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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거적때기 둘러쓰고, 제자리 잃고…광화문 '해치'의 기구한 팔자

왕범이, 해치…. 아무리 봐도 동물인 것 같은데 감이 확 와닿지는 않습니다. 예, 동물은 맞습니다. 
하지만 분명 차이는 있습니다. 왕범이는 ‘실존’이고, 해치는 ‘상상’의 동물이라는 겁니다. 같은 점도 있습니다. 
이 두 ‘실존’ 및 ‘상상’의 동물이 한때(왕범이) 혹은 지금(해치) 서울시의 공식마스코트입니다.
‘왕범이’는 1998년 2월~2008년 5월 사이 서울의 마스코트였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에서 따왔습니다. ‘왕’하면 떠오르는 한국의 으뜸 도시라는 이미지를, ‘호랑이’의 순우리말인 ‘범’에 붙인 겁니다. 

 

그런데 오세훈 시장 시절인 2008년 5월 ‘왕범이’가 상상의 동물인 ‘해치’로 전격 교체되는데요. 
당시 오시장은 싱가포르의 머라이언, 베를린의 곰처럼 해치를 서울 하면 떠오르는 상징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는데요. 
그러나 ‘해치’는 201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고(故) 박원순 시장부터 천덕꾸러기가 전락했습니다. 
그러다 2022년 7월 복귀한 오세훈 시장이 유명무실해진 ‘해치’의 인지도를 되살리기 위해 캐릭터 재디자인 및 콘텐츠 개발용역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15년 된 ‘해치’ 캘릭터를 요즘 시대에 걸맞은 디자인으로 바꾼다는 거죠. 


■불완전한 복원
그런데 며칠전 광화문 월대와 현판의 복원이 끝나 마침내 일반에 공개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로써 1990년부터 2045년까지 장장 55년간 진행되는 경복궁 복원 사업의 ‘중심축’이 완성된 셈입니다. 
즉 월대-광화문-흥례문-근정전ㅡ침전(강녕전·교태전)-후원(건청궁) 등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척추뼈가 완전히 복원된 겁니다. 그러나 복원이 마무리된 광화문 앞 광장을 바라보면 한가지 ‘불완전한’ 복원의 장면과 마주칩니다.
보시면 광화문 앞 양쪽에 바투 서있던 해치상이 월대 남쪽 끝 부근으로 옮겨갔는데요. 

 

그런데 이것이 원 위치가 아닙니다.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1906~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1868~1945)가 찍은 광화문 사진과, 그간의 월대 발굴결과 등을 토대로 디지털 이미지 분석이라는 첨단기법으로 측정했는데요. 
복원된 월대 남쪽 끝에서 약 39.2m 정도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그럼 뭐가 문제됩니까. 그 쪽으로 이동시키면 간단하겠네요. 그러나 그게 간단치 않습니다. 그럴 경우 해치상이 광화문 앞을 반월형으로 돌아가는 도로 한가운데에 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가뜩이나 도로선형을 왜곡시켜 가면서까지 어렵게 복원한 월대가 아닙니까. 그런데 해치까지 도로 한복판에 세워놓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해치를 월대 양쪽 끝으로 옮겨놓은 겁니다. 
따지고보면 광화문 제모습찾기 사업 중 유일하게 ‘제자리를 잃은 복원’이라는 평을 받을만 합니다. 


■해치, 해채, 해태…
이렇게 ‘해치’가 새롭게 단장한 광화문 광장에서 하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는데요. 
그러나 여전히 ‘해치’가 어떤 동물이고, 왜 서울의 상징이 되었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 같네요.   
서울시의 공식 홈페이지를 볼까요. ‘해치는 정의와 안전을 지켜주고 꿈과 희망, 행복을 가져다주는 전통적 의미와 맑고 매력 있는 세계도시 서울의 비전을 전달하는 새로운 상징으로 탄생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너무 포괄적인 설명이죠. ‘해치=어떤 동물’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우선 이름부터가 해치인지, 해채인지, 해태인지 모호합니다. 역대의 운서(韻書·사전의 일종)에서도 다양하게 발음됐거든요. 다만 현재 중국 발음이 ‘즈(zhi)’인데다 자칫 서울의 상징이미지로 프로야구팀 이름(‘해태’)를 떠올리면 곤란하잖습니까. 
그래서 ‘해치’라 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옛날 신문을 찾아보면 ‘해태’는 보이지만 ‘해치’는 좀체 찾을 수 없습니다.


■사냥감에서 정의의 사도로
그뿐이 아닙니다. 해치(혹은 해태)는 그 정체가 모호한 상상의 동물입니다.
즉 연구결과 해치가 문헌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라는데요.  
중국 한나라 시대 문인인 사마상여(기원전 179~117)의 ‘상림부’에 “천자가 해치를 사로잡아 희롱한다(弄解치)”(<사기> ‘사마상여 열전’)는 내용이 나옵니다. 
해치가 천자(황제)의 사냥감인 ‘실존 동물’이지, 상상의 동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후한(기원후 25~220)을 거치면서 ‘해치’의 성격이 완전히 바뀝니다.
즉 후한의 사상가인 왕충(27~97)의 <논형>(‘시응편’)은 아주 그럴듯한 고사를 소개합니다.
“요 임금 때 법을 관장한 고요가 옥사를 다스릴 때 해치(외뿔 양)를 앞세웠다. 해치는 죄 있는 자만 골라서 들이받았다.”
예전에는 천자의 사냥감이었던 ‘해치’가 이제 옳고 그름, 즉 시비와 사정(邪正)을 분변해서 판결해주는 상서로운 동물로 견강부회된 겁니다.

정조 연간에는 사헌부 지평이 해치관을 쓰지 않고 경연장에 참석했다는 탄핵을 받아 면직됐다.


■‘해치관’을 쓴 사정기관 관리
이때부터 ‘해치=잘잘못을 가리는 서수’라는 인식이 퍼졌구요. ‘해치’ 모양의 ‘관’, 즉 ‘해치관’은 탄핵과 감찰의 임무를 전담한 어사(사헌부 관리)의 전유물이 됐습니다. 이 제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도입됐답니다.
명나라 창업주 태조(주원장·재위 1368~1398)가 공민왕(1351~1374)에게 ‘관복’과 관련된 자문(외교문서)을 내렸는데요.
그 외교문서에 “어사대부(대사헌)와 중승(집의·종3품) 등 어사대(사헌부) 관리들은 모두 해치관을 쓴다”고 했다는 군요.(<세종실록> 1426년 2월26일자) 비단 해치관 뿐이 아니었답니다.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의 흉배(가슴·등에 장식한 표장)에도 ‘해치’ 무늬를 새겼다”(<단종실록> 1454년 12월12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796년(정조 20) 2월9일 <정조실록>은 더욱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습니다.
즉 “사헌부 지평(종5품)인 이시원(1753~1809)이 해치관을 쓰지 않고 임금과 정사를 논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경연장에 참석했다는 비난을 받아 사의를 표명했고, 결국 면직됐다”는 겁니다.


■해치상은=하마상인가
그렇다면 광화문 앞 해치상 역시 ‘시비 곡직을 가리는 신령스러운 동물’을 상징한 것이겠네요.
아닌게 아니라 광화문 해치상과 관련해서는 그럴듯한 해석이 기미되었습니다.
출퇴근하는 관리들이 ‘잘잘못을 분변하는’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며 선정을 다짐했다는 겁니다. 일리있는 해석이죠.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합니다. 광화문 앞 해치상의 건립 사실을 알린 <고종실록> 1870년 10월9일자를 볼까요.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했다(闕門立해치爲限).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하교가 엄중한데 한갓 형식이 되었으니 어떻게 기강이 서겠는가.”
<고종실록>에 따르면 광화문 앞 해치상은 단순한 하마비였다는 거네요. 아닌게 아니라 100여년전의 사진에는 해치상 옆에 하마비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궁궐이니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광화문 앞 해치는 ‘시비곡직을 가리는 서수’의 의미는 아니었던걸까요. 

 

■관악산의 화기를 달래는 해치상? 
또하나 알쏭달쏭한 수수께끼가 있어요. 해치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죠.
해치가 물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있죠. 따라서 경복궁에서 발생했던 잦은 화재를 잠재우려고 해치상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전해져왔습니다. 
그런데 <고종실록>은 그러한 정설을 부인하고 있잖습니까. ‘해치상=하마비’였다고요.
아닌게 아니라 ‘해태=물’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기록은 어떤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실학자 이규경(1788~미상)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사라진 책인) <승아>에 이르기를 ‘해치는 불짐승(火獸)이고 멀구슬나무 잎사귀를 먹고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오히려 실학자 이규경(1788~미상)의 <오주 연문 장전 산고>는 “(사라진 책인) <승아>에 이르기를 ‘해치는 불짐승(火獸)이고 멀구슬나무 잎사귀를 먹고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고 전합니다. 해치가 물이 아니라 ‘불의 짐승’이라고 한겁니다.
뭐 불의 기운을 가진 짐승이라 불을 잘 다룰 수 있는 거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좀 억지춘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왜 ‘해치’와 ‘관악산’ 이야기가 나왔나 하고 궁금해했는데요. 

조선 후기 학자 박제형이 1886년 쓴 <근세조선경감>은 “대원군이 경복궁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은 불처럼 생긴 관악산 때문이라고 여겨 돌로 물짐승 형상을 새겨 궁문 앞 양쪽에 세웠다”고 했다. 이때부터 ‘해치=물짐승=관악산 화기 잠재우기용’이라는 인식이 퍼졌던 것 같다.

 

궁궐의 서수상을 연구한 김민규 문화재청 전문위원이 팁을 주더라구요. 조선 후기 학자 박제형(생몰년 미상)이 1888년에 쓴 역사·야사집인 <근세조선정감>에 그 말이 나온다구요. 그래서 찾아봤더니 정말로 있더라구요. 
“대원군이 경복궁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은 불처럼 생긴 관악산 때문이라고 여겨 돌로 물짐승 형상을 새겨 궁문 앞 양쪽에 세웠다”는 겁니다. 아마도 이 <근세조선경감>이 소개된 이후 ‘관악산 화기 잠재우기=해치 설치’의 이야기가 정설처럼 돌았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1923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가 된다면서 광화문 앞 해치상을 철거해서 궁궐 안쪽에 처박아 두었는데요. 

 

그해 10월4일자 동아일보는 ‘거적에 싸여 방치된 해치상’을 비감어린 어조로 고발했습니다.
“해태는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고…만조백관이 광화문을 출입할 때 수시로 경계하는 마음을 일으키려고 세웠다.”
여기까지는 이전의 인식과 같아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눈길을 끕니다.
“경복궁 남쪽의 관악산이 화산(火山)이어서…화재예방을 위해 해태상 만들어 관악산을 흘겨보게 했다는….” 
조선일보 1934년 1월1일자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도중 불이 나자 전전긍긍했는데, 경복궁에서 마주 보이는 관악산이 불의 산이기 때문에 자주 불이 난다는 풍수가들의 허황된 말을 믿고 해태상을 설치했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일제는 헐어버린 해치상을 조선총독부 서편 궁장 밑에 처박아두었다. 동아일보는 거적을 뒤집어쓴채 방치된 해치를 두고 “해태는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재주가 있어…만조백관이 (광화문을) 출입할 때 수시로 경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고 전했다.

 

1924년 5월20일자 조선일보는 기막힌 해프닝을 소개하는데요. “서울시내 용산 등 16곳에 불을 지를 방화범을 잡고보니 충남 강경 출신인 9살 소녀 복순이였다”면서 그동안 세간에 퍼졌던 흉흉한 소문을 전합니다.   
“경성시내에 방화 사건이 잇따르자 ‘경복궁 앞에 있던 해태를 없애버린 까닭’이라며 당국(총독부)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철거되었던 해치상은 1929년 11월29일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 뜰 앞으로 옮겨졌는데요. 
최근까지 광화문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로 서있는 옹색한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 때 재이전한 겁니다.

조선일보 1934년 1월1일자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도중 불이 나자 전전긍긍했는데, 경복궁에서 마주 보이는 관악산이 불의 산이기 때문에 자주 불이 난다는 풍수가들의 허황된 말을 믿고 해태상을 설치했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광화문 해치상, 귀가 붙인 이유
이렇게 광화문 해치상의 정체를 알 기 힘드네요. 이름도 해치, 해채, 해태 등으로 모호하고, 그 의미도 ‘사냥감-시비 곡직을 가리는 서수-하마비-화기를 억누르는 물짐승’ 등으로 계속 바뀌죠.     
물론 의미를 찾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 아까 인용했지만 해치는 ‘해치=외뿔짐승(一角獸)’으로 표현되어 있답니다. 
그중에서도 신양(神羊·신령스런 양)이 주목된다는데요. 황성신문 1899년2월25일자를 볼까요.
“해치(해치)라는 짐승은…신양(神羊)이라…‘바른 사람’(正人)을 보면 귀를 붙이고 허리를 공손히 굽히고 ‘사악한 자’(邪人)를 만나면 뿔을 세우고 치받으니…이리하여 우리 서울 황궁의 좌우성에 조성한지라.”

6년 가까이 거적㎘을 둘러쓴채 방치되어 있던 해태상은 1929년 11월 조선총독부 뜰 앞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제자리는 아니었다

 

지금 광화문에 우뚝 서있는 해치상을 보면 두 귀가 밀착되어 붙어있습니다. 그것이 황성신문이 언급한 ‘바른 사람을 보면 귀를 붙이고 허리를 공손히 굽힌다(貼耳馴服)’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 해치상을 설계한 이는 ‘이세욱’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조선일보 1934년 1월1일자에도 “대원군이 관악산의 화기를 잠재우려고 석공 이세욱을 시켜 ‘우리 부부’(해태상의 의인화)를 만들었다”고 썼구요. <별건곤>(1929년 9월호)은 “광화문 앞 쌍 해치(치는 신양이고, 음은 해치이며 속칭 해타라 한다)는 근세 미술의 대가 이세욱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경성기략>(권4·‘경복궁 중건’>도 “광화문 밖 쌍해치는 근세미술사가 이세욱의 걸작”이라고 했습니다. 

이세욱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은데요. 한 연구자가 <근정전 영건도감 별단> ‘계사’에 등장하는 ‘숭록대부 이세옥’을 ‘이세욱’의 혼동으로 해석하는데요.
만약 그렇다면 ‘이세욱(옥)’은 화가 출신의 조각가이며, 궁궐의 석물 제작에 여러차례 감독한 인물로 문헌자료에 등장합니다. 다만 석공은 아니구요. 해치상 등을 설계한 인물로 보인답니다.


■해치는 신령스러운 양?
연구자들은 <고종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해치상=하마비’로 단순하게 보지는 않는 것 같아요.
광화문 해치상에 주목하라는 건데요. 원래 존재했던 뿔이 퇴화된 감을 줍니다. 원래 해치상은 17세기 이전까지는 중국처럼 뿔 달린 짐승으로 나오지만 이후 해치와 사자를 결합하는 과도기를 거쳐 뿔이 점차 사라진다는군요. 
그러다가 1867~70년 사이 완성된 광화문 해치상을 기점으로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모습이 정립됐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사자의 몸을 갖고 있는 신양(神羊)의 형태로요. 그런 모습은 중국에는 없답니다.

황성신문 1899년 2월25일자는 “해치는 신양(神羊·신령스런 양)이며 바른 사람을 만나면 공손해지고, 악인을 만나면 뿔로 치받는다”면서 광화문 앞에 해치상을 세운 이유를 밝혔다.황성신문의 기사처럼 광화문 해치는 마치 양과 같은 형상이며, 귀도 바싹 붙였다.

 

그래서 연구자 중에는 숙종(1674~1720) 이후 소중화 사상 따라 조선의 문화수준에 깊은 자부심을 느끼며 중국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조선만의 고유한 색채가 발현된 것일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구요.
또한 왕권강화를 꾀한 흥선대원군의 의지가 표출된 상징물이었다는 해석도 있답니다
경복궁이 중건될 무렵은 세도정치의 폐해가 드러났던 때죠.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해치의 속성을 통해 다시는 세도정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해치상을 통해 발현하려 했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법과 정의의 상징인 해치상을 경복궁 앞에 세웠다는 겁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이 별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그럴듯한 추정일뿐이죠. 


■포토존이 된 해치상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광화문 앞 해치상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봤는데요.
솔직히 저는 왜 해치가 서울을 대표하는 공식 마스코트로 선정되었는지는 선뜻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자면 명칭 조차 통일되지 않았구요. 게다가 그 동물의 정체성 또한 분명하지 않잖습니까.
조금 좁혀 정리한다 해도 해치는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졌고요. 
게다가 선악과 시비를 가리는 동물이지 않습니까. 검·경찰청, 법원, 감사원 같은 사정당국이라면 몰라도, 서울 시민의 상징 동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견해에 한표를 던지고 싶어요.  
그런데 요즘 재미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광화문 월대와 현판 등의 복원과 함께 벽쪽에 붙어있던 해치상이 앞쪽으로 전진배치되자(물론 원위치는 아니지만) 일약 ‘인기 포토존’으로 부각되었다고 하더군요. 
해치상과 함께 사진 한장을 찍으려면 ‘줄을 서시오’를 외쳐야 한다네요. 

 

하기야 요즘엔 사진찍는 포인트에 열광하는 시대가 됐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역사성이 어떻고, 상징성이 저떻고 정색을 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시민들이 좋아하면 그뿐인거죠. 따지고 보면 역사성·상징성·진정성 뭐 이런 것들도 시민들이 만들어가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성격이 ‘사냥감-시비 곡직을 가리는 서수-하마비-물짐승’에서 다시 바뀌겠네요. ‘사진모델’로요.
다만 그런 생각은 듭디다. 서울시가 ‘해치’를 진정으로 서울 시민의 마스코트로 정착시키려면 단편적인 홍보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해치상을 찾는 이들에게 ‘이 동물이 왜 서울의 상징동물이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 동물 앞에서 사진을 찍어야 할 이유는 말해줘야죠. 적어도 왜 ‘왕범이’가 ‘해치’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이 기사를 위해 김민규 문화재청 전문위원과, 양숙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임경희 궁능서비스 기획과 학예연구관, 조은경 복원정비과장, 전의건 사무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민규, ‘광화문과 월대 서수상의 상징과 제작시기’, <광화문 월대 복원, 시작과 끝>(월대포럼), 문화재청궁능유적본부, 2023
김언종, ‘해태고’, <한국한문학연구> 제42권 42호, 한국한문학회, 2008
이성준, ‘조선후기 해치상의 도상변천-광화문 해치상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39,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2
이순우,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 하늘재, 2004
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월대 및 동·서십자각 권역 복원 등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명지대건축문화연구소, 2018
오현덕·남호현·유영식·김정곤·강기택·유우식, ‘1900년대 초반의 기록사진과 디지털 카메라 사진분석을 활용한 광화문 앞 해치상의 원위치 추정’, <보존과학회지> 37권5호,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2021
이영섭, ‘한국 해태의 형상고-중국으로부터의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중국어문학논집>92호, 중국어문학연구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