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소설책을 읽어준다고? 아니야. 한문책을 읽어야 잠이 잘 와.”
1758년(영조 34년) 도제조 김상로(1702~?)가 좀체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영조에게 “오늘 밤 제가 읽어주는 언문(한글) 소설책을 들으시면서 잠자리에 들으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영조는 “한글소설이 아니라 한문소설을 읽어야 잠이 올 것”이라면서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아재 개그’ 한편을 들려주었다.
“예전에 어떤 아낙이 아기가 울자 한문책으로 얼굴을 덮어주었네. 이웃집 사람이 그걸 보고는 ‘아니 왜 하필 한문책으로 아이 얼굴을 덮냐’고 물었네. 그러자 그 아낙은 이렇게 말했네. ‘아이 아버지가 잠을 청할 때마다 한문책을 읽읍디다. 그래서 나도 아이를 재우려면 한문책을 얼굴에 덮어줍니다.’ 어떤가. 아이 어미 말이 맞지 않은가. 한문책이야말로 사람을 잠들게 하는 책이라는 거지. 하하!”(<승정원일기> 1758년 12월19일)
■영조의 농담 “한문책을 읽어야 잠이 온데!”
영조는 소설을 무척 애호한 군주였다.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는 “북경에 가면 중국소설인 <탁록연의>와 <남계연담>을 특별히 구해오라”(<영조실록> 1772년 11월1일)고 신신당부했다.
한글소설 중에는 김만중(1637~1692)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그리고 <홍백화전>을 즐겨 읽었다. 특히 영조는 <구운몽>의 저자가 누구냐고 친히 묻고는 “문장이 매우 좋고 구성도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가 <구운몽>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 영조 뿐이 아니었다.
아들인 사도세자는 공부보다는 소설에 빠졌던 것 같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불과 4일 전인 1762년(영조 38년) 윤5월9일 <서유기>와 <수호지>, <삼국지> 등에서 128 장면을 뽑아 그림으로 그려놓은 <중국소설회모본>의 서문을 썼을 정도였다.
■숙직중에 소설책 봤다고 파직당한 신료들
그러나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소설을 터부시했다. 문체반정을 외치던 정조의 뜻이었다. 정조는 민간에 떠도는 잡담을 꾸민 패관잡기나 거짓투성이의 소설류를 배척했다. 연암 박지원에게는 “경박한 문체로 <열하일기>를 썼다”면서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고, 상재생(생원 혹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성균관 소속 유생) 이옥의 과거(대과) 응시를 막기도 했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에는 서학교수 이상황과 이조참의 김조순이 예문관에서 숙직하다가 재미삼아 소설책을 본 것을 적발했다.
두사람이 읽은 책은 당송시대의 각종 소설류와 <평산냉연>이었다. <평산냉연>은 재주가 뛰어난 남자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의 혼인과정을 소재로 한 청나라 통속소설이다. 정조가 소설을 “이치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해를 주는 음란하고 사특한 음악이나 색깔 같은 것”으로 치부했으니 화를 낼만 했다. 정조는 문제가 된 불온서적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이상황·김조순 등 두 사람을 파직시켰다.
정조는 임금에게 올리는 대책문에 ‘상스러운 패관문자’를 올린 초계문신 남공철(1760~1840)을 엄히 문책했다. 패관문자는 정통 산문문체인 고문(古文)과 상대적인 개념의 가벼운 한문문체이다.
주로 소설이나 야담 같은 서사물이나, 생활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낸 소품문을 가리킨다. 길이가 짧고 주제가 가벼우며 감성적인 산문 문장을 일컫는다. 요즘이라면 젊은이들이 주로 쓰는 인터넷용어나 은어 등이 포함된 것이리라. 남공철을 향한 정조의 추상같은 꾸지람을 보라.
“명색이 각신(규장각 관리)이고 명문가의 아들이라는 자가 가훈을 어기고 임금의 명령까지 저버린채 불경한 문체를 쓰다니…. 저 자가 반성할 때까지 경연에 얼씬도 못하도록 하고 그 집안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하라.”(<정조실록>)
남공철은 임금에게 올리는 대책문에 요즘으로 치면 젊은이들이 쓰는 신세대 용어와 문장을 쓴 죄로 곤욕을 치른 것이다.
■궁중은 물론 저잣거리에까지 블어닥친 소설열풍
이런 일화들은 18~19세기 조선에 불어닥친 소설 열풍이 궁중에까지 불어닥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대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역관을 통해 중국에서 새로운 서적들이 대거 들어왔다. 이무렵 서울의 중심가는 운종가를 중심으로 흥성했다. 남공철(1760~1840)은 “서울은 돈 가지고 살고, 팔도는 곡식 가지고 산다”(<금릉집>)고까지 했다. ‘여항’ 혹은 ‘여염’이라 일컫는 저잣거리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책은 중인과 평민의 벗이 되었다. 때를 맞춰 한문소설 외에 한글소설이 다수 창작되고 거질의 대하소설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은 여전히 대중이 소화하기에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역관을 통해 중국에서 수입되는 책을 다루는 서적중개인인 이른바 책쾌와 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전기수(傳奇수)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조수삼(1762~1849)의 <추재집>은 전기수의 활약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전기수는 한글소설인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을 읽어주었다. 매월 1일과 2일은 청계천 다리인 제일교와 제이교, 3일은 배오개, 4일은 교동(경운동), 5일은 대사동(인사동), 6일은 종각 앞에서 책을 읽어주었다. 7일부터는 역순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한달 단위로 청계천 주변을 돌며 책을 읽어준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왜 피살당했나
전기수의 책읽기는 요즘의 연예인을 방불케했다. 구름처럼 모인 인파 속에서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연기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 갑자기 대사를 멈추고 뜸을 잔뜩 들였다. 그러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청중이 앞다퉈 돈을 던졌다. 조수삼은 이것을 요전법(邀錢法·돈을 요구하는 수법)이라 했다. 인기 전기수는 거리에서 머물지 않았다. 부잣집 마나님들의 부름을 받아 여장을 하고, 여자 목소리를 내며 양반집 안채를 드나들었다.
안방마님과 정을 통하다가 적발되어 포도대장에게 죽임을 당한 전기수도 있었다.
1790년(정조 16년) 정조 임금은 “실로 어이없이 죽임을 당하는 맹랑한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면서 종로에서 일어난 전기수 피살사건을 예로 든다.
“어떤 사내가 종로 절초전(담배 썰어 파는 가게) 앞에서 전기수가 소설을 읽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영웅이 실의에 빠진 대목에 이르자 구경꾼 하나가 돌연 눈초리가 찢어지도록 눈을 크게 뜨고 입에서 거품을 내뿜었다. 사내는 담배 써는 칼로 전기수를 찔러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말았다.”(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아정유고·은애전’)
책 읽어주는 남자, 즉 전기수가 읽은 책은 <임경업전>이었다. 당대의 학자 심노숭(1762~1837)은 “임경업 장군이 역적 김자점의 무고로 목숨을 잃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흥분한 구경꾼이 실감난 연기를 펼친 전기수를 찔러 죽였다”고 전했다.
■조선판 도서대여점의 등장
책쾌와 전기수 외에 세책점(貰冊店)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세책점이란 1990년대 유행했던 도서대여점을 연상시킨다.
요즘 선보이고 있는 전자책 스트리밍 서비스 역시 18~19세기 세책점의 업드레이드 버전이 아닐까. 아직까지 책을 사고 파는 일이 익숙치 않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책을 일일이 필사해서 분책한 뒤 빌려주는 서비스가 바로 세책점이었다. 세책점은 당대 불어닥친 소설열풍을 타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심지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명재상인 채제공(1720~1799)과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여인들이 책을 빌리느라 가사를 탕진할 정도”라며 혀를 끌끌 찼다.
“부녀자들이 패설(소설)을 앞다퉈 숭상한다. 거간꾼은 책을 깨끗이 베껴 돈을 받고 빌려준다. 부녀자들은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빚을 내더라도 다투어 빌려간다. 책읽기로 긴긴 해를 보낸다.”(채제공의 <번암선생문집>)
“집안 일을 내버려두고 소설을 빌려보는 것에 정신이 팔려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이야기는 모두 투기와 음란한 내용이다. 요즘 부인들의 방탕함과 방자함이 여기서 비롯됐다.”(이덕무의 <사소절>)
19세기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세책점 모습도 비슷했다. 1891~93년 사이 조선에서 일본어교사로 일한 일본인 오카쿠라 요시자부로(岡倉由三郞·1865~1935)는 “일본의 가시혼야(貸本屋)처럼 조선에도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가 있다”고 소개했다.
“세책가에는 한글소설 뿐 아니라 <서유기>, <수호전>, <서상기> 등 중국 소설의 번역본도 있다. 냄비, 솥 등 아무거나 어느 정도 값어치가 있는 물건을 세책가에 가져가서 보고싶은 책을 빌린다. 요금은 2~3일 기한에 권당 2~3리 정도다.”(오카쿠라의 <조선의 문학>)
1890~92년 사이 조선에 체재한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1865~1935) 역시 생생한 필치로 세책집의 유행을 전한다.
“세책점은 책방보다 양질의 종이에 인쇄됐다. 10분의 1~2문에 빌려주는데, 흔히 돈이나 물건을 담보로 요구한다. 물건은 운반하기 쉬운 화로나 솥 등을 들 수 있다.”
■부인들에게 시원한 하늘을 보여준 소설세계
세책점은 특히 여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세기말~20세기초 서울의 세책점은 30곳이 넘었다. 월탄 박종화(1901~1981)의 회고담이 흥미롭다.
“시골로 시집간 여인네들이 서울 친정나들이할 때는 책세집에서 책을 빌려와 읽었다. 서울의 책세집은 장마철이 석달 넘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새색시가 장마 핑계를 대고 얼른 시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박종화의 ‘월탄회고록’, 1972년 3월22일 한국일보)
아낙네들이 빌려보는 책 중에는 <콩쥐팥쥐전>이나 <별주부전>이 인기였다.
박태원(1910~1986)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동전 한 푼과 주발 뚜껑을 담보로 주고 가장 재미있는 춘향전을 빌려본 주인공 구보씨’를 묘사했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은 1938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글에서 “전성기 세책의 종류는 수백종 누천권을 초과했고, 수십년전(1912년)까지 남아있던 황금정(을지로)의 한 세책점에서만 총 120종 3221권이 남아 있었다”고 전했다.(최남선의 ‘조선의 가정문학’ 1938년 7월30일)
최남선의 한마디가 흥미롭다.
“골방 속에 갇혀 지내던 부인네들에게 달밝고 별 깜박거리는 시원한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 실로 이 소설의 세계였습니다.”
■실명거론에 가족까지 들먹인 조선판 댓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는 세책은 지저분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구석기 시대부터 공간만 있으면 뭔가를 끄적거린 인간의 낙서 욕구는 절대 말릴 수 없다.
지금까지 국내외 기관이나 대학에 현전하는 세책본 소설은 대략 90종이다. 유춘동 선문대 교수(역사문화콘텐츠학과)의 연구에 따르면 90종의 세책본 소설 중에 확인할 수 있는 낙서의 총량은 대략 1500건에 달한다. 이 중 책세점 주인에게 쌍욕을 곁들이며 “책 빌리는 값이 너무 비싸다”고 비판한 낙서가 눈에 띈다.
“책주인아, 너 너무 책세를 많이 받이서 욕을 했는데, 또 이 낙서를 보고도 예전 같이 돈을 받으면 감옥소에 보내 종신징역하게 될 터이니 조심해. 좌편에 있는 ○○와 ××는 너와 네 어미와 △하는 거야.”
책주인 부모가 성교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남자의 성기 옆에 나체 상태의 책주인 어머니를 그려놓고는 “이 물건은 세책점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쓴다든지, “네 딸년을 나한테 보내라”든지 하는 욕설도 보인다.
“책주인 안주인 보소. 금일 저녁 갈 터이니 방에 불이나 더 지피고 베개를 둘이나 놓고 기다리라” “책이 재미있어 잘 보았다만은 책 주인 모(어미)가 생각나서 기별하니 부디 네 어미를 단장시켜 이 글을 쓴 양반에게로 시집보내라”는 낙서도 있다.
■실명거론에 신상털이까지
주인의 실명을 거명하고 비판하는 경우도 제법된다.
이름 석자만 쓰는 경우도 있지만 “임경삼아. 내용을 고치라고 몇번을 말했느냐”는 대놓고 실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張周泳馬子也 魚犬子雜種類’처럼 세책점 이름(장주영)을 거론한 뒤 한글욕을 한자로 옮긴 경우도 있다.
책주인의 실명을 거론한 것도 모자라 그 가족까지 들먹이며 성적인 욕을 서슴치않고 해대는 모양이 어쩌면 그렇게 요즘의 인터넷 댓글과 비슷한지 모르겠다.
물론 게중에는 그나마 지적이고 점잖은 낙서도 있었다. 월남과 파란(폴란드)의 망국사까지 들먹이며 세책집 주인을 비판한 낙서다.
“야. 지금은 약육강식에 우승열패하는 20세기에…우리나라 형편이 어찌 되었는고. 월남과 파란의 망국사를 보지 못했는가. 이런 세계에 음담패설로 꾸민 언문 이야기 책을 돈받고 세를 놓을 게 뭐냐.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풍속의 좋고 그른데 크게 관계있나니 내 말을 그르다 말고 이후에는 책세를….”
심지어 세책값 시비가 붙어 세책 주인의 “대가리(머리)가 구녁(구멍)이 뚫어지도록 두들겨서 붙잡혀갔다”는 내용까지 기록한 낙서도 있다.
■조선판 댓글릴레이
낙서한 사람을 향한 욕설도 눈에 띈다. 시쳇말로 댓글 릴레이이다.
“이것 쓴 사람은 개자식”이라든지 “이 글씨 쓴 자식은 개자식의 자손”이라든지 “만약 이 낙서를 보고 욕하는 놈은 내 아들이다”라든지 하는 식이다.
이런 ‘악플’이 한심했던지 댓글을 다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낙서도 있다. 아니면 욕설을 들은 세책업자의 답글일 수도 있다.
“이 세책 보는 사람은 곱게 보시고, 낙서하지 말고…무식하게 욕설을 기록하지 마시오. 그리고 지금 관민이 아사(굶어죽은) 지경인데 어찌 이야기책만 보시오.”
“이 책에 욕설을 쓰거나 잡설을 쓰는 폐단이 있으면 벌금을 낼 것이니 이후로 깨끗이 보시고 보내주소.”
책의 내용에 대한 독자의 감상과 촌평도 있었다.
예컨대 <삼국지>를 읽고서는 “이 책인 삼국지라 칭하나 삼국지가 아니라 망국지”라 하는가 하면 “가련타! 유황숙(유비)이여! 통일천하 하기 전에 영안궁에서 귀천하니 천도가 무심하고…”라는 낙서를 쓴 이가 있었다. 또 관우가 여몽에게 허무하게 죽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여몽 때려죽일 놈”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어떤 경우엔 책을 읽고 상상해서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물론 남녀의 성기와 성교 장면을 그린 경우도 많다. 처녀 총각을 등장시켜 성교직전의 심리상태를 그린 것들이 대다수다.
“화부인이 ○○이 꼴려 머리를 땋고서 방구해 보겠다고 나갔다가 건너 한 총각이 있음을 보고 사람을 살려라 하면서 ××을 가르치고 진저리 치는 형상”이며, “개총각이 춘흥을 못이겨 ○을 꼰아가지고 있던 차에 저 건너 처녀가 발가벗고 있는 것을 보고 △△을 흔들고 처녀야, 처녀야 부르는 화상”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한 낙서도 있다.
이밖에도 ‘책보는 갈보들 듣게, 책 보지 말고 오망구 한판씩 주게. 그것 한번 주면 40원’이라든지 “이것은 남녀가 ○하는 것이라”라든지 하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휘갈린 경우도 꽤 된다.
■당대 최고의 히트곡은 ‘유산가’
이외에도 당대의 유행가를 끄적거린 경우도 많다.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와 가사인 ‘상사별곡’, 가곡인 ‘황산곡’, 단가인 ‘소춘향가’, 고시조인 ‘서산에 일모하니’ ‘담바고 타령’, 민요인 ‘성주풀이’와 ‘수심가’ 등이 있다.
특히 전문적인 소리꾼이 불렀던 민속성악곡인 ‘유산가(遊山歌)’는 19세기말~20세기초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것 같다. 현전하는 90여종의 세책 중 20종에서 낙서가 보인다.
19세기판 조선을 뒤흔든 최고의 히트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산곡은 봄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면서 봄구경을 권하는 노래다. 주로 서울의 사계축(서울 만리동·청파동 일대)의 소리꾼들에 의해 전승됐다.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구경가세…”하는 가사이다.
■댓글의 주공격대상은 이완용, 송병준
낙서 가운데는 시대상황을 과감하게 꼬집는 이른바 ‘시국 낙서’도 심심찮게 있다.
조선말기~대한제국기를 거쳐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는 1890~1910년의 암울한 시대를 상징한다.
낙서, 즉 댓글의 주공격 대상은 역시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 등이다.
“대한제국 인민들아. 자세히 들어보라, 이 나라 망하게 놓은 자는 누구냐 하면 이완용과 송병준이라 하니 우리 대한 동포들아 일심하세. 그 두 놈을 잡아내어 장안에서 만민의 원수를 갚으세.”
“대역부도 이완용아 천하의 몸쓸놈 아무 때 죽어도 내 손에 죽으리라. 총리대신 이완용 개자식.”
공개적으로 입밖에 낼 수 없는 조선 민중의 울분이 이 세책본 낙서로 표출된 것이다. 어떤 낙서는 백성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슬프다 대한이여! 관민 간의 눈을 들고 잠들을 깨요.”
“우리 대한국 이천만 동포들아! 언제나 자주 독립하여 일본을 함몰하여 다 죽이고 언제나 대한 동포끼리 살어볼까. 이 책 보는 동포들은 이 글을 보고 아무쪼록 정신을 차려서 일본을 다 죽이고 삽시다.”
“심심하니까 이런 고담(옛 이야기)만 보겠지요. 고담을 보지말고 학교에 가서 교사합시다.”
신식 교육만이 살길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세책의 낙서과 요즘의 인터넷 댓글을 비교하면 어떨까..
“가감없는 의식표출이며 제한적이지만 향유자 쌍방의 의사소통이고 당대 사회현상의 반영”(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이라는 점에서 세책의 낙서는 요즘의 인터넷 댓글과 중첩된다. 익명성에 기댄 지독한 욕설과 신상털기 등도 지금의 댓글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또한 당대 사회의 민낯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 자체로 소중한 역사자료임이 틀림없다.
■이광수 김동인 작품보다 인기있었던 길거리 베스트셀러
<삼국지>나 <수호지> 등 중국소설의 번역물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8~19세기를 풍미한 베스트셀러 한글창작소설들도 부지기수다.
<윤하정삼문취록>(186책)이나 <명주보월병>(117책) 등은 100책 이상의 대하소설이며, <현씨양웅쌍린기>(24책)나 <옥루몽>(30책) 등은 20책 이상의 장편소설이다. <춘향전>(10책), <남정팔난기>(14책>은 물론이고 <홍길동전>(3책)>, <소대성전>(2책), <유충렬전>(7책) 등이 있다. 이밖에도 <조웅전>, <임경업전>, <숙영낭자전>과 <심청전>, <여장군전> 등도 있었다.
한글소설이나 번역소설은 비록 전국적인 유통망은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유통되는 지역, 특히 서울에서는 거의 전 계층의 심금을 사로잡는 오락물이었다. 아마 꼬장꼬장한 사대부 남성들도 앞에서는 눈쌀을 찌푸리는 척하면서 뒤돌아서서는 이른바 통속소설을 탐독하며 웃고 울었을 것이다.
영조 임금까지도 ‘잠을 청하려면 한문소설을 읽어야지 한글소설을 읽어서는 안된다’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1912년 활판본 소설이 간행되면서 한글소설은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윤석 연세대 교수(국문학)의 언급대로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소설을 지은 이나 소설을 읽은 독자나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개화기를 맞아 이른바 고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류는 퇴폐적인 유물로 폄훼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춘향전>, <홍길동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 고소설이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는 점이다. 여인네들이 가재도구를 탕진하면서까지 책을 빌려보았을만큼….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유춘동, ‘세책본 소설 낙서의 수집, 유형분류, 의미에 관한 연구, <열상고전연구> 45권45호, 열상고전연구회, 2015
이민희, <세책, 도서대여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조선시대 세책본의 댓글’, <문화재사랑> 통권 163호, 문화재청, 2018
이윤석, <조선시대 상업출판-서민의 독서, 지식과 오락의 대중화>, 민속원, 2016
정명섭, <조선직업실록>, 북로드, 2014
우정임, ‘16세기 방각본의 출현과 책쾌의 활약’, <역사와 경계> 76집, 부산경남사학회, 2010
이태영, ‘완판방각본의 유통 연구’, <열상고전연구> 61권, 열상고전연구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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