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발견은 어느날 불쑥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 같습니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1971년 7월5일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중 인부의 삽날에 부딪친 것은 다름아닌 무령왕릉의 모서리 벽돌이었죠.
무령왕릉 발굴의 이면에는 소름돋는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을 돌며 마구잡이로 파헤친 공주고보 교사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의 이야기인데요.
그 가루베가 1931~33년 사이에 송산리 6호분을 무단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무령왕릉’으로 오판했답니다. 6호분 바로 뒤에 구릉(진짜 무령왕릉)을 6호분의 수호신(현무)로 여겨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가루베가 이 진짜 무령왕릉을 멋대로 파헤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끔찍한 결과를 낳았겠죠. 그러나 이 오판 덕분(?)에 무령왕릉은 1971년까지 도굴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중장비 삽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었다
‘국보 중의 국보’로 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어떨까요.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백제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부여 능산리고분군’(현 백제왕릉원)엔 관람객들이 증가추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차시설은 턱없이 비좁았습니다. 부여군은 고분군의 서쪽 능선에 주차장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고요.
사전시굴조사가 진행되었고요. 건물터와 재를 비롯한 불 탄 흔적, 그리고 기와와 도기 편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차장 공사를 중단시킬 결정적인 유구·유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은 공사가 강행됩니다.
발굴 때문에 비용과 시간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심상치않은 징후가 보이는데 고고학도로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죠.
신광섭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현 백제문화제재단 이사장) 등 관계 연구자들이 문화재관리국으로 달려갔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찜찜하니 딱 한번만 파보자”고 건의한겁니다. 그러나 ‘민원을 걱정하는’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콧방귀를 뀔 수도 있었죠. 그런데 웬일일까요. 당시 노태섭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장이 선선히 “그러자”고 수용했답니다.
그러면서 국비(3000만원)를 선뜻 책정해주었습니다. 만약 “나온 것도 없는데 뭘 파보겠다는 거냐”고 일축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금동대향로는 공사 강행과 함께 중장비의 삽날에 찍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죠.
■강추위 속에 판 물구덩이
이듬해(1993년) 10월부터 본격 발굴에 돌입했답니다. 계곡부에 자리잡고 있던 현장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산골짜기에서 흘러드는 물 때문에 발굴구덩이가 웅덩이로 변했고요. 조사단은 그 물을 빼내느라 악전고투했습니다.
12월이 되자 강추위까지 불어닥쳤고요. 스폰지로 물을 적셔 빼내는 작업은 맨손으로 했는데요. 손이 꽁꽁 얼어붙었죠.
그러나 발굴은 기다림의 미학이자 인내의 결정체라 했던가요. 그때가 12월12일, 일요일 오후 4시30분이었습니다.
당시 김종만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사가 발굴사에 길이남을 ‘대어’를 낚습니다.
발굴 구덩이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드러났습니다.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발굴삽으로 천천히 노출시키는데, 한눈에 봐도 예사로운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후 5시쯤부터 전등을 밝혀 놓고 본격 수습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밤 8시30분쯤 ‘국보 중의 국보’가 물구덩이 속에서 빼어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백제 금동대향로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수상했습니다.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사찰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있던 곳이었습니다. 왜 향로가 나무 물통 안에 숨겨져 있었을까요.
■‘잠깐 숨겨놓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럴듯한 해석이 동원됐습니다.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사비(부여)가 함락됩니다.
백제 왕릉을 지키던 이 절의 승려들은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던 대향로를 감추려 했습니다. 승려들은 백제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감춰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오판이었습니다. 백제는 그 길로 속절없이 멸망하고 맙니다. 나당연합군은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을 불에 태웠고요.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습니다.
금동대향로도 이후 1300년 이상 묻혀버린 겁니다. 허황된 스토리일까요.
1995년 절터의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만한 유물이 발견됩니다.
‘백제 창왕(위덕왕·재위 554~568) 13년인 정해년(567년) (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리감’의 출토양상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탑의 중심기둥이 도끼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습니다.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습니다.
절을 유린한 나당연합군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고 마구 파헤친 것이 아닐까요.
자, 어떻습니까. 자칫했으면 주차장 부지로 사용되고 말았겠죠. 그런 곳이 사적(능사)으로 지정되었고요. 그 곳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가 2점이나 나왔습니다.
■금동대향로 19명 인물열전
올해가 그 금동대향로가 발굴된지 딱 30주년 되는 해더라고요.
마침 국립부여박물관이 내년 2월24일까지 ‘백제 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며칠전에는 백제문화제재단 등이 발굴 3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1993년 금동대향로 출토 직후 지도위원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예견했다죠. “앞으로 아마 이 향로를 주제로 한 논문이 수백편 발표될 것”이라고요. 정말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금동대향로 관련 연구성과가 쏟아져 나왔구요.
관련 기사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나왔죠. 그래 더 쓸거리가 뭐 있겠나 하고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요.
그래도 30주년이니 그냥 넘길 수 있나 하고 학술대회 발표문을 뒤적거렸는데요. 아! 쓸 거리가 하나 잡히더라구요.
‘향로에 표현된 19명의 인물상’과 관련된 발표문이었습니다.(소현숙 원광대 교수의 ‘백제금동대향로의 동아시아 미술사적 의의’)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왕에 발표된 논문(박경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백제금동대향로 도상과 상징성 연구’, 홍익대 박사논문, 2018)과 비교 분석해보았죠. 재미있더라구요.
금동대향로는 받침과 몸체, 뚜껑, 꼭지 등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요. 각 부분에 용과 연화, 산악, 그리고 봉황이 장식되어 있죠. 그중 뚜껑에 악사 5명을 포함한 17명, 몸체(연꽃)에 선인 2명 등 총 19명의 인물이 보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대향로에 표현된 인물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는데요. 어쩌면 그렇게 사실적으로, 디테일하게 표현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구요. 생생한 표정하며…. 우선 뚜껑을 볼까요.
거문고와 완함(비파), 북, 종적(피리), 배소(퉁소)를 연주하는 5악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단 이 5악사의 표정을 한번 보시죠. 보일듯 말듯 한 미소가 은은합니다.(박경은 학예연구관) 동시대 백제 불상의 온화한 표정을 연상하게 됩니다.
■5악사의 헤어스타일
이 대목에서 소현숙 교수가 ‘주목하라’고 하네요. 5악사의 헤어스타일을 자세히 보라고 합니다.
얼핏보면 정수리까지 삭발을 하고 뒷머리를 길게 땋아서 오른쪽으로 틀어 올린 것 같은데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머리카락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오른쪽으로 틀어 올린 것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이처럼 오른쪽으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는 헤어스타일이 중국 동진시대(317~419) 유물에서 보인다는데요.
즉 중국 난징(南京)에서 출토된 4~5세기 동진시대 여성 도용(무덤에 껴묻이한 인물·동물상)의 헤어스타일이 연상된다는 연구가 있다는 겁니다. 사진을 봤다니 정말 금동대향로의 5악사 두발 형태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렇다면 동진시대에 전해진 머리모양이 백제 악단의 공식 헤어스타일로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닐까요.
■5악사는 여성악단이었다
무엇보다 이 5악사가 ‘모두 여성’일 가능성이 짙고요.
중국 향로에서는 남녀 선인이 함께 즐겁게 놀거나 짝으로 표현된답니다.
즉 남녀의 결합 등이 득도(得道)의 중요 통로로 인식되었거든요. 결국 앞서 인용한 천녀와 옥녀, 신녀 등은 신선이 되는 일종의 보조자의 역할이었다는 겁니다. 반면 백제 금동대향로의 5악사는 어떨까요.
이들은 남성 선인의 짝이나 선인을 이루기 위한 보조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산 정상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는 주악(연주) 선인의 신분을 과시했다는 겁니다.
예컨대 거문고나 피리 등의 연주는 하늘 신을 부르는 초혼과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그렇다면 금동대향로 속 여성 선인은 신을 부르거나 제례의 악을 담당하는 기능이 부여받았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이른바 선인 악단에 소속된 전문 연주자로서 활약한 셈이죠.
게다가 이 백제 금동대향로는 돌아가신 백제 임금들의 명복을 빌기위해 피우는 ‘향로’였죠.
그런데 향로 위에 봉황이 있죠. 봉황은 천제가 보낸 사절이죠. 대향로 꼭대기의 봉황은 바로 이 5악사의 연주를 듣고 왕림했다는 겁니다. ‘봉황의 출현은 태평성세의 도래’를 뜻하죠. 따라서 여성들로 구성된 전문 악단의 존재는 봉황과 함께 향로가 구현하는 세계가 태평성세임을 드러내는 상징일 수 있다는 겁니다.
■12인 12색의 인물들
그럼 여성 5악사 외에 뚜껑에 표현된 12명은 어떤 인물일까요. 이중 3명은 동물을 탄 모습인데요.
한 명은 봇짐을 지고 코끼리 등에 편안하게 올라탔습니다. 코끼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동남아시아인이 아닐까요.(박경은 학예연구관) 또 한 인물은 말갖춤새를 완비한 말을 타고 산언덕을 오르고 있네요.
제3의 인물은 말을 탄 채 등을 돌려 활을 쏘고 있는데요. 이 ‘돌려쏘기’ 신공은 무용총이나 덕흥리 고분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파르티안 샷’이라고 하죠. 고대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의 궁기병이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구사한 기술입니다. 그럼 남은 9명은 누구일까요.
뚜껑의 제1단에는 3명의 인물이 출현합니다. 편의상 인물①~⑨로 표현해보죠.
인물①은 어깨에 옷이 빗물에 젖지 않도록 도롱이(비옷)을 걸친채 걷고 있네요. 인물②는 계곡의 암반 위에 앉아 있습니다. 손에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와, 둥근 무엇을 쥐고 있는데요.
여기서 관찰자들의 견해가 갈립니다. 이 ‘둥근 무엇’을 거울로 본 연구자가 있어요.(박경은 연구관)
인물②가 앞에 걸어가는 호랑이를 향해 거울을 비추고 있다는 겁니다. 도교 경전인 <포박자> ‘내편·등섭’은 “옛날 도사들은 직경 9촌의 거울로…새나 짐승이 사람으로 둔갑했다면 그 본래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고 했답니다.
그렇다면 인물② 역시 호랑이를 물리치거나 판별하려고 거울을 비추고 있는 걸까요.
그러나 다른 연구자는 물 위의 암반에서 갈고리처럼 생긴 물건을 들었다는 것에 주목했는데요. 또한 선인들의 전기인 <열선전>에서 낚시와 관련된 선인들이 다수 언급된답니다. 따라서 인물②는 ‘낚시하는 선인’으로 보는게 맞다고 추정합니다.
인물③은 어떨까요. 지팡이에 의지해서 구부정하게 걷고 있는 인물③을 노인으로 보기도 하고요.(박경은 학예 연구관)
그러나 중국 양나라 시대 도인 도홍경(456~536)은 “쉽게 굴복하는 세태가 싫어 지팡이를 짚고 산을 찾는다(倦世情之易撓 乃杖策而尋山)”고 했답니다. 그래서 꼭 ‘지팡이=노인’의 등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소현숙 교수)
■풀어헤친 머리를 감는 사람은
제2단에도 세 명의 선인이 있네요. 인물④는 약초를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풀의 줄기가 휘청대는 것을 보니 인물④가 손으로 확 휘어잡아 뜯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죠. 인물⑤도 인물③가 비슷하게 지팡이를 집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물⑥의 자세가 아주 특이하죠. 계곡 사이로 몸을 반쯤 내밀고 폭포 아래에서 긴 머리를 물에 담근채 감고 있어요. 이것을 입산수도와 단약 제조를 위해 목욕재계하는 과정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요.(박경은 학예연구관)
앞서 인용한 도홍경은 “입산 이후 머리 풀고 옷끈을 풀어헤친 채 산 위를 돌아다닌다”고 했거든요. 당대 중국에서 선인의 이미지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거나, 옷끈을 풀어버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소현숙 교수)
■광석캐는 도인, 명상하는 승려
뚜껑의 제3단에도 세 명의 인물이 있는데요. 인물⑦은 손에 날카로운 공구로 암반을 깎아내고 있고요.
아마 도교에서 수련과 단약 제조에 필요한 광석을 채취하는 것 같아요. 이걸 연단술(불로장생을 위하여 금단을 조제·복용하는 신선도술)이라 합니다. 인물⑧은 자기 키보다 큰 약초를 캐고 있죠.
인물⑨는 앞서 밝힌 인물과는 좀 다른 모습이죠. 어떤 연구자는 명상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하는 수련자의 모습이라 보았는데요.(박경은 학예여구관)
다른 이는 이 인물⑨는 ①~⑧과는 성격이 다른 인물, 즉 도인이 아니라 승려로 판단했습니다.(소현숙 교수) 이 인물⑨의 옷 꾸밈새(복식)가 다른 인물들과 다르다는 겁니다. 5악사와 다른 선인들은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복장의 안쪽에도 깃이 곧게 내려가는 속옷을 입었는데요. 인물⑨의 속옷만 대각선으로 표현되고 있는데요.
이것은 전형적인 승려의 옷차림이라는 겁니다. 사실 당대의 중국 사서인 <주서>나 <북서> 등은 “백제에서는 불교는 성했지만 도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또한 이 백제금동대향로가 쓰인 곳이 어디입니까.
백제 왕릉 옆에서 선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었죠. 그렇다면 당시 백제대향로 앞에서 의례를 담당했던 인물은 승려가 되었을 겁니다. 금동대향로 속에 나타난 유일한 승려가 바로 도교와 불교의 결합, 즉 당대의 백제 사상계를 잘 반영했다는 겁니다.
■택견이 아니라 공중을 나는 선인
인물은 몸체의 연꽃 안에도 두 명이 있는데요. 한 명은 새(용)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어요.
혼자 공중을 나는 선인도 있는데요. 이를 두고 전통무술인 택견 자세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무용총의 천정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보이죠. <삼국유사> ‘기이·남부여(백제)’조는 “백제의 전성기에는 신인이 삼산에 살았는데 공중으로 날아 서로 왕래했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금동대향로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 벌써 30년이 되었는데요. 말로만 국보 중의 국보 할 게 아니라 찬찬히 이모저모 뜯어보면서 이야깃거리를 차곡차곡 쌓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국립부여박물관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매우 감각적인 전시를 기획했다네요. ‘금동대향로’의 ‘향’을 뽑아냈다는데요.
‘향’을 주제로 3D로 구현해낸 향연(香煙)과 백제금동대향로 속 세상을 휘감아 도는 카메라 워킹을 선보였다고 하는데요.
이 짙어가는 가을철에 한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이 기사를 위해 국립부여박물관의 신영호 학예연구실장, 신민철 학예연구사, 이지은 연구원, 소현숙 원광대 교수가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박경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논문도 참고했습니다. 이해를 돕는데 인용한 인물상 삽화의 출처 역시 박경은 연구관의 논문입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박경은, ‘백제금동대향로의 도상과 상징성 연구’, 홍익대 박사논문 2018
소현숙, ‘백제금동대향로의 동아시아 미술사적 의의’, <발굴 30주년 학술회의>(백제금동대향로: 백제문화의 정수), 백제문화재단 등, 2023
김종만, ‘백제금동대향로 오악사 두발 형식 등장 배경’, <백제문화>68, 공주대백제문화연구소, 2023
국립부여박물관, <능사-부여 능산리사지 발굴조사 진전보고서 1-2>, 2000
국립부여박물관, <백제 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발굴 30주년 특별전 도록), 2023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적때기 둘러쓰고, 제자리 잃고…광화문 '해치'의 기구한 팔자 (70) | 2023.11.19 |
---|---|
중국 건국의 100대 영웅 정율성은 한중우호의 상징? 경계인? 빨갱이? (0) | 2023.11.08 |
대체 '사경'이 뭐길래…화장실 갔다오면 '향수 목욕' 해야 했을까 (1) | 2023.10.22 |
남근형·구구단·신세한탄·가요·망부가…백제 '빅5' 목간 열전 (0) | 2023.10.19 |
김부식도 천대했던 가야,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대접해준 이유는? (0) | 2023.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