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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역사읽기

백정놈의 '춘추필법'

 1)“<춘추>의 법은 ‘무군(無君)’, 즉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도전·남은의 관을 베고, 저택(저澤·대역죄인의 집을 헐어 연못을 조성하는 일)하소서.”
 1411년(태종 11년), 대사헌 박경 등은 이미 처단된 정도전 일파를 부관참시하고, 그들의 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태종 이방원이 ‘백성의 나라’를 꿈꿨던 삼봉 정도전을 주살한 지(1398년) 13년이나 흘렀는 데도 ‘정도전을 한번 더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 친 것이다.  

공자가 제자를 시켜 길을 묻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공자는 일생의 역작이라는 <춘추>를 지은 뒤 "훗날 나를 칭찬하는 것도, 나를 비난하는 것도 모두 <춘추>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역심을 품은 죄
 2)“<춘추>의 법은 ‘난신을 죽이고 역적을 칠 때는 반드시 그 당여(黨與·당파)를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강희안은 이개·성삼문의 음모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1456년(세조 2년) 대사헌 신석조 등은 강희안 등을 ‘6월의 변’ 사건의 연루자로 보고 처단할 것을 주청했다. ‘6월의 변’이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여파는 1년 뒤에도 이어졌다. 1457년(세조 3년), 대사헌 김연지 등은 ‘6월의 변’에 연루된 송현수를 처단해야 한다고 다시금 상소를 올린다.
 “송현수는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춘추공양전>은 ‘인신(人臣)은 장(將·역심)이 없어야 하며, 장이 있으면 반드시 목을 벤다’고 했습니다. 또 ‘벌(罰)이 죄(罪)에 합당하지 않으면 악(惡)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송현수를 법대로 처단해서….”
 그러니까 신하는 실제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역심을 품고만 있어도 참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00년이 흘러도…
 3)“상(명종)께서 ‘정죄(定罪)한 지 오래된 일인데, 다시 추론(깊이 파고 들어가 밝힘)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 <춘추>의 법은 비록 1000년 전의 일이라도 모두 추론했다고 합니다.”
 1548년(명종 3년)의 일이다. 영의정 윤인경 등이 선왕(중종) 시절 국정을 농단했던 김안로의 잔당과, 을사사화(1545년) 연루자들의 가산을 끝까지 추적해서 적몰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이에 명종은 일종의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언급하면서 “이미 처벌받은 사안을 이중처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춘추>를 인용, “대역죄는 1000년이 흐른다 해도 추적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임해군을 제사지내다니오’
 4)“<춘추>의 의리는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과거냐 현재냐’의 구별이 없습니다. 썩은 해골도 주벌(誅罰)할 수 있습니다. <춘추>의 의리가 아주 엄하니 죽었다고 추호라도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어찌 친친(親親)의 도리 때문에 역적 토벌의 대의(大義)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조석전은 아니되옵니다.”
 1609년(광해군 1년), 광해군은 역모죄로 몰려 사사된 임해군을 위해 조석전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조석전이란 고인을 생전과 똑같이 섬긴다는 의미에서 아침·저녁상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광해군은 형(임해군)을 역모죄로 몰아 죽인 것을 내심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신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한다.

 

 ■<춘추>가 무엇이기에
 <춘추>에 따르면, <춘추>의 법은, <춘추공양전>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앞의 인용문들에서 보듯 옛 사람들은 대역죄·모반죄 등과 같은 중죄를 처결할 때는 <춘추> 혹은 <춘추공양전>을 줄기차게 인용하고 있다. 법전을 먼저 들춰보지 않은 채….
 그렇다면 대관절 <춘추>가 무엇이기에 너도나도 ‘<춘추>의 대의’와 ‘<춘추공양전>의 해석’에 매달렸을까.
 <춘추>는 기원전 722(은공 원년)~기원전 481년(애공 14년)까지 242년간의 중국 노나라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사기> ‘공자세가’는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나라를 종주로 하여, 은(상)나라의 제도를 참작해서 편찬했다”고 기록했다. <춘추>를 편찬한 공자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공자는 평소 소송사건을 다룰 때 늘 다른 사람들과 의논해서 판단했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만큼은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어떤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지 못했다. <춘추>만큼은 공자가 책임감을 갖고 혼자 지었다는 얘기다.

 

 ■추상 같던 <춘추>의 포폄
 <춘추>의 핵심은 ‘포폄(褒貶)’이다. 즉 사건의 선악과 시비를 따져 평가한(포폄) 법률적 성격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춘추>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당대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사기>)이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춘추시대 오랑캐라는 소리를 듣던 오나라와 초나라가 저마다 군왕을 자처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춘추>의 잣대는 엄격했다. 오·초의 지위를 낮추어 본래의 작위(자작)로 칭했다. 또 있다.
 기원전 621년, 진(晋)나라 문공이 주나라 천자(양왕)를 ‘불러’ 천토(踐土·허난성 위안양현)라는 땅에서 회맹하고 첫번째 ‘춘추 5패’가 되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천토지회(踐土之會)’라 일컫는다. 하지만 <춘추>의 기록은 다르다. “천자가 하양(河陽·허난성 멍현)으로 사냥을 떠났다”고 한 것이다. 제후에게 ‘불려나가’ 회맹에 참여한 천자를 두고 사냥을 떠났다니….
 이는 ‘있는 그대로를 써야 한다’는 원칙에 맞지 않는 명백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공자의 뜻은 분명했다. “제후(진 문공)가 감히 천자를 부를 수 없다”는 포폄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천자가 하양으로 수렵을 다녀왔다”고 기록했던 것이다. 공자가 이같은 엄정한 포폄을 가한 까닭은 무엇인가.
 “<춘추>를 통해 포폄을 가한 까닭은 후에 군주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해서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면 천하의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사기> ‘공자세가’)
 무서운 말이다. ‘<춘추>의 대의(大義)’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지도자는 곧 난신적자의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추사 김정희의 '소원공자학'. 공자가 되기를 소원한다는 뜻이다. 후대인들은 너도너도 공자의 춘추필법을 배우고자 했다.

  ■공자의 춘추대의란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춘추의 대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춘추의 대의’는 이른바 ‘미언대의(微言大義)’의 어법으로 <춘추>에 녹아있다. ‘미언대의’란 공자가 아주 짧은 말로 가한 포폄을 통해(미언) 대의명분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공자의 아리송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와 같은 <춘추>의 미언대의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춘추학은 한나라 시대부터 나타났다. 특히 <공양전>과 <곡량전>, <좌씨전> 등이 ‘춘추삼전(春秋三傳)’으로 꼽혔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춘추> 해석서가 바로 ‘공자의 아리송한 숨은 뜻(미언대의)’을 문답식으로 밝힌 <공양전>이었다.
 동중서는 특히 이 <공양전>을 근거로 사상의 통일, 즉 ‘대일통(大一通)’을 이뤘다. 동중서는 국교로 삼은 유교의 덕치주의, 즉 백성 중심의 유교주의가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국가주의와 배치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덕으로 다스려야 하는 유교국가라지만 법과 형벌이 없이는 지배체제가 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기자는 최근 나온 <국가와 백성 사이의 한제국-덕치와 형벌의 이중주>(히하라 도시쿠니 지음·김동민 옮김, 글항아리)를 읽었다. 이 책을 통해 공자의 춘추필법이 가리키는 이른바 ‘춘추대의’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어찌 덕치만 할까’
 “하늘의 도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음과 양이다. 음(陰)은 덕(德)이고, 양(陽)은 형벌이다.”
 동중서의 말마따나 음과 양, 덕치와 법치는 공존해야 했다. 특히 유교국가임을 선포했기에 백성 중심의 덕치는 국가이념이었다. 따라서 ‘법치’는 어디까지나 ‘덕치’의 보조수단이어야 했다.
 하지만 권력자가 어디 그런가. 인내심을 갖고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기보다는 채찍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한게 인지상정 아닌가. 유교 국교화 이후 60여 년이 지난 뒤 한 선제가 그랬다지 않은가.
 “한나라의 제도는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순수하게 덕교(德敎)에만 맡길 것인가.”
 
 ■<춘추>의 숨은 뜻은
 <춘추>에서 보이는 ‘공자의 숨은 뜻(미언대의)’과, 그것을 해석한 <춘추 공양학>은 곧 형벌 적용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공양학자’인 동중서는 이렇게 풀이했다.
 “<춘추>에서 재판은 반드시 그 일에 근본을 두고 그 당사자의 동기를 따졌다. 동기가 사악한 자는 범행이 이뤄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처벌했고, 주동자는 죄를 특히 무겁게 하여 가중 처벌했으며, 근본동기가 곧은 자는 죄를 가볍게 적용했다.”
 그는 “따라서 군주를 시해했어도 어떤 이는 주살되고, 또 어떤 이는 주살되지 않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동기의 순수함과 불순함을 따져 같은 죄라도 판결은 다르게 한다? 나아가 “동기가 선하면 법에 어긋나도 처벌을 면하고, 동기가 악하면 법에 맞더라도 처벌한다”(<염철론>)는 데까지 확대된다. 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란 말인가. 예컨대 이런 식이다.  
 <춘추>의 기록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대부) 숙손득신이 죽었다.(叔孫得臣卒)”(노나라 선공 5년)
 아주 짤막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 5자의 한자 속에 공자의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후한의 사상가 하휴(129~182)는 이 대목에서 날짜가 기록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고)>)
 “<춘추>에서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공자 수가 임금을 시해하려던 것을 숙손득신이 알았는데, 신하가 되고서 도적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주살되어야 함을 밝힌 것이다.”
 공자가 분명 직접 들었던 시대의 기록일진대, 날짜가 없다는 것은 공자의 ‘춘추필법’이 분명하다는 것. 즉 당시 대부가 죽었을 때, 죄없는 자는 날짜를 기록했다는 것. 그런데 공자가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필시 숙손득신의 죄를 필주하는 필법을 담았다고 본 것이다. 이같은 토막기록을 갖고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 것이다.

 

 ■마음을 따져 죄를 결정한다?
 또 있다. <춘추>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양나라가 멸망했다.(梁亡)”(노나라 희공 19년)
 단 2자의 아주 간단한 기록인데, <춘추공양전>은 매우 장황하게 풀이했다.
 “양나라는 아직 정벌 당하지 않았는데 멸망했다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스스로 멸망한 것이다. 고기가 썩듯 내부에서 무너져서 멸망하기 때문이다.”
 또 “거나라 군주인 서기를 시해했다”는 <춘추>의 기록을 두고. <공양전>은 “<춘추>가 나라를 거론하면서까지 시해했다고 한 것은 백성이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하나 더 거론해보자.
 “오나라 자작 임금이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소나라 성문에 접근해서 죽었다.”(노나라 양공 25년)
 두 가지다. 군왕을 자칭했던 오나라 제후를 자작(子爵)으로 낮춰 기록한 것이 공자의 첫번째 포폄이다. 두번째는 역시 하휴의 주석이다.
 “오나라 임금이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소나라를 지났는데, 길을 빌리지 않고 갑자기 소나라 성문으로 난입했다. 그러자 소나라 문지기가 그를 쏘아 죽였다. 자기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군자(공자)는 모르고 한 일은 원망하지 않기 때문에 소나라 문지기가 오나라 임금을 죽일 수도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소나라 문지기는 영문을 모르고 오나라 군주를 쏴 죽였기 때문에 ‘무혐의’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것이 결국 ‘마음을 따져서 죄를 결정한다(論心定罪)’는 <춘추공양전>의 논단이다. 

공자의 고택과 공묘. 공자가 춘추를 지은 뜻은 컸으나 후대의 지도자들은 춘추필법 가운데 '사람의 악심'만 참고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사람의 악심(惡心)만 들여다본 판결
 사실 ‘마음을 따져 죄를 결정한다’는 ‘논심정죄(論心定罪)’의 원칙은 갈수록 무색해졌다.
 ‘행위자의 마음’ 가운데서 선의(善意)를 참작하지 않고, 악의(惡意)만을 강조하려는 습성이 짙어지게 된 것이다.
 권력자들이 해석한 ‘춘추대의’는 바로 <춘추>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후한서> ‘공융전’과 <전한서> ‘두연년전’에 나타난 사건을 비교해보자. 먼저 ‘공융전’….
 “태부인 마일제가 사신 자격으로 반역자인 원술과 교섭했다. 원술은 마일제를 자기 진영에 억지로 끌어들이려 했다. (원술은 1년 이상 마일제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일제는 분개해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마일제의 상여가 돌아왔을 때 조정은 그를 예우하려 했다. 하지만 공융은 반대했다. ‘왕실의 대신이라는 자가 위협을 당했다는 변명을 할 수 있는가. 원술이 반역자라는 사실은 천하가 아는 것인데, 그를 따라다니며 1년 이상 교제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공융은 <춘추>의 숙손득신을 마일제와 비교하면서 “절대 그를 예우해서는 안된다”고 공박했다. 그러니까 임금의 시해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밝히지 않았던 숙손득신과, 반역자 원술을 1년 이상 교제한 마일제를 동급으로 본 것이다. 숙손득신과 마일제의 마음 가운데 악심(惡心)만을 들여다 본 것이다.

 

 ■죄가 됐다가 무죄가 됐다가…
 이번에는 ‘두연년전’의 내용을 보자. 
 “어사대부인 상홍양이 대역무도죄로 주살됐다. 상홍양의 아들 상천이 도망쳐 부친의 옛 동료인 후사오의 집에 가서 숨어 지냈다. 후사오는 자수해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관은 후사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후사오의 집에 숨은 상천은 모반자가 아니라 모반자의 아들이라는 점이 참작됐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건을 재심한 시어사(侍御史·비리를 감찰하는 직책)의 판결은 달랐다. ‘상천은 부친의 모반을 알고도 간쟁하지 않았으니 반역자와 다름없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반역자를 숨겨준 후사오 역시 사면할 수 없다고 탄핵했다.”
 얼마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판결인가. 위정자들은 특히 대역죄나 모반죄 등에 전가의 보도처럼 ‘멋대로 판결’을 휘둘러댔다. 
 가장 골치아픈 <춘추>의 구절이 있다.
 바로 ‘장심(將心)’이다. ‘장심’은 ‘임금을 해치려는 뜻’, 즉 역심(逆心)을 말한다. <춘추공양전> 장공 32년조에 나온다.
 “임금과 어버이를 죽이려는 의도를 품어서도 안된다. 그런 마음을 갖기만 해도 반드시 주살된다.(君親無將 將而誅焉)”
 <한서> ‘회남왕전’을 보자.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기원전 179~122·<회남자>의 편찬자)이 역모의 혐의를 쓰고 결국 자살을 강요당하는 내용이 나온다.
 “43명이 나서 회남왕 유안이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주살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춘추>에서 ‘신하는 임금을 장자 죽이려는 의도를  품어서는 안된다. 죽이려는 의도만 품어도 반드시 주살한다’(臣無將 臣無將誅)고 했으니까…. 회남왕의 죄는 장차 죽이려는 의도를 품은 것보다 무겁다.”
 유안은 결국 ‘춘추대의’을 반했다는 이유, 즉 역심을 품었다는 죄로 처단되는 비운을 맛본 것이다. 

최근 출간된 '국가의 백성의 漢'(글항아리). 공자의 춘추필법이 가리키는 이른바 ‘춘추대의’의 허와 실을 살펴볼 수 있다.

■군주를 모독한 죄
 <공양전> 성공 2년의 기록을 보면 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제나라 경공이 진(晉)나라와 전쟁을 벌이다가 포위당했다. 이때 경공의 마차 오른쪽에 탑승한 봉추보의 생김새가 경공과 비슷했다. 봉추보는 경공의 행세를 해서 진나라 군대를 속이고 경공을 무사히 탈출시켰다. 그러나 봉추보는 상을 받기는커녕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봉추보가 경공의 행세를 할 때 경공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킨 것이 문제가 됐다. 아무리 임금 행세를 한다해도 그렇지…. 감히 임금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는 죄를 뒤집어 쓴 것이다. <공양전>은 봉추보의 참수를 두고 “당연한 것”이라 해석했다.
 봉추보는 제 몸을 던져 임금을 구했지만 ‘국왕 모독죄’로 참수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헷갈리는 법의 잣대
 앞서 살폈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춘추대의’를 어겼다는 이유로 죽어 나갔으며, 삼족에 구족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던가.
 그럴 때마다 인용된 것이 바로 <춘추>이며, <춘추공양전>이 아닌가.
 물론 공자의 ‘춘추필법’은 난신적자들을 두렵게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공자 스스로 <춘추>를 완성한 다음 이렇게 자부했다지 않은가.
 “후세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도 <춘추> 때문일 것이다.”(<사기> ‘공자세가’)
 그렇다면 ‘춘추대의’를 어겼다는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죽어간 사람들은 무엇이라 했을까. 모호한 어법으로 <춘추>를 써서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낳게 하여 피비린내를 풍기게 한 공자를 비난했을까.
 하기야 어디 공자 탓일까. 공자와 <춘추>를 견강부회해서 백성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며 쥐락펴락한 자들이 잘못한 게지. 제 아무리 ‘성인의 <춘추>’라도 백정에게 주면 ‘백정놈의 <춘추>’가 되는 것이니…. 그나저나 지금의 법은 어떤가. 성인의 법인가, 백정의 법인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