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정조)을 모시던 화원 가운데 묘수는 ‘그대’와 ‘늙은 단원’을 꼽았더니…‘단원’은 보이지 않고 ‘도인’만 화실에 퍼질러 앉아 여전히 세상에 있네”. 문인·화가·서예가인 신위(1769~1845)가 시집(<경수당전고>)에서 ‘묘수 화원’으로 꼽은 두 사람 중 ‘단원’은 두말할 것없이 김홍도(1745~1806?)를 가리킨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스승인 심사정의 ‘촉잔도’를 모티브로 삼았다. 그러나 이 그림은 아슬아슬한 험준한 산악길을 통해 촉지방으로 피란가는 행렬도, 속세를 피한 은자들의이상향인 무릉도원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삶의 터전에서 저마다의 임무에 전념하는 현실속 이상향을 그렸다는 평을 듣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는 조선의 ‘만찢남’ 

그도 그럴 것이 단원 김홍도는 18~19세기 조선의 ‘문화 아이콘’이자 ‘시대정신’이었다. “그림 한 장을 낼 때마다 곧 임금(정조)의 눈에 들었고”(조희룡의 <호산외기>), “속화를 그리면 사람들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쳤다”(강세황의 <단원기>)고 했다. 게다가 “눈매가 맑고 훤칠하며 용모가 빼어나서 세속 사람 같지 않아서 세인들이 신선(神仙)이라 했다”(강세황·조희룡·홍신유)고 할 정도였다. “꽃피고 달밝은 밤이면 거문고와 젓대(대금)를 연주했고, 슬피 노래하는 마음이 들 때면 북받쳐 몇줄기 눈물을 흘렸다”(강세황)는 센티멘탈리스트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김홍도는 시쳇말로 만화를 찢고 나올 만큼의 완벽한 ‘만찢남’이 아니었던가.

한번에 펼쳐보이기도 힘든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좌우를 잘라 나눠보았다. 이인문은 2m짜리 비단을 5폭 이어붙여 이 대작을 완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데 신위의 언급처럼 그런 단원과 쌍벽을 이룬 묘수이며, ‘퍼질러 앉아’ 그림을 그리던 ‘그대’와 ‘도인’은 누구인가. 바로 단원 김홍도와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이자 ‘평생지기’였던 이인문(1745~?)이었다. 무엇보다 단원은 ‘허정노수도’에서 “이인문과 이유신(여항문인이자 화가)이 나란히 서있는 아래서 지극히 주제넘은 일”이라고 자평했다. ‘겸손한 단원’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그만큼 평생의 벗인 이인문을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일게다. 

단원 김홍도의 동갑내기 친구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펼쳐보인 모습.  8m가 넘는 대작이다. 겸재 정선류의 진경산수화가 아니어서 저평가됐다. 그러나 이 그림 속에는 18~19세기 조선 백성들의 다양한 ‘삶의 현장’이 그려져있다. 단순한 산수화가 아니라 단원 김홍도와는 또다른  맛의 풍속화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와 이인문의 ‘동갑내기 콜라보’

‘소띠 동갑내기’ 두 화가의 관계는 각별했다. 일찍이 도화서에 들어간 동갑내기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같은 같은 모임에 참여하여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린 뒤 서로의 작품에 글을 쓰기도 했다. 요즘 말로 ‘콜라보’다.

대표적인 예로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는 ‘이인문이 증명하다’(李文郁證)는 내용과 함께 시 한편이 실려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꽃밭 아래서 천가지 목소리로 생황을 부나(佳人花底簧千舌)’라고 시작되는 시이다. 

강산무진도에 등장하는 또다른 마을 모습. 사람들이 모여앉아 쉬고 있거나 부지런히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인문이 김홍도의 집에서 그린 작품들도 있다. 이중 한 점이 ‘수간모옥도(數間茅屋圖)’이다. 그림에는 ‘고송유수관도인이 단원 집에서 그려 백하신동에게 주다(古松流水館道人寫檀園榻贈白下申童)’는 낙관이 있다. 또 이인문과 김홍도가 1791년(정조 15년) 중인 출신 시인인 천수경(?~1818)의 인왕산 집 이름(송석원)을 따서 결성한 시모임(‘송석원시사’)를 주제로 그린 그림 2점이 있다. 낮에 열린 시모임, 즉 시회(詩會)는 이인문(‘송석원시회도’)이, 밤에 열린 향연은 김홍도(‘송석원시사야연도’)가 각각 그렸다. ‘낮’은 이인문, ‘밤’은 김홍도가 그린 ‘콜라보’라 할 수 있다. 또 이인문과 김홍도가 글씨와 그림을 나눠 맡은 ‘송하한담도’(1805년)도 있다.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가 글(오언율시)을 쓴 합작품이다. ‘노송 아래 폭포를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는 두 인물’을 그린 이인문의 그림에 ‘…숲에서 우연히 노인을 만나(偶然値林수) 담소 나누느라 돌아갈 줄 모른다(談笑無還期)’는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붙어있다. 

강산무진도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힘써 일하지 않고 왕래도 하지 않은 중국풍의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인문은 ‘신필(神筆)’

김홍도만큼 ‘만찢남’은 아니지만 이인문도 ‘도인’ 혹은 ‘신필(神筆)’ 소리를 들은 천재였다.

우선 김홍도를 총애했던 정조 임금은 이인문에게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예컨대 1796년(정조 20년) 차비대령화원(국왕 직속으로 특채된 궁중화가)을 대상으로 두 차례 시험(녹취재)이 시행됐다. 

녹취재는 차비대령화원을 대상으로 사과(정6품) 및 사정(정7품) 직급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치르는 특별시험이었다. 그런데 당시 채점을 맡은 규장각 관리들은 이인문의 성적을 7명 중 꼴찌, 9명 중 4등으로 각각 매겼다. 

‘강산무진도’에 등장하는 강변 포구마을의 풍경. 물자를 쉼없이 운반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하지만 정조 임금의 재채점 결과는 달랐다. 정조는 규장각 관리들이 매긴 성적을 무시하고 두 번 모두 이인문을 1등으로 올려놓았다(<내각일기> 1796년 6월11일). 

그만큼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인문은 1784년(정조 8년)부터 시행된 녹취재에서 25번이나 특별녹봉을 받았다. 이인문의 성적표에 기재된 평가는 ‘격조(格調)’와 ‘사의(寫意·외형보다는 내재적인 정신을 표현)’, ‘초범(超凡·비범)’이었다. 문체반정을 추구한 정조의 입맛에 꼭맞는 화가였다는 뜻이다.

조운선 같은 배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문인 학자인 성해응(1760~1839)은 “이인문의 이름은 김홍도와 같았다”면서 두 동갑내기를 같은 반열 위에 놓았다. 특히 이인문을 두고는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연경당전집>)고 했다. 문인인 남공철(1760~1840)은 “이인문의 두 눈동자 형형한 빛은 늙어도 흐려지지 않았고…올곶은 뼈 굳게하고 자신을 능히 지켜왔다”면서 “시정의 속된 무리를 소인배로 여기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남공철은 나아가 자기 집에 걸어놓은 이인문의 소나무 그림을 ‘신필(神筆)’이라 했다(<금릉집>). 문인인 유재건(1793~1880) 역시 “언젠가 이공(이인문)이 소나무 그리는 것을 보았는데 칠십노인의 필치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신필(神筆)이라 했다”(<이향견문록>)고 전했다. 

세부 인물들의 모습들. 가마를 타거나 짐을 지거나 모여앉아 쉬고있거나 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에 비해 홀대받은 이유

그런데 이인문에 대한 평가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바로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산수화에 능한 신필’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산수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한 폭의 조각 종이일망정 깊고 먼 천리의 기세가 있어 찬탄을 자아낸다”(유재건)는 평부터 “정선(1676~1759)과 심사정(1707~1769) 이후 산수를 그리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고송유수관도인(이인문의 호)의 그 이름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마성린·1727~1798)라는 평까지…. 바로 이 대목이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이인문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은 이유가 될 것이다. 

다양한 삶의 현장을 그린 ‘강산무진도’. 단순한 산수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는 보는 이들이 손뼉을 치며 열광할만큼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그렸다. 반면 이인문은 필묵의 기량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이고 정형화한 산수화 분야에서 ‘신필(神筆)’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18~19세기 조선의 민낯을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표현한 김홍도의 그늘에 가렸고, 한국적인 미감이 부족하고 개성도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평가에서 보듯 이인문이 18~19세기 조선 화단이 요구한 그림의 주제와 소재를 다루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같은 주제를 두고 ‘낮의 시모임’과 ‘밤의 향연’을 따로 그린 ‘송석원시회도’(이인문)와 ‘송석원시사야연도’(김홍도)를 보면 두 화가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이인문은 시모임보다는 배경산수 위주로, 김홍도는 시모임을 중심으로 부각시켰다. 

어부가 그물을 끌어올리고 강을 통해 운반된 물품들을 실어나르는 강변 포구의 모습이다. 연구자들은 18세기초 대동법의 확대실시로 한강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물류가 급증했고, 그에따라 서울에 다양한 물화가 넘쳐났다는 점에 착안해서 ‘강산무진도’가 18~19세기 한강변을 그린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강산무진도의 모티브는 ‘촉도난’

그런 이인문에게 회심의 역작이 있었으니 바로 ‘강산무진도’이다. 강산무진도는 길이 8m가 넘는 두루마리 대작(세로 43.8㎝×856㎝)이다. 2m짜리 비단 5폭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다. 파노라마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산수표현과 정교한 세부묘사가 일관된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조선을 대표하는 대작이라는 평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산수의 파노라마’라는 이 작품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다. 앞서도 언급했듯 조선 강토를 그린 진경산수화도 아니고, 조선의 실상을 묘사한 김홍도나 신윤복(1758~?), 김득신(1754~1822) 등의 풍속화도 아니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산무진도’는 이인문의 스승으로 알려진 현재 심사정(1707~1769)의 ‘촉잔도’(1768년)를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강산무진도’에 표현된 도르래. 낭떠러지 아래 위에서 물건을 실어나르는 삶의 현장이다. 도드래 아래와 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역동적인 삶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촉’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 싸여 있기에 촉 지방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낭떠러지 사이에 다리를 놓듯 아슬아슬한 ‘잔도(棧道·하늘사다리길)’를 놓고 힘겹게 왕래했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은 그 유명한 ‘촉도난(蜀道難)’에서 “촉 가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蜀道之難難於靑天)”고 탄식했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촉나라로 몸을 피한 당나라 현종(재위 712~755)의 피란길을 그린 ‘명황행촉도’를 보면 현종 일행이 병풍처럼 펼쳐진 첨봉들이 둘러쌓인 깊숙한 산길을 지난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 등장하는 길들. ‘하늘가는 길보다 험준하다’는 중국의 촉지방 가는 잔도(하늘사다리 길) 같은 길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촉 지방으로 가는 아슬아슬한 잔도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길이 상대적으로 넓고 편안한 느낌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보면 ‘촉잔도’와 구성 모티브가 흡사하다. 넓은 평원에서 시작하다가 솟아오른 절벽이 보이는 전반부와 험준한 산세가 광활하게 그려진 중반부, 그리고 다시 잔잔한 평원으로 연결되는 구성이 그렇다. 

또한 두 그림 모두에서 사람이 줄로 잡아당겨 끄는 협선이 보인다. 협선은 중국 양쯔강(揚子江) 중상류와 쓰촨 지방에 걸쳐 형성된 협곡인 싼샤(三峽)로 올라가는 배다. 또 ‘강산무진도’에서 보이는 많은 길은 ‘촉도난’의 잔도를 연상케 한다. 17~18세기 중국의 산수판화집에는 잔도가 쓰촨성을 표현하는데 활용됐다. 또한 심사정의 ‘촉도난’에서 보이는 도르래가 ‘강산무진도’에도 등장한다. 게다가 그림 속 다층누각의 건물은 무대가 조선이 아닌 중국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러니 ‘강산무진도’는 작가(이인문)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중국 촉나라 피난길을 그린 관념산수화 쯤으로 이해됐다.

강산무진도에서 보이는 중국적 요소.

■산수화인가 풍속화인가

하지만 이 ‘강산무진도’에 천착한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라고 한다. 중국풍의 단순한 관념산수화가 아닐 뿐 아니라 김홍도와는 완전히 다른 맛의 풍속화가 그림 전체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무슨 소리인가. ‘강산무진도’는 심사정의 ‘촉잔도’와 완전히 다르다. 우선 ‘촉잔도’에 표현되는 황량하고 험준한 산세가 ‘강산무진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잔도를 표현했다지만 길이 매우 잘 닦여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길 위로 분주하게 사람이 이동한다. 이곳저곳의 마을에는 사람들과 나귀들로 북적댄다. 어떤 인물은 집안에서 친구와 담소를 나눈다. 또 어떤 이는 한가로운 때를 보낸다. 짐을 부지런히 나르는 짐꾼들도 이채롭다. 긴 나무막대기의 양쪽에 짐을 매달아 어깨로 나르거나 당나귀 혹은 수레를 이용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짐을 잠시 두고 마을 주막에 걸터앉아 밥을 먹는다.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과 당나귀, 말이 북적댄다. 

이인문의 스승인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 일부. 이 그림 역시 가로 무려 818㎝, 세로 58㎝의 대작이다.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 선생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너덜너덜한 ‘촉잔도권’을 5000원에 수집했고, 다시 6000원을 더들여 수리·표구했다. 이 ‘촉잔도’는 정형 산수화이다.|간송미술관 소장

그 뿐인가. 강에는 조운선과 같은 커다란 배가 떠다닌다. 그림에 등장하는 배는 총 100척이 넘는다. 이 배들이 마을 포구에 도착하자 짐꾼들이 도착한 짐을 부지런히 나른다. 또 ‘촉잔도’의 도르래와 ‘강산무진도’의 도르래는 조금 다르다. ‘촉잔도’ 도르래는 사람과 짐을 모두 태우고 있고 줄을 한쪽으로만 잡아당긴다. 하지만 ‘강산무진도’의 도르래는 짐만 나르는 운송도구다. 도르래 아래 위에서 줄을 잡아당긴다, 또한 도르래를 중심으로 절벽 위 아래에 마을이 보인다. 도르래 이용객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고, 마을은 당나귀로 북적댄다. 물자가 쌍방향으로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다. 이렇게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담고 있다. 산 중턱까지 집들이 있고, 멀리 산사가 보이며, 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여있고, 어촌마을이 있고 나루터에 사람이 모여있으며, 배가 자유로이 다니고, 물레방아까지 보이는…. 영락없는 풍속화의 모습이다.

1791년(정조 15년) 중인 출신 시인인 천수경(?~1818)의 인왕산 집 이름(송석원)을 따서 결성한 시모임(‘송석원시사’)를 주제로 그린 이 이인문의 ‘송석원시회도’는 ‘낮’의 시모임(詩會) 장면이다. 밤에 펼쳐진 향연(야연·夜宴)은 김홍도가 그렸다. 김홍도의 그림명은 ‘송석원시사야연도’이다. 같은 주제인데 이인문은 산수화처럼, 김홍도는 풍속화처럼 그렸다.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소국과민’을 지향하는 중국 산수화 아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도연명(465?~427?)이 꿈꿨던 이상향, 즉 무릉도원을 그린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매우 어색하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그려진 무릉도원은 동아시아 유토피아의 전형적인 이미지다.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 철저히 분리되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간이다. 정통의 관념 산수화가 추구하는 산수는 바로 그러한 현실 너머의 세상이다. 고기잡이에는 뜻이 없는 낚시꾼과 나무꾼, 고매한 스님과 시인이 유유자적 거닐거나 책을 펼쳐놓고 있다. 바로 노자가 꿈꾸던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사회이다. 

즉 노자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어야 하며(小國寡民) 문명의 이기가 있어도 쓰지 않고(使有什伯之器而不用) 백성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멀리 옮겨 살지 않도록 하며(使民重死而不遠徙)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갈 곳이 없는(雖有舟輿 無所乘之)…사회’를 꿈꿨다.(<노자> 80장) 노자가 꿈꾼 사회는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지 않고 이웃나라와 가까워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말 탄 선비가 버드나무 위에서 노니는 꾀꼬리 한쌍에 넋을 잃는 모습을 그린 마상청앵도’에는 ‘이인문이 증명하다’(李文郁證)는 내용과 함께 시 한편이 실려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꽃밭 아래서 천가지 목소리로 생황을 부나(佳人花底簧千舌)’라고 시작되는 시이다.|간송미술관 소장

하지만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속 공간은 단선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가는 개방적 구조이다. 또 다양한 신분·직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강과 산을 넘어 움직이며 교역하는 역동적인 분위기는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노자와 배치된다. 게다가 문명의 상징인 다층건물과 인공의 수레바퀴, 도르래 역시 ‘문명의 이기는 쓰지 않는다’는 노자식 이상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중흥군주 정조시대상인가 

그래서 연구자 중에는 ‘강산무진도’가 조선의 중흥기인 정조 연간, 즉 18~19세기 흥청대는 서울, 그것도 한강 모습을 그린 ‘풍속화’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8세기 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장이 발달했고,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수공업이 활발해졌다. 대동법 시행으로 바닷길과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급증했다.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된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넘쳐났고, 저잣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중흥군주인 정조는 그런 ‘번창한 도시’ 서울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1792년(정조 16년) 정조는 한양(서울)의 저잣거리 풍물을 그린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완성한 기념으로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 한편씩 제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박제가(1750~1805)가 지어올린 ‘성시전도시’를 보라.

“놀고 먹는 백성 없이 집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 인(仁)의 성(城)과, 의(義)의 시장에 나라를 세워 번성함과 화려함만 믿지 않는다.”

마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가 표현한 다양한 인물들의 생활상 같다. 정조 임금이 누구인가. 1794년 규장각 검교직각 남공철(1760~1840)과의 대화에서 “과인의 정치가 요순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심을 잃지는 않은 것 같다”고 은근 자랑한 임금이다. 말하자면 ‘내가 펼친 정치, 태평성대의 상징인 요순 시대에 근접하지 않냐’는 자부심을 피력한 것이다. 정조는 “우리나라 사방 6000리에 산도, 바다도 있어 수레와 배로 요동이나 심양, 중국이나 왜국까지 갈 수 있다”(<홍재전서> ‘도리총고서’)면서 예의 진취적인 기상을 펼쳐보인 바 있다.

이인문이 그리고 김홍도가 글을 쓴 ‘송하한담도’(1805년). ‘노송 아래 폭포를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는 두 인물’을 그린 이인문의 그림에 ‘…숲에서 우연히 노인을 만나(偶然値林수) 담소 나누느라 돌아갈 줄 모른다(談笑無還期)’는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붙어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강산무진도는 풍속화이다

그런 배경지식을 갖고 ‘강산무진도’를 뜯어보게되면 ‘산수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그림의 ‘가는 길’은 중국의 촉 혹은 무릉도원이 아니라, 경제활성화 덕분에 성시를 이루던 ‘서울 가는 길’의 한강변이라는 느낌이 든다. 현실과 동떨어진 중국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선의 이상향을 그렸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언급처럼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속세를 떠난 이상향의 산수화가 아니라 번영하는 인간의 산수화’이며, 혹은 ‘강산은 산수화지만 인간이 주인공인 산수화’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림에 과문한 필자가 감히 말하고 싶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산수화의 범주에 넣지 말고, 18~19세기 한강변을 살아간 조선 백성들의 삶을 그린 풍속화라 하면 인될까. 동갑내기인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하고는 다른 맛의…. 

 

■8m 넘는 대작을 펼쳐보인다

이 강산무진도(보물 제2020호)는 국립중앙박물관이 7월21일부터 9월27일까지 개최하는 특별전(‘새 보물 납시었네-신국보보물전 2017~2019’)에서 소개된다. 당초 오는 23일 개막예정이었지만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일정을 한달 가까이 늦췄다. 2017~2019년 국보·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3건을 소개하는 이 특별전에는 ‘강산무진도’를 비롯,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4호·2019년),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국보 제327호·2018년), 신윤복의 ‘미인도’(보물 제1973호·2018년) 등이 출품된다.

한 점 한 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지만 필자는 그중에서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인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 가려있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콕 찍어 공부해봤다. 강경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특별전에서 8m 넘는 대작인 ‘강산무진도’를 완전히 펼쳐 전시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산수화인듯, 풍속화인듯 조선의 18~19세기를 그린 산수인물장관의 파노라마를 찬찬히 뜯어봐야 하겠기에…. (이 기사는 고연희·김소영·김정임·김미숙 선생 등의 논문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 민길홍 선생의 글과 국립중앙박물관 이수경·강경남 선생의 도움말과 자료제공도 기사 작성에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정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2016

고연희, ‘강산무진(江山無盡), 조선이 그린 유토피아’, <한국문화연구> 24권,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2013

김소영,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연구’, 명지대 박사논문, 2015

안대회, ‘성시전도시와 18세기 서울의 풍경’, <고전연구> 제35권 35호, 한국고전문학회, 2009

강관식, ‘조선 후기 화원 회화의 변모와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 제도’, <미술사학> 17호, 미술사학연구회, 2002

김미숙, ‘18세기 조선시대 화원연구’, 공주대 석사논문, 2015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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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20.06.18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방아가 그려진 시점에서 조선의 풍속은 아니에요.조선에는 물레 방아가 없었기 때문이다.

  2. Abe 2020.06.18 17: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거짓으로 조선의 역사를 왜곡 폄훼하네...

    검색만하면 다 나오는 사실을 단지 우리역사 폄하의 목적으로 생각나는대로 거짓을 지껄이는구나,,, 천박한 왜구 kimduhan

    • kimduhan 2020.06.18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차가 조선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

      우리나라는 삼한시대부터 보나 제언 등의 관개 시설을 발전시켜 이용했기 때문에 수차는 평소에 그리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수차 제작에 쓰이는 목재가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았다는 점도 수차 보급이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에 속한다.

      둘째, 수차는 제작해서 설치하고 작동시키기까지 그 효과에 비해 경비와 수고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먹고살기에 급급한 백성들에게 관에서 주도하는 수차의 보급은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

      셋째, 가뭄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가 수차의 제작 보급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닥치면 일단 기우제부터 먼저 준비하거나 음양 사상에 의존하는 등의 전통적인 자연관이 강했다. 여기에다 기술을 천시하고, 타국의 기술을 들여오는 데 앞장서는 사람에 대한 거부 의식 등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장치 등 정교한 수차의 기술개발에서 조선의 기술자들이 실패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88%98%ec%b0%a8%ea%b0%80-%ec%a1%b0%ec%84%a0%ec%97%90%ec%84%9c-%eb%bf%8c%eb%a6%ac%eb%82%b4%eb%a6%ac%ec%a7%80-%eb%aa%bb%ed%95%9c-%ea%b9%8c%eb%8b%ad/?cat=28



      조선왕조는 세종 말엽까지 여러 가지 방법을 다하여 통차를 크게 권장하였으나, 그 노력에 비하여 농민들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농민들의 가난 때문에 새로운 수차를 만들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다른 이유는 우리 나라의 지세와 자연조건으로 볼 때 대체로 천수(天水)로써 만족할 수 있는 때가 많았으며, 가뭄이 심할 때에는 수차를 돌릴만한 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쓸모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715

    • Abe 2020.06.18 2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신 이상자인거요 아니면 기억력 3초 붕어 아이큐 인거요?
      없었대매?

      아무튼 가지가지하는 왜국 극우 군국주의 혐한 관종 이구만.... 쯧쯧.....

    • kimduhan 2020.06.18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론이 아니라 매도로 갚다.매도어의 종류는 한국어는 풍부하군요.

    • Abe 2020.06.18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경우엔 매도가 아니고 사실 적시 이지요...

      조선엔 물레방아 없었다고 사기 치더니,
      인용한 글들엔 있었다고 나오네...
      그러니 당연히 정신 상태 감정이 필요한거지...

      싫어도 사실을 직시하기를...

    • kimduhan 2020.06.18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있어 있어. 거의 보급하지 않았을 뿐.

    • Abe 2020.06.20 1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에서는 수차를 제분용 관개용에 따라 다른 명칭을 붙였다. 곡식을 가는 맷돌로 쓰일 때에는 수연(水碾), 수애(水磑), 수마(水磨), 수롱(水礱) 등으로 불렀고, 곡식을 빻는 방아로 쓰일 때는 수대(水碓) 또는 기대(機碓)라고 불렀다. 한반도에서 수차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5, 6세기경부터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근거는 아래에도 나와 있는 610년에 고구려의 중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그해에 연자 맷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kimduhan 2020.06.20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에서 수차가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환경이 수차에 적합지 않다는 걸 가장 큰 이유로 든다. # 조선이 기술이 있었음에도 수차를 보급시키지 못한 이유 한반도는 강수량 대부분이 장마철에 밀집해 있는 만큼, 수차를 돌릴만한 물이 부족한 상황이 자주 있다는 것. 거기다 겨울에는 물이 얼어버리는지라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당장 실록에 "토양(土壤)의 성분이 푸석하여 물을 받을 수 없는 까닭에 수차의 법은 마침내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천수답이나 보, 제언 등 다른 방법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비싼데다 사용하기도 어려운 수차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이를 두고 원동기형 수차와 달리 용골차는 계절에 상관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애초에 조선이 보급하려고 했던 건 물살로 돌아가는 상,하사식 수차가 아니라 그냥 페달을 발로 밟아서 물을 위로 퍼올리는 족답식 양수기고 원래 조선에서 쓰던 용두레의 상위호환이라는 것이다. 정말 하상계수 문제로 수차를 못썼으면 용두레도 못써야했으며 그냥 물있는 곳에 박아놓고 밟아돌리는 물건에 무슨 기후탓을 하고있냐는 것. 용두레 삼각대랑 용골차, 후미구루마 지지대 설치하는 난이도는 별반 차이가 없으며 괜히 조선시대 재야학자부터 임금까지 수세기에 걸쳐 수차 보급 방안을 고심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보급 시도는 계속 있었다. 잠곡 김육이나 연암 박지원도 중국에서 들여온 수차를 보급했다는 것이 버젓히 업적으로 나와있고, 특히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 때 수차의 보급에 적극 나섰다. 관개용 수차는 빗물과 도랑에만 의존하는 천수답과 기존 관개시설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들의 대체용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이, 기존 관개시설과 수차의 이용이 병행되지 못하는 문제점에 대해 조선 후기 재야학자인 반계 유형원은 자신의 저서인 우서에서 '우리나라 농민들은 수차의 이용을 알지 못하여 논 아래 도랑의 물이 한 길만 내려가도 이를 굽어보기만 할 뿐 감히 끌어올리지를 못한다'라며 한탄하기도 했다.참고 그러나 보급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순조 시대가 되면 자원이 풍부한 강원도와 경상도 함양, 창원에서는 수차가 널리 보급되었다. 남도형과 북도형의 수차엔 차이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https://namu.mirror.wiki/d/%EC%88%98%EC%B0%A8

    • Abe 2020.06.21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 조증 울증이 왔다리 갔다리...
      물래방아 없다... 있다 왔다리 갔다리...

    • kimduhan 2020.06.21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댓글은 이해 못하네요.외국인에게도 알기 쉬운 한국어로 부탁 드립니다.

    • Abe 2020.06.22 2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외국인과 혐한 극우 군국주의자 왜구는 다르지요..

    • kimduhan 2020.06.23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한국을 좋아해서 혐한이 아닌데요.한국의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민족주의와 이에 따른 반일 사상이 싫어할 뿐입니다.

    • Abe 2020.06.28 16: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젠 미저리의 반론까지 !!!

      사자가 암소를 너무 좋아해서 고기만 먹였대요...
      ㅋㅋㅋ..
      파시즘적 민족주의가 극에 달한 나라가 왜국인데
      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혐한 서적이 즐비한 천박한 민족 차별주의가 만연한 곳이 왜국 아닌가?
      타민족 배척시위가 백주 대낮에 일어나는 곳이
      왜국이잖아요...

      정신 차려요... 왜구 아자씨 !!!

  3. kimduhan 2020.06.18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성시전도"은 한양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다.중국풍의 이상적인 거리를 그린 것이다.이"강산 무진 그림"도 물론 조선에 없던 수차가 있는 중국풍의 공상의 풍경이어서 실제 조선과는 전혀 다르다.김 폰도가 위대한 것은 이런 공상이 아니라 실제 조선 서민을 그린 것이다.

    • Abe 2020.06.18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식함의 소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인간의 인식체계로 볼수 없는 모습을 재구성하는 거장들의 작품은 모르지요?

      사진같은 그림만 이해할 수 있는 딱 그 수준...

    • kimduhan 2020.06.18 2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공상의 마을이나 풍경을 그리는 예술은 있고,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그러나 이 칼럼에서는 "공상이 아닌 실제 조선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Abe 2020.06.18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의 독해 능력은 확실히 문제가 많다

    • kimduhan 2020.06.18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산수화의 범주에 넣지 말고, 18~19세기 한강변을 살아간 조선 백성들의 삶을 그린 풍속화’

    • Abe 2020.06.21 1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한글 이해가 제대로 않되는 군...

    • kimduhan 2020.06.21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18세기~19세기 한강 부근에서 살았던 조선인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라고 읽었는데 잘못되고 있습니까?

  4. kimduhan 2020.06.18 1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산무진도’이라고 한글만으로 쓰고 있지만 뜻을 알것일까?

    • Abe 2020.06.18 2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구글이나 네이버에 치면 나옴...
      옛날 그림 제목뜻 알려고 그 원시적인 표의문자들을 암기할 필요없음.

    • kimduhan 2020.06.18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글만 보이면 의미를 알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인터넷 검색은 아무도 못 들었어요.

    • Abe 2020.06.18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의 음흉한 노림수를 뻔히 아니까...
      선빵 때린겨.... 우쭈쭈 아팠어요??..

  5. 완화삼 2020.06.19 0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아닌 왕유의 시 중
    종남별업의 마지막 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