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하고 있는 전시 중 볼만한 것이 뭐지요?” “아무래도 삼성퇴 특별전이 아닐까요.” 얼마전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와 올해 열리는 특별전 이야기를 나누던 기자의 귀가 번뜩 뜨였다.

말로만 듣던 ‘삼성퇴’ 특별전이라. 필자는 오래전에 읽었던 삼성퇴 관련 단행본을 다시 들춰보았다. 삼성퇴 특별전은 올해 7월21일부터 10월2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삼성퇴와 삼성퇴 관련 유물이 120점 오는데, 이중 24점이 한국의 국보에 해당되는 ‘1급 유물’이란다. 해외에 대여되는 중국유물의 경우 국보가 20%를 넘을 수 없다는 대여 규정이 있다고 한다. 1990년대에서 삼성퇴 특별전을 개최하려고 중국측과 접촉했지만, 중국측이 대여료로 1억5000만원을 요구하면서 무산된 바 있다. 이번에는 대여료가 한 푼도 없다. 중국 측도 ‘교류전’의 형식으로 한국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측은 한국의 역사를 통사로 볼 수 있는 유물들을 지목했단다.

삼성퇴 유적에서 발굴된 가면. 중국 중원 문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유물이다. 대부분의 얼굴상이 쓰고 있다. 순금판으로 압축한 황금가면이다. |삼성퇴 박물관

■세 개의 금성과 조각달

그렇다면 삼성퇴(三星堆)가 대체 무엇인가, 중국 발음으로는 ‘싼싱두이’지만 이 기사에서는 쉽게 ‘삼성퇴’라 하겠다. 혹자는 한국의 대표 기업인 삼성과 관련이 있느냐고 짓궂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물론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삼성퇴는 양쯔강(揚子江) 중류인 쓰촨성(四川省) 광한시(廣漢市)에서 서북쪽인 야쓰허(鴨子河)와 마무허(馬牧河) 등의 두 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유적 이름이다. 

왜 하필 삼성퇴일까. 드넓은 평지 위에 유독 두드러진 황토 둔덕 3곳이나 우뚝 솟아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 세개의 금성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강 건너에는 웨량만(月亮灣)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조각달 같다. 그러니 멀리서 보면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금성이 고운 조각달과 어우러진 느낌을 준다.

그 덕분에 청나라 가경 연간(1796~1820년)에 편찬된 <한주지>는 이곳의 경관을 ‘삼성반월(三星伴月)’ 혹은 ‘삼성반월퇴’라 했다. 훗날 이 일대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지면서 ‘삼성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삼성퇴에서 발굴된 청동가면상. 길이  1m38, 폭 85㎝, 높이 66㎝ 무게 71.1㎏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다. 이번 ‘삼성퇴’ 특별전에 소개된다.  |삼성퇴 박물관 

■사람 머리 청동상에 벌벌 떨다 

삼성퇴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웨량만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옥으로 만든 유물이 나와 주목을 끈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삼성퇴에는 벽돌제조공장이 들어서 벽돌제조에 쓰일 흙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었다. 뜻있는 고고학자들은 1980년부터 삼성퇴 발굴을 시작해서 다량의 옥기와 석기 등을 품고 있던 무덤들을 발굴했다. 학자들은 삼성퇴 유적의 연대를 중국 하나라(기원전 2070~1600)와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와 비슷한 3000~4000년 전으로 판단했다.

1986년 7월18일 오후 벽돌공장 노동자 2명이 벽돌제조용 흙을 파내려고 곡괭이를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컹’하는 소리와 함께 흙 속에 있던 돌 부스러기가 위로 튀어올라 두사람의 얼굴과 종아리를 때렸다. 노동자들은 “큰일 날 뻔 했다”고 투덜거리면서 바닥을 살폈다. 뭔가 단단한 물건 위에 흙이 엷게 덮여있었다. 조심스레 흙을 치워보니 너비 20㎝ 길이 40㎝ 가량의 큰 칼 모양의 옥석이었다, 

본격발굴이 시작되었다. 7월26일 이 구덩이에서 중국 상나라 전기 시대에 해당되는 대형 청동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발굴단원들이 사진을 찍고 한바탕 난리굿을 펼치는 그 순간 어디선가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기 봐요. 아! 이건 사람 머리예요.”

사람들이 덜덜 떨면서 발굴 현장에서 뛰쳐나갔다. 정신을 차린 발굴자 중 한사람이 그 현장에 찾아가보니 과연 청동으로 만든 사람머리상(靑銅人頭像)이 보였다. 실물 크기와 비슷했다. 사람머리상은 머리부분은 입 구(口)자 모양이었고, 마늘쪽 같은 코에 콧대가 두드러졌다. 두 눈에는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청동 사람머리상은 한 둘이 아니었다. 신화 속에 나타나는 영웅호걸처럼 각각 다른 자태와 품격을 지닌 청동인두상이 속속 발굴됐다. 

청동으로 된 사람머리상. 높이 29㎝ 폭 20.6㎝ 무게 4.483㎏이다.  처음 삼성퇴 유적에서 이런 청동머리상이 확인되자 발굴단원들이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삼성퇴 박물관

■황금지팡이 소문에 1만명 몰려와

다음날인 27일에는 더욱 놀라운 유물이 나왔다. 발굴단이 찾아낸 것은 대나무 껍질 모양의 황색물체였는데, 불빛 아래 반짝 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황금유물이 나왔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황금 허리띠와 황금갑옷, 황금투구를 찾아냈다느니, 금으로 만든 사람(금인·金人)이 발굴됐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나중에는 용맹한 금인(金人) 무사가 황금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 황금 말을 탄채 황금빛 뱀모양 창을 들고 구덩이에서 튀어나와 삼성퇴를 몇바퀴 돈 뒤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번졌다. 이와함께 무장한 공안(경찰)이 신비로운 괴물을 잡으려고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현장은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 주민들로 북적였다. 오후들어서는 1만명 정도가 현장으로 몰려왔다. 공안은 물론이고 재빨리 구성한 민병들이 현장을 보호했다. 이 유물은 전체 길이 1.42m, 직경 2.3㎝, 463g 정도였다. 전체가 황금은 아니었고 나무 막대기에 황금을 얇게 두들겨 붙인 것이었다. 

이 유물은 금장(金仗), 즉 금지팡이로 판단됐다. 보통 금지팡이는 나라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알려져왔다. 그렇다면 중국 중원의 왕조인 하·상·주가 모두 구정(九鼎), 즉 주변 9개의 부족이 비용을 들여 만든 청동 솥을 왕권의 상징으로 숭상했던 것과 다른 문화가 아닌가. 

고대 촉나라가 같은 시대(하·상) 중원문화와 서로 다른 기원과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겠다. 특히나 이런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금지팡이는 고대 이집트 파라오나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 등만이 차지할 수 있는 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중국 서남 지역인 삼성퇴에서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금장이 출토되었다니….

남아있는 높이 40.2㎝, 길이 23.3㎝, 폭 20㎝, 무게3.046㎏인 청동상. 출토된 청동상은 각기 다양한 형태의 헤어스타일과 얼굴을 자랑하고 있다. 

■눈알 튀어나온 청동상

14일간이나 진행된 발굴결과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진 구덩이에서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 발굴유물은 청동제 사람머리상 13점과 청동 얼굴상, 앉아있는 사람상, 청동구슬, 청동술잔, 청동단지, 청동쟁반 등 청동기 178점과 다양한 옥기류 429점, 석기류 70점, 도기류 39점, 조개류 124점, 금기류 4점 등이었다. 

다시 8월16일 재개된 터 발굴에서 다시 한번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엄청난 크기의 청동가면이 나왔다. 훗날 복원된 청동 가면은 높이가 65㎝, 너비가 138㎝, 두께 0.5~8㎝였다. 두눈은 옆으로 길고 안구는 심하게 과장되어 직경만 13.5㎝가 되며 눈언저리가 16.5㎝ 정도 돌출되어 있었다.

청동가면과 함께 세밀하게 조각된 다양한 청동유물이 출토됐고, 역시 각양각색의 청동 사람머리상도 나왔다. 이밖에도 크기가 각기 다른 청동 얼굴상과 눈알이 톡 튀어나온 짐승 얼굴 청동상과 청동신수(神樹)등 기이한 유물 투성이었다. 이밖에도 상아(67점)와, 상아구슬(120건), 조개껍질(4600건) 등도 나왔다.


■중원과 사이(四夷)의 차별

그런데 중국인들이 어떤 이들인가. 중국인들은 중국 문화의 발상지로 황허(황하·黃河) 중상류의 남북 양안을 ‘중원(中原)’이라 했다. 중화의 중심지이자 중국문명의 요람이 바로 중원이라 자랑했다. 이곳은 바로 하나라(기원전 2070~1600년)와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주나라(1046~252) 등이 차례로 문명을 일군 곳이라 했다. 현재의 허난성(하남성·河南省), 싼시성(산서성·山西省) 등과 산둥성(산동성·山東省), 허베이성(하북성·河北省)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중국학계는 특히 이 황허 중류에서 이른바 양사오문화(仰韶文化·기원전 5000~기원전 3000년)를 중국문명의 뿌리라 했다. 그러면 그외의 지역은? 그저 사이(四夷)라고 해서 사방 4곳의 오랑캐 땅이라 했다. 예컨대 중원의 동쪽에는 동이(東夷·활 잘쏘는 동쪽사람), 서융(西戎·창쓰는 서쪽 사람들), 남만(南蠻·벌레가 많은 남쪽), 북적(北狄·이리가 많은 북쪽)으로 낮춰불렀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자부심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청동으로 만든 서있는 사람상. 전신을 다 갖춘 인물상이다. 옷자락에 4마리 용이 새겨져있다. 용은 후대에 황제나 임금을 상징하는 신령한 동물이다. 또 무언가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오랑캐의 소굴에서 속속 밝혀지는 문화

하지만 1970년대말부터 중국 전국 각지의 발굴에서 수상한 흔적들이 대거 확인되기 시작했다. 

우선 중국인들이 ‘동이의 땅’으로 폄훼했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기원전 6000년 전 유적인 차하이(査海)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가 확인됐다. 이 차하이 문화는 뒤에 이어지는 훙산문화(紅山文化ㆍ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의 원형이 되었다. 즉 1983년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 뉴허량(牛河梁)과 둥산쭈이(東山嘴)에서는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갖춘 유구와 유물들이 대거 확인됐다. 남쪽에서는 어떠했나.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揚子江)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량주(양저·良渚ㆍ기원전 3200~기원전 2200년)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이었다. 중원의 중화주의가 골수에 박힌 중국학자들은 이른바 오랑캐 소굴에서 중원문화와 비슷한, 아니 중원문화를 능가하는 정교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원숭이도 황학도 넘을 수 없는 땅

바로 그런 와중에 고촉, 옛 촉나라의 땅에서도 이른바 중국 중원과는 확연히 다른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발굴이 이어진 것이다. 사실 옛 촉나라가 어느 곳인가.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그 유명한 ‘촉도난(蜀道難)’을 보라. 

“와아! 높고도 높구나. 촉도의 험난함이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구나…땅이 무너지고 산이 꺾이고 장사가 죽자 하늘사다리며 잔도가 고리처럼 이어졌네…. 황학 날아 넘어가지 못하고 원숭이 건너려 해도 매달릴 것 걱정하네…촉도의 어려움이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운지라 서쪽 바라보면서 길게 탄식만 하누나.”

‘촉도난’의 내용처럼 촉나라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옛 촉, 즉 고촉(古蜀)와 관련된 사료는 그리 많지 않다. 촉나라의 전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기술한 서한 시대 양웅(기원전 53~기원후 18)의 <촉왕본기>이다.  

“촉나라 땅에서 가장 먼저 왕으로 칭해진 자들은 잠총, 백관, 어부, 두우, 개명 등인데 당시 촉나라 백성들은 상투를 늘어뜨리고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했으며, 문자도 모르고, 예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옛 촉국은 주나라 무왕이 상(은)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을 정벌하기 전 목야에서 회맹한 8개 부족 중 하나였다. 기원전 7세기에는 촉왕 두우가 황제를 칭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농토를 개척했다. 이로써 촉은 서남 지역의 대국이 됐다. 그러나 촉나라는 기원전 316년에 멸망하고 만다. 

1호 구덩이에서 나온 황금지팡이. 길이가 1m43㎝이고, 무게는 463g이다.

■황금똥 싸는 황금소를 잡아라  

진나라 혜문왕(기원전 337~311년)은 쓰촨 지역을 정벌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어 고민 중이었다. 이때 사마착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사마착은 “나라가 부유해지려면 광활한 토지자원이 뒤를 받쳐야 한다” 는 등의 이유를 들어 서촉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황학도 원숭이도 넘지못했다’는 촉나라를 어떻게 정벌한단 말인가. 진나라는 꾀를 낸다.

“우리가 황금 똥을 싸는 황금 소를 만들어 사신을 통해 촉나라 왕에게 전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아니나다를까. 이 소문이 촉왕의 귀에 들어갔다. 황금똥을 누는 황금소를 차지하겠다는 헛된 꿈에 부풀었던 촉왕은 5명의 장사를 보내 현재 지앤먼관(劍門關)을 통하는 길(금우도·金牛道)을 뚫었다. 그러자 진나라 군대는 길을 뚫은 촉 장사들을 죽이고, 그 길(금우도)을 통해 거침없이 사천 지방을 정복했다.


■상나라 저 너머에서도 또다른 문명이…  

삼성퇴 유적의 연대는 대략 5000년 전부터 3000년 전으로 편년된다. 그 궁벽한 땅에서 신석기시대 초기에서 중국인들이 그토록 신줏단지처럼 모셨던 중원의 하·상·주(초)까지를 아우르는 기나긴 세월동안 문명을 일굴 줄 누가 알았으랴.

물론 신기한 것은 ‘원숭이도 황학도 넘기 어려웠다’는 관문을 뚫고 촉-중원 문화 사이에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청동예기 가운데 술그릇과 다양한 옥제품은 당대 중원의 상나라 문화와의 교류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교류의 흔적은 제한적이다. 

반면 이곳에서 발굴된 다양하고도 엄청난 규모의 청동유물은 중국 중원은 물론이고, 그외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높이가 2m62㎝에 달하는 청동입상(서있는 청동상)과 폭이 무려 1m38㎝에 이르는 청동가면, 높이가 최고 3m95㎝가 되는 청동신수(神樹) 등은 보는 이를 전율에 휩싸이게 한다. 특히 2호 구덩이에서 찾아낸 대형청동상(높이 2m62㎝)은 무게가 180㎏이나 되며, 과장되게 큰 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2호 구덩이에서 출토된 청동상의 소인상들의 경우 옷깃이 겹쳐지지 않은 웃옷을 입거나, 무릎을 꿇거나 하는 모습인데, 이는 신분의 차이를 뜻한다. 또 사람 얼굴 형상의 청동인두상도 모두 57점이나 나왔다. 이 얼굴상을 첫 발견한 발굴단원이 벌벌 떨었다는 바로 그 유물이다.

형태가 엄청 다양하다. 정수리가 평평하고 머리카락을 뒤로 땋은 것, 평평한 머리에 모자를 썼거나 화(回)자 무늬의 관을 쓴 것, 변발을 머리 뒤에 둘둘 감거나 머리 뒤로 나비모양의 비녀를 꽂은 것, 양쪽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쓴 것 등등…. 

청동신수. 신수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나무 사다리로 인식되어 왔다.|삼성퇴박물관 

■돌출이마와 하늘사다리

그런데 더 특별히 주목해야 할 유물은 바로 대부분의 얼굴상이 쓰고 있는 가면이다.

1·2호 구덩에서는 순금판으로 압축한 황금가면들이 여럿 확인됐는데, 고대 촉나라 사람들은 왜 이런 가면을 끈 청동상을 제작했을까. 신비롭기 그지없다. 또 특이한 유물은 반원형의 가면형태로 출토되는 이른바 얼굴상이다. 모두 20점이 출토됐다. 얼굴의 형태가 다양한데, 어떤 얼굴상은 눈썹과 안구는 검은색으로. 입술은 붉은 색을 칠하기도 했다. 어떤 가면상은 폭이 1m38㎝나 되고, 안구가 뚜렷히 돌출했으며, 양쪽 귀가 지극히 과장된 짐승 귀만큼이나 크다. 또다른 가면상은 새의 날개와 꼬리 모양의 말린 뿔, 즉 사람과 짐승(새)의 특징을 융합한 가면상도 있다. 또하나 의미심장한 유물은 청동신수(신령스러운 나무)이다. 그런데 ‘신수(神樹)’는 하늘과 인간의 교류를 의미하는 나무이다. <회남자> ‘지형훈’을 보면 “여러 천제가 오르내리는 곳이 바로 건목(建木)”이라 했다. 건목은 뿌리가 휘감기고 줄기가 엉켰으며 잎이 무성한 통천신수인데, 신기한 하늘 사다리라 했다. 단적인 예로 고대 제왕인 복희씨와 곤륜 등이 사다리로 하늘세계에 올랐다고 한다. 이와같은 상징물의 주인공은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는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 아닐까. 

‘왕(王)’자가 바로 하늘(一)과 땅(一)을 이어주는 사람, 즉 제사장(ㅣ)을 형상화한 상형문자가 아닌가.     


■깎아지른 벼랑 사이에 놓은 잔도로

촉나라 사람들이 이토록 규모가 크고도 정교한 청동기를 제작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중국인들이 그렇게 깔봤던 족속인데…. 그렇다면 삼성퇴가 대표하는 고촉국의 문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국학계는 “삼성퇴에서 나타나는 청동 술그릇과 제기그릇, 관(瓘·옥) 등은 당대 중원의 하나라 시대(기원전 2070~기원전 1600년) 것과 차이가 없다”면서 촉나라와 중원의 문화교류는 그 뿌리가 깊다고 했다. 

학자들은 촉나라와 중원(하나라·상나라)은 때로는 장강(양쯔강)을 통해, 때로는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선반형태로 아슬아슬 매단 이른바 잔도(棧道)를 통해 교역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사기> ‘화식열전’도 “파촉은 사방이 가로막혀 잔도를 1000리에 걸쳐 만들어 물자가 오갔다”고 기록했다.

촉국은 동시대의 중원문화를 일부 받아들였지, 결코 동화되지는 않았다. 중원은 물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하고도 다양한 청동인물상과 가면상, 가면 등이 그것을 웅변해준다. 예컨대 삼성퇴 출토 금지팡이(금장·金仗)는 권력자만이 지녔던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반면 중원이라는 하·상·주는 모두 구정(九鼎), 즉 주변 9개 부족의 비용 갹출로 만든 청동 솥을 왕권의 상징으로 받들었다. 

삼성퇴 유적 전경. 멀리서 보면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금성이 고운 조각달과 어우러진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곳의 경관을 ‘삼성반월퇴(三星伴月堆)’라 한다. 

■수레바퀴론 

한때는 오랑캐의 소굴로 손가락질 당했던 중국변방에서 중원문화에 버금가는, 아니 능가하는 문화가 속속 출현하자 중국학계는 호떡집에 불난듯 했다. 

결국 잠시 패닉에 빠졌던 중국학계는 결국 ‘통고적(痛苦的·쓰라린) 아픔’ 을 겪으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황허 중류는 중국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우선 신석기 시대인 ‘양사오 문화’와, ‘훙산문화’, ‘량주문화’, 그리고 청동기 시대인 상나라와 고촉국 문화의 관계를 재설정했다. 

쑤빙치는 “북에서 훙산문화, 남에서 량주문화가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의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또 “(고촉국과 같은) 다른 지역의 문화도 각기 독자적인 특징과 경로로 발전해서 중원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이것을 수레바퀴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러 곳의 문화가 수레바퀴 살처럼 한가운데로 모여 화려한 중국문명을 꽃피웠다는 것이다. 

뭐 돌이켜보면 황허 유역에서만 문명이 발달했다는 주장인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중화주의’였다. 왜냐면 중국대륙에는 황허만 있나. 양쯔강과 랴오허 유역을 터전으로 삼은 각각의 문명이 있었을 것이 불문가지였을테니까…. 

삼성퇴는 바로 중국문명의 기원론이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수천년동안 뒤집어쓴 오랑캐의 오명을 벗은 삼성퇴 유물을 볼 수 있다니 벌써 기대가 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황젠화, <삼성퇴의 황금가면>, 이해원 옮김, 일빛, 2002

웨난, <삼성퇴의 청동문명-사라진 고대왕국, 고촉국의 신비>, 일빛, 2002

안신원, ‘사천 삼성퇴 제사갱 유적의 성격에 대하여’, <역사와 사회> 4권, 한국샤머니즘 학회, 2002

김선자, ‘도상으로 본 중국신화-암각화에서 삼성퇴까지’, <중국어문학논집> 제40권, 중국어문학연구회, 2006

Posted by 이기환기자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