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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 창고(오구라)'는 누구?

“장관님, 오쿠라(大倉)가 아니라 오구라(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성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전 경남 출토 금관’. 신라의 전형적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의 특성인 ‘초화(草花)’ 형 금관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오’라고 해서 ‘대창(大倉)’을 ‘오오쿠라’로 읽었지만 지금은 표기법이 바뀌어 그냥 ‘오쿠라’라 한다. 그래서 원래 ‘오구라’로 읽는 ‘소창(小倉)’과 헷갈리게 됐다. 얼핏보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발언 같다. 하지만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은 “아마도 문화부 장관이 오구라를 오쿠라로 잘못 언급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부는 “장관 발언을 보도자료로 옮길 때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장관이 잘못 발언했든 아니든 헷갈리기 십상이다.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큰 창고’와 ‘작은 창고’ 

그러나 솔직히 말해 ‘대창’이든 ‘소창’이든, ‘오쿠라’든 ‘오구라’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다. 둘 다 일제강점기에 귀중한 한국문화재를 가져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이다.

그러고보면 오쿠라의 ‘대창(大倉)’은 큰 창고, 오구라의 ‘소창(小倉)’은 작은 창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큰 창고’인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의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인가. 딴은 그렇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청·일 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된 인물이다. 구한말 부산에 진출,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한 오쿠라는 엄청난 양의 한국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특히 일제가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답시고 철거한 경복궁 자선당(세자의 침전) 건물을 통째로 뜯어갔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경기 이천 향교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온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도 가져갔다. 오쿠라는 그렇게 반출한 자선당 건물과 석탑, 유물 등으로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1917년 개관)을 꾸몄다. 오쿠라슈코칸의 조선실에 진열된 미술품이 3692점이나 됐고 서적도 1만5600여권에 이르렀다.   

하지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자선당을 비롯한 슈코칸의 진열관이 모두 소실되었다. 오쿠라가 모았던 고려자기 등이 모두 불에 탔고, 석조물(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만이 남았다. 1996년 겨우 살아남은 자선당의 유구만이 반환되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쓸어간 남의 나라 문화재를 화재로 잃어버린 오쿠라의 죄상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찾아오고 싶어도 찾아올 수 없게 만들어버린 죄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작은 창고’의 묻지마 싹쓸이 수집

그렇다면 ‘작은 창고’(小倉)인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어떤가. 그 역시도 어마어마한 수의 한국문화재를 쓸어간, 악명이 높은 자이다. 오구라는 일본에서 아버지의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한 뒤 ‘한국행’을 택했다. 당시 ‘한국행’을 택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불량도항자들이었다. 일본에서 발붙일 곳이 없던 자들이 한국행 배를 탄 것이다.  

한국으로 건너온 오구라는 막 개발붐이 일어난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다. 사업수완을 발휘한 오구라는 곧 전국의 전기사업을 통합 경영하면서 재력가로 급부상했다. 그렇게 떼돈을 모은 오구라가 눈길을 돌린 분야는 바로 문화재 수집이었다.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오구라는 “일본 고대사 중에 조선의 발굴 및 고미술품에 의해 비로소 분명하게 밝혀지는 부분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문화재 수집 동기를 밝혔다.

실제로 오구라가 한국문화재 수집을 위해 2000만엔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당대의 수장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투자한 돈의 10배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있다. 

아무리 일본인이지만 꼬박꼬박 제 돈 주고 문화재를 수집한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그것을 팔아넘긴 한국인들의 잘못이 더 큰 게 아닐까. 그러나 오구라의 행적을 추적하면 절대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우선 오구라는 특정분야 문화재를 집중 구입한 수집가들과 달랐다. 장르불문, 출처불문으로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묻지마 싹쓸이’ 수집이었다. 불교문화재와 도자기, 목칠공예품, 회화, 전적, 서예, 복식까지…. 

그렇게 모은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이 이른바 ‘오구라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거액으로 도굴품 마구 사들인 죄 

물론 오구라가 도굴을 주도했거나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구라는 도굴범들의 장물을 너무도 후한 값을 치르고 긁어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오구라는 경산의 한 농부가 들고온 ‘청자 죽작문주전자’(대나무와 참새 그린 주전자)를 5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20칸짜리 기와집 가격이 4000원 정도였다니 농부가 받은 돈은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원은 족히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농부가 고향에 가서 떠벌리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에 체포됐다가 오구라와의 대질 끝에 풀려났다는 일화가 회자됐다.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니 모든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이 오구라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고령의 가야 고분 300여 기를 파헤친 악명높은 도굴꾼은 장물 전부를 오구라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때 개당 2원씩 샀다는 ‘굽은옥’(곡옥)의 양은 두 되가 넘었다. ‘후하게 쳐줘서 고맙다’는 인사치레에 오구라는 “물건만 많이 가져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개성경찰서장을 지낸 나가타(永田) 경시(총경급)는 개성 근무 당시 장물로 압수한 고려청자 5점을 자기 개인 소유로 둔갑시킨 뒤 이를 오구라에게 팔았다. 니가타는 10만원을 부른 평양 골동품상의 제의를 거절하고 ‘부르는 대로 다 준’ 오구라에게 넘겼다고 한다. 

경주 계림보통학고 교장인 지바 젠노스케(千葉善之助)라는 자의 일화도 기막히다. 지바는 일요일마다 건장한 학생 몇몇을 불러 모은 뒤 미리 보아둔 신라 고분을 대놓고 도굴했다. 지바는 이 도굴품을 교장 관사에 옮겨두고 경주경찰서장과 오구라에게 연락하여 “유물 좀 보러 오라”고 했다. 그러면 오구라는 한밤중에 술을 사들고 찾아왔고, 마음대로 값을 계산한 뒤 경찰서장과 지바 교장에게 얼마씩 나눠주고는 유물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교장이라는 작자가 학생들을 도굴에 동원했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오구라 같은 자가 이렇듯 광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싹쓸이했으니 엄청난 수의 유적이 파괴되고 유물이 도굴되는 악순환을 초래됐던 것이다.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사라진 금관총 유물 어디갔나 했더니 

그런 탓에 절대 다수의 ‘오구라 유물’ 명칭에는 ‘전(傳)’자가 붙어있다. 출토지가 어디인줄 모르는, 혹은 밝힐 수 없는 유물이라는 뜻이다. ‘어디 어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傳)하는 유물’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전(傳)’자가 붙는 유물의 결정적인 흠은 ‘출처, 즉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물의 출토지와 출토상황 등을 모르는 유물로는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그러니 ‘근본을 모르는 유물’은 문화유산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오구라 유물 중 ‘전(傳) 금관총 유물 일괄’이다. 

금관총은 1921년 9월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고분이다. 여기서 사상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출토됐다. 그러나 유적조사 전문가들이 신고한지 3일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경험이 없는 경주 지역 조사원들이 불과 4일 만에 발굴을 해치우고 말았다. 이 혼란의 와중에 상당수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오구라 유물’ 중에 있는 ‘전 금관총 출토유물’은 ‘금제수식’과 ‘금제흉식금구’, ‘금제도장구’, ‘곡옥’(굽은옥), ‘청령옥’(유리구슬옥) 등이다. ‘금제수식’은 금관테의 둘레나 귀고리에 붙인 중간장식이다. ‘금제흉식금구’는 장식에서 몇가닥으로 늘어진 구슬을 고정하려고 일정간격으로 끼운 부속구이다. ‘금제도장구’는 칼의 손잡이나 몸통에 돌려감은 얇은 금판이다. 모두 완성품의 부품들인데, 금관총 발굴 때 누군가 슬쩍 훔쳤다가 오구라에게 팔아넘긴 장물이었을 것이다.     


■왜 유물 앞에 ‘전(傳)’자가 붙었나 했더니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금관(전 경남)과 금동관 2점(전 경주 및 전 울산), 금동관모(전 창령) 등도 모조리 ‘전’자가 들어가 있다. 도굴품이라는 얘기다. 

이중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 양식인 ‘초화형(草花形)’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령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관(국보 제138호)과 비슷하다”면서 “국내에 온다면 국보의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전 창녕 금동관모’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경남 창녕 또한 오구라의 집중 표적이 된 듯하다. 일본 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다수의 창령고분군이 도굴로 거의 내용물을 잃었는데 그 부장품들은 대구 오구라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등의 소장품이 됐다”(우메하라의 <조선고대묘제>, 1972년)고 밝혔다.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창녕’이라면 최근 도굴분 밑에 가려있다가 온전한 모습으로 확인된 무덤(63호분)에서 금동관 등 금제유물이 쏟아진 교동·송현동 고분군을 가리킨다. 오구라 유물 중 ‘전 창녕’ 출토품은 ‘금동관모’ 외에도 ‘금동제조익형관식’(새날개모양관장식) 등이 있다. 둘 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지금도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에는 무자비한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다. 도굴을 조장한 오구라 등이 고분군에서 불법으로 유출된 장물들을 수중에 넣었다는 얘기다. ‘전 동래 연산리 출토 유물’과 ‘경주 입실리 출토품’도 1920~30년대 마구잡이 도굴로 흩어진 뒤 오구라의 품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밖에 ‘전 경주 출토품’으로 표기된 ‘견갑형 동기’는 현재까지 오구라 유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청동기에는 두마리 사슴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마리는 등에 화살이 꽂혀있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은 왜?

오구라의 유물 가운데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몇 점이 보인다. 익선관과 당의, 치마 등 조선왕실 최고위층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다. 실제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성된 오구라 유물 목록에는 ‘익선관(임금의 곤룡포에 쓰는 관모)=이태왕소용품’이고, ‘당의, 치마, 속곳 등=이왕비 소용품’이라는 기록이 나란히 발견됐다. ‘이태왕’은 고종(재위 1863~1907)을, ‘이왕비’는 순종(재위 1907~1910)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런 왕실유물들이 대체 언제 오구라의 수중에 넘어갔을까. 동아일보 1924년 10월19일 기사에서 실마리가 잡힌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덕수궁에 보존된 왕실유물이 땅으로 새었는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사라져서 재작년에 남은 물건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재고품 목록을 만들었지만 이 역시 점차 없어졌다.”

나라 잃은 지도자의 유품마저 유물 사냥꾼의 손아귀 안에 잡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오구라 유물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 금동일광삼존불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 등 93건의 불교문화재가 있다. 

또 각종 고려자기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은 물론이고 소반과 주칠장까지 다방면의 문화유물을 긁어 모았다. 회화에도 손을 뻗쳐 겸재 정선과 심사정, 최북, 김득신, 강세황, 이인문, 김홍도, 변상벽, 장승업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물들도 소장했다. ‘괴물 불가사리’가 따로 없을 정도다.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해방되자 자기 집 마루밑에 숨기고간 유물  

오구라는 해방 되기 10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긁어모은 유물을 야금야금 일본으로 옮긴다. 

그중 고운무늬청동거울(정문경)과 고려청자 등이 일찌감치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다. 아마도 도굴품 거래의 증거가 되는 유물을 일본으로 옮겨 혐의를 피하려 했을 것이다. 기막힌 일이 또 있었다. 

8·15 해방 직후 오구라는 트럭 한 대를 국립부여박물관까지 몰고와서 “소장 문화재를 나에게 팔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단다. 그러자 박물관의 일본인 관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 “아니 부여박물관 물건은 나라의 재산인데 어찌 당신한테 팔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단다. 그러자 오구라가 했다는 말이 기막히다. 

“지금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구라는 마지막까지 한국문화재를 쓸어모으려고 발악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오구라의 유물들은 ‘적산문화재’으로 한국측에 귀속될 처지였다. 오구라는 눈물을 머금고 700~800점을 대구부(시)에 기증했다. 그러나 오구라는 다 주지 않았다. 트럭 7대분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그러고도 상당수 문화재를 700평에 달하는 대구의 저택 마루 밑과 천장에 숨겨두었다. 

200여점의 유물은 과수원을 갖고 있던 심복(최창섭)에게 맡겨놓았다. 오구라는 최창섭에게 “10년 후에 다시 올테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쫓겨가던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자기 재산을 땅 밑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이 또한 기막힌 일이다.

1964년 5월27일 옛 오구라 저택의 밑바닥에 숨겨놓았던 유물 142점이 전기공사 도중 발각됐다. 이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인계됐다. 그런데 오구라는 “142점이 아니라 500여점을 마루 밑에 묻어놨다”느니, “소장품 중 8할을 대구에 두고왔으니 행방이라도 알고 싶다”느니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 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결국 돌아오지 못한 오구라 유물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은 어찌 됐을까. 오구라가 일본으로 돌아올 때의 나이는 76살이었다. 

모든 생활의 기반이 한국에 있었던데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오구라는 결국 수집한 문화재를 야금야금 팔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오구라는 1964년 당시로서는 천수를 다한 9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구라 유물 중 남은 1030건의 한국문화재가 1981년 국립도교박물관에 기증된다. 오구라 유물은 1965년 한일회담 당시 한국측이 반드시 가져와야 할 ‘반환목록’에 올랐다. 1958년 4차회담에서 한국측은 “오구라 컬렉션이 개인소장품이라지만 대부분이 도굴품이고 일본의 국보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것이 많다”면서 “가치나 중요도로 비춰볼 때 당연히 반환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정부는 1960년 제5차 한일회담에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오구라 소장품을 보물로 지정하거나 유출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총독부가 오구라의 유물 반출을 방관 혹은 허락한 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게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오구라 컬렉션은 어디까지나 개인소장품(사유재산)”이라면서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끝내 1965년 한·일 양국이 합의한 반환문화재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지금 국립도쿄박물관이 갖고있는 오구라 유물은 1030점에 이른다. 이중 일본의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무려 39건이다. 그중 절대 다수가 출처, 근본을 잃어버린채 남의 나라 박물관 진열장이나 수장고에 놓여있는 처량한 신세이다.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반환을 요구해야 할 ‘한국 문화재’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한국내에서 ‘오구라컬렉션’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어떤지 모르겠다. 한반도를 도굴천지로 전락시키면서까지 한국문화재를 닥치는대로 쓸어간 자의 유물을 ‘오구라 컬렉션’으로 세탁해주는 셈이 아닐까. ‘오구라 도굴품’ 혹은 ‘오구라 도굴조장품’ 쯤으로 일컬어야 하지 않을까. 또하나 일본정부는 ‘개인소장품’이어서 반환이 난색을 표했단다. 그렇다면 1981년 이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면 이제는 ‘개인소장품’이 아니다. 정부차원이라면 얼마든 반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 아닌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동현·김삼대자·남은실·오다연·오영찬·이순자·이원복·이한상·정다움·최연식, <오구라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정규홍, <유랑의 문화재>, 학연문화사,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12책), 2005

황수영 편,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이순우,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1-2>, 하늘재 2002~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