80년 만에 ‘갑툭튀’한 장영실의 ‘신상정보’…새빨간 가짜뉴스일까
2022년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현판, 궁중현판’ 특별전에 등장한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 그 현판에 천재과학자 ‘장영실’의 직위(호군)과 자(실보), 탄생연도(계유·1393), 본관(경주)가 적혀있었다.|국립고궁박물관·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연구사 자료
호군-장영실-실보-계유-경주인’. 2022년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현판, 궁중현판’ 특별전을 둘러보던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눈이 번쩍 뜨이는 현판 1점을 보았다.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이하 현판)이었다. 1857년(철종 8) 창경궁 화재로 불탄 주자소를 재건하면서(1858) 내건 현판이었다. 현판에는 계미자(1403)부터 경자자(1420)·갑인자(1434)·정유자(1777)·임인자(1782)·병진자(1796) 등을 주조한 선배들과 함께 무오자(1858) 담당 관원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은 ‘장영실’이었다. ‘호군(정4품) 장영실’과 함께 ‘자(字·다른 이름)=실보(實甫)’, ‘태어난 해=계유·1393)’와 ‘본관=경주’가 적혀 있었다. 단 12자에 불과한 장영실의 초간단 인적사항이었다.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 1857년(철종 8) 창경궁 화재로 불탄 주자소를 재건하면서(1858) 내건 현판이었다. 현판에는 계미자(1403)부터 경자자(1420)·갑인자(1434)·정유자(1777)·임인자(1782)·병진자(1796)·무오자(1858) 담당 관원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인 생몰연대
그러나 강민경 학예사는 이 12자에 ‘꽂혔다’. 장영실이 누구인가. 물시계인 자격루를 비롯해 일성정시의(해·별시계 겸용 시계), 해시계(앙부일구), 천문관측대(간의대) 등을 발명했거나 제작 및 실무를 책임진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장영실과 관련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출세 이후의 행적은 <세종실록>에 실려있지만, 전후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당연히 생몰연대도 미상(?~?)이다.
그저 원나라(소주·항주) 출신 아버지와 동래현 관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라는 이력(<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1434년 7월1일)만이 남아있다. 말년의 행적도 묘연하다.
1442년(세종24) 세종이 타는 가마(안여)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마지막이다.
그간의 연구로는 장영실이 1385~90년 사이에 태어났고, 아산 장(蔣)씨로 추정했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
그런데 ‘장영실의 탄생연도=1393년(계유)’이고, ‘출신=경주 장씨’라고 특정한 현판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사실 이 현판은 1999년 문화재청이 펴낸 도록(<궁중현판>)에도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장영실’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장영실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저 원나라(소주·항주) 출신 아버지와 동래현 관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라는 이력(<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1434년 7월1일)만이 남아있다.
■왕자의 난, 인조반정을 기억하며…
강민경 학예사는 본격적으로 ‘장영실과 현판 사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현판에서 한가지 ‘남다른 무엇’이 읽혔다. 궁궐 또는 관청·관아에 걸기 위해 관원의 명단을 새긴 현판은 많다.
그러나 절대 다수는 생존 관원의 이름만 새긴다. 물론 예외는 있다. 1743년(영조 19) 5월7일 영조가 창의문에 올라 “계해년(1623년·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라”(<승정원일기>)는 명을 내린 바 있다.
영조는 “과거 태종의 헌릉 신도비에 개국(1392)·정사(1398·1차 왕자의 난)·좌명(1400·2차 왕자의 난) 공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과 같다”고 부연설명했다.
그럼 영조는 왜 창의문에 ‘120년전 인조반정의 공신 명단’을 새긴 현판을 걸라는 명을 내렸을까.
창의문은 1623년 3월12일 밤 인조반정군이 진입한 관문이다. 반란군이 이 문을 깨고 들어와 무혈입성했다.
태종 헌릉의 ‘신도비’나 ‘창의문 현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의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룬 사건에 공을 세운 과거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앞날의 사표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자격루가 완성되자 세종은 “원나라가 물시계를 만들었다지만 장영실의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장영실은 만대에 이어질 기물을 만들었다”고 극찬했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선배들을 기억하라!
주자소 현판은 어떨까. 강민경 학예사는 이 현판의 원본은 조선의 중흥군주인 정조 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했다.
현판은 세종대(갑인자·1434)에서 340여년 뒤인 1777년(정조1) ‘정유자’ 주조 담당관의 이름으로 건너뛴다.
주자소 명칭은 잠시 ‘감인소’로 일컬어졌다가 1796년 다시 ‘주자소’로 되돌아간다.(<정조실록> 1796년 12월15일 등)
그렇다면 이 현판은 정조가 ‘감인소’를 ‘주자소’로 바꾼 1794~96년 사이에 제작되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때 제작된 현판을 이어받아 일부 사항을 보완해 1858년 재건된 주자소 건물에 내걸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긴 정조는 “세종을 동방 태평 만세 왕업의 터전을 닦으신 성군”(<정조실록> 1800년 1월20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조는 또한 임진자(1772)·정유자(1777)의 주조나, <국조보감> 등의 완성과 같은 각종 문적 사업을 벌일 때 세종이 주자소에서 이룬 성과를 본받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 현판은 정조가 역대 주자소 관리들의 공을 되새기고자 제작한게 아닐까. 태종이 상기시킨 ‘개국 및 1·2차 왕자의 난’의 공신과, 영조가 본받은 ‘인조반정’의 공신처럼….
장영실은 자격루를 비롯해 일성정시의(해·별시계 겸용 시계), 해시계(앙부일구), 천문관측대(간의대) 등을 발명했거나 제작 및 실무를 책임진 인물이었다.
■경주 장씨인가
그러한 역대 주자소 관리 명단에 ‘장영실’의 이름 석자가 빠질리 만무하다.
하나하나 현판에 새겨진 장영실 관련 내용을 짚어보자. 먼저 장영실의 벼슬인 ‘호군(護軍)’은 정4품의 꽤 높은 관직이다. 장영실이 ‘호군’을 역임한 것이 ‘1433년 9~1438년 1월’이다. 이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활자라는 ‘갑인자’가 제작된 1434년(세종 16), 바로 그 무렵이다. 현판은 또 장영실의 자, 즉 다른 이름을 ‘실보(實甫)’라 표기했다.
이 또한 다른 사서나 문헌에 없는 기록이다. 장영실의 ‘실보’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자’는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무관(懋官)’처럼 드물지만 더러 보인다. ‘출생연도인 계유년(1393년)’은 어떠한가. 사실이라면 ‘미상(?~?)’으로 소개된 장영실의 생몰년 가운데 ‘생년’은 해결된다. 장영실의 가문은 어떠한가. 현판에서는 ‘본관=경주’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장영실의 가문은 ‘아산 장씨’로 알려져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경주 지역 성씨 중에 ‘장(蔣)’씨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장영실=경주 장씨’는 잘못 기록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는 있다.
중국 원나라 출신인 장영실이나 그 아버지가 세종으로부터 ‘경주 장씨’ 성을 하사받았을 수도 있다.
위그르족 출신인 설장수(1341~1399)가 조선 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조에게서 경주 설씨를 하사받은 경우가 있으니까….
만약 ‘장영실=경주 장씨’였다면 어찌된 일일까. 1442년 이후 장영실의 행적이 묘연해진 뒤 그 후손들이 ‘아산 장씨’에 기대어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문 관측 기구에 흠뻑 빠진 세종은 장영실 등에게 “너희는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으로 익혀와서’ 모방해서 만들라”는 밀명을 내린다.
■볼수록 금이 가는 신뢰감
뭐 여기까지는 논란은 좀 있을 수 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현판과 각종 문헌·사료를 비교 검토하던 강민경 학예사는 갈수록 벽에 부딪힌다.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 여럿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이 현판은 1858년 걸렸고, 그 원본은 1794~9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장영실이 활약한 1430년대와는 360~420년의 갭이 생긴다. 그런 유구한 세월이 흘렀으니 조선 초기 인물과 관련된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을 것이다. 비근한 예가 있다.
1729년(영조 5) 윤7월4일 영조는 세종조에 개발된 갑인자 활자 등을 두고 신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세종조에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그 공효(공적과 효과)가 어떤가.”(영조)
“당시 호군 장영은 생각이 교묘하고 기기를 만드는데 뛰어나서 물시계(자격루) 등을 만들었는데…”(참찬관 신치운)
“(계미자와 경자자의 주조 발문을 쓴) 권근(1352~1409)·변계량(1369~1430)의 후손은 뭐하는가. 또 (갑인자 발을 쓴) 김빈(?~1455)은 어떤 사람인가.”(영조)
“권근의 자손은 많고, 희귀성인 변계량의 사대부 후손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김빈은 잘 모릅니다.”(시독관 윤광익)
이 대목이 흥미롭다. 신치운(1700~1755)이 장영실의 공적을 한참 읊으면서 정작 이름은 ‘장영’이라 했다.
실록을 정서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탈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치운이 장영실을 ‘장영’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한 현판에 등장하는 ‘김빈’의 존재도 잘 모른다고 했다. 병조참판,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갑인자와 자격루 제작에도 간여한 문신 김빈도 ‘듣보’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자격루 등 각종 천문과학기구를 제작한 장영실을 두고 당대 사람들은 “장영실은 세종의 위대한 발명을 위해 태어난 인물”(<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등)로 평가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
■‘곳곳에서 허점’
그런 판국이니 300~400년전 인물들의 프로필이 정확하겠느냐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강민경 학예사는 현판의 등장인물 인적사항과 족보, 실록, 과거급제자 명단(<등과록> <국조문과방목>), <국조보감>, <해동명신록> 등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현판과는 상당부분 달랐다.
예컨대 조선 전기의 무신·과학자인 이천(1376~1451)의 경우를 보자. ‘예안’으로 알려진 이천의 본관이 현판에는 ‘계림(경주)’이라 했다. ‘밀양 변씨’이며, ‘1369년생’인 변계량을 두고도 현판에서는 ‘수성인이자 1346년(병술년)생’이라 했다. 변계량의 경우 ’자‘가 ‘거경’(<등과록>)으로 알려졌는데, 현판에는 ‘숙미’라 했다.
‘1362년생이자 성주 이씨’인 이직(1362~1431)의 경우 현판은 ‘1335년(을해년)생이자 연안 이씨’로 표기했다. 박석명(1370~1406)은 36년이나 빠른 1334년(무술년)생이라 했고, 순천인 본관을 밀성(밀양)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태종실록>은 “박석명이 37살의 나이에 죽었다”(1406년 7월14일)고 밝혔다.
이밖에 1385년생인 집현전 직제학 김돈(1385~1440)의 경우 현판은 1393년(계유년)이라 했고, 본관도 ‘김해’라 했다. 그러나 <세종실록> 1440년 9월16일자는 “김돈은 안동부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정척(1390~1475)의 경우 현판은 ‘본관=동래, 자=‘등승’이라 했지만, 졸기(부음기사)는 “자=명지, 본관=진주”(<성종실록> 1475년 8월2일)라 했다.
장영실은 1442년 그가 감독제작한 안여(임금의 가마)가 무너지고 부러지면서 불경죄로 곤장 100대형을 받았다. 세종은 2등을 감경해주었지만 그의 직첩을 거두고 곤장 80대형을 집행하도록 허락한다. 이후 장영실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술이부작인데?’
이러니 현판에 등장하는 장영실의 인적사항도 믿기 힘든 상황이 됐다.
정조 연간에 현판의 원본을 지었을 때나, 혹은 1858년 현판을 내걸 때 엉터리 자료를 토대로 작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장영실을 비롯한 현판 등장 인물들의 출생연도, 자(다른 이름), 본관 등을 아무런 근거없이 새겨 넣었을까. 게다가 몇몇 이름 밑에 일부 항목(출생연대, 본관, 자)을 공란으로 남겨둔 것도 심상치 않다.
여기서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공자왈’이 떠오른다.
“서술 하되(述而) 지어내지 않는다(不作)”는 뜻이다. ‘전해지는 대로 쓸 뿐, 멋대로 창작·가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밖에 “의심스러운 것은 공백으로 남겨둔다”(<논어> ‘위령공편’)는 ‘공자왈’도 있다. 그렇다면 어떨까.
정조 때나 철종 때 현판의 내용을 짓는 자가 과연 ‘없거나 혹은 사실과 다른 내용’을 검증없이 새겨넣었을까. ‘공자왈’을 좇아 ‘의심스러운 부분을 공란으로 남겨두는’ 센스까지 발휘했는데…. 분명 이 현판을 제작할 때 보고쓴 자료가 있었을 터인데…. 혹시 주자소에 대대로 내려오는 ‘주자소 선생안(역대 관리 명부)’ 같은 자료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임금이 타고 가던 가교. 가마채를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고가는 가마이다. 임금이나 왕실 웃어른의 장거리 행차 때 이용했다. 조선조 정조이 화성행차 시에 사용했던 정가교(正駕轎)가 이것과 같은 형태였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과학천재
이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해도 회의감이 들기는 한다. 잘못된 자료로 괜한 호들갑을 떤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장영실이 누구인지 안다면 그 12자의 인적사항이 얼마나 알토란 같은 신상정보인지 알 수 있다.
장영실은 중국인(원나라) 아버지와 조선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출신이었다.
다만 노비출신 어머니 때문에 그 역시 동래현의 관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종께서도 보호했고 나(세종)도 역시 아꼈다”(<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는 언급에서 보듯 두 임금(태·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천문 관측 기구에 흠뻑 빠진 세종은 장영실 등에게 “너희는 원나라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으로 익혀와서’ 모방해서 만들라”는 밀명을 내린다. 장영실 등은 순전히 눈으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를 발명해낸다.
세종은 완성된 자격루를 보고 “원나라가 만든 물시계보다 훨씬 정교한 자격루를 만들었다”고 감탄했다. 세종은 이런 성과를 거둔 장영실에게 호군(정4품)의 관직을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
이후 장영실은 일성정시의(해·별시계 겸용 시계), 해시계(앙부일구) 등 세종 연간에 선을 보인 각종 천문기기를 발명했다.
그 덕분에 “장영실은 세종의 위대한 발명을 위해 태어난 인물”(<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등)로 꼽혔다.
그림은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주자소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에 등장하는 역대 주자소 관리들의 인적사항과, 실록, 등과록 등 사서 및 문헌자료를 비교해보니 다소 차이가 있었다.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자료
■미궁에 빠진 장영실의 급퇴장
이후 대호군(종3품)으로 승진한 장영실의 ‘급퇴장’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1442년(세종 24) 장영실이 책임지고 제작한 안여(국왕 전용 가마)가 부러지고 허물어져서 곤장 10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세종실록> 3월16·4월27일)는 기사가 잇따른다. 죄목은 ‘불경죄’였다. 그래도 장영실이 아닌가.
그동안의 공적을 감안한다면 사면해주던지, 아니면 아주 가벼운 형벌로 경감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세종은 2등을 감형하라는 명을 내린다. 곤장 100대에서 80대로 겨우 20대 줄여준 것이다. 무슨 곡절이 있었을까.
세종은 ‘당대의 태평성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평을 들은 장영실을 왜 그리도 헌신짝 버리듯 버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후 장영실은 자격루 등을 제작한 불세출의 과학자가 아니라 악기 제조에 능력을 발휘한 기술자(장공·匠工)나 악사(樂師)로 소개될 뿐이었다.(<중종실록> 1519년 2월2일·7월7일)
영조 때인 1743년 천문기기 제작에 공을 세운 인물 중에 꼽히기는 했지만 ’장영실’이 아닌 ‘장영’으로 잘려 언급되었다.
왼쪽 사진은 2018년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고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 11발.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한 최첨단 무기였다. 무쇠 내부에 설치된 발화 장치가 신관(발화) 역할을 했다. 이 발화장치가 폭발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화포발사가 가능했다. |사진은 호남문화재연구원·개념자료는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비격진천뢰 이장손의 경우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이장손이다.
비격진천뢰는 동서양을 통틀어 처음 제작된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무쇠 내부에 설치된 발화 장치(죽통과 나선형 나무에 감은 심지)가 신관(발화) 역할을 한다. 이 발화장치가 폭발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화포발사가 가능했다. 단순 폭발이 아니라 날아가 적진에 도달할 때 쯤 폭발하는 작열포였다.
폭발음이 주는 공포감도 대단했고, 파편인 마름쇠가 흩어져 터지니 그 위력도 어마어마했다.
왜군은 조선의 비밀병기인 ‘비격진천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다.
일본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이장손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이장손의 존재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년) 9월 1일에 경주성 전투를 설명하는 말미에, 그것도 실록을 쓴 사관의 부연설명에 겨우 ‘괄호 열고 닫고()’ 형식으로 등장한다. 아주 작은 글씨로….
“(비격진천뢰는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포로 발사하면 500~600보 날아가 떨어진다.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다.)”
달랑 이 내용 뿐이다. 독자기술로 최첨단 무기를 개발한 이장손의 생몰연도도, 가문도, 이력도 ‘?’로 남았을 뿐이다.
그 흔한 ‘졸기’조차 없는 지독한 홀대…. 어쩌면 그렇게 장영실과 같은 대접을 받았는지….
이번 현판에 등장하는 ‘장영실 인적사항’이 잘못 새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가짜뉴스’를 두고 공연히 호들갑 떤다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00% 아니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현판 내용을 입증할 새로운 자료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기회에 조선을 위해 ‘쓰임’ 받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장영실이나, 혹은 이장손 같은 분들을 한번이라도 더 언급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이 기사는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활자주조를 감독한 신하명단을 새긴 현판의 역사적 가치, <고궁문화> 제16호, 2023년’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강 학예사와 김충배 전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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