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226년 전인 1792년(정조 16년) 4월 24일 정조가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험문제 하나를 낸다.
“사흘 뒤 묘시(卯時·오전 5~7시)까지 <성시전도>를 보고 시(詩)를 지어 바쳐라.”
한양의 저잣거리 풍물을 그린 대형 두루마리(병풍), 즉 <성시전도(成市全圖)>의 완성기념으로 시(詩) 한 편 씩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규장각 관리들에게는 엄청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끄적끄적 몇자 안되는 시를 완성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 200구, 1400자가 넘는 장편시를 제출하라”는 지엄한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조가 어영부영한 군주인가, 본인이 직접 답안지를 체크하고 등수를 일일이 매긴 다음 시험지에 촌평까지 해주었다,

 

■"제 점수는요?"
“음, 신광하는 ‘소리가 있는 그림(有聲畵)’이고, 박제가는 ‘말할 줄 아는 그림(解語畵)’이다. 이디보자. 이만수는 아름답고(가)’, 윤필병은 ‘넉넉하며(贍)’, 이덕무는 ‘고아하고(雅)’, 유득공은 ‘모두가 그림(都是畵)’이로구나.”
신하들이 ‘제 점수는 요?’하고 궁금하겨 여겼을 것이다.
“그래.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다. 2등은 (검서관) 박제가다.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이고, 4등은 승지 윤필병, 5등은 겸검서관 이덕무·유득공이다.”
특히 정조의 어평을 받은 6명 중에 신광하·박제가·이만수·이덕무·유득공 등의 시가 전해지고, 상을 받지 못한 서유구의 시도 남아있다.

<성시전도>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태평성시도>. 한양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렇다면 규장각 관리들은 한양 저잣거리 풍경, 즉 백성들의 일상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을까. 지엄

한 임금이 낸 시험 답안지에 곧이곧대로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독설가로 알려진 초정 박제가가 제출한 답안지의 시를 봐도 약간은 석죽은 감이 있다.
“놀고 먹는 백성 없이 집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
아니 박제가가 누구란 말인가. “한양 안에 똥과 오줌이 넘쳐나고 냇가의 석축에 인분이 가득차 더러운 냄새가 진동한다”(<북학의>)고 독설을 퍼분 이가 아닌가.
그렇지만 임금의 면전에서 한양 저잣거리를 두고 ‘똥!덩!어!리!’라고 대놓고 디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독설가 박제가가 표현한 한양거리
그러나 박제가는 역시 박제가다웠다. 임금에게 제출한 다른 이들의 시가 대부분 정제되고 고답적인 언어로 한양의 풍경을 묘사했지만 박제가는 되도록 한양거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물가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네.~ 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고 성을 내며 노려본다.”  특히 시의 반 이상을 시장과 거리의 풍물을 표현하는데 할애했다.  
“배우들 옷차림이 해괴하고 망측하다. 동방의 장대타기는 천하에 없는 거라. 줄타기와 공중제비하며 거지처럼 매달렸다.…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 사람이 시키는대로 절도 하고 꿇어 앉기도 하네.”
마치 200여 년 전 한양의 시장에서 벌인 광대와 사당패의 공연 한 편을 그대로 보는 듯 하다.

 

한양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박제가의 <성시전도시>. 정조가 실시한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다. |안대회 교수 제공

■이빨 사이로 침 뱉어낸다
“아전배들은 허리로 인사하고, 시정잡배들은 이빨 사이로 침을 뱉어낸다.(吏胥之拜拜以腰 市井之唾唾以齒)” 
‘침 좀 뱉고 껌 좀 씹는’ 동네 양아치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박제가가 언급한 시정잡배의 인사법을 두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는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날 이유원과 필담을 나누던 중국인이 갑자기 박제가의 ‘문제의 시’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는 것이다.
“이빨 사이로 침 뱉는게 조선인의 인사법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순간 당황한 이유원은 약간 딴청을 피우며 “글쎄요. 내가 이 시를 처음 봐놔서….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조선 양아치들의 ‘침뱉기 신공’이 인사법이라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화를 내면서 박제가의 시를 중국에 소개한 자를 색출해서 처벌했다.
박제가도 자신의 <성시전도시>를 두고 “이언(邇言), 즉 천박하고 깊숙한 맛이 없는 시일 수밖에 없다”고 자인했다.  

그러나 당대사람들은 박제가의 표현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단적인 예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박제가의 시는 당대의 실정을 잘 형용했다”고 칭찬했다.
박제가 뿐 아니라 신택권·이학규·신관호 등도 당대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언어로 한양의 저잣거리를 표현했다.
“바닥에 쌓인 생선에선 비린내 살살 풍겨오고, 사람보곤 냅다 달리는 놈은 돼지라네. ~누더기 입은 사내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어린 계집종은 정수리에 동이 이고~쏟아지려 하자 머리를 치켜든다.”(이학규)
“가련타! 광통교 색주가는 별자(別子) 쓴 등을 걸고 탁자를 늘어놓았네. 가련타! 구리개 약파는 늙은이는 망건 쓰고 어슬렁 주렴 안에 머무네.”(신택권)
두 사람은 종로~청계천~을지로를 무대로 살아간 시장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했다.

남사당패의 공연모습.

■골초가 된 조선
이중 신택권의 시를 보면 한양거리를 강타한 담배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위로 정승판서부터 아래로 가마꾼까지, 안으로 규방서부터 외방고을의 기생까지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담배를) 즐기지 않겠느냐”고 했다. 따지고보면 정조 임금 자체가 지독한 골초였으니 누굴 탓하랴. 실제로 정조는 과거시험의 시제로 ‘남령포(담배)’를 내걸면서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담배만한 것이 없다”고 담배예찬론을 편 것으로 유명하다.(<정조실록> 1796년 11월18일)
당대 부동산거래의 실상과 부동산 가격 및 인기지역 동향도 알 수 있다.
“집주름(家쾌·부동산 중개업자)이 천 냥을 매매하고 백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동쪽 집, 서쪽 집’으로 이사를 유도하고 중개수수료를 챙기는 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또 집값 1000냥 중에 100냥을 받아 챙긴다면 부동산 중개료가 매매가의 10분의 1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남촌과 북촌에는 이름난 집들이 몰려있으니 부귀한 자는 성세(聲勢)에 기대야 한다”는 것과

19세기 한양의 뒷골목에 늘어선 노점들. 시정잡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예전엔 조용하고 외진 곳을 좋아했으나 지금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는 표현도 있다.

지역에 따라 집의 가치가 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시대에 따라 부촌의 조건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조용하고 외진 곳을 선호했던 양반들이 낮고 번화한 동네를 찾아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했던 것 같다.
“외진 골목에 팔짱끼고 살자니 생계가 어려워/빈촌에 둥지 틀어 시장 가까이 산다”고 했으니 말이다.

 

■조선판 힙합전사들의 인사법
의리’를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한량들의 모습도 보인다.
“아직도 협객을 사모하는 풍모가 남아 말 달리고 투계(鬪鷄) 하면서 한 자나 되는 칼을 찼네. 문득 의기투합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히네.”
의리있는 협객을 그리며 의기투합한 한양 한량들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한량들끼리 만날 때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장면은 마치 ‘힙합 가수들’의 독특한 인사법 같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보면 박제가를 비롯한 이학규·신택권 등의 시는 신문의 르포르타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조 임금이 다스리던 18세기말 한양의 저잣거리를 취재해서 아주 간결한 필치로 다듬은 ‘내러티브식 기사’가 아닐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글은 안대회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와 18세기 서울의 풍경’, <고전연구> 제35권 35호, 한국고전문학회, 2009와 역시 안대회의 ‘성시전도시 9종’, <문헌과 해석> 봄호, 문헌과 해석사, 2009 등을 참고했습니다. 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책문, 2014에서 발췌하여 팟캐스트용으로 재정리했습니다.)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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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18.07.05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먼저 한자의 오자를 지적합니다.


    「成」市이 아니고, 「城」市全圖.

    그리고 ···그림을 보면 이것은 중국의 거리와 같네요. 구별을 할 수 없다.
    사람들의 복장도 그렇다.

    • 아베 긴따로 2018.07.05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참 부지런하고 성실해 니혼진 두한이상은.
      니네 나라 일이나 신경 써.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별 잡~놈~이 남의 나라에서 똥탕질이야~

    • kimduhan 2018.07.05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신은 일본인의 이름을 핸들 네임으로 하고 있니?

    • 아베 긴따로 2018.07.05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니가 한국인 탈을 뒤집어 썼길래 너 고스프레 함 해봤어. 왜 꼬와?

    • kimduhan 2018.07.05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덧붙이자면, 이것은 같은 시기의 에도(도쿄)을 쓴 그림이다. 중국과 분명히 다른 문화가 보인다.

      http://www.smb-digital.de/eMuseumPlus?service=DynamicAsset&sp=SU5mxm4Yx%2FVa7mYMRtCIXANVY4X3zCXfuutmYEsi22Yy3VLMi3FnliwpXenNMJQGnnRjDUTdJ2XQM%0AxxKPSk06dMSKhPZoJX7u&sp=Simage%2Fjpeg

    • 아베 긴따로 2018.07.05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이 일본 진드기 찰거머리 김두한상. 행님 말쌈 안들리냐. 썩 꺼지라고 말로 할 때 조용히 사라지거라~~ 이 행님 매우 거칠다. 알간?

    • kimduhan 2018.07.05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리고, 이 200년전의 에도의 니혼바시 그림에는 점포도 많이 써지고 있지만, 그 안에는 지금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회사가 몇 개나 있습니다. 물론 이 칼럼에 등장하는 「태평성시도」의 도시풍경은 상상상의 물건으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거기에 점포가 써지고 있었다고 한들, 당연 현대에 존속하고 있는 가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2. kimduhan 2018.07.05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의 한양(漢陽)이 분뇨투성이로 불결 하기 짝이 없었던 것은 사실로, 그것을 지적하는 것인 듯한 독설이라도 내지, 분뇨는 당연 잡배들만이 하고 있었던 것이라도 아니네요.

    조선시대 한양 거리는 ‘똥 천지’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210102105475

    • 아베 긴따로 2018.07.05 1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자석아 니가 여기서 젤 불결해 자석아.
      썩 꺼지란 소리 안들리냐

    • ㅡㅡ 2020.05.31 0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지금 보실지 모르겠지만 도시 전체가 분뇨 투성이었던것은 한양뿐만 아니라 19세기 서양에서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기 전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며 다른 유럽의 국가도 도시에 분뇨가 가득했었습니다

    • kimduhan 2020.05.31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19세기의 일본 도시는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시가지에는 공중 변소가 설치되어 똥오줌은 회수되어 농촌에서 모두 비료로 됐다.수도가 완비되어 거리에 공중 목욕탕이 있어 시민은 저렴하게 목욕하고 깨끗한 몸을 유지했다.

    • kimduhan 2020.05.31 1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1600년 일본에 최초로 발을 디딘 영국인 윌 아담스 선장이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했던 당시에도 분명 일본인들의 이러한 문화적 특징은 존재했다.

      '사무라이 윌리엄'이라는 아담스의 자서전에서 길레스 밀턴은 영국 거리에서 '종종 배설물이 넘쳐나던' 시기에 '청정한 하수도와 화장실, 향나무로 증기 목욕을 사용할 정도로 귀족들은 고지식할 정도로 청결했다'고 썼다. 개인 위생을 무시하는 유럽인들은 일본인들을 "끔찍하다"고 평했다.
      https://www.bbc.com/korean/features-50031430

    • kimduhan 2020.05.31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첫째로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였던 비숍과 커즌은 예의범절, 청결, 근면성 등 서양사회의 기준을 가지고 동양사회를 바라보았다. 비숍은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계층에서 발견되는 무례함에서 야만성을 발견한 반면에 일본에서는 산간마을이나 기차안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발견하였다. 일본식 예의범절과 행동양식은 일본을 문명사회로 평가되도록 하는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요소는 청결이었다. 비숍은 당시 서울을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라 하였고, 커즌은 서울은 눈과 코가 다 같이 괴로운 장소라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깨끗한 곳으로 묘사하여 양국간 평가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더구나 당시 한국인들은 시간관념이 박약해서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다고 관찰함으로써 정체된 동양사회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고, 이러한 정체성은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조차 발견된다고 쓰고 있다. 예절바름, 청결, 근면, 시간관념 등 영국인들이 당시 근대성의 근거로 삼았던 기준에 한국은 많이 뒤쳐져 있었다.
      http://m.keri.org/web/www/network_02?p_p_id=EXT_BBS&p_p_lifecycle=0&p_p_state=normal&p_p_mode=view&_EXT_BBS_struts_action=%2Fext%2Fbbs%2Fview_message&_EXT_BBS_messageId=260026

    • kimduhan 2020.05.31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종 때는 일본의 발달된 목욕 문화를 듣고

      조선에도 공중목욕탕을 만들고자 했었다.

      15세기 초 일본을 방문했던 통신사가 세종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다.

      박서생(통신사)
      “일본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욕을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큰 집에는 개인 욕실을 설치하고 있었고 집집마다 여러 군데 욕탕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욕실의 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어 편리합니다.”
      “가령 물이 적당히 끓여지면 뿔피리를 부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다투어 돈을 내고 목욕을 합니다.”
      “조선도 이런 욕실을 많이 설치해서 화폐의 사용법을 돕도록 하소서.”

      하지만 유교문화의 보수성과 백성들의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공중목욕탕은 빛을 보지 못했다.
      https://ppss.kr/archives/51553?fbclid=IwAR3KIzdkrn3n0s_-EqFl6leRA1rTjWqfCk5ApvCHouk6Q1PJ1Z-iDVCPWAE

  3. kimduhan 2018.07.05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여기서 “19세기 한양의 뒷골목에 늘어선 노점들”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사진은, 19세기라도 내지, 한양(漢陽)의 사진이라도 아니다. 실제로는 20세기 초두의 공주 사진이다.
    한국의 고증이 꽤 더운데한 것은 자주 있는 것으로, 이 사진은 한겨레신문에서는 「일본 통치 시대」의 공주의 사진이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공식 사이트에서는, 동래구의 시장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1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31376.html

    ※2 부산광역시 동래구
    https://www.dongnae.go.kr/index.dongnae?menuCd=DOM_000000402000000000

    실제로는, 이 사진에는 일본어의 설명이 있어서, 사실은 일본인에게는 잘 안다.
    이렇게 쓰여져 있다.
    「韓國忠清南道公州韓人市日ノ露店」

  4. kimduhan 2018.07.05 1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똑같이, 이 기사로 「남사당패 공연」라고 소개되고 있는 사진은,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사이트에서는 동래구에 1900년대(20세기 초두)의 생활 풍경으로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https://www.dongnae.go.kr/index.dongnae?menuCd=DOM_000000402000000000

    • kimduhan 2018.07.17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에서는 한방의학이 20세기가 되어도 믿을 수 있고, 인분을 약으로서 사용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5. kimduhan 2018.07.05 17: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기사로 소개되고 있는 「태평성시도」의, 너무나 중국적이어서, 너무나 상업적인 모양(조선의 실제로 멀리 떨어져 있다)에 위화감을 느끼고, 기자님이 「제공원」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의 공식 사이트를 살펴보면, 이 그림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그것에 의하면, 역시 중국풍의 거리로서 설명되어, 이것은 한양(漢陽)의 당시 모양을 그린 것이 아니고,“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이상공간을 시각화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의 한양(漢陽) 풍경」라고 소개하는 것은, 명확히 틀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906

  6. kimduhan 2018.07.09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사당패의 공연이라고 하는 사진의 전데이터 찾았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아카이브에 있는, 일본 통치 시대 조선의 포스트카드이네요.
    그림 엽서에는 「朝鮮風俗 肩乗曲舞 FESTIVAL DANCING イ65」이라고 있습니다.


    Ceremony, Farmers' Dance? n.d from the Collections Search Center, Smithsonian Institution
    http://collections.si.edu/search/detail/edanmdm:siris_arc_61201

    • kimduhan 2018.07.14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약 일본이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있었다면, 이 왕가나 그 신하는 피해자입니까? 실제로는 일본은 조선 정부의 집권층에 협력자가 많았으므로, 강제적으로 점령하지 않아도 간단하게 병합할 수 있고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진에 보여지게, 마을축제를 평화스럽게 즐길 수 있는 정도에는 문명적인 통치를.

    • kimduhan 2018.07.17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질문:당시의 대한 제국정부집권층은, 일본에 무력으로 위협되어, 강제되어서 무리하게 병합 조약조인 시킬 수 있을 수 있었던 불쌍한 피해자입니까?
      Yes or No?

    • kimduhan 2018.07.17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강제 점령이라면, 현재 친일매국놈과 불리는 사람들도 피해자이며, 나쁜 것은 일본만이라고 하게 된다.
      왜 그런 단순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1)일본에 협력한 매국놈이, 일본과 병합 조역을 조인했다. 그리고 병합 시대가 시작되었다.
      (2) 악랄한 일제가, 대한 제국집권층을 칼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리하게 점령했다.

      실제의 역사는 (1)입니까? (2)입니까?

    • kimduhan 2018.07.17 14: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두가 이 설명으로 이해가 갑니다.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이 한시바삐 구축해야 할 내셔널리즘하에서는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흑역사에 해당하였다.

      신생 대한민국은 일제 시대를 오직 저항과 수탈이란 두 축으로만 기억하기를 원했으며, 많은 조선인들이 강자인 일본제국의 대외 침략에 편승하고 그 일원이 되어 과실을 누리기를 갈망하였던 기억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었다. 그것은 신생 독립국과 그 구성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기부정적, 정신분열적 기억이었다.”

    • kimduhan 2018.07.17 15:35  댓글주소  수정/삭제

      (1)일본의 군사력에 의한 위협으로 강제적으로 점령되었다면, 당시의 대한 제국집권층에 책임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2)민비는, 조선사로 어떤 위치 부여의 여성입니까?
      조선 왕조의 개화와 국가의 재흥에 힘쓴 인물? 조선사에 좋은 영향을 준 인물인가,아니면, 악영향을 준 인물인가?

    • kimduhan 2018.07.17 1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1)당시의 집권층이 찬성한 것이라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미국과의 전쟁에 관해서, 쇼와 천황은 반대이었습니다만, 당시의 일본 집권층이 개전을 결정했습니다. 「미국에 압박되어서 이것이상 참을 수 없다」라고 할 이유이었습니다.
      물론, 일본에 개전의 책임은 있습니다. 당시의 집권층이 결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민비는 조선 개혁의 적으로, 중국의 서태후 같은 존재이었습니다만, 조선의 정쟁에 일본이 관여해서 살해까지 한 것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일본인으로서 사과합니다.

    • kimduhan 2018.07.17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지막 황손’ 이석 “명성황후 ‘시간’한 조선인이 바로…”

      의친왕의 아들로 알려진 이석씨가 9일 한 종편에 출연해 ‘명성황후 시해와 시간’을 주도한 범인으로 조선인 우범선을 지목했다. 자신이 처음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 이씨는 우범선에 대해 “을미사변 당시 훈련군 2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며 “우범선은 씨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31128111#csidxb8bfaea3158f359b64ab11a9e537272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충청남도 조사부, 柳寬順을 고문한 鄭春永을 체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충청남도 조사부, 柳寬順을 고문한 鄭春永을 체포
      박두한 공소시효기간을 앞두고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정기의 철추는 이제 바야흐로 총결산기를 상징케 하는 가운데 자못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데 작 8일의 도반민특위에서는 또다시 서천군 장항에 적을 두고 여관업을 경영하고 있는 정춘영(55)을 인치 취조중에 있는데 이는 왜정때 일군 헌병보조원으로서 순국 처녀 유관순양이 기미만세운동에서 활약하던 것을 직접 체포 수감하고 잔인한 고문을 하였다는 혐의로써 방금 준엄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

      동방신문 1949년 08월 09일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itemId=d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dh_013_1949_08_08_0080

  7. kimduhan 2018.08.17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럴드 경제는 정직하네요.

    ‘태평성시도’는 번화한 도시의 상업활동과 소비, 문화와 유흥의 중심지로서 한양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국의 ‘청명상하도’나 일본의 ‘낙중낙외도’와 가장 큰 차이는 실제 도시경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이 지향했던 이상적 도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1008000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