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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저기 반짝거리는 물체가…” 두 인부가 찾아낸 0.05mm 금박 화조도

며칠전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가로 3.6㎝, 세로 1.17㎝, 두께 0.04㎜의 금판에 0.05㎜ 이하 선으로 한 쌍의 새(쌍조)와 꽃(團華·둥근 꽃무늬)을 조밀하게 새긴 이른바 ‘금박 화조도’의 출현을 알렸죠. 기사의 일보는 이미 보도되었으니까요. 저는 이 극초정밀 유물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동궁과 월지’가 어떤 유적인지 그 기막힌 스토리를 ‘발굴’해보고자 합니다.   

■심상치않은 인부들의 눈썰미
2016년 11월이었습니다. ‘동궁과 월지’와 접한 동쪽지역을 발굴중이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조사를 마무리할 작정이었습니다. 유적과 인접해서 일제강점기에 부설된 동해남부선의 철로(폐선)가 지나고 있는데요. 그 철로 옆에 조성된 배수로에서 물이 계속 차올라서 심층 발굴은 불가능했던 겁니다. 
상층부만 발굴하고, 철로가 철거된 후의 마무리 조사를 기약한채 발굴장을 정리하고 있었는데요. 
그때 인부 중 한 사람이 연구소 조사원을 찾아와 “저기 흙 속에서 뭔가 반짝거리는게 보인다”고 알립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정원혁씨)이 그 인부가 지목한 통일신라 건물지의 계단 출입시설 부근을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팥알만큼 작지만, 반짝 거리는 작은 물체가 구겨진 채 흙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금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일이 지난 뒤 또다른 인부가 첫번째 발견지점에서 20m 떨어진 회랑건물터에서 반짝거리는 물체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수습된 두 물체는 출토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수장고에 들여놓았습니다.
그 후 수습유물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놀랄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두 물체를 꺼내 봤더니 문양의 패턴이 흡사했고, 그것을 이어보니 아!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죠. 턱없이 작은 크기(가로 3.6cm×세로 1.17cm×두께 0.04㎜)이고, 무게 또한 0.3g밖에 안되는 금박인데요. 그것도 반 정도로, 구겨져서 흙 속에 묻힌채 발견되었습니다. 심지어 20m 거리에서 나머지 반쪽까지 찾아낸겁니다. 가히 기적이라 할만 합니다. 그걸 한 분도 아니고, 눈썰미 좋은 두 분의 인부가 찾아냈다는 것이 아닙니까.

■‘포 나인(99.99%)’의 기적
연구소측은 이 작은 금박을 완전체로 복원한 뒤 분석했는데요. 그 결과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0.3g(0.08돈)의 금박 순도가 ‘포 나인(Four Nine)’, 즉 99.99% 였습니다. 
불순물이 0에 가까운 ‘포 나인(99.99%)’을 향한 고순도의 정련기술은 요즘에도 ‘워너비’ 라죠. 그런 ‘포 나인’의 정련기술을 통일신라시대에 확보했다는 이야기잖습니까. 참고로 신라시대 금관(6점)의 금 함유량이 80~89%(19~21K)이었답니다.
무엇보다 끌이나 정으로 새긴 선의 굵기가 신비롭기까지 한데요. 사람의 머리카락 굵기(0.08㎜)보다 얇은 0.05mm 이하인 것으로 분석되었거든요. 국가무형문화재 김용운 조각장이 혀를 내두르더라구요.

“컴퓨터로 도안한 그림을 레이저로 쏘면 가능할까요. 한번 시도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0.05㎜ 문양을 새기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김용운 조각장은 고려시대 금도금 은잔의 문양을 보여주었는데요. 이 은잔은 5㎜에 약 20선을 조각했는데, 신라금판은 5㎜ 사이에 약 60선을 새겼다는군요. 신라 금판이 고려 은제잔보다 3분의 1정도 더 정밀했다는 얘기죠. 무엇보다 컴퓨터와 레이저를 사용해도 새기기 어려운 극초정밀 기술이라니 입이 딱 벌어질 정도입니다.

‘금박 화조도’의 문양 선 굵기(0.05㎜)는 사람의 머리카락(0.08㎜)보다 훨씬 얇을 정도로 세밀한 것으로 분석됐다. 고려 금도금 은잔의 경우 5㎜에 약 20선을 조각했지만 신라 금판은 5㎜ 사이에 약 60선을 새겼다. 국가무형문화재 김용운 조각장은 0.05㎜ 이하의 굵기로 문양을 새긴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극초정밀하면 예부터 우리 기술이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 유명한 청동기시대 국보경(정문경·숭실대소장)은 선의 골 깊이가 약 0.70mm, 선의 간격이 약 0.30mm, 선의 굵기가 약 0.22mm에 불과합니다. 자그만치 2300~2200년 전인데 말입니다.
익산 미륵사지 출토 금동제 사리 외호의 문양은 0.3㎜에 불과합니다. 신라 천마총 금관의 가는선(약 0.25㎜), 황룡사지 금동제 봉황장식의 꽃잎 내부 선(약 0.10㎜), 동궁과 월지 출토 금동제 풍탁의 선(약 0.14mm), 감은사터 사리기 누금 알갱이(약 0.30㎜)를 보십시요. 한결같이 극초정밀 예술품이죠. 이런 예술품을 제작한 분들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장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은 예술혼 
세부 문양을 살펴볼까요. 넓은 금판에 문양을 새긴 후에 필요한 부분만 오려 사용했는데요. 
둥근 꽃잎 문양(단화·團華)을 배치한 뒤 좌·우에 새(멧비둘기)를 마주 보게 표현했습니다. 
가로 3.6cm×세로 1.17cm×두께 0.04㎜에 불과한 금판에 왼쪽새(가로 0.9cm×세로 0.75cm)와 오른쪽새(가로 0.8cm×세로 0.65cm), 그리고 꽃문양(가로 1.37cm×세로 0.92cm)까지 새겼다는 거 아닙니까. 이게 가능할까요.
그런 작은 금판에 문양을 새기다보니 아차 실수한 흔적도 보인다는데요. 

“자를 대고 오리다가 실수해서 다시 자를 옮겨대고 오린 흔적이 있습니다. 스케치한 다음 잘못 오리거나, 무늬를 잘못 새겼다는 의미입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한상 교수는 “워낙 작은 문양을 새겼기 때문에 기계가 아닌 이상 오히려 틀리는 게 당연했을 것”이라면서 “만약 실수를 그냥 두고 완성했어도 육안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그럼에도 1200년 전의 장인은 오차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예술혼을 발휘하며 고쳤던 겁니다. 

왜 쌍조문을 새겼을까요. 쌍조문의 문양적인 모티브는 서역과 동북아시아에 확인됩니다. 
3세기 사산조 페르시아(226~651)에서 처음 확인되는 문양이구요. 주로 길상(吉祥)의 의미로 새기거나 그렸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서역을 지나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전래되었구요. 국내에서는 막새와 같은 기와에서 주로 확인됩니다.
바탕에 새긴 꽃은 상상의 꽃잎 문양인 단화(團華)인데요. 이런 꽃문양도 국내 출토 사례가 제법 됩니다. 
이번에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금박 화조도’와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은제 음각 화조문 소형 사리호(꽃과 새를 새긴 은제 사리 항아리)’랍니다. 

‘금박 화조도’의 바탕에 새긴 꽃은 상상의 꽃문양인 단화(團華)이다. 국내에서도 더러 보인다.(밑 왼쪽 사진) 이번에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금빛 화조도’와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은제 음각 화조문 소형 사리호(꽃과 새를 새긴 은 사리 항아리)’(밑의 오른쪽 사진)이다.

이 작디작은 ‘금박 화조도’는 어디에 쓰는 물건이었을까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6년 이 유물을 발굴해놓고도 지금까지 공개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용처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금판에 구멍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떤 기물에 붙인 마구리(장식물)인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습니다.
전 이런 생각이 듭니다. 건물터 출입구 계단과 회랑건물지에서 수습된 것으로 보아 이 금판을 부착한 어떤 귀금속 상자를 들고가다가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요. 물론 종교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상향을 위한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00% 단언할 어떤 증거도 없으니까요.

‘동궁과 월지’의 일제강점기 사진. 1980년대 초까지도 ‘안압지’로 일컬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잡초만이 무성하고 자라고 가운데 물이 고여있는 전형적인 연못인 것 같았다.

■‘막걸리 값 안주냐’고 깨버린 신라 접시
궁금증이 드시죠. ‘동궁과 월지’가 어떤 유적인데 이런 극초정밀 유물이 나왔을까요.
한번 알아보죠. 웬만큼 나이를 먹은 이들에게 친숙한 유적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안압지’입니다. 
기러기 ‘안(雁)’자에 오리 ‘압(鴨)’자를 쓴 것으로 보아 기러기나 오리 떼가 노는 연못(지·池)이라는 뜻이겠죠. 
본래 <삼국사기>는 “674년(문무왕 14)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만 했는데요.

조선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증보 편찬)이 “(연못) 이름을 ‘안압지’라 했다”고 특정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안압지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운데 물이 고여있는 전형적인 연못 같았습니다.

1974년 11월부터 경주고도관광개발 10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연못의 준설작업이 시작된다. 잡초와 함께 진흙이 두껍게 쌓인 연못을 파낸 것이다. 처음부터 발굴조사가 아니라 단순한 준설작업으로 진행된 공사였기 때문에 굴삭기가 동원되었다. 그때 상당량의 유물이 쓸려나갔다. 준설에 투입된 인부들 가운데는 “막걸리 값을 안줄거냐”면서 조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수습한 토기들을 깨뜨리기도 했다.

급기야 1974년 11월부터 경주고도관광개발 10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연못의 준설작업이 시작됩니다. 잡초와 함께 진흙이 두껍게 쌓인 연못을 파낸 거죠. 그러나 이 연못에서 의미있는 유물이 출토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죠. 
일반 공사업체가 굴삭기로 바닥의 진흙을 파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문화재청 산하 경주사적관리사무소는 혹시 몰라 임시직이었던 고경희 조사원(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장 역임)을 현장감독으로 보냈답니다. 그때가 1975년 1월이었는데요. 작업인부들이 곡괭이와 삽으로 딱딱하게 굳은 흙을 퍼내고 있었답니다.

준설작업에서 신라시대 유물이 잇달아 노출되고, 무단 유출이 이어지자 1975년 3월25일부터 공사중단과 함께 정식발굴로 전환되었고, 깜짝 놀랄만한 발굴성과가 쏟아져 나왔다

이때의 에피소드가 기막힙니다. 인부들에게 “유물이 출토되면 신고해달라”고 했더니 “그걸 공짜로 신고하느냐. 막걸리 값을 쳐주지 않으면 줄 수 없다”면서 고경희 조사원이 보는 앞에서 신라토기(접시)를 깨버리는 이들도 있었답니다. 인부들 중 일부가 삽과 곡괭이로 퍼낸 흙을 손수레에 담아 외부로 반출했다는 설이 파다했답니다. 그냥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고경희 조사원의 급보를 받은 경주사적관리사무소는 준설공사를 중단시켰고, 1975년 3월부터 정식 발굴로 전환되었습니다. 

■안압지가 아닌 동궁, 월지
이른바 안압지와 주변 발굴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요. 깜짝 놀랄만한 발굴성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연못조사는 1975년 3월부터 1년간 진행되었는데요. 연못은 총 면적 4738평(1만5658㎡)과 그 안에 독립된 3개의 섬, 입·출수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정교한 호안석축(강변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 시설)이 확인됐구요. 
연못 주변조사는 1976년 5~12월까지 8개월간 진행됐구요. 연못의 서편과 남편에 건물지가 총 31동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중 서쪽의 건물 5동은 연못의 축대시설과 연접해서 조성되었는데요. 아마 이 건물의 밑까지 찰랑찰랑 물이 차있었을 겁니다. 대단한 ‘뷰’였을 겁니다. “674년(문무왕 14) 궁궐 안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부합되는 발굴성과였습니다.

연못 안팎에서 출토된 유물은 3만3000여점에 달했답니다. 그중 안압지 주변의 건물지에서 출토된 ‘의봉4년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매우 중요한 표지유물이었습니다. ‘의봉’(676년 11월~679년 6월)과 ‘조로’(679년 6월~680년 8월)는 당나라 고종(650~682)의 연호 중 각각 9, 10번째의 연호거든요. 
그런데 <삼국사기>는 “679년(문무왕 19) 동궁(태자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했다”고 했거든요.
674년 연못을 조성한 다음 5년 만인 679년부터 동궁을 세웠다는 이야기죠.

또한 안압지 연못에서 출토된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와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 및 ‘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의 명문이 주목을 끌었는데요. <삼국사기> ‘직관지’에 등장하는 동궁(세자궁) 소속 관청 가운데 ‘세택(洗宅)’이나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 ‘용왕전(龍王典)’ 등이 보이거든요. 
후대의 기록이지만 “822년(헌덕왕 14) 왕의 동모제(어머니가 같은 동생) 수종(흥덕왕·재위 826~836)을 부군(副君·왕세자 혹은 태자)으로 삼고 월지궁에 입궁시켰다”는 기록이 보이네요. ‘월지궁=동궁’이라는 얘기죠.

674년 조성된 연못(안압지)은 679년 세워진 동궁의 부속시설로 기능했으며, 그 이름은 ‘월지(月池)’일 가능성이 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부터 ‘안압지’로 흔히 알려졌던 사적 명칭은 2011년부터 ‘경주 동궁과 월지’로 바뀌었습니다.

안압지(월지) 출토 유물 3만3000여점 가운데 안압지 주변의 건물지에서 출토된 ‘의봉4년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매우 중요한 표지유물이다. ‘의봉’과 ‘조로’는 당나라 고종(650~682)의 연호 중 각각 9, 10번째의 연호이다.

■신라시대 ‘복불복’ 게임기와 남근의 출현
동궁과 월지(안압지) 출토 유물 가운데 압권은 길이 6m, 너비 1.2m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배였습니다. 
출토 당시 멀쩡한 상태였던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 썩어서 스폰지 상태에서 발굴되었는데요. 8명 정도가 타고 노닐었을 놀이배로 추정되었습니다. 7~9세기 통일신라시대 임금들이 뱃놀이를 즐겼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죠.  
연못에서 확인된 다양한 금동판불(널빤지나 동판에 새긴 채색불상) 16구도 눈길을 끌었는데요.

안압지(월지)에서 출토된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와 ‘세택(洗宅)’명 목간, 국립경주박물관 부지에서 확인된 ‘동궁아’와 ‘신심동궁세책’과 연관지을 수 있다. 안압지가 동궁(태자궁)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출토유물 중 이목을 잡아 끈 유물 두 점은 주령구와 목제 남근이었습니다.
연못의 바닥 뻘층에서 확인된 주령구(酒令具)는 6개의 사각형과 8개의 육각형으로 된 ‘14면체 주사위’였는데요.
각 면에는 4~5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새겨진 글을 읽어가던 조사단은 무릎을 쳤는데요. 술자리에서 주사위를 던져 14면에 새겨진 글 대로 벌칙을 받았던 놀이기구가 분명했습니다. 

<삼국사기>는 “822년 헌덕왕의 동생인 수종(훗날 흥덕왕)을 부군(副君·태자)로 삼고 월지궁에 입궁시켰다”고 기록했다. ‘월지궁=태자궁(동궁)’이라는 얘기다. 조선시대(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사에 따라 ‘안압지’로 일컬어왔던 연못의 명칭은 각종 문헌기록과 발굴성과를 반영하여 2011년부터 ‘경주 동궁과 월지’로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판 ‘복불복’ 게임이었다고나 할까요. 벌칙 가운데는 ‘원샷으로 술 석잔 마시기(삼잔일거)’, ‘스스로 노래부르고 마시기(자창자음)’, ‘술 잔 비우고 크게 웃기(음진대소)’, ‘무반주 댄스(금성작무)’, ‘야자타임(유범공과)’, ‘임의로 신청곡 받아 노래부르기(임의청가)’ 등도 있었는데요.
‘여러 사람이 코때리기(중인정비)’, ‘팔을 구부려 마시기’(곡비즉진), ‘얼굴 간지럼 태워도 참기(농면공과)’,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추물막방)’ 같은 짓궂은 벌칙도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직장내 괴롭힘’으로 지탄받았을 것 같아요. 역시 연못에서 확인된 ‘목제 남근’은 어떨까요. 길이 13.5㎝, 17.5㎜ 짜리가 두 점 확인되었는데요. 이 무슨 망측한 유물인가요. 

월지(안압지) 바닥에서 출토된 주령구, 6개의 사각형과 8개의 육각형으로 된 ‘14면체 주사위’였다.

그러나 선사시대부터 생식기를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고 숭배해왔습니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중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 고분에서도 이와같은 남성 성기가 도드라지게 표현한 흙인형이 토기에 붙은 채 확인되기도 합니다.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볼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군요. 
이와 함께 아무래도 궁궐 연못이다 보니까 궁중생활을 유추해볼 수 있는 생활유물들이 많았습니다. 다양한 용기와 숟가락, 금동제 가위, 목간 등이 쏟아졌습니다. 이 유물들은 통일신라 초창기 신라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죠.

■‘인부 1과 인부 2’의 다른 얼굴
하지만 1975~76년의 월지(안압지) 발굴은 기본적으로 연못 준설 과정에서 진행된 제한된 조사였습니다.
2007년부터 월지의 동쪽 지역에 대한 본격 조사가 시작되었구요. 동궁·월지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짓기 위한 조사였는데요. 그 결과 다른 신라왕경유적에서는 유례가 없는 대형건물군과 담장 등과 함께 안압지 출토품들과 같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월지에서 확인된 다양한 유물들. 길이 6m, 너비 1.2m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배가 출토됐고, 목제 남근이 2점 발견됐다. 아무래도 월지가 궁궐 연못이다 보니까 신라시대 궁중 생활을 유추해볼 수 있는 생활유물들이 많았다.다양한 용기와 숟가락, 금동제 가위, 목간 등이 쏟아졌다.

지난 2017년에는 황룡사 광장으로 통하는 동문터를 확인했구요. 변기 및 오물 배수시설까지 갖춘 수세식 화장실도 찾았습니다. 그 무렵 그 옆 발굴장에서 ‘금박 화조도’를 기적적으로 발견해낸거구요.
저는 팥알 만큼이나 작은 ‘금박 화조도’를 발견한 두 분의 인부를 찾아냈으면 합니다. 1974년 당시 ‘막걸리 값을 주지 않는다’면서 신라 토기를 깨뜨린 인부와 어찌 그리 비교가 되는지요. 그 얘기를 했더니 어창선 학예연구관이 “1974년 인부는 준설작업에 투입된 사람이고, 이번에 금빛 화조도를 찾은 분은 고고학 조사에 조예가 깊은 발굴인부”라며 “인부라고 ‘다 같은 인부’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더군요. 생각해보면 그 분들의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이름없는 두 분의 활약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 기사를 위해 어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과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