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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광화문 현판’에 웬 색깔 논쟁?…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사연

1997년 11월11일, 경복궁 내 경회루 연못을 준설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이 흥미로운 유물 하나를 건져냈습니다.
큰 돌에 눌린채 직사각형 돌판 위에 놓여있던 청동용이었는데요. 몸과 머리가 분리됐고, 발도 일부 절단된 상태여서 그리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청동용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는데요. 혀를 쑥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해학적인 형상의 청동용(龍)이었답니다. 조사단은 무릎을 쳤습니다.

■경회루 연못에서 혀를 내민 청동용이 
조선 후기 유학자인 정학순(1805~1890)이 경회루의 건축원리를 기록한 <경회루전도>(1865년 제작)를 떠올린 건데요. 
즉 <경회루 전도>는 “경회루 연못의 북쪽(감방·坎方·물의 방향)에 (불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물의 신인 청동용(銅龍) 두마리를 잠겨넣었다”고 썼거든요. “불을 제압하려고 세운 경회루의 모든 구성은 ‘물의 숫자’인 ‘6’으로 이뤄졌다. 청동용 2마리를 연못에 넣음으로써 불 기운이 있는 ‘동(銅)’과 불의 수인 ‘2’를 물을 상징하는 ‘감육(坎六) 방향’(북쪽)에 넣어 높은 수인 6이 낮은 수인 2를 누르고자 한 것이다.”(<경회루전도>) 

2001년 1월18일 오후 2시, 근정전 해체 도중 상층 종도리에서 근정전 중수의 내역을 기록한 상량문과 함께 ‘수(水)’자와 ‘용(龍)’자를 표현한 부적과 육각형 은판이 확인됐다.

1865~68년 경복궁의 중건과정을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에도 청동용 이야기가 나옵니다.

“1867년(고종 4) 7월 12일 경회루 연못의 석축 아래 샘 주위에 돌함을 만들어 용 한 쌍을 가라앉혔다. 물은 습함으로 흐르고 구름은 용을 따르는 바 감응하는 것이 기운에 맞는 것이며, 하늘은 하나로 생기고 물(坎)은 여섯(6)으로 왕성하니….”
왜 용을 경회루에 넣었을까요. 용을 넣고 떡과 과일, 술 등을 올려 제사를 지내며 읽은 고사문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근정전 종도리에서 상량문과 함께 발견된 ‘물 수(水)’자 부적. 38.3㎝×44.5㎝의 장지에 물 ‘수(水)’자를 윤곽으로 하고 그 안에 깨알 같은 글씨로 용(龍)자를 1000여자 채워 넣었다.

“…(물의 신인) 쌍룡을 주조하니…근엄한 머리뿔이 산처럼 높고 300개의 비늘로 우두머리가 되었으니…물을 쓰면 불이 사라지고, 물이 기운을 받으면 불이 사그러드니…물의 기운을 머금어 항상 뿌려 만세토록 궁궐을 보호하소서.”(<경복궁영건일기>)
용이 어떤 동물입니까. 임금의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었죠. 또한 물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예부터 가뭄 때 용에게 기우제를 올렸고, 어민들은 풍어를 위해 용왕님께 제사를 지내왔죠. 불을 다스려 화재를 막아주는 신령으로도 알려져 왔습니다. 경복궁 중건 때도 경회루 연못에 용을 넣어줌으로써 궁궐을 화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낸 겁니다. 

은판을 육각형으로 만든 이유가 있다. <경복궁영건일기>와 <경회루전도> 등을 보면 <주역>에서 6이라는 숫자는 물(水)을 상징하는 숫자라 했다. 육각형 은판 5점을 붙여보면 겹친 자리에 ‘물이 아득하다’, ‘물이 수면에 가득하다’는 뜻의 ‘묘(묘)’자가 나타난다.


■용(龍) 1000마리가 새겨진 물 수(水)자 부적
그뿐이 아닙니다. 그런데 4년 뒤인 2001년 1월, 근정전 중수공사를 위해 종도리를 살피던 조사단의 눈이 무언가가 걸렸습니다. 1867년(고종 4) 근정전의 중수가 끝났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梁文)이 발견된 겁니다. 상량문에는 공사 담당자 156명의 명단과 흥선대원군의 업적 등이 담겨 있었는데요. 그러나 정작 조사단의 눈을 잡아끈 대목은 따로 있었습니다.
‘물(水)’과 ‘용(龍)’으로 도배한 부적 3점과 육각형판 5점이 보인 겁니다. ‘용’ 부적의 목적은 분명했죠. 임금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살펴봤듯이 ‘물의 신’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장도 아닌 두 장에 ‘용(龍)’자를 깨알같이 1000여 자씩 메워 썼는데, 완성된 글자가 다름아닌 물 ‘수(水)’자 였습니다. 다른 부적 1점은 역시 용을 그린 묵룡화였습니다

경복궁 안에 경회루를 조성하고, 청동용을 연못 속에 넣은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불(火)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1867년 7월12일 청동용을 경회루 연못에 넣은 뒤 떡과 과일, 술 등을 올려 제사를 지냈다. 이때 청동용을 제작한 별간역 김재수는 고사문에서 “…(물의 신인) 쌍룡을 주조하니…근엄한 머리뿔이 산처럼 높고 300개의 비늘로 우두머리가 되었으니…물이 기운을 받으면 불이 사그러드니…물의 기운을 머금어 항상 뿌려 만세토록 궁궐을 보호해달라”고 기원했다.

육각형 은판 5점 역시 흥미를 자아냈는데요. 1점 당 폭 3.6㎝, 두께 0.25㎝의 육각형 은판의 모서리마다 물 수(水)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왜 ‘육각형’ 은판이었을까요.

앞서 인용한 <경회루전도>와 <경복궁영건일기> 등에 숫자 ‘6’이 유독 강조되었잖아요. <주역>에서 6은 물의 숫자였다는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더 있습니다. 발굴단에서 육각형 은판 5점을 붙여보았는데요. 
그랬더니 물 水자가 3개 모인 ‘묘(묘)’자가 되는 겁니다. 묘(묘)자는 ‘물이 아득하다’, 혹은 ‘수면(水面)이 아득하게 넓다’는 뜻입니다. 그러고보니 은판을 싼 종이에도 묘(묘)자를 써놓았네요. 어떻습니까. 무슨 물 수(水)자에 한맺힌 사람들 같죠.
<경복궁 영건일기> 1867년 2월9일자에 ‘용(龍)자 1000개로 만든 ’수(水)‘자 2점과, 묵룡도(용그림) 1점을 상량문 위아래·허리춤에 넣어두었는데, 불을 제압하기 위해서(皆所以制火)…’라 했습니다. 일기기록과 출토 상황이 부합되죠.

2001년 1월18일 오후 2시, 근정전 해체 도중 상층 종도리 하단의 장여 중앙부 북측에서 발견된 구멍. 그곳에서 근정전 중건 사실을 고한 상량문과, 공사참여자(156명) 명단, 그리고 중건을 지휘한 흥선대원군(1820~1898)의 공적을 칭송한 글이 노출됐다. 여기서 ‘수(水)’자와 ‘용(龍)’자 부적과 육각형 은판도 보였다.

■육각형 은판의 비밀
그런데 경회루 청동용과 근정전의 물 수(水)자 용 부적 및 육각형 은판으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경복궁 영건일기>를 보면 강녕전에도 상량문과 함께 수(水)자를 새긴 6각형 은판을 넣었고(1865년 10월 11일), 경회루에도 수은을 담은 병과, 은판, 수(水)자 부적 2장, 묵룡화 1장 등을 상량문과 함께 매납(경회루·1867년 4월 20일)했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근정전의 정면 서쪽 계단 옆에는 물을 가득 담은 ‘드므’를 설치했죠. 
‘드므’는 무쇠로 만든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 말입니다. 건축물이 화재에 휩싸였을 때 화마(火魔)가 드므의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설치한 거랍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을 세워놓았죠. 해태는 불을 먹는 물귀신을 뜻합니다. 그것으로도 미덥지 못했는지 불의 형상인 관악산의 화기를 잠재우려고 산 정상에 돌을 파서 6각지 형태의 우물을 팠답니다.(<경복궁영건일기> 1866년 1월6일) 

<경복궁영건일기> 1867년 2월9일자는 “‘용(龍)’자 1000개로 만든 ‘수(水)’ 2점과, 용그림 1점을 상량문 위아래·허리춤에 넣어두었는데, 이것은 불을 제압하기 위해서(皆所以制火)였다’고 기록했다.

■광화문 현판, “어떤 ×이 썼어?”
또 하나의 반전 팩트가 있습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있죠. 
1865~68년 사이에 경복궁과 함께 복원된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훼철되고 소실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쳤죠. 그러다가 1968년 원래 위치에서 복원한다고 했지만 그때도 논란을 빚었습니다.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복원되었기 때문이죠. 복원된 광화문은 원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올라갔구요. 그것도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진 채로 복원됐어요. 당시 광화문을 중앙청의 정문으로 사용하려고 중앙청 축에 맞춰 바꾼거죠. 

1968년 광화문 중수 후 내걸린 박정희대통령의 친필 한글휘호 현판.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썼다. 그러나 2010년 원 위치로 복원된 광화문에 걸린 새로운 현판은 1865~68년 중건 당시 광화문 현판글씨를 담당한 훈런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한 한문 ‘光化門’이었다. 그러나 이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제작됐다.

여하튼 그때 내건 광화문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친필(‘광화문’)이었습니다. 당시 현판식에 참석한 서예가 출신 윤제술 국회의원(1904~1986)이 대통령의 현판글씨를 보고 “어떤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어”하고 큰소리로 욕했답니다. 
그러자 곁에서 ‘대통령’이라고 쿡쿡 찌르자 순간 기지를 발휘해서 “그래도 뼈대는 살아있구만!”하고 위기를 넘겼다는 일화가 떠돕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박대통령도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듬해 현판글씨를 다시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2006년부터 ‘광화문 제모습 찾기’ 사업이 시작되고 4년 뒤인 2010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광화문은 원래의 위치의 제모습으로 복원됩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의 현판글씨가 내려지죠. 대신 1865~68년 광화문 중건 때 광화문 현판의 주인공인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한 한문 ‘光化門’ 현판을 걸었습니다. 


■“흰색 바탕이 아닌 검은색 바탕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건 현판이 금세 균열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재복원이 결정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흰색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한 현판이 좀 이상하다는 지적이 잇달았습니다. 아무리봐도 검은색 바탕이 맞다는 겁니다. ‘색깔논쟁’이 벌어졌던거죠. 
2015년 궁중화사 출신의 안중식(1861~1919)의 1915년 작품인 ‘백악춘효(白岳春曉)’(2점)에서 검은색 바탕의 광화문 현판이 보인다는 등의 자료를 공개한 논문(강임산의 ‘1968년 광화문 복원의 성격’, 명지대 석사논문, 2015)이 나왔습니다.

1940년 서양화가 심형구(1908~1962)가 그린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광화문 현판’에도 어두운 바탕에 밝은 색의 글씨가 보입니다.

1940년 서양화가 심형구(1908~1962)가 그린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광화문 현판’에도 어두운 바탕에 밝은 색의 글씨가 보인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도쿄대(1902년)과 국립중앙박물관(1916년) 소장 흑백사진을 보면 흰색바탕에 검은색 글씨가 맞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던 2018년 들어서 문화재청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광화문 사진(1893년) 등을 토대로 과학적 분석을 해보니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가 맞는 것 같다”고 인정했는데요. 
그런데 그해(2018년) 말 매우 흥미로운 자료가 하나 공개 되었습니다. 광화문을 비롯한 경복궁 전각들의 현판이 ‘검은 색 바탕에 금색동판’으로 특별 제작되었으며, 그 이유는 ‘화재 방지용’이었다는 역사기록이 확인된 겁니다. 
바로 일본 와세다대(早稻田大)가 소장한 <경복궁 영건일기>를 분석한 논문(김민규의 ‘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 <고궁문화> 11호, 국립고궁박물관, 2018) 덕분이었다. 

즉 <경복궁 영건일기> 1865년 10월11일자는 “광화문 현판은 묵질금자(黑質金字·검은 색 바탕에 금색글자)로 되어 있으며, 동판으로 획을 만들었고, 10품금 4량으로 거듭 칠했다”고 했습니다. 
광화문 현판 뿐 아니라 근정전 현판 역시 ‘검은색 바탕에 금박 동판을 씌운 글씨’로 제작했습니다.(<경복궁 영건일기> 1867년 4월22일) 즉 동판(銅板)을 글씨 모양으로 자른 뒤에 금을 칠한 겁니다. 
그런데 검은색 바탕은 광화문·근정전 뿐 아닙니다. 경회루, 교태전, 강녕전, 근정문, 건춘문, 신무문 등이 모두 현판 바탕이 검은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동판 글씨를 쓴 광화문·근정전과 달리 경회루, 교태전, 강녕전은 나무판에 글자를 조각한 뒤에 금박(金箔)을 입힌 겁니다.

일본 와세다대도서관 소장 <경복궁 영건일기>는 “광화문·근정전 뿐 아니라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경회루, 근정문, 건춘문, 신무문 등의 현판 색깔이 검은바탕”이라고 분명히 기록했다.

■검은색 바탕은 화재예방용?
그러나 두 방식 다 공통점이 있죠. 검은 바탕색이라는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1867년(고종 4) 4월21일 교태전과 강녕전 현판 관련 기록에 심상치않은 내용이 보입니다.
즉 “교태전·강녕전 현판의 묵질금자(墨質金字·검은 바탕에 금색글자)로 했다”는 기록과 함께 각주에 “경복궁의 각 전당은 모두 ‘검은 바탕’이었고, 이는 불을 제압하는 이치를 취한 것(皆爲墨質 取制火之理)”이라고 부연설명돼 있습니다. 
검은 색이 불을 제압한다구요. ‘검은 색’은 사신도의 ‘북 현무(北 玄武)’에서 보듯 음양오행 가운데 ‘북쪽과 물(水)’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경복궁 중건 때 각 전각의 현판을 검은색 바탕으로 한 이유는 바로 ‘화재방지용’이었던 겁니다.

<경복궁영건일기> 1867년 4월21일자는 “교태전·강녕전 현판의 묵질금자(墨質金字·검은 바탕에 금색글자)로 했다”는 기록과 함께 각주에 “경복궁의 각 전당은 모두 ‘검은 바탕’이었고, 이는 불을 제압하는 이치를 취한 것(皆爲墨質 取制火之理)”이라고 설명해놓았다. ‘검은 색’은 사신도의 ‘북 현무(北 玄武)’에서 보듯 음양오행 가운데 ‘북쪽과 물(水)’을 상징한다.

그런 것을 모르고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해놓았던 겁니다. 문화재청은 새롭게 등장한 여러 증거들을 참고해서 그간의 오류를 바로잡은 뒤 광화문 현판을 ‘검은색 바탕에 금박 동판을 씌운 한문 글씨’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광화문’ 현판은 각자(刻字·글자를 새김)와 단청을 마무리했다는데요.

지금은 글자에 금박을 씌운 동판을 덧대는 작업만 남았는데, 동판의 설계를 진행 중이라는데요. 검정 바탕에 금박 글자로 된 광화문 현판이 내년 하반기에 완성된답니다. 
새 현판의 완성은 내년에 마무리될 광화문 앞 월대(月臺·기단 형식의 대) 복원 공사와 맞물려 있는데요. 1월1일이나 삼일절, 광복절 뭐 이런 상징적인 의미가 부각될 수 있는 날을 선정해서 설치할 것 같습니다.

■무학대사의 불길한 예언
어떻습니까. 경복궁 중건 때 흥선대원군(1820~1898)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감이 잡히시죠. 그의 뇌리에 온통 ‘불, 불, 불’ 밖에 없었던 겁니다. 따지고 보면 흥선대원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초부터 경복궁의 ‘화기(火氣)’를 잠재우는 것이 풍수학상 관건이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은 재미있는 야사를 전하죠.
“한양의 진산을 인왕산으로 잡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대사(1327~1405)와 “제왕은 남면(南面·남쪽을 향해 앉아 다스려야 한다는 뜻)해야 한다”는 정도전(1342~1398)의 논쟁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흥선대원군(1820~1898)의 뇌리엔 오로지 화재방지대책 밖에 없었다. <경복궁영건일기> 등 자료를 보면 경복궁을 풍수상 물바다로 만들어 화재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하다.

이때 정도전의 주장이 먹히자 무학대사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아닌게 아니라 경복궁은 이후 여러차례 화마에 휩싸이죠.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은 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됩니다. 게다가 무학대사가 예언한대로 꼭 200년 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왜적의 방화로 경복궁은 전소됩니다. 그 뒤 270년이 지나도록 경복궁은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865년(고종 3)부터 중건된 겁니다. 
무너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죠. 이때 갖가지 눈물겨운 화재예방 방책이 동원된 겁니다. 

조선개국 직후 도읍을 전할 때 “인왕산을 진산으로,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대사(1327~1405)와 “제왕은 남면(南面·남쪽을 향해 앉아 다스려야 한다는 뜻)해야 한다”는 정도전(1342~1398)의 논쟁이 벌어졌다는 야사(<오산설림>)가 전해진다.

■무리한 경복궁 중건의 대가
그러나 과정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공사비를 조달하지 못해 200여 일이나 공사가 중단됐구요. 
그래서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고육책을 썼지만 민심까지 잃었습니다. 별의별 수단을 다 써서 화재방지책을 마련하려 애썼지만, 별무신통이었습니다. 
경복궁이 중건된지 6년 만인 1873년(고종 9) 12월 자경전·교태전·자미당에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이를 다시 고치기 위해서는 30만냥의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재정난이 심각했죠. 급기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1815~1882)까지 나섭니다.
“재정이 고갈됐습니다. 세 전각(자경전·교태전·자미전)을 중건하는데 경비가 이미 바닥났고, 내탕고(왕실의 곳간)도 텅비었습니다. 전하께서 절제하고 소박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고종실록> 1875년 5월10일) 
그렇지만 공사는 강행되었죠. 2차 중건은 15개월이 지난 1875년(고종 12) 3월이 돼서야 끝났는데요. 그러나 지긋지긋한 화마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끝까지 괴롭혔습니다. 17개월 후인 1876(고종 13) 11월 또다시 대형화재가 경복궁을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 화재로 교태전 등 무려 830여칸이 전소됐죠.

경복궁 중건 당시 목조건물인 각 전각의 화재 예방을 위해 갖가지풍수비보책까지 마련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후 132년이 지난 2008년 2월 10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숭례문이 불타는 모습이 생중계되었죠. 
저는 여기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요. 우선 뼈아픈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풍수상 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결과가 두 번의 대화재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한숨이 아닌가, 국고를 탕진해가면서, 민심의 이반을 읽어내지 않고 강행한 경복궁 중건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뭐 이런 느낌이 하나 들고요.
또하나는 그렇게 당대에 온갖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무리하게 강행해서 중건한 경복궁이 아니냐. 그 덕분에 그나마 지금의 경복궁이 남아있는게 아니냐, 뭐 이런 감상도 들고요. 비근한 예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고, 결국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만리장성이 지금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으니 말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옛 사람들의 희생이 이뤄낸 문화유산이잖습니까. 역사의 평가라는게 참 쉽지 않습니다.  (이 기사를 위해 김민규 동국대 강사와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민규, ‘경복궁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 <고궁문화> 11호, 국립고궁박물관, 2018
김민규, ‘경회루 연못 출토 청동용과 경복궁 서수상의 상징 연구’, <고궁문화> 7호, 국립고궁박물관, 2014
강임산, ‘1968년 광화문 복원의 성격’, 명지대석사논문, 2015
우종훈, ‘경회루 전도 해제 및 역주’, <건축역사연구> 26권 3호(통권 112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17
이상해·조인철, ‘경복궁 경회루 건축계획적 논리체계에 관한 연구-정학순의 경회루전도를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14권 3호(통권 43호), 2005 
국립고궁박물관, 정정남·이선희 번역, <국역 영건일감>(고문헌 국역총서 제5책),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