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순수비. 한국사를 배울 때 놓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삼국 가운데 약소국이던 신라가 진흥왕 때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정복하고 북쪽으로는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함경도 이원지방까지 진출한 다음 새롭게 개척한 영토를 순행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으로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순수비는 창녕비ㆍ북한산비ㆍ마운령비ㆍ황초령비 등 4곳입니다. 한결같이 개척한 새로운 영토 중에서도 요충지에 속하는 지점에 건립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4곳 뿐일까요. 역사학자들은 진흥왕순수비가 더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상한 곳을 마침내 찾았습니다. 1980년대 초 학계에 보고된 감악산비입니다. 임진강유역의 요충지, 임진강-파주-서울을 잇는 감악산(해발 675미터) 정상에 심상치않은 비석이 서있습니다. 생김새는 북한산 순수비와 닮았고, 12~13자의 글자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흥왕순수비요!"하는 확증이 없기에 그냥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뿐입니다. 이 비석은 1976년 감악산을 관할하는 군부대 소령의 눈에 띄었고, 마침내 학계에 보고됐습니다. 누구든 감악산에 가면 이 심상치않은 비석을 반드시 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아 참, 철원에도 진흥왕순수비의 전설이 깃든 곳이 있습니다. 고석정입니다. 이 역시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가보십시요.
감악산(紺岳山)이라는 산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 양주시, 연천군 사이에 있는 해발 675미터의 산이다. 예로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함께 흘러나온다 해서 감악(紺岳), 즉 감색바위라고 하였다.
전형적인 바위산이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임진강 하류의 넓은 평야지대가 보이며, 개성의 송악산과 북한산이 보인다.
감악산에서 바라본 임진강 이북 땅. 언제나 그렇듯 답답한 건물들이 없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바라보면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정상에는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해있는 이곳엔 수수께끼 같은 옛 비석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비석은 저 멀리 개성 송악산을 바라보고 있고, 삼국시대부터 요처였던 칠중성을 품에 안고 있다. 굽이굽이 사연을 담은 임진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고….
이곳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요처 중의 요처다.
1976년 어느 날. ○○사단 정보과장인 윤일영 소령은 작전구역인 감악산 정상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그는 정상에 나 홀로 서있는 이른바「몰자비(沒字碑ㆍ명문이 마멸된 비)」를 볼 때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직무상 감악산 정상을 늘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이 비석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 거렸어요.』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정상의 비석이 원래는 묻혀 있었는데 누가 똑바로 세운 뒤 갓(개석)까지 새로 만들어 얹어 놓았다고 했다.
『영험하다는 소리가 있어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여인네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네요.』
윤일영 소령의 뇌리를 스치는 대목이 있었다.
『육사시절 허선도 교수님이「관방지리」를 가르치면서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곳은 한결같이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말씀을 하신 게 번뜩 떠올랐어요.”
이곳 감악산은 칠중성이 눈앞에 보이는, 삼국시대부터 그야말로 요처 중 요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몰자비」는? 혹시 진흥왕 순수비가 아닌가.
-웬 설인귀 전설?
속전에 따르면 이 비석과, 비석이 있는 감악산 주변은 실은 당나라 장군 설인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우선 『대동지지(大東地志)』 「적성(積城)」 ‘감악산단조(紺岳山壇條)’는 『높이가 3장(丈)이나 되는 석단 위에 고비(古碑)가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고려사』「지리조」와『신증동국여지승람』,『적성군지』등 사료를 종합해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감악산은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를 지내는 곳이었다. 봄, 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현종 2년(1011년) 거란병이 장단악(長湍嶽)에 이르렀는데 감악신사(神祠)에 군기와 군마가 있는 것처럼 보여 거란병이 두려워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이에…(설인귀)신에게 감사하였다. 민간에 전하길 신라사람이 당 장군 설인귀를 제사하여 산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세조실록』「1464년 10년 9월조」은 더욱 재미있는 기록이 등장한다.
『권람(權擥)이 병이 들자 감악에서 기도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쳤다. 권람이 신(神)에게 말했다.「감악산 신(神)이 당나라 장수(설인귀)라 하지만, 저는 일국(조선)의 재상입니다. 그러니 설인귀와 맞먹어도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무당이「그대가 감히 나와 서로 버티는데 돌아가면 병이 날 것」이라고 신어(神語)를 해댔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이곳에 등장하는가. 속전에는 설인귀가 감악산 인근인 주월리 육계토성에서 태어나 맹훈련하여 당나라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설인귀의 고향이라는 적성의 주월리 백옥봉, 그의 용마가 났다는 율포리, 무건리와 설마치에서 했다는 무예연습 전설, 감악산에 있다는 그의 수도석굴, 죽어서도 신으로 추앙되어 제사가 받들어졌다는 정상부의 사당 등 설인귀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설인귀가 누구인가. 그는 신라를 욕보이고 누란의 위기로 빠뜨린 철천지원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조」를 보자.
『지금 (문무)왕은 천자의 명을 어기고 이웃나라의 우호를 속이고…오호라! 전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구나.』(설인귀)
『창고에 쌓아둔 양식을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느라 신라의 백성들은 굶고 있는데, 웅진의 중국 군사들은 양식이 남아돕니다.(중략) 당나라는 이유도 묻지 않고 군사 수 만 명을 보내 신라를 뒤엎으려 합니다. (신라는) 억울하며 절대 반역하지 않았습니다.』(문무왕)
671년 당나라 행군총관 설인귀(薛仁貴ㆍ613~683년)가 신라 문무왕을 협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띄운다.
이에 문무왕은『태양(당)이 빛을 비춰주지 않아도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고 있다.』면서 당나라에 충성을 다짐한다. 동맹군에서 점령군으로 변해버린 당나라군의 끊임없는 요구에 백성이 굶어죽게 생겼는데도….
문무왕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설인귀의 협박에 굴복한다.
약소국의 비애인가, 외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대가인가. 아직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낼) 때가 아니니 온갖 수모를 꾹 참았겠지.
이렇게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 지은「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가 역사의 뼈저린 기록물로 남아 있다.(『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조」) 그런데 그 설인귀가 감악산 주변에서는 전설로 남아 있다니.
-설인귀는 분명 당나라 사람
신라에게 뼈아픈 수모를 안겨준 설인귀는 왜 이토록 우리 땅에서 신격화했을까.
전설에 따르면 설인귀가「모국」인 고구려를 정벌한 것에 자책하여『죽은 후에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서라도 우리를 돕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연천 현감이며, 감악산 소사의 제관이었던 명문장가인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ㆍ1681~?)의 언급『감악산기』(1742년)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자.
『설인귀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으로, 아버지를 감악산에 장사지냈고, 안동도호부에 머물 적에 수차례 성묘를 했다고 한다. 설인귀의 사당 옆「몰자비」는 혹시 아버지 묘 앞에 있는 비석이 아닐까?』
하지만 당대의 중국기록인 『구당서(舊唐書)』 「열전」 ‘설인귀전’에 따르면 설인귀는 당나라 강주(絳州) 용문(龍門) 출생이다. 그런 신라 땅 감악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니….
오죽했으면 『여지도서(輿地圖書)』「보유편(補遺篇)」‘적성현지(積城縣誌)’가 『설인귀의 육계토성 출생설과 산신설 등은 어디까지나 속전일 뿐 제동지언(齊東之言)에 불과하다.』고 일축했을까.
여기서 「제동지언」은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의 동쪽 변경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지칭하는 것으로 사리분별을 모르는 어리석인 사람들을 일컫는다.
설인귀와의 관련설은「제동지언」으로 폄훼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감악산이 신라시대 때부터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악산은 신라의 제사터
『삼국사기』「잡지(雜誌)ㆍ제사(祭祀)」에 따르면 신라는 나마(奈麻), 골화(骨火), 혈례(穴禮) 등 왕경과 왕경 부근에 있었던 3산(山)에서 대사(大祀)를, 토함산ㆍ지리산ㆍ계룡산ㆍ가나갑악(加那岬岳)ㆍ웅곡악(熊谷岳) 등에서는 중사(中祀)를, 상악(霜岳ㆍ강원 고성)ㆍ설악ㆍ부아악(負兒岳ㆍ북한산)ㆍ감악산에서는 소사(小祀)를 지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 곳을 보면 대ㆍ중ㆍ소로 구분한 국가제례의 면모를 간파할 수 있다.
즉, 대사는 신라의 영역이 경주 일원이었던 초창기부터 지냈던 큰 제사였고,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중사와 소사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감악산의 소사 역시 부아악(북한산)과 함께 신라가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과정, 즉 6세기 중엽~7세기 초엽 추가한 제사일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강과 임진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까지 영역을 넓힌 뒤 척경(拓境)과 순행(巡行)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 즉 순수비를 세운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가.
윤일영 소령의 지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비석의 형태와 크기, 위치, 그리고 비석과의 관방시설과의 관계에 천착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군인에게는 일반학자들이 갖기 어려운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사의 측면에서 유적과 유물을 살필 수 있다는 점이다.
-요충지에만 세운 순수비
우선 신라의 순수비가 확인되는 곳을 곱씹어 보았다.
진흥왕은 영토를 넓힌 뒤 그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북한산(555년)과 창녕(561년)ㆍ황초령(黃草嶺ㆍ568년)ㆍ마운령(磨雲嶺ㆍ568년)비가 그것이다.
그런데 순수비가 건립된 곳은 한결같이 중요한 관방시설의 인근지역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국경지역을 둘러보던 진흥왕은 아마도 요처 중의 요처만을 골라 순수비를 세웠을 것이다.
예컨대 창녕비 인근의 화왕산성은 낙동강 남쪽의 의령과 함안으로 통하는 길목에 서있고, 마운령비 인근의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잇는 통로를, 황초령비 인근의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잇는 통로를 각각 통제하는 곳이다. 물론 북한산비가 있는 북한산성은 개성과 서울을 잇는 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요충지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553년) 북한산 순수비를 세운다. 그런 뒤 북진을 계속한다. 이제 신라는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게 된다. 국경선은 지형과 기동로의 측면에서 3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파주ㆍ연천을 기준으로 한 임진강ㆍ한탄강 지역이고, 둘째는 임진강 동쪽인 철원지방이며, 셋째는 낭림산맥 동쪽의 함흥지역을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신라-고구려 국경지역에서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비와 황초령비, 마운령비다.
그렇다면 남는 의문점. 북한산이 개성-파주-서울을 잇는 요충지였으므로 순수비를 세웠다면, 또 하나의 요충지인 적성지역에는 과연 순수비를 세우지 않았을까.
누차에 걸쳐『삼국사기』를 살펴보았듯 칠중성과 감악산이 있는 적성지역에서는 7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고구려군의 남하루트와 한국전쟁 때의 북한군ㆍ중국군 남침로 등을 검토해보아도 적성을 통과하면 북한산성을 거치지 않고도 서울로 쏜살같이 빠져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진흥왕은 칠중성을 품에 안고 있는 감악산 정상에도 순수비를 세우지 않았을까.
-북한산순수비를 빼닮은 감악산 고비
또한 이 감악산 비석은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와 너무도 흡사하다.
감악산비는 높이 170센티미터, 너비 74센티미터, 두께 15센티미터이다. 북한산비는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 154센티미터, 너비 69센티미터, 두께 15센티미터다. 석재도 화강암으로 똑같다. 나중에 얹어놓은 덮개돌을 빼면 두 비의 형태와 규모는 동시대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이미 살펴봤듯이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에서 나와 있듯이 북한산은 감악산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부터 제사(소사)를 지냈던 곳이 아닌가.
또 다른 관점은 감악산비가 해발 675미터의 높은 곳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북한산비 역시 해발 556미터 비봉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이뿐이 아니라 창녕비(화왕산)와 마운령비(운시산), 황초령(중령진)비 역시 고지에 서있었다.
이 모든 자료와 해석을 토대로 윤일영씨는 북한군 게릴라의 침투로와 관련된 군 전술 세미나에서 칠중성과 감악산의 중요도를 밝혔다. 예나 지금이나 도섭(渡涉)할 수 있는 임진강의 칠중성 인근이 전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사(戰史)의 개념에서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신라 진흥왕은 국경선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성(城)이나 진(鎭)을 선정한 뒤 그 배후의 높은 산에 순수비를 세웠을 것이며, 따라서 감악산비는 또 하나의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이 원고는 1981년 1월30일『임진강 전사 연구초(硏究抄)』라는 책자에 소개됐고, 군 내부에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동국대 학군단장으로 전출한 이덕렬 대령이 이 자료를 동국대박물관 측에 알려주었다.
그 후 비석에 대한 정식학술조사는 1982년 동국대 박물관이 맡는다.
-12~13자의 자흔(字痕)만이…
당시 황수영 동국대 총장도 1975년 이래로 감악산 고비(古碑)를 찾으려 양주군청 공보실을 자주 왕래했던 터였다. 당시만 해도 비석의 정확한 위치가 양주군 황방리로 알려져 있었다.
이용범 당시 동국대 박물관장이 남긴「칠중성과 감악산 고비 조사」(『불교미술』(1983년) 특집기사를 보면 그 내막이 자세하게 나온다.
『감악산 비석의 현재(1982년) 위치는 파주 적성 설마리와 연천 금곡면 천파리, 양주 남면 황방리의 경계에 있는데, 군청의 행정구역 자료에는 감악산비의 정확한 위치는 「황방리」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찾지 못했던 것이다.』
여하튼 당시 황수영 총장·이기백 교수(서강대) 등이 참여한 학술조사에서 이 고비가 삼국시대의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진흥왕대의 순수비를 염두에 두고 감악산 고비를 살펴보면 외관과 규모가 이상하리만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흡사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임창순·고병익·황원구·남도영·이병도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비문을 판독하려 애썼다. 하지만 12~13자의 자흔(字痕)만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동국대 조사단은『삼국시대의 고비는 틀림없지만, 기적적으로 어떤 새로운 자료가 나오든가, 새로운 판독방법이라도 개발되지 않는 한 이 고비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힘들게 정상에 올라 감악산비를 친견하고 있노라면, 그리고 북한산비와 비교하노라면 둘 사이에 깊은 친연관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철원 고석정 비(碑)의 주인공은 진평왕? 진흥왕?
감악산비 말고도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비석이 철원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앞서 검토했듯 철원은 신라와 고구려 국경선 가운데 전략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3곳 가운데 한 곳이었다.
철원지역은 함경도 함흥지역과 임진강 이서(以西)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한국전쟁 때도 이런 중요성이 강조되어 백마고지 전투를 비롯해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동국여지승람고려 충선왕 5년(1313년) 국통(國統)의 존호를 받았던 무외(無畏)가 쓴 『고석정기』 내용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철원군 남쪽으로 만보를 가면 신선의 구역이 있는데, 이곳을 고석정이라 한다. 정자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일어나 높이가 300척 가량 되고, 주위가 10여 장(丈)쯤 된다. 바위를 따라 올라가면 구멍 하나가 있는데 기어 들어가면 집의 층대 같이 생겼고, 10명 쯤 앉을 수 있다. 그 옆에는 옥돌로 된 돌비가 있는데 신라 진솔왕(眞率王)이 놀러 와서 남긴 비(碑)다.』
고석정은 기록에 나온 대로 인공구조물로서의 누정(樓亭)이 아니라 큰 바위가 만들어낸 바위정자이다. 하지만 『고석정기』에 나오는 이 진솔왕비는 안타깝게도 남아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고석정기』에 나오는 진솔왕은 누구인가.
진흥왕(眞興王ㆍ540~576년), 진지왕(眞智王ㆍ576∼579), 진평왕(眞平王ㆍ579~632년)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짙다.
이와 관련해서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 『관동읍지(關東邑誌)』등은 진솔왕=진평왕이라고 했다.
하지만 1931년 고석정을 실사한 이마니시 류(今西龍)는『진평왕 치세 53년간 고석정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오히려 진흥왕일 가능성이 많다.』고 진평왕설에 회의감을 드러냈다.
1982년 감악산비를 조사한 이용범 교수도『고석정의 고비는 마운령-황초령에서 북한산순수비를 연결하는 고대 교통의 요충지에 서 있다.』면서『이 비는 임진강 유역의 감악산비와도 어떤 관련성을 상정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해석했다.
물론 윤일영씨는『철원지역에 존재했을 진흥왕 순수비는 지형과 전략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강원도 평강과 이천, 철원 경계에 있는 대왕덕산(大王德山ㆍ해발 788미터)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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