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대부의 아내들이 귀신에게 아첨하고 혹(惑)하여, 산야의 음혼(淫昏)한 귀신을 제사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특히 송악산과 감악산이 심합니다.” 1431년(세종 13년) 6월25일 대사헌 신개(1374~1446)는 “부녀자들까지 귀신에게 올리는 제사에 빠져있다”고 한탄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부녀자들이 송악산과 감악산에서 제사를 지낸 뒤 술판을 벌이고, ‘귀신을 즐겁게 한다’며 풍악을 치고 즐기고, 밤을 세운 뒤 돌아오면서…광대와 무당이 난잡하게 말 위에서 방자하게 놀아도….”

이 상소를 받은 세종대왕은 “만약 사대부 아내가 감악산·송악산 같은 산천 제사에 참여해서 기도를 올리면 그 남편까지 처벌하도록 해라”는 명을 내렸다.(<세종실록>)

황해~임진강~서울 축선에 자리잡고 있는 감악산 정상에 우뚝 선 감악산비. 글자가 마멸된 몰자비로 알려져 왔다. 신라의 순수비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현재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돼있다. 국가 지정문화재 승격이 시급하다.

■세 글자 판독의 충격

최근 기자는 서예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대전대 서화연구소 책임연구원)가 경기 감악산 정상(해발 675m)에 우뚝 서있는 감악산비에서 광(光), 벌(伐), 인(人)’ 등을 읽어냈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1999년 감악산 정상의 감악산비석에서 얻은 탁본을 새삼스레 분석한 결과 가장 확실하게 보이는 글자를 기자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손박사는 “도드라지게 구별되는 글자만 3개 찾은 것”이라면서 “10년간 묻어두었던 감악사비 탁본을 다시 꼼꼼히 들춰보아 글자를 더 읽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손박사는 “판독 가능한 글자 중에는 ‘중(中)’자와 ‘김(金)’자도 있다”고 전했다. 이 판독이 맞다면 획기적인 발견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문인 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조차 1666년(현종 9년) 이 비석을 친견한 뒤 ‘예부터 글자는 있었지만 판독할 수 없는 몰자비(沒字碑)’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손박사의 판독이 맞다면 이것은 ‘350년 만의 해독’이라 할 수 있으니 기념비적인 발견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진흥왕 혹은 진평왕순수비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에서 이 비석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비석은 진흥왕(재위 540~576년) 혹은 진평왕(579~632)이 한강과 임진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까지 영역을 넓힌 뒤 ‘척경(拓境)과 순행(巡行)을 기념’하기 위해 순수비를 세운 시기와 일치한다.



■감악산에 ‘도만호’ ‘호국백’이라는 관작을 내린 이유

그런데 이처럼 심상치않은 비석이 우뚝 서있던 감악산은 예부터 신령스런 곳으로 추앙받았다. <삼국사기> ‘잡지·제사조’는 “…왕경(경주) 부근의 3산(山)에서는 대사(大祀)를, 토함산·지리산·계룡산·가나갑악·웅곡악(함경 안변) 등에서는 중사(中祀)를, 상악(강원 고성)·설악·부아악(북한산)·감악산에서는 소사(小祀)를 지냈다”고 기록했다. 신라는 애초에 왕경(경주) 부근에서 지내던 제사의 영역을 넓혀 중사→소사 등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감악산의 소사는 부아악(북한산)과 함께 신라가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과정(6세기 중엽~7세기 초엽)에서 추가한 제사일 가능성이 짙다. 

그런데 감악산을 신성시하는 일종의 신앙은 신라 때 시작되어 고려를 지나 유교국가인 조선조까지 이어진다.

단적인 예로 “1287년(고려 충렬왕 13년)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를 도와 내안(?~1287·원나라 종실)을 토벌할 때 감악산신의 제2자에게 ‘도만호’(치안담당 장관)의 관직을 주는 제사를 올려 왕의 출정을 돕도록 했다”(<고려사>)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왕실도 마찬가지였다. 1393년(태조 2년) 1월21일 막 개국한 조선 조정은 전국의 명산·대천·성황(城隍)·해도의 신에게 작위를 내리는 조치를 취하는데 이때 감악산을 “지리·무등·금성·계룡·삼각·백악산과 함께 ‘호국백(護國伯)’에 봉했다”(<태조실록>)는 기록이 보인다. 임금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감악산과 감악산신에게 ‘도만호’니 ‘호국백’이니 하는 봉작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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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국시대땐 기마부대가 한국전쟁 땐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국군이 건너올만큼 수심이 얕은 지점이다.


■신령처로서의 감악산 

감악산이 심상치않은 곳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조 제2대 임금인 정종(재위 1398~1400)의 회고담에 그대로 투영돼있다. 즉 1400년(정종 2년) 1월10일 정종은 “귀신의 도라 하여 모두 헛된 것은 아니”라면서 고려말에 본인이 직접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즉 고려 우왕(재위 1374~1388) 시절 정종(당시는 이방과)은 대언(승지·국왕비서) 신분으로 우왕을 수행하여 장단(파주)에 머물렀는데, 이때 기생 5~6명이 한꺼번에 복통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감악산에서 제사를 올리고 기도했는데, 조금 뒤에 귀신이 한 기생의 몸에 빙의되어 전지도지(顚之倒之·몸을 뒤집었다 굴렀다 함)하고 펄펄 뛰었네. 기생은 부끄러운 것도 알지 못했어. 그러니 귀신이라고 다 헛것이라고 할 수 없지.”(<정종실록>) 

조선에서도 감악산(북악)은 백악산(가운데), 관악산(남악), 치악산(동악), 송악산(서악)과 함께 사시사철 제사를 지내야 할 ‘오악(五嶽)’으로 꼽혔다. 해동성군이라는 세종대왕 역시 시시때때 사람을 보내 감악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세종실록> 1422년 3월 10일) 

감악산 앞을 지키는 칠중성은 백제-말갈, 신라-고구려, 신라-당나라간 치열한 접전을 벌인 요충지다. 한국전쟁 때는 영국군과 중국군이 혈투를 벌인 캐슬고지의 이름으로 통했다. 지금도 삼국시대 문화층 위에 현대식 참호가 들어서있다

1425년(세종 7년) 윤 7월24일에는 세종이 중병에 걸리자 감악산을 비롯해 삼각산·백악산(북악산)·목멱산(남산)·송악산·개성 덕적도·삼성산·양주 서낭당 등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1457년(세조 3년) 8월2일에는 의경세자(1438~1457)가 중병에 걸리자 소격전과 송악산, 감악산 등에 향과 축물을 내리고 세자의 쾌유를 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가뭄이 들거나 흉년이 들 때도 ‘반드시 기도를 올려야 할 신령처’로 감악산이 꼽혔다. 

심지어 1484년(성종 15년) 4월22일에는 목멱산(남산)에 있던 사당을 지키던 차을중이라는 인물이 나무신상(목상)을 만들어 “감악산신이 이곳으로 옮아왔다”고 거짓말로 현혹시킨 것이 적발됐다. 서울을 호위하는 남산신보다 오히려 감악산신을 더 신령스러운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왕실이 이럴진대 공경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백성들까지 감악산의 영험함을 믿는 것은 당연했다. 예컨대 1311년(고려 충선왕 3년) 감악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엄금했다. 

“귀신을 숭상해서 내로라하는 공경사대부와 백성들이 앞다퉈 감악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지중문사 민유와 전 소윤(少尹) 김서지가 감악산 제사를 위해 임진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고려사절요>)

조선조 때도 마찬가지여서 앞서 인용했듯 대사헌 신개가 무분별하고 난잡한 감악산 제사를 거론했던 것이다. 

1400년전 신라-고구려, 신라-당나라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칠중성과 감악산에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영국군과 중국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감악산 칠중성 앞을 흐르는 임진강은 강물이 얕아 인마와 탱크가 도섭할 수 있는 요충지다.

■아닌 밤중에 설인귀

그런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감악산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당나라 장수인 설인귀(614~683)였다는 점이다. <고려사> ‘지리조’ 등에는 설인귀와 관련된 설화가 제법 등장한다,

“1011년(고려 현종 2년) 거란군이 장단(파주)에 이르렀다. 그런데 감악신사(사당)에 마치 군마가 주둔해 있는 것처럼 보여 거란군이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민간에서는 ‘신라인들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아 제사를 올린 덕분’이라 했다.”    

이런 설인귀 설화는 조선조의 정사인 <세조실록>에서도 등장한다. 즉 1464년(세조 10년) 9월2일 길창부원군 권람(1416~1465)이 지병 때문에 감악산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의 일화이다.

중국군이 감악산 계곡으로 후퇴한 영국군을 추격하고 있다.  

“권람이 감악산에서 기도할 때 마침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때 감악산신이 나타나 ‘내가 당나라 장수 설인귀’라고 외쳤다. 그러나 권람은 물러서지 않고 ‘그대가 당나라 장수이고, 난 일국의 재상이니 피차 비슷한 지위인 것 같은데 어찌 그렇게 구차하게 세력을 과시하느냐’고 윽박질렀다….”

감악산 일대에서 왜 뜬금없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이곳에 등장하는가. 속전에는 설인귀가 감악산 인근인 파주 적성 주월리 육계토성에서 태어나 당나라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설인귀가 ‘모국’인 고구려를 정벌한 것에 자책해서 “죽은 후에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서라도 우리를 돕겠다”고 했다는 것이 속전의 얼개이다.


■출렁다리로 만족할 것인가 

하지만 설인귀의 고향이 감악산 인근(적성 육계토성 부근)이라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이다.

당대의 중국기록인 <구당서> ‘열전·설인귀전’은 “설인귀는 당나라 강주(絳州) 용문(龍門) 출생”이라고 못박고 있다. 지금의 산서성(산시성·山西省) 하진(허진·河津)이다. 오죽하면 <여지도서> ‘보유편·적성현지’가 “설인귀의 육계토성 출생설과 산신설 등은 어디까지나 속전일 뿐 제동지언(齊東之言)에 불과하다”고 일축했을까. 

예부터 감악산은 신령스럽고 영험한 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시대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국가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지정됐다. 병든 임금의 치유를 빌고,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를 막아달라는 기도처로 각광받았다.  

‘제동지언’은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의 동쪽 변경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사리분별을 모르는 어리석인 사람들을 일컫는다. 고구려 멸망의 선봉에 서고, 신라까지 욕보인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어째서 감악산신으로 거듭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감악산사, 즉 사당과는 관계없는 감악산비가 설인귀와 관련된 비석으로 와전되곤 했다. 아닌게 아니라 허목의 <기언>과 <동국여지지>, <지행록> 등은 설인귀를 모셨다는 감악산사(사당)를 음사(淫祠·악신을 모시는 사당)로 규정했다. ‘요망한 악신이 화복(禍福)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설인귀의 악령이 ‘진흥왕(진평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짙은 감악산비까지 씐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감악산은 최근 설치된 출렁다리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살펴보았듯 ‘제5의 진흥왕(진평왕)순수비’(추정)가 우뚝 서있는 감악산의 그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출렁다리가 대신할 수 없다. 감악산에 올라 풍우난설을 감당해낸 비석을 바라보며 1500년 역사를 가늠해봄이 어떤가. 만지지는 말고….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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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드롬 2019.10.07 0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으로 죽은 원혼들이 많아서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것이 영험한 산이라는 속설로 전해져오는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