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격진천뢰 철판의 두께가 아래 위와 측면이 달랐다. 이는 폭발을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발견된 비격진천뢰 뚜껑의 심지구멍이 두 개인 까닭은 불발탄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조선의 비밀병기이자 귀신폭탄’이라 지목하며 벌벌 떨었던 비격진천뢰의 비밀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2018년 11월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에서 발견된 비격진천뢰 11발을 인수받아 소장중인 국립진주박물관은 “2018년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에서 발견된 11점을 포함, 현존하는 비격진천뢰 16점의 과학조사 및 보존처리 과정에서 비격진천뢰 뚜껑의 형태와 잠금방식, 그리고 비격진천뢰의 껍질 두께에 숨겨진 폭발의 비밀 등을 밝혀냈다”고 12일 밝혔다.


처음 밝혀진 비격진천뢰의 구조원리. 컴퓨터 단층촬영(CT)과 감마선 투과 촬영 결과 비격진천뢰의 벽 두께에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즉 크기가 다른 형틀받침쇠 3개(그림에서는 두 개만 보임)를 사용해서 본체의 내부에 조성된 공간의 두께를 조절한 것이다. 즉 비격진천뢰를 제작할 때의 쇳물 주입구와 살상용 쇠조각 및 심지를 꽂아넣는 뚜껑 부분, 즉 아래 윗부분은 두껍게 한 반면, 측면은 상대적으로 얇게 설계했다. 왜냐하면 비격진천뢰의 제작 때 쇳물을 붓는 주입구와, 쇠조각을 넣고 완전 밀폐시켜야 할 뚜껑 부분은 두껍게 처리해야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폭발해버리는 치명적인 오류를 막을 수 있다. 반면 측면을 얇게 제작하면 목표물에 떨어진 비격진천뢰가 그 얇은 부분으로 일시에 터질 수 있게 되어 살상력을 배가시킨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비격진천뢰의 두께가 불균일한 이유는

비격진천뢰는 본체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쇠조각을 집어넣게 된다. 그런 뒤 내부 화약이 폭발할 때 본체가 깨지고 쇳조각이 흩어지면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비격진천뢰를 쏘는 화포(완구)의 화약이 폭발 할 때와 목표를 향해 날아간 뒤 떨어질 때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때문에 비격진천뢰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발사 때와 떨어질 때의 충격을 견뎌야 한다. 반면 떨어진 비격진천뢰의 내부 화약이 폭발할 때는 쉽게 부서져야 큰 위력을 발휘하면서 터질 수 있다. 그렇기에 비격진천뢰의 본체는 적절한 두께와 강도 조절이 필요하다. 

그런데 국립진주박물관이 11발에 대한 컴퓨터 단층촬영(CT)과 감마선 투과 촬영 결과 비격진천뢰의 벽 두께에 일정한 차이가 났음을 확인했다. 즉 크기가 다른 형틀받침쇠 3개를 사용해서 본체의 내부에 조성된 공간의 두께를 조절한 것이다. 즉 비격진천뢰를 제작할 때의 쇳물 주입구와 살상용 쇠조각 및 심지를 꽂아넣는 뚜껑 부분, 즉 아래 윗부분은 두껍게 한 반면, 측면은 상대적으로 얇게 설계한 것이 이번 보존처리 과정에서 밝혀졌다.  

확인된 비격진천뢰의 뚜껑. 뚜껑은 비격진천뢰가 발사돼 날아가는 과정에서 내부를 구성하는 부속품이 빠지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두 개의 심지 구멍이 있다. 심지불이 불발될 확률을 낮추기 위해 두 개를 만든 것이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허일권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비격진천뢰 16발을 조사한 결과 크기가 다른 형틀받침쇠 3개를 꽂는 방식으로 측면의 두께를 아래·윗부분보다 최저 3㎜에서 최고 10㎜ 정도 더 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전했다. 허일권 학예사는 “비격진천뢰의 제작 때 쇳물을 붓는 주입구와 쇠조각을 넣고 완전 밀폐시켜야 할 뚜껑 부분은 두껍게 처리해야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폭발해버리는 치명적인 오류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측면을 얇게 제작하면 목표물에 떨어진 비격진천뢰가 그 얇은 부분으로 일시에 터질 수 있게 되어 살상력을 배가시킨다. 이번에 비격진천뢰의 성분조직을 분석해본 결과 본체는 주조 방식으로, 뚜껑은 단조 방식으로 다르게 제작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본체는 잘 깨지는 주조기법으로, 뚜껑부분은 질기고 강한 단조기법으로 만든 이유는 바로 폭발 때 뚜껑이 먼저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고 본체가 쪼개지면서 쇠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처음 찾아낸 뚜껑의 진실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비격진천뢰의 뚜껑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도 이번 보존처리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비격진천뢰 뚜껑은 19세기 문헌자료인 <융원필비> 등에만 남아있었지만 이번에 실물을 찾아냈다. 뚜껑은 비격진천뢰가 발사돼 날아가는 과정에서 내부를 구성하는 부속품(목곡, 쇳조각, 화약 등)이 빠지지 않도록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번에 처음 확인된 뚜껑에는 직사각형이며 중앙에 꼭지와 함께 두 개의 심지 구멍이 있다. 

허일권 학예사는 “심지불이 불발될(꺼질) 확률을 낮춰주기 위해 두 개를 만든 것”이라고 해석했다. 확인된 뚜껑은 입구를 통해 안으로 넣은 뒤 내부공간에서 돌려 고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보존처리과정에서는 또 국내에 현존하는 16점을 조사한 결과 모두 ‘중간 정도의 크기’에 해당되는 비격진천뢰임을 확인했다. 

무쇠 안에 대나무통을 꽂고 통 안에 나선형의 홈을 파놓은 나무(木谷)에 도화선을 감은 뒤 화약구멍 속으로 화약과 쇠조각, 진흙을 넣고 화포에 장착한다. 도화선에 차례로 불을 붙인 다음 발사한다.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의 ‘비격진천뢰’ 특별전

국립진주박물관은 오는 16일부터 8월25일까지 이런 연구성과를 반영한 ‘2019년 조선무기 특별전-비격진천뢰’를 개최한다. 특별전은 크게 1부 영상과 2부 실물 전시로 구성했는데, 1부에서는 ‘귀신폭탄-비격진천뢰’라는 주제의 영상을 상영한다. 2부는 ‘문헌 속 비격진천뢰’, ‘비격진천뢰와 완구’, ‘현대 과학이 밝혀낸 조선의 첨단 무기’란 세 개의 주제로 구성돼있다. 특히 국내에 현존하는 비격진천뢰 16점과 완구(화포)를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보물 제860호로 지정된 창경궁(추정) 비격진천뢰를 비롯해 장성(추정), 하동, 진주, 창녕, 고창 지역에서 발견·발굴된 유물이 소개된다. 비격진천뢰의 발사기인 완구는 보물 제858호와 제859호 중완구, 보물 제857호 대완구 등 국내에 전하는 3점이 모두 선보인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조선의 첨단 무기’에서는 조선시대 무기 해설서인 <화포식언해>와 <융원필비>에 나오는 비격진천뢰 내용을 소개하며 실물과 비교했다.

최영창 관장은 “이번 전시는 임진왜란 당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염원은 비격진천뢰를 발명해냈고, 그 속에 담긴 새로운 기술을 오늘날의 과학으로 재조명한 것”이라면서 “비격진천뢰에 담긴 구국의 마음과 선조들의 지혜를 되돌아보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비격진천뢰의 본체는 잘 깨지는 주조기법으로, 뚜껑부분은 질기고 강한 단조기법으로 만들었다. 바로 폭발 때 뚜껑이 먼저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고 본체가 쪼개지면서 쇠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조선의 비밀병기 비격진천뢰는?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년) 과학자인 이장손이 발명한 당대 조선의 독창적인 최첨단 무기다. 

오늘날과 같은 신관(발화) 장치가 있어서 목표물까지 날아가 폭발하면서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그리고 수많은 파편(마름쇠·삼각형 형태의 쇠조각)을 쏟아내는 작렬탄이었다. 시간을 조절해서 폭발한다는 면에서 일종의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다.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위력을 발휘했다. 

“1592년(선조 25년) 9월1일 박진(?~1597)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쇠조각에 맞은 20여명에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선조수정실록>)

경상좌병사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써서 경주성을 탈환했다는 실록기사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징비록>은 왜적이 점령한 경주성에 비격진천뢰를 떨어질 때의 광경을 더 자세하게 묘사해놓았다.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쏘자 적병이 점령한 경주성의 객사의 마당 한가운데 떨어졌다. 왜적들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몰라 다투어 몰려들어 구경하고 서로 밀며 굴려보고 살펴보았다. 갑자기 포가 폭발하자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흩어지니 이를 맞고 즉사한 자가 30여명 되었다. 이튿날 아침 적병이 성을 비운 채 도주했고, 경주가 드디어 수복됐다.”

그러면서 류성룡은 “비격진천뢰포 하나의 위력이 수천 명 군사보다 낫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비격진천뢰는 군기시의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무기다. 진천뢰를 대완구(대포)에 넣어 쏘면 500~600보를 날아가 땅에 떨어져 한참 있으면 불이 그 안에서 일어나 터진다. 왜적들은 이 무기를 가장 무서워했다.”

국내에는 모두 16점의 비격진천뢰가 전해지고 있다. 비격진천뢰는 화포(완구)를 사용해서 발사했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사실 경주성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휘하의 군사들이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해 있었다. 그해(1592년) 8월 경상 좌병사 박진과, 영천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장 권응수와 정세아 등이 합세해서 경주성 탈환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이에 박진은 결사대 1000명을 모아 전열을 정비한 뒤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사용해서 경주성 탈환에 성공했다. 새로운 과학무기의 위력을 마음껏 과시한 전투라 할 수 있다. <연려실기술>은 더 적나라한 표현을 덧붙이고 있다.

“비격진천뢰가 터지자 맞고 넘어져서 즉사한 놈이 20여 명이나 됐다. 온 진중이 아찔하여 거꾸러져서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왜적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귀신의 조화라고 하면서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울주)로 도망갔다. 박진은 경주성에서 곡식 1만여 섬을 얻었다.”

비단 경주성 전투 뿐이 아니다. 그 해 10월의 진주대첩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진주대첩의 전말을 전한 보고서에 등장한다.

“목사(김시민)는 성 위에 비격진천뢰와 질려포(쇠조각이 든 탄환을 쏘던 화포), 그리고 큰 바윗돌을 모아 두고 적의 접근을 막았습니다.…적이 몰려오자 진천뢰나 질려포를 터뜨리고, 큰 돌멩이와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왜적들은 계속 죽어나갔는데, 비격진천뢰에 맞아 넘어져 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습니다.”(<학봉집>)

또 1593년(선조 26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우리 군사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휴대용 개인화기) 및 비격진천뢰와 지신포(신호용 탄) 등의 화기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8월13일 남원성 전투에서도 “성 중에서 잇달아 진천뢰를 발사하여 적병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자 적은 도로 물러갔다”(<난중잡록>)고 했다. 이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사용한 예가 나온다. 그랬으니 의병장 김해(1555-1593)의 <향병일기>는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비격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기록했다. 


19세기 군사교범인 <융원필비>에 기록된 비격진천뢰 제작 기법. 대나무통과 나선형 목각, 마름쇠, 마감장치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연세대 도서관 소장


■왜군을 벌벌 떨게 한 비격진천뢰

일본측도 조선의 비밀병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다. 일본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고 했다. 왜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대단했다.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비격진천뢰를 개발한 이장손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 이장손의 존재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년) 9월 1일에 경주성 전투를 설명하는 말미에, 그것도 실록을 쓴 사관의 부연설명에 겨우 등장한다. 즉 비격진천뢰 덕분에 경주성이 수복됐다는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고 박진이 가선대부(종 2품)로 승진했다는 내용을 모두 기록한 다음 ‘()’ 형식으로 이장손의 존재를 살짝 첨언한다.

“(비격진천뢰는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완포구(大碗砲口·대포)로 발사하면 500~600보 날아가 떨어진다.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다.)”

당대 전세계의 그 어느 포탄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기술로 만든 최첨단 무기를 개발한 이장손의 생몰연도도, 가문도, 이력도 ‘?’로 남았을 뿐이다. 이번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이 이장손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