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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XX를 잘라버리자"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치르는구나!”
1803년 전남 강진의 갈밭에 살던 백성이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男根)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남근을 들고 관아 문을 두드렸다. 아내가 울며불며, 하소연 했지만 소용없었다. 문지기가 가로막고선 관아의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체 무슨 사정이었을까. 자해한 남성은 사흘 전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자 마을 이장이 이 핏덩이를 사흘만에 군적에 편입하고는 기다렸다는 듯 백성의 소(牛)를 토색질해갔다. 그렇게 되자 아이의 아비는 자신이 남근을 잘못 놀린 탓에 아이를 낳았다고 자책하고는 자해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 고발한 ‘군정 문란’의 생생한 현장이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이 1808년부터 10여 년간 머물며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고발했던 곳이다.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백성들은 16~60세의 남성들이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내야 했던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다. 특히 갓난아이는 물론, 죽은 사람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는 무자비한 가렴주구에 백성들은 녹아났다.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징집통지서가 날라오고 사람이 죽어서 신고해도 받아주지도 않고…. 오죽했으면 자신의 남근까지 잘라버리고 말았을까. 마침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다산은 이 비참한 사연을 다아 구구절절 시 한편을 남겼다.
“~자고로 사네가 자지를 잘랐다는 말 들어보지 못했네(自故未聞男絶陽)/시아버지 상복 입었고/갓난애 배냇물도 안 말랐거늘/시아버지 지아비 갓난애 이름이 죄다 군보에 올랐데/야박스런 말에 달려가 하소연해도 문지기가/호랑이처럼 가로막고 이정(이장)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 끌고 가네/지아비 칼 갈아 방에 드니 삿자리에 붉은 피 가득하고,/… 부자들은 한 해 내내 피리 가야금 풍악이나 즐기면서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지 않네….”(‘애절양·哀絶陽’) 
다산의 시를 읽으면 피가 거꾸로 솟고 몸서리가 쳐진다. 하기야 무려 18년의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 고발했으니까 생생할 수밖에 없다.
“우국애민, 즉 시대를 가슴아파 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不傷時憤俗非詩)”라고 절규한 다산이 아니던가.

 

■부자감세 비난하고, 부유세 주장한 다산
“~똑같은 우리나라 백성들이라네/마땅히 세금을 거둘 셈이면/부자들에게 거두어야 옳구나(가矣是富人) 함부로 벳기고 베어내는 정치를/왜 품팔아 빌어먹고 사는 무리에게만 치우치는가.(偏於傭개倫)”
1804년, 어언 43살이 된 다산은 여전히 강진의 유배지에서 술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는 무려 1600자나 되는 장편 고시(<여름날 술을 마시다(夏日對酒)>)를 지었다.
이른바 조선 후기의 ‘삼정의 문란’, 즉 전정과 군정, 환곡의 문란가 함께 과거제도와 신분제도의 모순을 매섭게 질타했다. 다산은 이 가운데 백성들의 등골만을 빼먹는 전정의 문란을 한탄하면서 시쳇말로 ‘부자감세’ 대신 공평과세와 ‘부유세’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서도(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이 오랜 세월 버림받고 억눌리어/열 대 동안 벼슬아치 되는 길 막혀 버렸네/겉으로야 비록 공손한 체 할지언정/맷속 늘 수레바퀴모양 꼬여 있다네/칠치(漆齒·왜적)들 옛날에 나라 삼켰을 때/의병들 곳곳에서 일어나 말달리며 싸웠건만/서도 백성들 팔짱끼고 수수방관 한것은/참으로 까닭이 있음을 돌이켜 헤아려야만 하네.”
다산의 절규는 무슨 뜻인가. 임진왜란 때 평안도와 황해도의 사나운 인심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도 차별을 받다보니 국난에 빠졌음에도 팔짱을 끼고 있던 서도 사람들의 한을 되새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을 예고한 다산
대기근이 강타한 1809~1810년 사이, 호남지역에는 유랑민들이 넘쳐흘렀다. 다산은 심상찮은 예언을 하게 된다.  
친구인 공후 김이재에게 “큰일 났다”는 편지를 보낸다. “이대로 가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호남 일대에 근심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백성의 소요이고, 다른 하나는 아전의 탐학입니다. 노숙하고 유랑하는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고, 마을은 텅 비었습니다. 그런데도 수령과 감사는 전혀 마음을 쓰지 못하고~ 애오라지 백성들만 노략질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반드시 남쪽 지방에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85년 뒤 다산의 우려대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후대에 이 편지를 읽은 위당 정인보는 “다산 선생은 신이 아니냐”고 감탄하면서 이렇게 풀이했다.
“다산 선생이 동학농민전쟁을 예측한 것은 별 것이 아니다. 지극정성이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는 것이다. 슬프다. 이 지극정성을 누가 알랴.”

 

■송시열은 머저리
다산의 칼날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어떻고, 주리·주기론이 어떻고 하면서 공허한 당파싸움을 벌인 선비들을 겨눈다.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주머니 속에 갇힌듯 궁벽하구나. 남의 것을 사모하고 따라하느라 촐랑촐랑대다가 흘륭한 기술 미처 배울 겨를이 없네. 뭇 바보들이 한 머저리 치켜세우고(衆愚捧一癡) 입 딱 벌리고 무작정 받들자 하네”(‘술지·述志’)   
다산이 말한 ‘머저리를 치켜세우는 뭇바보들’이란 ‘송시열을 으뜸으로 모시는 패거리 학파’를 지칭한다. 그는 “지금 선비들은 공리공담만 좋아하지 나라정책과는 얼음과 숯처럼 어울리지 않는다”(고시 27수 중 24번째 시, 1801년)면서 공리공론을 일삼는 성리학자들을 맹비난한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자들은 스스로 ‘숨어사는 선비’, 즉 은사(隱士)를 자칭하며 거드름을 피운다.~이런 자들에게 전곡(錢穀·돈과 곡식), 갑병(甲兵·전쟁), 송옥(訟獄·소송), 빈상(빈相·손님접대)의 일을 맡기면 벌떼처럼 일어나 ‘유현(儒賢)의 대우를 이처럼 해서는 안된다’며 불만을 토로한다.”(‘오학론·五學論’)
다산은 이 대목에서 “이런 자들을 성인이 어찌 가르칠 수 있으며 이런 자들을 어찌 임금이 이런 자들을 등용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한다.  

다산의 <목민심서>. 다산은 백성들의 골을 빼먹는 지방관리들의 학정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들을 밝혔다. 

■놀고먹는 선비들을 생업전선으로 몰아라
그렇다고 다산이 슬픈 현실을 고발만 한 것은 아니다. 
다산은 농민을 만성적인 가난에서 해방시키는 방법이 있다면서 해법을 제시한다. 바로 토지는 원칙적으로 농민의 소유여야 하고, 생산물 역시 농민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소유·공동노동·공동분배를 통해 빈부격차를 줄이고 놀고먹는 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여전제(閭田制)’를 핵심으로 한 ‘전론(田論)’이다.
다산이 주장한 ‘여전제’란 무엇인가. 우선 땅의 경계를 그어 구역을 만들어 그 경계선 안에 둘러싸인 구역을 여(閭)라 한다. 이 여에는 여장을 두고 여에 소속된 사람들로 하여금 다 함께 농사를 짓게 한다. 내 땅 네 땅 경계를 없애고 모든 일은 여장의 명령을 따르게 한다. 여장은 사람들의 일량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한 뒤 추수 때 일한 양에 따라 곡식을 분배한다. 이것이 여전제이다.
중요한 것은 농사를 짓지 않은 사람은 논밭을 주지 않고, 따라서 수확물도 분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놀고먹던 선비는 호구지책을 위해서라도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직업을 바꿔 생업전선에 뛰어들 것이다. 다산의 시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다.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 선비들/시절이 수상타 근심하는 말이라곤/오곡이 풍성하여 흙인양 지천인데도/농사에 게으르니 스스로 무진장 굶주리는 게 마땅하다네!”(‘기민시·飢民詩’, 1795년)
‘여전제’는 바로 공산주의 토지개념이면서, 선비들을 직업전선으로 쫓아내는 혁명적인 토지제도였던 것이다.

 

■열 명 중 8~9명은 버림받은 사람들
다산은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제민에 도움이 되지 않은 과거제도를 이른바 ‘과거학’이라 일컬으며 통박한다.
“마치 광대가 연극하는 것 마냥 천하를 이끄는 것이 과거학이다. 글자를 빼앗고 글귀를 표절하여 좋은 곳을 아름답게 꾸며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실용성 없는 공허한 말을 토해내고 허황되기 짝이 없는 내용의 글을 지어….”
다산의 한탄이 계속된다.
“과거학에 빠지면 예악(예와 음악)과 형정(정치와 형벌)을 잡스런 일로 여긴다. 그런 자가 목민(수령)이 되면 직무에 깜깜하여 아전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 중앙정부에 들어가 재부(경제부처)와 옥송(사법부) 벼슬을 맡으면 산송장 마냥 자리만 지키고 앉아 봉급만 타먹고….”(‘오학론’)
인재등용의 걸림돌은 책상물림만을 뽑는 과거제 뿐 아니라 지역·적서·당파의 차별이었다.
“10명 중 8~9명을 버린단 말입니까. 평민이라 버리고, 의원·역관·율학·역원(曆員)·서화원·산수원(算數員) 등은 중인(中人)이라 버리고, 서관(평안)·북관(함경)·해서(황해)·송경(개성)·심도(강화)·관동(강원)·호남(전라) 출신이라 버리고, 서얼(첩의 자식)이라 버리고…. 오로지 권문세가 몇 십 가문만 버림받지 않은 자입니다.”
다산은 조선을 좀먹는 모든 차별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무재이능과(茂才異能科)’를 시행하는 것이란다.(‘통색의·通塞議’)
다산이 말하는 ‘무재이능과’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는 과거제도를 뜻한다. 우선 인재 추천권이 있는 공직자를 총동원해서 출신지나 출신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100명 정도의 인재를 추천받는다. 그런 다음 이들을 대상으로 경학과 시부(詩賦), 정책과 역사학 시험을 보여 10여 명을 선발한다. 다산은 특히 백성을 먹여 살리는 계책, 즉 경세제민의 방책을 중점과목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물은 미꾸라지다”
다산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대목이 많다.
우선 당대에도 특정지역을 두고 지독한 편견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다산은 흥양(전라도 고흥) 현감으로 발령받은 지인(김희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요사이 사람은 수령을 맡았다 하면 한마디씩 한다네. ‘이 지방은 인심이 나쁘다.’ 그런데 이 말 한마디는 천 사람의 마음을 잃게 하네.”
다산은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도 책상머리에 두고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한마디를 던진다. 
“성인인 공자의 고향이라도 못된 짓 골라 하는 광동(狂童·악동)은 있기 마련이네. 결국 동해건 서해건 마음도 같고 도리도 같다네(東海西海 心同理同)”(‘거관사설·居官四說’)
다산은 유배시절에 자식들의 올바름 삶을 위한 가르침을 전했는데, 지금 읽어도 와닿는다.
“재물이란 꽉 쥘수록 더 미끄럽게 빠져나단다. 그러니 재물은 미꾸라지란다. 옷은 입으면 해지고 먹을거리는 먹으면 썩기 마련 아니냐. 무릇 재물을 비밀스레 간직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문의 가르침(示二兒家誡), 1810년’) 
다산은 또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라고 선언한다. 
“한 글자는 ‘근(勤)’이요, 다른 한 글자는 ‘검(儉)’이다. 우선 놀고먹는 식구가 없어야 한다. 또 먹을거리란 생명만 연장하면 되는 것이다.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목구멍에 들어가면 더러운 물건이 되지 않느냐.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힘을 쏟을 뿐이다.”

 

■참여작가로만 끝난 다산
다산은 조선 후기 봉건적 병폐 앞에 속수무책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피를 토하듯 고발한 참여시의 작가였다 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치안책을 알려거든 들판 농부에게 묻는 것이 낫다”(‘유림만보·楡林晩步’, 1801년)고 했듯, 18년 간의 유배는 백성들의 삶을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느꼈던 기회였다. 
하지만 말이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산이 비참한 백성들의 삶을 비분강개하며 고발하고, 또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죽어가고 망해가는 백성과 조선의 깜깜한 앞날 앞에 울분을 토할 뿐이었으니…. 다산이 그저 참여시의 작가로 끝났다는 점이 슬플 뿐이다. 덧붙여 한마디…. 영조와 정조 시대…. 누가 중흥군주였고, 개혁군주였을까. 다산의 고발대로 백성이 유리걸식하고, 죽어가고 있었는데…. 깊은 회의감이 들 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글은 다산 정약용의 저작물을 엮어 논한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 노만수 엮어옮김, 앨피, 2013년을 참고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