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기 제품은 확실한데….” 2023년 6월이었다. 사비 백제의 왕궁터인 부여 관북리 유적을 발굴하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팀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발굴 지점은 왕궁 내 조정(국사를 논의하고 행사 및 향연를 여는 공간) 시설로 여겨지는 대형건물터가 확인된 곳이었다. 그런데 한 건물터의 30m 범위 안 여러 구덩이에서 거뭇거뭇한 물체가 노출됐다.
“칠기인 것 같은데 어떤 제품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죠.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사각형 미늘(갑옷의 개별 조각)과 이 미늘을 연결한 구멍들이 확인됐습니다.”(심상육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특별연구원)
이것들은 ‘옻칠한 갑옷(칠피갑옷)’으로 판명되었다. 갑옷 조각은 모두 6곳이 확인됐다. 그중 한 구덩이에서는 갑옷과 함께 말의 아래턱 뼈가 나왔다. 주변의 기와폐기층에서는 말안장 부속품(발받침대·등자)이 확인됐다. 이 구덩이의 갑옷은 마갑(말갑옷)일 가능성이 짙다.
백제멸망의 흔적
백제의 도읍인 공주와 부여 등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백제 멸망의 흔적. 너무도 창졸간에 멸망했음을 증거해주고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말발굽 흔적의 백제궁궐
이상한 일이다. 갑옷은 사비 백제 말기 의자왕(641~660) 등이 국사를 돌보았을 백제 조정 건물에서 출토됐다.
그것도 6곳에서 띄엄띄엄 묻혀있었다. 그 중에는 말뼈와 말갖춤새를 곁들인 말갑옷(추정)도 있었다.
그렇다면 말을 탄 장수(기병)가 국사를 처리하는 조정 건물을 휘젓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떤 급박한 상황이기에 궁궐이 말발굽으로 짓밟혔단 말인가. 추정 가능한 단서를 이 근처에 찾을 수 있다.
붕괴된 건물, 방치된 기와더미
사비백제의 도읍인 충남 부여에서는 폭삭 무너진 백제 멸망기 건물터가 잇달아 확인되고 있다. 그 건물터와 인근 배수로에서는 기와와 와당 더미 등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명문 돌구유(석조)이다. 이 돌구유는 옻칠갑옷의 출토 지점에서 120m 정도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돌구유는 궁궐 내의 조경시설인 석연지(화강암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연못)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돌구유 겉면에는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글귀가 심상치 않다.
‘당나라(大唐)가 백제(百濟)를 평정(平)하고 새긴 비명(碑銘)’이라는 뜻이다.
왕궁터에 흩어진 갑옷
사비 백제(538~660)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 그중 조정(국사를 논의하고 행사 및 향연을 여는 공간) 추정 구역의 30m 범위 안 구덩이 6곳에서 옻칠한 가죽 갑옷이 확인되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관북리에서 또 하나의 방증자료가 1980~90년대에 나온바 있다. 즉 관북리의 맨 뒤쪽(위쪽)에 조성된 석축 아래에 배수구 (너비 60㎝, 깊이 25㎝) 안에서는 백제 기와와 와당, 그리고 제사용으로 쓰인 완형의 회색 도기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도기들은 겹겹히 포개져 있었고, 묶인채 버려진 것들도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폭삭 주저앉은 건물 더미에서는 엄청난 양의 기와더미와 함께 연화문 와당이 곳곳에서 보였다.
지금까지의 관북리 발굴 상황과 이번에 확인된 옻칠갑옷을 합쳐 정리해보면 어떨까.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이라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을 증거해주는 ‘생생 자료’가 아닐까.
갑옷과 말뼈
옻칠한 가죽 갑옷은 6곳에서 확인됐다. 그중 한 구덩이에서는 갑옷과 함께 말뼈가 공반되었다. 그 주변에서는 말을 탈 때 쓰는 ‘발받침대(등자)’도 나왔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옻칠갑옷의 생생증언
비단 관북리 뿐이 아니다. 백제 멸망을 웅변해주는 ‘옻칠 갑옷’은 공주 공산성에서도 확인되었다.
즉 2011년 공산성을 발굴하던 공주대박물관 조사단은 60여자를 판독할 수 있는 ‘명문 옻칠 갑옷’을 발굴했다. 이 갑옷에는
‘행 정관십구년사월이십이일(行 貞觀十九年四月二十二日)’ 명문이 돋보였다. ‘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627~649)이다.
부여 석조(돌연못)의 비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중인 보물 ‘부여 석조(돌연못)’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기념으로 세운 비명이라는 뜻이다.|김지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정관 19년이면 645년, 즉 의자왕 5년에 해당된다. 이 명문과 관련해서는 “645년 백제가 당나라에 금칠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바쳤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보장왕’, <신당서> ‘동이열전’)는 기록이 눈에 띈다. <삼국사기>는 “백제가 바친 황금칠 갑옷을 당나라 군사들이 입었다”고 했다.
공산성은 660년 7월13일 나·당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위기에 빠진 의자왕이 야음을 틈타 몸을 피했던 곳이다.
갑옷과 돌연못의 수상한 관계
‘대당평백제국비명’이 발견된 곳과 옻칠갑옷이 출토된 곳은 불과 100여m 떨어져 있다.|심상육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특별연구원 제공
그렇다면 부여 관북리와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 갑옷’도 백제멸망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
즉 나·당 연합군의 침략에 맞선 백제 장수(기병)가 궁궐(사비성·웅진성)을 지키려고 동분서주한 흔적일 수 있다.
물론 ‘공산성 갑옷의 주인이 백제군이 아니라 당나라군’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백제 멸망의 생생 증거’라는 핵심 이야기는 달라질 수 없다. 오히려 당나라군 장수의 것이라면 의자왕이 정사를 펼치던 곳(혹은 피신했던)을 유린한 멸망의 역사를 증거해준다.
무너진 왕궁건물
왕궁터인 관북리 뒤쪽 배수로에 쌓인 사비백제 말기의 도기와 기와, 와당류. 또 폭삭 주저앉은 건물터에서 엄청난 양의 기와더미와 함께 연화문 와당이 곳곳에서 보였다.
■수로에서 발견된 인골의 증언
그보다 더 극적인 고고학 자료가 있다. 2008년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수로에서 발견됐다.
즉 수로 내부에서 최소 3개체 이상의 인골과 각종 동물뼈, 그리고 도기와 기와 철기, 목기 등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인골 가운데는 아래턱뼈를 없지만 양호한 상태로 출토된 두개골이 눈길을 끌었다. 이밖에도 각각 다른 개체인 넓적다리뼈와 정강이뼈 등도 확인됐다. 이 수로는 사비 도성 내부의 공간을 구분짓기 위해 조성한 물길로 보인다.
그 수로 안에서 3개체분 이상의 인골이 확인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정상적인 죽음이었다면 도성 바깥쪽에 조성된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도성 내 중심지역에 속하는 이곳에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면 어떨까.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죽임을 당해 한꺼번에 유기된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645년’명 옻칠갑옷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정관12년(645)명 옻칠갑옷. <삼국사기>에는 “645년 백제가 당나라에 금칠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휴식궁궐
부여 화지산(해발 46m) 유적에서도 비슷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다. 이곳은 궁의 남쪽에 연못을 조성한(634) 뒤 새롭게 세운 정자(망해정·655)가 존재(<삼국사기>)한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곳에서는 우물 유구와 함께 수상한 건물터가 계속 확인되고, 연꽃무늬 수막새와 중국제 백자 벼루 등이 출토된 바 있다. 그래서 화지산은 의자왕을 비롯한 사비 백제(538~660) 임금들의 휴식 궁궐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화지산에서는 기시감을 느낄 수 있는 유구가 목격됐다. 건물터가 폭삭 붕괴된 채 확인된 것이다. 건물의 하부구조를 보면 붕괴의 원인이 ‘화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온 때문에 터진 기와와 수막새, 그리고 불에 타 터져버린 홍두깨 흙 등….
이곳에서는 사비백제 시대 이후의 유구와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백제 멸망과 함께 임금들의 휴식궁궐(추정) 역시 전쟁의 화를 입었고, 다시는 복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제 수로 속 인골의 정체
사비 백제 시대 수로로 추정되는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는 3개체 이상의 인골이 확인됐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물구유 향로와 도끼로 잘린 탑기둥
가장 잘 알려진 백제 멸망의 증거가 1993년 12월12일 밤 부여 능사(능산리 절터)에서 현현했다.
당시 하염없이 솟구치는 물웅덩이에서 건져올린 유물이 바로 백제금동대향로였다. 그런데 이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구덩이는 본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있던 곳이다.
이상한 일이다. 백제 국왕이 선왕들의 명복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피웠을 향로가 아닌가.
수로에 유기된 1300년전 시신
부여 쌍북리 수로에서 출토된 백제인의 두개골. 아래턱뼈가 없어졌지만 치아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수로에서는 두개골 외에도 각기 다른 사람의 뼈가 흩어져 있었다. 최소 3개체 이상의 사람으로 추정된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 성스러운 향로를 왜 물구유(나무 물통)에 넣었을까. 2년 뒤인 1995년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절터(능산리)의 목탑터에서 역시 깜짝 놀랄 만한 유물이 발견됐다. ‘567년(백제 창왕 13)(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 석조사리감’이었다. 무엇보다 출토 양상이 의미심장했다. 탑의 중심기둥이 도끼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다. ‘창왕(위덕왕)’명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
이렇듯 물구유 속 ‘금동대향로’와 도끼로 찍혀 비스듬히 넘어진 ‘석조 사리감’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백제 휴식궁궐의 흔적
부여 화지산에서는 수상한 건물터가 계속 확인되고, 연꽃무늬 수막새와 중국제 백자 벼루 등이 출토됐다. 유물의 위상으로 보아 화지산에 의자왕 등 사비백제 임금들의 휴식궁궐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연구자들은 이 발굴상황을 백제 멸망과 결부시킨다. 그 스토리텔링이 그럴듯 하다.
즉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사비(부여)가 함락된다. 왕릉을 지키던 능사의 승려들이 국왕이 국가 제사를 위해 향을 피웠던 대향로를 감춘다. 그들은 백제가 완전 멸망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쳤다.
하지만 승려들의 생각과 달리 백제의 사직은 끝내 종막을 고하게 된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은 철저히 유린 소실된다.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다. 나·당 연합군은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고 도끼로 마구 파헤쳤다. 그렇게 금동대향로는 1300년 이상 묻혀버렸다. 목탑 속 중심기둥도 도끼에 찍힌 그대로 남게 됐다.
와르르 붕괴된 휴식궁궐
화지산 유적에서는 화재로 붕괴된 건물터와 무너진 기와 등이 수북히 쌓인 배수로가 그대로 노출됐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까맣게 몰랐던 나·당 밀약
이렇듯 백제의 왕궁터인 사비 혹은 공주에서 끊임없이 현현하는 백제 멸망의 흔적은 무엇을 말해줄까.
백제 멸망이 너무도 창졸간에 다가왔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라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건가.
역사서를 읽어보면 그럴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무렵(의자왕 시대·641~660) 백제가 신라를 쥐잡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예컨대 642년(의자왕 2) 의자왕은 미후성(의령)과 대야성(합천)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면서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화재의 증거
화지산 유적 발굴 결과 화재로 소실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고온 때문에 터진 기와와 수막새, 그리고 불에 타 터져버린 홍두깨 흙 등이 확인됐다.
그런데 9년 후인 651년(의자왕 11) 당나라 고종(재위 650~683)이 의자왕에게 보낸 국서를 보면 심상치않다.
“백제 왕은 빼앗은 신라 땅을 돌려줘라. 그렇지 않으면 지난번(650) 신라 (김)법민(문무왕·661~681)의 청대로 신라의 백제 공격을 허락하겠노라. 당나라는 고구려가 백제를 돕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삼국사기> ‘의자왕조’)
그런데 백제 의자왕은 당 고종이 보낸 협박 편지 속에 들어있는 칼날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 국서를 받기 3년 전인 648년(의자왕 8·진덕여왕 2)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 연합군 결성의 밀약을 맺었던 것이다.
물구덩이 속 향로
백제 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사(능산리 절터)에서 현현했다. 당시 하염없이 솟구치는 물웅덩이에서 건져올린 유물이 바로 금동대향로였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진덕여왕의 아부송
당시 당 태종(626~649)은 신라 사신 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를 만나 “당나라가 군대를 보내…두 나라(백제·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다.
650년 진덕여왕(647~654)이 손수 짠 비단 위에 당 고종을 위해 바친 ‘태평송’이 기가 막힌다.
“…높디 높은 황제의 포부 창성도 해라…황명을 거스르는 외방 오랑캐는 칼날에 목 베여 천벌을 받으리라…황제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를 등용했도다…삼황오제의 순수한 덕이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비추리라.”(<삼국사기> ‘진덕여왕조’)
일국의 왕이 비단을 손수 짜서 바친 것도 모자라, 그 위에 황제를 찬양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글귀를 새겼다?
굴욕외교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신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백제의 공세로 나라의 존망을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당 연합군이 결성됐으니 신라 진덕여왕으로서는 간은 물론이고 쓸개라도 빼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공방터 수조 속 국보
백제금동대향로는 사찰(능사)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구유형 목제 수조에서 확인됐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사치향락에 빠진 의자왕
그럴 때 백제 의자왕은 무엇을 했을까.
652년(의자왕 12)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했다.
<삼국사기> 등에 비친 의자왕이 누구인가. 처음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통할만큼 지극한 효자였다.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친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충신들을 쫓아냈다. 성충(?~656)이 옥사하고 흥수(생몰년 미상)가 귀양 갔다. 그 빈 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생몰년 미상) 같은 인물로 채웠다.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 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656년(의자왕 16) 왕이 사치향락에 빠졌다. 왕은 적극 간언한 좌평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니 지형을 잘 선택해서 군사를 운용하라’는 충언의 글을 올렸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삼국사기> ‘의자왕조’)
금동대향로 은닉지
금동대향로는 백제 선왕들의 제사를 지내던 부여 능사 공방터 수조에 은닉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660년 나당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침략 때 숨겨둔 것으로 짐작된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망조의 퍼레이드
<삼국사기> 등은 659년부터 백제에 든 망조 기사로만 도배했다.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왔고”(659년 2월), “태자궁에서 암탉과 참새가 교미했으며”(4월), “백마강에서 세 길이나 되는 물고기가 나와 죽었고”(5월), “키가 18척이나 되는 여자 시체가 떠올랐으며”(8월), “대궐 남쪽 도로에서 한밤에 귀신이 나타나 곡을 했다”(9월)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운명의 660년이 되자 망조가 업그레이드된다.
“왕도(사비·부여)의 우물물과 백마강이 핏빛으로 변했고”(2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으며”(4월), “이유없이 놀라 달아나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은 백성들이 100여명이 됐고”(4월), “부여 시내의 절 강당과 탑에 벼락이 쳤다”(5월)는 기사가 이어진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백제는 둥근 달, 신라는 초승달’ 이야기(6월)다.
즉 귀신이 “백제는 망한다”고 외치고 땅으로 들어갔다. 땅 속에서 발견된 거북이의 등에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무당이 “둥근 달(백제)은 곧 기울고, 초승달(신라)은 곧 차게 된다”고 풀이했다.
그럼에도 백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망국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창왕’명 사리감의 비밀
1995년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절터(능산리)의 목탑터에서 확인된 ‘창왕(위덕왕)’명 석조사리감. ‘567년(창왕 13)(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9일의 전투, 싱거운 패망
소정방(592~660)이 이끄는 당나라군 13만명이 덕물도(인천 덕적도)에 도착한 것은 660년 6월21일이었다.
신라 태종무열왕(654~661)도 군사 5만명을 동원한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백제 의자왕은 지금의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연다. 의자왕은 “앞으로 나가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지 대책을 마련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조정 공론은 ‘나가 싸우자’는 측과 ‘지켜야 한다’는 측이 팽팽히 맞섰다. 의자왕은 어쩔 줄 몰라했다.
도끼로 찍힌 목탑
금동대향로가 확인된 능사의 목탑터에서 명문 석조사리감이 확인됐다. 그런데 탑의 중심기둥이 도끼 같은 흉기로 잘려있었고, 사리감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백제 조정이 우왕좌왕하며 탁상공론을 벌이는 사이 나·당 연합군은 쏜살같이 사비(부여)로 진격했다.
7월9일 계백(?~660)의 황산벌(충남 연산) 전투가 벌어졌다. 계백의 5000결사대는 4번 싸워 모두 승리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이후의 전투는 나·당 연합군의 파죽지세였다. 백제는 패닉에 빠졌다. 의자왕의 여러 아들이 좌평(장관) 6명과 함께 당나라군 진영에 달려가 죄를 빌었다. 그러나 당나라 소정방은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12일)
백제군은 당나라군이 사비성 30리밖까지 진군할 때까지 연전연패했다. 사망자만 1만여명에 달했다. 13일 밤 의자왕은 야음을 틈타 태자 효(미상)과 함께 공주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이때 의자왕이 남긴 한마디는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후회였다. 사비성에 남은 의자왕의 여러 아들(부여태·부여융 등)들은 곧 항복했다.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과 태자(부여효) 역시 웅진방령(웅진성 장관)인 예식(615~672)과 함께 두 손을 들었다. 그때가 660년 7월18일이었다. 당나라군이 덕물도에 도착한 때(6월21일)부터 치더라도 25일 남짓이었다. 황산벌 전투(7월9일)부터 따지면 불과 9일만이었다. 무려 678년(기원전 18~기원후 660)의 역사는 그렇게 순식간에 종막을 고한다.
백제 멸망의 흔적
당나라 13만 대군은 1900척의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 660년 6월21일 인천 덕물도에 닿았다. 신라 5만 대군도 백제의 배후를 쳤다. 백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한채 7월18일 항복하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는 국치일
8월2일 열린 나·당 연합군의 승전 기념 연회는 백제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국치일로 기억될 것이다.
“신라 태종무열왕과 당나라 소정방 등은 당상(대청마루 위)에, 백제 의자왕과 아들(부여 융)은 당하(대청마루 아래)에 앉았다. 신라왕과 소정방 등이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했다. 백제의 신하들이 모두 울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9월3일 당나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800여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백제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형국이었다. 그랬으니 그 누가 폭삭 무너진 폐허 속에서 백제 678년 사직의 종막을 위로하는 진혼곡을 불러 줄 수 있었겠는가. 660년 7월18일 이후 1300여년 동안 아무도 돌볼 수 없었던 아픈 역사의 기억들인 것을…. 부여에서, 공주에서 1300년 이상 꽁꽁 숨겨져 있던 망국의 편린들이 이제야 한조각 한조각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PS=그러나 너무 백제의 최후를 마냥 폄훼할 필요는 없다. 백제는 의자왕의 항복 이후 10년 이상 가열찬 독립운동을 벌였다. 특히 660~663년 사이 신라와 당나라군과 접전을 이룬 백제부흥군을 ‘부흥 백제국’으로 일컫는 연구자가 있을만큼….)
(이 기사를 위해 심삼육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특별연구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김지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신영호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및 신나현 학예연구사가 관련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부여박물관, <능사>(학술조사보고서 8책), 2000
백제고도문화재단, <화지산 유적-2018년도 5~6차 발굴조사>(발굴조사 연구보고 82·91책), 2020·2021
백제문화재연구원, <부여 쌍북리 602-10번지 유적>(조사보고 제11집), 2010
김지호·조영훈·류진호·황선빈·디바오르지, ‘디지털가시화기술을 활용한 부여 석조 명문 재검토기초연구’ <백제목간학술심포지엄 자료집>, 한국목간학회·백제학회, 2023
충남대박물관,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발굴보고(Ⅱ), 1999
심상육, ‘발굴자료를 통해 본 사비도성의 변천과 경관’, <백제문화> 62권 62호,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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