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다. 한문 3통, 영문 3통으로 된 조약에 서명한 이들은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로버트 슈펠트 해군제독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해괴한 조약이었다. 도장은 신헌에 찍었지만 조약의 교섭권을 행사한 쪽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었다. 교섭과정에서도 블랙코미디가 이어졌다.
1905년 미국의 아시아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과 중국, 조선을 방문한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사진 아랫줄 가운데). 그러나 사절단장인 윌리엄 테프트 국방장관(앨리스 바로 뒤)은 일본의 가쓰라 수상과 이른바 가스라-테프트 밀약을 맺고 귀국했고, 앨리스 일행은 중국 방문도중 고종의 초청을 받아 조선을 찾아왔다. |앨리스의 자서전 ‘<혼잡의 시간들> 1934년’에서
■조미수호조약의 제1조
즉 청나라 이홍장이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조문을 조약문에 삽입하려 했다. 미국의 공인 아래 조선에서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지배하기 쉬워진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이홍장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선조정은 ‘청국의 속방’ 운운을 오히려 적극 찬동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은 “조선이 중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주(自主) 할 수 있으니 염려없고 속방조항 삽입은 조선에 크게 이익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체결된 이른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가 이채로웠다.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이른바 ‘거중조정’ 조항이이 포함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제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돕는 중재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 능을 방문한 앨리스가 능의 수호신에 걸터앉는 무례를 저질렀다,
■<조선책략>이 일으킨 반향
고종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바로 이 ‘거중조정’ 조항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미국을 향한 한없는 기대감을 표출했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않는 대인배의 나라이자 대양인인 미국’이야말로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강대국들의 야욕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美) 나라(國)이었다.
고종과 조선조정은 왜 그렇게 미국을 짝사랑했던 것일까.
1880년(고종 17년) 고종은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확인하고자 제2차 일본 수신사 파견을 결정하고 예조참의 김홍집(1842~1896)을 임명했다. 김홍집은 약 한달간 일본 도쿄(東京)에 머물며 일본 조야의 인사는 물론 주일청국공사 하여장(1838~1891)과 참찬관 황준헌(1848~1905) 등과 접촉했다. 이때 황준헌은 앞으로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취할 방안을 정리해서 김홍집에게 전했다. 이것이 6000자에 달하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다.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조선책략>은 러시아를 천하의 강대국임이라고 소개하면서 “러시아가 서유럽에 진출하려 했다가 열강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이제는 동방을 침략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 “러시아의 마수가 이미 두만강변에 미쳤고 따라서 조선이 누란의 위기에 빠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황준헌은 이런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려면 조선은 청국, 일본 미국과 긴밀히 연결해서 자강정책을 확립하라고 주문한다. 이것이 ‘친중국, 결일본(일본과 결합·합종책), 연미국(미국과 연대)’이라고 역설한다,
황준헌은 ‘친중국’과 관련, “청나라야말로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해서 천하의 러시아를 제어할 유일한 국가”라 강조했다. 또 “청나라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러시아의 위협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양국이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2년 제물포의 임시장막에서 거행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광경. 우스꽝스럽게도 교섭단계에서 조선은 배제됐고, 조인식에만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이 도장을 찍었다.
‘결일본’은 무슨 소리인가. 황준헌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한·위·조·연·초·제 등 6국이 합종하자 진(秦)이 감히 동진하지 못했고, 삼국시대 오와 촉이 결합하자 위가 남진하지 못한 것을 예로 들면서 조선과 일본이 결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준헌은 특히 “일본은 국내문제로 조선을 해코지할 겨를이 없으며, 오히려 조선이 자강해서 일본의 서쪽 울타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햇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연미국’은 무엇인가. 왜 미국과 연대하라는 것인가.
황준헌의 주장은 이랬다. 미국은 원래 영국의 속국이었다가 100년전 조지 워싱턴이 ‘발분자립’하여 독립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 뒤로 선왕(워싱턴)의 유훈을 지켜 예의로 나라를 세우고 다른 나라의 토지와 백성을 탐하지 않고 굳이 다른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약소한 나라를 돕고 선의를 유지하며 유럽인들로 하여금 악행을 함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다고도 했다. 황준헌은 “따라서 조선이 반드시 이런 공평한 나라를 끌어다 우방으로 삼으면 화를 면하게 된다”면서 “미국은 대인배의 나라이자 대양인의 나라”고 치켜세웠다.
1905년 고종이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대접한 음식중 첫번째 요리인 신선로. 신선로에는 소고기 안심, 곤자소니(소 대장의 골반 안에 있는 창자의 끝부분으로 기름기가 많이 달린 부분), 등골, 소(양)의 간, 처녑, 돼지고기, 저태(암퇘지 뱃속에 있는 새끼돼지), 꿩, 닭, 전복, 해삼, 표고버섯, 은행, 호두, 녹두전분, 숭어, 달걀, 게 알, 무, 미나리, 파, 참기름, 밀가루, 간장, 후춧가루, 잣 등 26가지 식재료가 들어갔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책략>이 일으킨 반향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조선에 소개되자 고종 뿐 아니라 조선 조정은 열광했다.
김홍집은 미국과의 수교가 필수적이라 했고, 고종은 일본어를 잘하는 승려(이동인·?~1881)를 도쿄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밀사로 보내 미국과의 수교 의사를 밝혔다. 조정의 여론은 <조선책략>에 따라 당장 미국과 수교하자고 입을 모았다. 고종은 “<조선책략> 검토회를 열어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물론 재야에서는 보수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센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영남유생 이만손(1811~1891)은 만인소를 올려서 기독교 사교론과 조선책략의 배척운동을 펼치면서 개항을 반대하고 척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 청나라의 주도로 조미간 통상수호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훗날 제2대 주미공사를 지낸 이하영(1858~1919))의 미국관은 조선인들이 미국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내국 침입이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황금의 부국이니 조선은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고,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라 모욕과 야심도 적을 것이다.”
앨리스와의 오찬에 등장한 골동면. 메밀국수에 소고기안심, 달걀, 후풋가루, 들깨가루, 참기름, 간장 등을 버무린 비빔국수다.| 문화재청 제공
■사랑할 수밖에 없던 미국?
그렇게 조약을 맺고 조약의 제1조를 ‘어려울 때 도와준다’는 거중조정조항을 삽입했으니 미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조약체결 1주년을 맞이한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보빙사 일행은 체스터 아서 미국대통령(재임 1881~1884)에게 큰절을 올리는 모습이 화제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 보빙사 일행은 40여일간 미국 전역을 둘러보고 돌아온 뒤 미국과의 우호친선을 위해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고종에게 영어교육기관 설치를 건의한다. 이에따라 1886년(고종 23년) 인재양성을 위한 영어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설립된다. 미국에서 파견된 원어민 교사도 최초로 고용됐다.
육영공원은 관리들이나 양반 자제들을 선발하여 영어교육을 실시했다. 국영교육기관 뿐이 아니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설립되면서 관리나 양반자제들만 받던 영어교육이 여성들을 포함한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대됐다. 고종은 육영공원의 영어교육원칙은 ‘교이영문영어(敎以英文英語)’, 즉 영어단어와 문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목을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른바 영어몰입식 교육이었다. 영어 교육열의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종은 육영공원으로 행차해 친히 영어시험을 감독하기까지 했다. 황태자에게도 개인 선생을 붙여 영어 과외를 시켰다.
앨리스에게 제공한 메뉴판. 17가지 음식에 3가지 양념을 제공했다. |미국 뉴욕공공도서관소장
고종은 근대식 군사교육을 위해 미국에서 군사교관을 초빙하고 최초의 사관학교라 할 수 있는 ‘연무공원’도 설치 운영한다.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에서 기증받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5)의 친필편지가 바로 1888년(고종 25년)조선에 파견된 미군 교관에게 “우리 장정들을 정예병으로 키워달라”며 보낸 편지이다. 박정양의 <미행일기>는 “이때 파견된 교관이 다이(多爾·윌리엄 매캔티어 다이·60)와 검민시(커민즈·儉敏時·에드먼드 H 커민즈·60), 리니(利尼·존 G 리·30) 등이었다”고 전했다. 고종은 이들을 끔찍히 여겼다.
<고종실록> 1890년(고종 27년) 윤2월 26일자는 “연무공원과 통위영, 장위영의 군사조련에 성과가 있었으니 교사들이 공로가 가상하다. 다이에게 병조참판(2품)의 직을 내렸다”(<고종실록>)고 기록했다.
최초의 근대적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이 공립외국어 전문교육이라면 ‘연무공원’은 장래 지휘관의 실전대비훈련을 위해 설립한 조선식 사관학교였다. 어려울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도와줄 것 같았던’ 대인배의 나라 미국을 향한 고종의 애정공세는 끝도 한도 없었다.
■미국 대통령 딸까지 초청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기대와 달리 미국은 조선을 위해 단 한번도 나서주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미국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조선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1823년 시작된 먼로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의 고립주의 및 불간섭 외교정책을 몰랐고, 제국주의 열강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국제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기울어져가는 대한제국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고 ‘대인배의 나라’인 미국 대통령의 딸까지 초청한 것이다. 아마 고종은 앨리스를 ‘미국의 공주’로 여겼을 것이다. 고종은 황태자(순종)과 함께 친히 앨리스를 영접했고 황실가마까지 내줬으며 거리마나 성조기를 매다는 등 국빈으로 대접했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이 조선에 파견된 미육군 교관에세 보낸 친필편지의 본문, “온마음을 다해 가르치셔서 조선 장정들을 정예병으로 키워달라”는 당부편지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그리고 9월20일 앨리스를 덕수궁 중명전으로 초청해서 함께 공식오찬을 나눈다. 고종이 여성과 겸상해서 식사를 한 최초의 자리가 됐다. 이날 오찬 때 먹은 국빈오찬상의 차림표가 지난 9월21일부터 11월24일까지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1층 전시실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식탁’ 특별전에서 공개되고 있다.
고종은 이날 대표적인 궁중음식인 신선로(열구자탕), 비빔국수(골동면), 숭어찜(수어증), 편육, 생선전(전육), 전복조림, 누름적(회양적·각종재료 익히고 색을 맞춰 꼬챙이에 꿴 음식), 두텁떡(후병), 약밥(악식), 숙실과(과일을 익혀 다시 과일모양으로 또는 다른 형태로 만든 음식) 등 17가지 음식과 초장·겨자·꿀 등 3가지의 양념이 제공했다. 이날 제공된 음식의 메뉴판은 미국 뉴욕 공공도서관 소장자료이다.
신선로에는 소고기 안심, 곤자소니(소 대장의 골반 안에 있는 창자의 끝부분으로 기름기가 많이 달린 부분), 등골, 소(양)의 간, 처녑, 돼지고기, 저태(암퇘지 뱃속에 있는 새끼돼지), 꿩, 닭, 전복, 해삼, 표고버섯, 은행, 호두, 녹두전분, 숭어, 달걀, 게 알, 무, 미나리, 파, 참기름, 밀가루, 간장, 후춧가루, 잣 등 26가지 식재료가 들어갔다.
■까맣게 몰랏던 가쓰라-테프트 일약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잠는 심정으로 미국 대통령 딸까지 초청한 고종의 외교전은 너무도 순진했다.
고종은 앨리스 초청 50여 일 전인 7월29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밀약의 골자는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밀약은 앨리스가 포함된 미국의 아시아사절단 단장격인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1857~1930·차기 미국 대통령)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1848~1913) 사이에 맺은 것이었다. 테프트는 이 밀약을 맺고 중도 귀국했고, 앨리스 일행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가 고종의 초청을 받고 조선으로 ‘놀러 온 것’이었다. 그 밀약 체결소식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으로서는 버스 지나간 후 손을 흔든 격이 됐다. 약혼자와 함께 여행중인 ‘앨리스 공주’는 결과적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내민 대한제국 황제를 농락한 셈이다.
1883년 조미수교 1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박정양 등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고 있다. 이 진귀한 모습을 신비롭게 여긴 미국 뉴욕의 언론이 삽화로 그렸다. 아서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존재감없는 키작고 멍한 황제’
앨리스는 1934년 출간한 자서전(<혼잡의 시간들>)에서 오찬장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황제와 마지막 황제가 된 그의 아들은 우리 공관 근처의 궁궐(덕수궁)에서 남의 눈을 피해 생활했다. 며칠 후 궁궐내 유럽식으로 꾸민 장소(중명전)에서 점심을 먹었다. 위층 방으로 안내받아 (접견한 후) 키 작은 황제는 자신의 팔은 내주지 않은채 내 팔을 잡았고, 같이 서둘러 비틀거리며 매우 좁은 계단을 내려가 평범하고 냄새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중명전 2층에서 잠깐 고종을 알현한 앨리스가 고종과 함께 1층 오찬장으로 내려오는 순간의 묘사다. 기껏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대접을 했더니 ‘키작고 무례한 황제’와 ‘냄새나는 식당’ 운운 하며 ‘디스’했다.
게다가 앨리스는 ‘고종’을 ‘멍한 존재’로 깎아내렸다. “그들은 황족의 존재감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며 다소 측은하게 별다른 반응없이 멍하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던 앨리스는 서울에서도 승마복 차림에 시거를 피워가며 고종을 알현했고, 명성황후 능에 가서는 능을 지키는 수호상 위에 떡하니 걸터앉아 사진을 찍는 오불관언의 무례를 저질렀다.
철없고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렸다한들 남의 나라를 향한 존중은 ‘1’도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앨리스가 대한제국을 농락하고 돌아간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을사늑약(11월17일)에 의해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단절 국가가 됐다.
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언약을 철석같이 믿은 고종의 애정공세는 슬픈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정기, ‘한미수교 110년, 조약으로 본 불평등의 역사-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이권침탈’, <역사비평> 18, 역사비평사, 1992
장경호, ‘청일전쟁 직전 고종의 대미의존 심화와 시도’, <한국근대화연구> 86, 한국근현대사학회, 2018
서명석, ‘개화기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고찰’, 동국대석사논문, 2007
김기정, ‘한미관계 130년, 연미책 부침의 역사’, <지식의 지평> 10, 대우재단, 2011
이윤상, ‘대한제국의 생존전략과 을사조약’, <역사학보> 188권, 역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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