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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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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에 맞서다 숙청 ㆍ1959년 류사오치(劉少奇) 중국 국가주석 취임 1959년 4월27일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인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에 올랐다. 당시 중국대륙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자력갱생을 도모하던 마오쩌둥은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우경 보수병에 걸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가고 있다”면서 “대약진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이다. 이를 위해 7만개의 인민공사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5000~6000개의 향(鄕)을 한 단위로 묶은 인민공사는 농·공·상·학·병을 집결한 집체경제의 단위였다. 하지만 이 급작스럽고 과도한 드라이브 정책은 재앙을 낳았다. 인민들은 수확철인데도 ‘영국 따라잡기’를 위한 철강생산..
마지막 영국 식민지 짐바브웨의 독립 ㆍ권력의 ‘달콤한 독’ 로버트 무가베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1924년 극소수의 영국계 백인이 절대다수 흑인을 지배했던 영국 식민지 로디지아의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독학으로 영국 런던대를 졸업한 뒤 로디지아 소수 백인정권에 항거하는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치열한 무장투쟁 끝에 승리를 쟁취한 무가베는 80년 4월18일 독립을 선포, 짐바브웨 공화국을 탄생시킨다. ‘독립의 영웅’은 실용적 사회주의자를 표방했다. 농지분배와 대대적인 의료사업, 그리고 무료교육 등을 실시, 문맹률을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최저인 15%까지 끌어내렸다. 또한 비동맹 외교의 중추역할을 담당, 나라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그런 그에게 ‘흑백간의 공존을 이룬 모범생’이란 별명이 붙었다. 하지..
1971년 중·미간 핑퐁외교 시작 ㆍ적의 적은 ‘친구’ 1971년 3월 말,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던 일본 나고야. 장발과 꽃무늬 의상으로 ‘히피’라는 별명을 얻은 19살 미국선수 글렌 호완이 돌연 중국 선수단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5분간 동안 중국선수 좡쩌둥(莊則棟)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 만남이 불과 며칠 뒤 세계사의 물꼬를 바꿔놓는 실마리가 되었다. 좡쩌둥은 61·63·65년 세계대회 단식우승을 차지한 중국선수단의 선수 겸 부단장. 그는 마오쩌둥·저우언라이의 명(命)을 받아 미국선수와 접촉한 것이다. 중국은 즉시 미국선수단을 초청했다. 4월10일 미국선수단은 열렬한 환호 속에 베이징에 도착, 국빈대접을 받는다. 호완은 수만명의 인파 속에서 “나야말로 마오 주석의 말마따나 요원의 불길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며 으쓱댔다. 유명..
1982년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무력점령 ㆍ끝나지 않은 ‘영토분쟁’ 아르헨티나군이 마젤란 해협에서 500㎞ 떨어진 포클랜드(아르헨티나어로는 말비나스) 제도를 무력점령했다. 1833년 영국의 자치식민지가 된 이후 끈질기게 영유권을 주장해온 아르헨티나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의도는 영유권 확보뿐이 아니었다.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에 따른 민심이반과 치솟는 인플레이션 등 아르헨티나 국내 위기를 전쟁으로 풀어보려는 술수였다. 1만3000여㎞ 떨어진 곳에 있는 “영국이 도대체 어쩔 것이냐”는 계산도 숨어있었다. 영국 내에서도 “거기가 우리 땅 맞냐”고 반신반의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국을 이끈 이는 ‘철의 여인’ 대처 총리였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영국민을 단합시키고 즉각적인 군사작전을 펼쳤다. 4월26일 영국은 대규모 기동..
1991년 남북탁구단일팀 첫 해후 ㆍ46일간의 ‘작은통일’ 어언 18년 전의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1991년 3월25일 오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할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한 달간의 합동전지훈련을 위해 일본에서 해후했다. 취재차 남측선수단과 같은 비행기를 탔던 기자가 입국수속을 마치자마자 역시 막 도착한 북측선수단을 만나러 무거운 짐을 끈 채 마구 뛰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분단 46년 만의 첫 만남. 한반도를 그린 ‘파란 단기’의 기치 아래 남북의 젊은이들은 전지훈련 도중 금방 ‘작은 통일’을 이뤘다. 남은 북을, 북은 남을 모방했다. 북한 리분희는 저도 모르게 ‘앗싸’ 대신 ‘파이팅’을 외쳤고, 현정화는 ‘기랬지. 이 동무들’하면서 북측 말을 흉내냈다. 4월24일 개막된 대회에서 현정화·홍차옥(이상..
1957년 막사이사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 ㆍ‘정직’으로 민심을 사다 “각하, 이렇게 깊은 밤에 떠나려 하시면….”(오스메나 세부시장) “아닐세. 난 너무 할 일이 많아서….”(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1957년 3월17일 일요일 새벽 1시. 세부를 방문했던 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을 태운 마닐라행 비행기가 칠흑의 어둠을 뚫고 이륙했다. 약 17분 뒤인 1시17분쯤 필리핀 역사상 가장 비통한 사고가 일어났다. 비행기가 카발라산(해발 988m) 봉우리에 부딪혔고, 사망자 명단엔 대통령이 포함돼 있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국민을 사랑한 지도자’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때 게릴라 지도자로 활약했다. 필리핀 독립(1946년)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국방장관(1950년)-대통령(1953년)이 되자 골칫거리였던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인 후크단을 진압하는..
1967년 스탈린 딸 스베틀라나 망명 ㆍ끝내 얻지 못한 ‘자유’ 1967년 3월9일,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딸이 인도 주재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41살의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였다. 서방은 암울했던 스탈린 치하의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끓었다. 기구한 여인의 행적도 주목받았다.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이 낳은 딸. 어머니는 말년에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학대 속에 1932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스베틀라나는 16살에 영화제작자 알렉세이 카플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훗날 카플러는 이루어지지도 못한 이 사랑의 대가로 10년간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야 했다. 이후 3번의 결혼-이혼을 거친 스베틀라나는 53년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
1987년 평화의 댐 착공 ㆍ對국민 사기극 1986년 10월30일. 당시 이규호 건설부 장관의 발표는 전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북한이 비밀리에 200억t 저수용량의 금강산댐(임남댐) 건설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만약 댐이 무너지면 서울은 12~16시간 내에 물바다가 되고 여의도 63빌딩의 3분의 2, 국회의사당의 지붕부분만 남게 된다는 충격적인 시뮬레이션 결과를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국민들은 경악했다. 북한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 댐을 세웠다고 당국은 설명했다. 성금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코흘리개 어린이부터 지팡이를 쥔 어르신까지 줄을 섰다. 정부는 11월26일 대응댐인 ‘평화의 댐’ 건설계획을 세웠고, 이듬해인 87년 2월28일 강원 화천군 동촌리에서 첫삽을 떴다. 89년 5월27일 댐 높이 80m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