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이게 웬 불상이지?”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 대의면 하촌리 마을밖 도로공사에 품팔이를 나온 마을주민 강갑순씨(당시 40세)와 큰아들 전병철군(17)이 야산 비탈의 돌무더기를 파헤치고 있었다. 얼마쯤 파내려 갔을까. 두사람은 깜짝 놀랐다. 걸리적 거리던 잡석 하나를 곡괭이 끝으로 제치자 폭 30㎝ 길이 40㎝, 깊이 30㎝ 가량의 네모반듯한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누워있던 금빛 찬란한 불상을 보았다. 강씨는 발견사실을 대의면 지서에 알렸고, 불상을 친견한 전문가들은 경악했다.
‘금동연가 7년명 7년명 여럐입상’. 이 불상은 제작연대(기미년·539년)가 있는 가장 오래된 금동불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시어머니에게 고기 한근 사드려야죠”
금동불상은 둥근 연꽃 대좌 위에 중생의 고통을 풀어주는 수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이 소용돌이 치는 불꽃 모양의 배모양 광배와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높이 16.2㎝에 불과하지만 광배 뒷면에 새겨져있는 ‘연가7년 고려국낙랑’(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浪)으로 시작되는 4행 17자의 명문이 불상의 가치를 높였다.
이 불상은 ‘기미년(539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있는 가장 오래된 ‘기년명 금동불’이다. 고구려 평양(낙랑)에서 제작된 불상이 왜 신라·가야 지역인 의령 땅에 묻혔는지는 불가사의하다. 하지만 이 불상은 중국 북위 시대의 양식을 받아들여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으로 재해석한 ‘한국적 조형미의 선구작’으로 꼽힌다.
불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이름으로 국보(제119호)가 됐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불상을 발견 신고한 강갑순씨 모자와 땅 임자(전모씨) 에게 20만원씩의 보상금을 나눠주었다.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제17조와 21조 등)과 ‘유실물법’(제13조) 등은 ‘발견 유물은 신고는 7일 이내에 신고해야 하며, 발견자와 신고자, 토지 및 건물소유자에게 보상금을 균등하게 지급한다’고 규정해놓고 있다. 1963년 쌀값(80㎏ 한가마니·2800원)과 요즘 쌀값(20만원 가량)을 비교할 때 1963년 20만원이면 요즘의 1400만원에 해당된다.(한국은행 자료) 날품팔이로 근근히 살고 있던 강씨 모자는 물론이고 토지 소유자도 뜻밖에 보상을 받은 셈이다.
1963년 날품팔이 하던 주민이 도로공사 중 발견한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국보 제119호) 고구려 불상이 왜 가야 혹은 신라지역에서 발견되었는지 의문이다. 당시 발견자는 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발견자 강갑순씨와 토지소유자 전씨가 이듬해 12월 보상금을 받기위해 상경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경향신문 1964년 12월 16일자) 강씨는 국립박물관에서 자신이 발견한 ‘연가 7년명’ 불상을 친견했고 문화재관리국 직원들의 안내로 5대궁을 관람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강씨가 농토라곤 가진 것 없이 70고령의 시어머니와 5남매의 참혹한 살림을 이끌어왔다’고 소개했다. 강씨는 보상금으로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 “빚진 5000원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전답을 사야겠다”고 밝혔다. 강씨는 “한푼도 헛되이 쓸 수는 없는 돈”이라면서도 “시어머니에게 고기 한 근이라도 사다 드려야겠다”고 말한 뒤 시골집으로 직행했다.
■꿈자리가 사나워 파본 배수로에서 국보 불상이…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7호)의 ‘발견담’ 또한 기가 막힌다. 주민 박용출씨는 서울 청량리의 판잣집이 철거당하는 바람에 서울 삼양동 산동네 국유지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부인이 채소를 팔아 8식구가 근근히 살아가던 박씨는 1967년 1월 어느날 밤 집 뒤의 산비탈이 무너져 온 식구가 깔려죽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자리가 워낙 사나워 불안에 떨었던 박씨는 1월28일 천막집 뒤 산비탈 쪽에 하수도를 깊이 파기 시작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을 발견한 강갑순씨가 보상금을 받기 위해 상경해서 국립박물관에 진열된 불상을 바라보고 있다. 전답 1평 없이 70이 넘은 시어머니와 5남매를 키워야 했던 강씨는 당시 “보상금으로 빚을 갚고 전답을 사는데 사용하겠다”면서도 “시어머니에게 고기 한근 사드리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1964년 12월16일자
한 1m쯤 파내려갔을까. 곡괭이 끝에 뭔가 금속물질이 닿는 에리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박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위 흙을 파헤쳐보았고 그곳에서 뜻밖에 금동불상이 나타났다. 높이 20.7㎝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살찐 얼굴과 신체, U자형으로 늘어진 옷 등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됐다. 삼국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관음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천막집에서 8식구가 근근히 살아갔던 박용출씨는 이듬해 1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불상의 가치는 240만원으로 평가됐지만 발견한 지점이 국유지여서 국가가 반(120만원), 박용출씨가 반(120만원)을 받게 된 것이다. 화폐가치의 변화를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하는 통계청 프로그램에 따르면 1968년 120만원은 2019년 12월 기준으로 3300만원에 달한다.
서울 삼양동 천막집에 살던 박용출씨는 1967년 꿈자리가 사나워 하수구를 파다가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7호)을 발견했다. 박씨는 지금 기준으로 3300만원에 해당되는 보상금(120만원)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수도검침원이 찾아낸 문무왕릉비편
2009년 2월 초 수도검침원인 최순득씨(당시 45)이 경북 경주시 동부동 한 주택의 마당 수돗가에서 검침하고 있다가 희한하게 생긴 돌덩이를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검침원 최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전문가를 거쳐 국립경주박물관에 발견사실을 알렸다. 박물관 조사결과 이 돌덩이의 한쪽면에서만 200여자의 글자가 확인됐다. 글자의 서체와 음각 양식으로 미루어 이 돌덩이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이었다.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은 “문무왕릉비는 682년(신문왕 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지만 부서졌으며 1796년 부서진 조각을 확인했다”고 기록했다. 1796년(정조 20년) 확인된 문무왕릉비의 조각은 다시 20년 넘게 실전됐다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1817년(순조 17년) 경주답사 때 발견되었다. 그러나 추사가 찾아낸 문무왕비는 다시 사라졌으며, 1961년 경주 동부동 민가에서 비석의 아랫부분만 찾아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비석의 윗부분이 수도검침원의 눈썰미 덕분에 확인된 것이다. 문무왕비의 윗부분을 발견한 수도검침원과 집주인은 각 1500만원씩 보상금을 받았다.
2009년 주민 김헌도씨가 길가다가 발견한 포항 중성리비(국보 제318호). 유물평가액(1억원)의 반(500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발견지점이 국유지라 평가액의 반(5000만원)은 국가로 돌아갔다.|문화재청 제공
■대문 울타리 기둥석으로 쓰려다가…
경북 지역에서 줄줄이 발견된 ‘신라비석 트리오’인 울진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1988년)와 포항 냉수리비(국보 제264호·1989년), 포항 중성리비(국보 318호·2009년) 등의 발견 또한 드라마틱하다.
울진 봉평비가 스타트를 끊었다. 1988년 1월 20일 경북 울진 죽변면 봉평리 농민 주두원씨는 논둑에 박힌 커다란 바위가 거추장스러워 포크레인으로 파내어 논두렁에 던져놓은 바 있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3월 20일 이장 권대선씨가 이 논두렁에 박힌 돌덩이를 대문 울타리 기둥석으로 쓰려고 포크레인에 실어 마을 공터로 옮겼다. 그후 내리기 시작한 봄비에 흙이 씻겨나가면서 돌덩이에서 희미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권대선 이장은 명문 비석의 발견사실을 신고했다. 4월15일 아침 매일신문 기자가 노중국 계명대 교수 연구실을 찾아와 비석의 명문 탁본을 보여주며 감정을 의뢰했다. 노교수는 깜짝 놀랐다. 신라 6부와 함께 비석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간지(갑진·524년)가 보였다. 판독해보니 이 비석은 524년(법흥왕 11년)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왕·귀족들이 모여 신라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울진 백성들의 집단항쟁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판결문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은 발견자와 소유자에게 각각 250만원씩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충남 태안에서 건져올린 주꾸미가 끌어안고 있던 청자 접시. 이 청자접시의 유물평가액은 12만원에 불과했지만 이 청자가 실마리가 되어 청자를 가득 실은 ‘태안선’이 발굴됐다. 말 그대로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 난파선’이었다. 발견 신고자는 포상금으로 2000만원을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쇠꼬챙이라 밭을 뒤지다가…
봉평리비가 발견된 지 1년이 지난 1989년 3월 31일 오후 웬 20대 청년(이모씨·당시 29세)이 노중국 계명대 교수실을 방문했다. 마침 연구실에는 주보돈 경북대 교수와 김상현 동국대 교수 등도 함께 있었다. 청년은 “내가 옛 비석을 하나 찾았다”면서 비석 실물크기의 종이를 펼쳐보였다. 종이에는 명문 그대로 모사한 글씨가 담겨 있었다. 교수들은 깜짝 놀랐다. ‘사라(斯羅·신라)’와 ‘촌주(村主)’,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도사(道使)’ 등 신라시대 용어들이 보였다. 척 보아도 국보급 신라고비였다. 교수들은 발견장소와 발견 경위 등을 묻고는 “작년(1988년) 봉평비 발견자에게도 보상금 500만원이 나왔다”고 소개하면서 “빨리 당국에 신고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청년은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비문 모사품을 싸들고 나갔다. 청년은 30분 후 “비의 발견장소가 영천에서 안강 사이”라고 전화로 알려왔다.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를 실마리로 본격발굴이 시작되어 켜켜이 쌓아놓은 청자꾸러미가 태안선에서 인양됐다.|문화재청 제공
애가 탄 교수들은 영천~안강~포항으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각 마을을 돌며 비석을 찾았다. 심지어는 영천~안강 사이 각 마을에서 긴급임시반상회까지 열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이 청년은 노중국 교수 연구실을 찾기 전에 이미 원로학자인 심재완 영남대 명예교수에게 판독을 의뢰해 놓은 뒤였던 것이다. 심교수는 주위 교수들과 1차 판독 한 뒤에 언론에 신라고비의 발견사실을 공개했다.
청년은 어떻게 이 비석을 발견했을까. 평소 역사 및 고고학에 관심이 많던 청년(영일군 냉수2리)은 1년전 봉평리비의 발견소식을 듣고 예전에 할아버지가 비석을 묻어두었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라 자기 집 밭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1989년 3월 어느날 쇠꼬챙이로 밭을 이리저리 파던 청년은 밭 가장자리에 박혀있던 돌 하나를 발견했다. 청년의 짐작이 맞았다. 땅 표면에서 15㎝ 정도만 노출된 돌에는 뭔가 글자 같은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청년은 이 비석을 ‘끙끙’ 거리며 리어카로 운반한 뒤 자기집 감나무 아래로 옮겨놓았다. 이것이 포항(영일) 냉수리비이다. 봉평비(524년)보다 21년 빠른 503년(지증왕 2년) 조성된 비석이다. 비석은 재물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에 대한 판결문이다. 문화재관리국은 발견자 집에 3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2007년 충남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가 건져올린 청자 26점이 빌미가 되어 고려시대 곡물운반선인 마도 1·2·3호선이 발굴됐다. 최초 신고자는 3300만원이 넘는 포상금을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가장 오래된 비석이 가장 비산 비석이 되다
그러나 이 두 비석은 20년 후 포항 중성리비 발견의 길을 터준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
2009년 5월11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주민 김헌도씨는 자기 집 앞에서 한창이던 도로개설공사 현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김씨의 눈에 걸린 것은 며칠전부터 공사현장에서 눈에 띈 자연석이었다. 크고 평평한 돌이라 화분받침대로 제격이라 여기고 그 무거운 돌을 낑낑 대며 아파트(일성빌라) 담벼락 아래로 일단 옮겨놓았다. 다음날(12일) 새벽에 내린 비 때문에 붙어있던 흙이 씻겨나가자 돌 표면에서 뭔가 낙서 같은 것이 보였다. 옛날 비석임이 틀림없었다. 김헌도씨 등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김씨 마당에서 비석을 감싸고 있던 담요를 들춰내자 영롱한 햇빛을 받은 비에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辛巳)~’라는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전문가들은 “고졸한 글자, 관직의 명칭 등을 감안하면 ‘501년 신사년’이거나 ‘441년 신사년’일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501년이든, 441년이든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고비 가운데 시대가 가장 이른 것이다. 이 비석은 ‘5~6세기 지금의 흥해지역에서 수조권(세금을 거둘 권리)를 둘러싼 분쟁과 중앙정부가 그 분쟁을 판정한 결과를 고지한 판결문’으로 추정된다.
마도 인근해역에서 발굴한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보물 제1783호). |태안해양유물전시관 제공
지금까지 확인된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는 점이 이 유물의 가치를 높였다. 당시 보상금 산정위원회는 이 유물의 가치를 1억원으로 책정하고 그 반인 5000만원을 발견자인 김헌도씨에게 지급했다. 발견지점이 국유지였기 때문에 보상금의 반인 5000만원은 국가소유로 돌어갔다. 이 5000만원은 지금까지 지급된 문화재 발견 보상금 가운데 최고액이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김헌도씨가 발견한 중성리비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석이라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면서 “발견자가 아주 젠틀한 사람이라는 점도 최고액의 보상금을 받는데 일조했다”고 전했다. 포항 중성리비는 국보 318호로 지정됐다.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청자의 가치는 단돈 6만원이지만…
2007년 5월 14일 밤 충남 태안 안흥항 인근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민 김용철씨(당시 58)는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다, 어민들 사이에서 ‘물꿈’은 길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태안 대섬 앞바다로 조업을 나간 김씨는 통발에서 주꾸미 800여 마리를 낚았다. 그런데 그중 한마리가 희한했다. 푸른 빛깔의 접시를 발로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놓으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다음 입구를 자갈로 막아놓는다. 그런데 이 주꾸미는 청자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보상금 외에 받을 수 있는 포상금 기준. 마도 1·2·3호선 발굴의 단초를 마련한 심선택씨도 보상금으로는 두차례에 걸쳐 5만원씩만 받았다. 그러나 심씨 덕분에 건져올린 난파선 3척과 인양유물의 가치는 3억7680만원(1등급)으로 평가됐다. 포상금 1등급 기준대로 계산한 결과 ‘2000만원+(3억7680만원-1억원)×5/100=3384만원’이었다. 심선택씨는 10만원(보상금)과 3384만원(포상금)을 합해 총 3394만원을 받았다.
김씨의 신고를 받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본격발굴에 돌입했고, 2만5000여점의 유물이 든 이른바 ‘태안선’을 찾아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청자선’이었다, 김용철씨야말로 ‘태안선’ 발굴의 단초를 마련한 일등공신이었다.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의 보상규정에 의해 김용철씨는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대접’ 단 1점의 유물평가액은 12만원 뿐이었다. 그것도 김씨의 소유가 아닌 바다에서 발견했기에 국가와 김용철씨가 사이좋게 6만원씩을 나눴다. 그러나 주꾸미 청자를 실마리로 고려청자선을 찾아냈는데 단돈 6만원이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다행히 다른 법이 있었다.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제21조)은 ‘발굴의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는 문화재의 가치와 규모를 고려해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3항)고 규정해놓았다, 따라서 김용철씨는 발견문화재 신고에 따른 보상금 6만원 외에, 포상금을 더 받을 수 있게 됐다.
김용철씨의 신고가 원인이 되어 발굴한 ‘태안선과 유물’의 가치액은 1억원(1등급)으로 평가됐다. 포상규정에 따르면 1등급의 경우 2000만원+(문화재의 평가액-1억원)×(5/100)이다. 이 계산이 적용되어 김용철씨는 보상금 6만원과 포상금 2000만원(2000만원+0)을 받았다. 김용철씨는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대접’ 덕분에 2006만원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김용철씨에게 행운을 안겨준 주꾸미는 곧바로 공판장으로 팔려나갔으니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태안선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청자 퇴화문 두꺼비형 벼루가 보물(제1782호)로 지정됐다.
1992년 경남 함안 아파트공사장에서 신문배달학생이 발견한 말갑옷. 당시 학생은 철조각만 발견했는데 이것을 사학과 출신 신문지국장에게 알렸고, 신문지국장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신고했다. 발견에서 공사중단까지 불과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포크레인 삽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보물이 이들의 순발력 덕분에 살아남았다.|문화재청 제공
■5만원에서 3394만원이 된 사연
주꾸미 청자가 발굴된 지 두 달 여 뒤인 2007년 7월 20일과 27일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 심선택씨가 청자 26점을 인양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곳은 ‘태안선’ 발견지점에서 약 2㎞ 떨어진 섬 앞바다였다. 이번에는 그물에 주꾸미가 아닌 청자가 걸렸다.
역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어졌고, 2009년부터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가 잇달아 인양됐다. 마도 1·2·3호선은 청자가 아닌 곡물운반선이었다. 화물 대부분은 벼와 쌀·콩·메밀·조·피·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 및 메주, 젓갈류 등이었다. 세 난파선에서 화물표인 목간과 죽찰(竹札) 등이 다량 수습되어 선적물의 내용과 침몰연대를 비교적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마도 유물 중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과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 등 두 점이 보물(제1783호·1784호)로 지정됐다.
마도 1·2·3호선 발굴의 단초를 마련한 심선택씨도 보상금으로는 두차례에 걸쳐 5만원씩 총 10만원만 받았다. 심씨가 인양한 26점 중 청자소문대접과 청자음각국당초문완 1점만 국가 귀속되었다.
그러나 심선택씨 덕분에 건져올린 난파선 3척과 인양유물의 가치는 3억7680만원(1등급)으로 평가됐다. 따라서 포상금 규정(1등급)대로 계산하면 ‘2000만원+(2억7680만원×5/100)=3384만원’이었다. 심선택씨는 결국 10만원(보상금)과 3384만원(포상금)을 합해 총 3394만원을 받은 셈이다.
물론 아무리 가치가 높은 유물을 발견 신고하고, 또 발견 덕분에 아무리 엄청난 유물을 건져올리는 결과를 낳았어도 보상금과 포상금의 규모는 1억원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보상금 및 포상급 지급 최고액은 포항 중성리비를 발견한 김헌도씨의 5000만원이었다. 만약 김헌도씨가 자기 소유의 토지나 집에서 중성리비를 발견했다면 보상금 최고한도액(1억원)을 받았을 것이다.
경주 민가에서 발견된 신라 문무왕릉비의 상단 부분. 문무왕릉비는 1817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했다가 실전됐으며, 1961년 경주 동부동 민가에서 비석의 아랫부분만 찾아낸뒤 48년만인 2009년 윗부분이 발견됐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엿장수가 뒤늦게 신고했지만…
물론 보상금 및 포상금과 관련없는 ‘우연한 발견’ 사례도 있다. 관련법이 구비되지 않은 때였거나 발견자가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 해당된다. 1971년 8월 어느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살던 구모씨(당시 67)는 집 담장 밖 배수로 공사를 위해 땅을 파다가 희한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녹 슬고, 흙 묻은 물건들. 하지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얼마 후 마을에 엿장수가 나타나자 구씨는 “때마침 잘 됐다”면서 땅속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파낸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건넸다. 이제 엿장수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엿장수는 생각할수록 찜찜했다.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철물들을 수거하면 그 가운데는 꽤나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들이 우연히 흘러 들어오기도 하지 않는가. 엿장수가 보기에 구씨가 건네준 이 물건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이 물건들이 땅에서 나왔다지 않은가. 엿장수는 결국 전남도청에 이같은 사실을 신고했다.
이 유물들은 최초발견 4개월이 지난 뒤인 12월 말 전문가 감정을 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깜짝 놀랐다. 엿장수가 신고한 청동 잔무늬 거울(정문경·精文鏡) 2점, 팔주령(八珠鈴) 2점, 쌍두령(雙頭鈴)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와 새기개 등 11점 모두 국보급 청동유물이었다.
이듬해(1972년) 11점 모두 ‘화순대곡리 청동기 일괄’이라는 이름으로 국보(제143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 국보유물을 발견한 구씨는 물론이고, 습득사실을 신고한 엿장수도 보상금을 타지 못했다. 발견자인 구씨의 경우 신고없이 엿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 문화재보호법에 저촉됐고, 유물을 신고한 엿장수는 사라져버린 뒤여서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71년 전남 화순 대곡리 민가 배수로 공사 도중 발굴된 청동유물. 발견자는 유물의 가치를 모른채 엿장수에게 넘겼고. 엿장수는 4개월이 지난 뒤 전남도청에 신고했다. 출토된 세형동검(청동검) 3점·청동팔령두 2점·청동쌍령구 2점·청동손칼(청동삭구) 1점·청동도끼(청동공부) 1점·잔무늬거울(청동세문경) 2점 등 모두 11점이 일괄로 국보로 지정됐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우연한 발견의 사례들
1960년 동국대 불교학과 2년생인 이재옥씨는 “집 주변의 비석에서 탁본을 떠보라”는 스승(황수영 동국대교수)의 방학과제에 따라 비암사(충남 연기군 전의면)를 찾았다. 이씨는 비암사 삼층석탑의 3층 지붕에 있는 3점의 검은색 비석 탁본을 떠서 스승에게 제출했다. 이렇게 발견된 것이 국보 제106호인 ‘계유명 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11개월동안 연기군 일대에서만 불상 7기가 확인됐다. 이중 ‘계유명 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와 ‘계유명 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 등 2점이 국보로, ‘기축명아미타불비상’(보물 제367호),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제368호), ‘삼존불비상’(보물 제742호) 등 5점이 보물로 잇달아 지정됐다. 이뿐이 아니다. 1927년 경북 군위에 살고 있던 최두한씨는 마을 앞 돌산 꼭대기 절벽에 틀림없이 부처님이 계실 것이라 믿었다. 최씨는 밧줄을 타고 절벽을 타고 내려갔는데, 과연 절벽 50m 아래의 석굴에서 부처 삼존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국보 제109호인 ‘군위 삼존석굴’이다. 이 석굴은 493년(신라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창건했으며, 경주의 석굴암보다 280여 년 앞선 것이다. 따라서 ‘제2석굴암’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시기로 따지면 제1석굴암이 되는 셈이다.
1907년에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서 한 농부가 무쇠솥 하나를 발견했다. 이 솥 안에 높이 20㎝가 넘는 초기 백제 금동불상이 두 개나 나왔다. 일제강점기라 일본 헌병대가 모두 압수해 갔고 경매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 그 중 국내로 환수된 불상 하나가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이다. 또한 경북 구미 선산읍 고아면 봉한 2동 뒷산 공사도중 국보가 2점이나 발견됐다.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와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 등이다. 이 불상들은 그보다 70여년전 한 농부에 의해 부근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됐다가 몇년 뒤 현재의 장소에 다시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역대 최대보상금(5000만원)을 기록한 포항 중성리비 발견지점.
■“보상금도 포상금도 받지 못했지만…”
최근 5세기 아라가야 시대 무덤(마갑총)에서 확인된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이 보물(제2041호)로 지정했다. 28년 전인 1992년 6월6일 아침 아파트 공사현장을 지나던 신문배달학생(이병춘군)이 발견하고 신문지국장(안삼모씨)이 신고한 유물이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지국장이 평소 “함안은 아라가야 중심지이니 언제 어느 곳에서 유물이 나올 지 모른다. 늘 관심을 두고 지켜보라”고 강조했고, 배달학생이 공사장에서 목격한 철조각을 허투루 보지 않았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공사장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철조각 더미가 아닌가. 한낱 쓰레기로 치부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심상치않은 문화유산으로 여긴 신문배달학생과 지국장의 눈썰미와 열의가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급보를 받고 달려간 당시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박종익 학예연구사가 막 공사를 재개하려던 포크레인을 막아서며 ‘공사중단’ 결정을 통보했다. 단 10분 늦었어도 보물 말갑옷은 포크레인의 삽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었다. 발견에서 신고, 그리고 공사중단까지 불과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발견자(안삼모씨)와 신고자(이병춘씨)은 보상금은 물론이고 포상금도 받지 못했다. 2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밝혀내기는 어려웠다. 다만 발견 당시 발견자와 신고자가 신고한 것은 말갑옷 ‘완제품’이 아니라 파편, 즉 철조각이었기에 법에 따른 ‘보상금’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짙다. 불상 혹은 명문비석처럼 발견 당시부터 완제품이 아니었던 이유가 컸으리라.
물론 ‘주꾸미 청자’ 등이 경우처럼 우연한 발견과 발견을 단서삼아 태안선·마도선 같은 엄청난 유물을 건져 올렸다면 ‘포상금’ 수여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이 발견·신고한 것은 한낱 철조각이었지만 그 철조각이 실마리가 되어 국립기관(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이 완형의 보물(말갑옷)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갑옷 철편을 발견한 1992년 당시엔 ‘포상금 제도’가 없었다.
필자는 이 함안 마갑총 발굴 말갑옷의 보물 지정 소식에 안삼모·이병춘 등 두사람을 수소문해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28년이 지난 지금에도 ‘쿨’ 했다. 발견당시 신문지국장이던 안삼모씨는 “(마갑총 발견은)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당시 신문배달 소년이었던 이병춘씨는 창원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병춘씨는 지난해 5월 경남도지사상 시상식에도 불참했단다. 함안군청 측은 “그 분(이병춘씨)이 시상식에 불참하는 바람에 상장 등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고 전했다. 필자 역시 이병춘씨에게 여차저차하니 ‘이야기 좀 듣고 싶다’는 문자를 남겼지만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우연한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본의 아니게 보상금 및 포상금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찾은 이들에게 보내는 아주 조그만 성의일 뿐이다. 그나마 이런저런 이유로 그런 작은 성의조차 전달할 수 없었던 예가 많았다. 그들이 찾아낸 문화유산 앞에 그들의 이름 석자를 결코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이 기사에서 그들의 실명을 기록해두고 싶다.
안삼모씨의 한마디가 귓전을 때린다. “그땐 급했어요. 정화조 공사 때문에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놓은 상태였으니까 정화조를 묻고 덮어버리면 (말갑옷은) 끝장이었죠. 그래서 서둘렀던 거죠.” 그나저나 1971년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 발견한 청동유물 11점을 당국에 신고한 엿장수는 과연 어디 있을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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