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혀?”
충청도 사투리가 웃음을 자아낸다.
“보신탕(개고기) 먹을 줄 아느냐”는 질문이다. ‘개 혀?’의 복수형도 있단다. ‘개들 혀?’란다.
충북 사람들이 딴죽을 건다. ‘개 혀?’는 엄밀히 말해 충청남도 사투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충북에서는 뭐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나온다.
“개 햐?”
사실 개고기는 동양만의 식습관은 아니었다. 1926년 1월 8일 동아일보를 보면 흥미롭다.
“조선에서는 위생상 해롭다고 떠드는데 독일 작센 지방에서는 매년 평균 5만두의 개가 식용으로 팔리고, 개고기 전매업자까지 있다”는 해외토픽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차츰 ‘개고기는 동양의 야만스런 식습관’이라는 이미지로만 굳어져 갔다.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서 사냥개를 선물받은 뒤 보냈다는 감사편지는 인구에 회자된다.
“맛있게 잘 먹었소이다.”
그런데 27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동안 끈질긴 사랑을 받았던 복날 개고기 문화가 눈에 띄게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국내에서도 개고기 문화의 상징이던 성남 모란시장의 식용견 점포 거리는 파리를 날리고 있다. 보신탕의 간판을 단 음식점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반려견 인구가 급증하면서 ‘개고기 문화=야만’이라는 인식이 퍼진 결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개혀?’하는 말이 ‘극혐’의 단어로 사전에 등재될 날이 멀지 않았다.
가만보니 성질이 흉악한 사람을 ‘개고기’라 일컬은 때가 있지 않았던가. 자칫 개고기 음식을 먹다가 ‘개고기’란 욕설을 들을 판이다.
■복날 십자가형을 당한 견공들
복날 개고기문화가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2700년전이다.
“진(秦) 덕공 2년, 처음으로 복일(伏日)을 정해 개(犬)를 잡아 사람을 해치는 뜨거운 독기, 즉 열독을 제거했다.(以狗禦蠱)”(<사기> ‘진본기’)
이것이 복날과 보신탕의 유래다. 진나라 덕공 2년(기원전 675년) 때의 일이니 꼭 2692년 전이다. <사기>의 주석서인 <사기집해>와 <사기정의> 등은 복날의 기원을 흥미롭게 부연설명해놓았다.
“초복, 제사를 지낼 때 개를 읍(邑)의 4문 앞에 걸어놓았다.(祠社책狗邑四門也) 사람을 해치는 열독과 악한 기운을 물리치려고 개를 걸어놓는 것이다.”개장찜, 개장국누르미, 누렁이 삶는 법 등 각종 개고기요리의 조리법을 설명한 <음식디미방>의 개고기 요리법. /영양군 제공
고대의 형벌 중에 책형(책刑)이 있다. 기둥에 묶어놓고 찔러 죽이는 형벌이다. 2700년 전 진나라 사람들은 성문 안 4대문에 개를 ‘십자가’ 형태로 못박아 걸어두면서 열독과 악귀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1960~70년대 복날에 개를 매달아놓고 몽둥이로 서서히 때려죽이는 장면이 40~5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서히 때려죽여야 호르몬이 분비되어 육질이 야들애들해진다나 어쩐다나. 참으로 잔인한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몽둥이를 맞는 개가 처절한 고통 속에 울면 온동네 개들이 따라 짖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끔찍한 장면이다.
■왜 복날에 개를 잡았나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복날에는 왜 개를 잡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
초복은 하지가 지난 뒤 세번째 경일(庚日)이다. 중복은 네번째 경일이며, 말복은 입추 뒤 첫번째 경일이다. 그런데 천간(天干)의 하나인 ‘경’은 오행으로 치면 쇠(金)에 해당한다.
오행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균형을 이루는데 불이 쇠를 녹이기 때문에 ‘화극금(火克金)’이라 한다.
그러니까 쇠의 기운이 강한 경일에는 화기가 강한 음식을 먹어서 눌러줘야 한다.
그런데 개는 ‘양(陽)’을 뜻하는 ‘가축(狗陽畜)’이다. 이른바 이열치열에 딱 맞는 음식인 것이다.
이런 해석도 있다. 가을철을 상징하는 금(金)의 기운이 나오려다가 아직 물러나지 못한 여름의 화(火)를 만나 바싹 엎드려 복종(伏)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제후의 반열에 오른 개백정 번쾌
그런데 복날과 상관없이 개고기를 먹는 풍습은 꽤나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예기> ‘월령’이나 <식경(食經)>은 “음력 7월(맹추·孟秋)에는 음식으로 마(삼)과 개고기를 먹는다.(食麻與犬)”고 했다.
<주례> ‘천관·선부’를 보면 주나라 천자는 “말·소·양·돼지·닭과 함께 개고기를 고기반찬(膳)으로 먹는다”고 했다.
또 주나라 때 8가지 진귀한 음식의 조리법을 기록한 <예기> ‘내칙’은 8번째 진귀한 음식인 ‘팔진’을 이렇게 설명했다.
“팔진은 간료(肝료)라 한다. 개의 간을 구해 창자 속에 끼어있는 기름으로 덮은 다음 불로 굽는다. 기름이 다 타서 없어지면 음식이 완성되는 것이다.”
수나라 때의 의서인 <식경>은 음식을 접대하는 데 필요한 궁합음식을 소개해 두었다.
“소고기엔 쌀밥이, 개고기에는 조밥이 좋다.(犬宜粱) 찹쌀밥에는 개고깃국과 토끼고깃국이다. 이런 것들을 쌀가루를 넣어 끓인다.(折도犬羹兎羹) ”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젊었을 때 ‘개고기 요리’를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의 일등공신이 된 번쾌(樊쾌)라는 인물의 본업은 ‘개백정’이었다.
<사기정의>는 “진나라 말기에는 개고기를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먹는 것처럼 먹었기에 번쾌가 개도살을 생업으로 삼은 것”이라 했다.
아마도 젊은 시절 백수건달이었던 유방은 번쾌가 잡은 개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물론 개고기 값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젊었을 적부터 건달에 불과했던 유방을 챙겼던 번쾌는 훗날 ‘유방의 부인(여 태후)’의 여동생인 여수와 결혼했다.
그는 유방의 최측근으로 한나라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워 무양후에 올랐다.(<사기> ‘번역등관열전’>) 이것이 ‘개백정 번쾌’의 깜짝 출세기이다.
이밖에 <논어>에는 “제사에 개고기를 쓴다”는 기록이 있고, <소학>에는 “제사와 손님 접대에 군자는 소를 쓰고, 대부는 양, 선비는 개를 쓴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약전의 유배지였던 흑산도, 다산은 흑산도에 떠도는 개를 잡아먹으면 1년에 최소한 50여 마리는 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부러워 했다.
■다산 정약용의 개고기 사랑
우리 선조들의 ‘개고기 사랑’도 유별났다.
일단 ‘개고기 마니아’였던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의 예를 한번 보자.
다산이 50살이 되던 1811년(순조 11년)의 일이다. 다산은 흑산도 유배중인 형(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개고기 예찬론’을 한껏 펼친다.(<다산시문집> 제20권)
“(형님이) 유배중에 짐승 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흑산도 안에 들개(山犬)가 100마리가 아니라 1000마리도 넘을텐데…. 저라면 5일에 한마리씩 삶아 먹겠습니다."
다산은 한술 더뜬다.
“1년 3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흑산도를 형님의 탕목읍(湯沐邑·천자나 제후의 식읍지)으로 만들어주어 고기를 주고 부귀를 누리게 하였는데…. 오히려 고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택하다니 역시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1년에 52마리를 먹으라니…. 다산은 ‘지독한 개고기 마니아’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개를 사냥하는 방법까지 전수한다.
“식통(食桶) 하나를 만드는데 그 둘레는 개의 입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깊이는 개의 머리가 빠질 만하게 만든 다음 그 통(桶) 안의 사방 가장자리에는 두루 쇠낫을 꽂는데 그 모양이 송곳처럼 곧아야지 낚시 갈고리처럼 굽어서는 안 됩니다. 그 통의 밑바닥에는 뼈다귀를 묶어 놓아도 되고 밥이나 죽 모두 미끼로 할 수 있습니다. 쇠낫은 박힌 부분은 위로 가게 하고 날의 끝은 통의 아래에 있게 해야 합니다. 이래야 개가 주둥이를 넣기는 쉬워도 주둥이를 꺼내기는 거북합니다. 또 개가 이미 미끼를 물면 그 주둥이가 불룩하게 커져서 사면(四面)으로 찔리게 됩니다. 때문에 끝내는 걸리게 되어 공손히 엎드려 꼬리만 흔들 수밖에 없습니다.”
■박제가의 개고기 미식회
다산은 박제가(1750~1805) 역시 특유의 ‘개고기 요리법’까지 창안한 개고기애호가였음을 밝히고 있다.
“개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ㆍ장ㆍ기름ㆍ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습니다.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이라는 것입니다.”
다산은 초정 박제가가 ‘맛있게 삶는 방법’까지 통달한, 끔찍한 ‘개고기 애호가’ 였음을 알리고 있다. 비단 다산과 초정 뿐일까.
■개고기 파티로 쿠데타의 결의를 다진 이들
별 일도 다 있었다. ‘임금 시해’의 거사를 앞둔 쿠데타 세력이 개고기음식을 최후의 만찬으로 택한 일이 있었다니 말이다.
1777년(정조 1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홍계희 가문은 몰락하고 만다. 그러자 ‘정조 시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 해 7월28일, 정조의 이복동생 이찬(1759~1778년)을 추대하는 반역의 무리는 대궐밖 ‘개잡는 집(屠狗家)’에서 개장국을 사먹고(買吃狗醬) 대궐로 잠입했다.
거사를 앞두고 보신탕집에 모여 개고기 파티로 ‘최후의 만찬’을 펼치며 결의를 다진 것이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임금이 밤새도록 책을 읽고 있던 존현각 지붕을 뚫고 시해할 작정이었지만 발각되고 만 것이었다.
일당은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미수에 그친 일당이 이튿날 모인 곳도 바로 최후의 개고기 파티로 결의를 다진 개 잡는 집이었다. 일당은 이곳에서 다시금 거사계획을 세웠지만 도중에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개고기 뇌물로 국왕비서실에 입성했다.
또 기막힌 일이 있다.
1534년, 중종은 인사발령을 내면서 문제의 이팽수를 승정원 주서에 임명했다. 그런데 <중종실록>을 쓴 사관이 발령내용의 팩트를 전하면서 슬쩍 논평한다.
“이팽수는 승정원 내부의 천거도 없었다. 그런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천거한 것이다. 이팽수는 안로와 한마을에 살았고, 이팽수의 아버지가 김안로의 가신이었다. 안로는 팽수를 자제처럼 여겼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고향 선후배라는 지연(地緣)이 작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음 대목은 웃긴다.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했다. 팽수가 봉상시 참봉으로 있을 때부터, 크고 살찐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김안로의 구미를 맞추었다. 김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청요직에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불렀다.”
‘‘가장’은 ‘개고기’를 뜻하고, ‘주서’는 정7품의 벼슬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주사(6급·주무관)’ 정도?
그러니까 봉상시 참봉(지금의 9급)이었던 이팽수가 당대 권력가 김안로(金安老·1481~1537)에게 개고기 뇌물을 써서 요직중의 요직인 국왕비서실로 입성했다는 것이다.
■"자네 개고기는 맛이 없네"
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 이가 있었다.
진복창이란 인물이었다. 진복창은 한때 이팽수와 함께 봉상시 주부(정6품)로 근무한 적이 있던 동료였다. 진복창 역시 김안로에게 ‘개고기 구이’로 접근했다.(1536년)
“진복창은 봉상시 주부(정6품·요즘의 5급)가 되었음에도 김안로의 뜻에 맞춰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하는가 하면, 매번 좌중에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떠벌였다.”(<중종실록>)
문제는 진복창이 이팽수처럼 높이 발탁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개고기 구이’ 실력이 이팽수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진복창은 김안로가 그토록 좋아하는 ‘개고기 구이(견적·犬炙)’을 바쳤지만 오히려 크게 쓰임받지 못했다. 진봉창은 스스로 ‘내 견적요리가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김안로로부터 ‘요리 실력이 이팽수보다 못하다’는 질책을 받았다.”(<중종실록>)
개고기요리를 뇌물로 바친 이들도 문제지만, 개고기라면 사족을 못쓴 김안로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국상 중에도, 외교 중에도 참지못한 개고기 탐닉
김안로 뿐이랴.
“1649년(효종 즉위년) 강원감사 유석이 국상을 당한 이때 방자하게 공석에서 고기를 먹고 심지어는 가장(家獐·개고기 요리)를 마련해 먹으면서 ‘맛이 없다’고 화를 내며 요리하는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습니다.” (<효종실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국상 중인데도 “여름철에는 반드시 보신을 해야 한다”며 개고기 요리를 해먹고 사람까지 죽였다는 뜻이다. 빗나간 개고기 사랑이다.
무척 냉소적인 필치로 개고기를 사랑했던 사람의 ‘깨끗하지 못한 최후’를 그리고 있다.
또 다산 정약용과 같은 시대를 산 문신 심상규(1766~1838) 역시 ‘지나친’ 개고기 애호가였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나온 심상규의 ‘개고기 편력’은 유명하다. 그는 1812년 사신의 명을 받아 연경(베이징)으로 갔다. 그런데 마침 복날이 다가오자 입맛을 쩍쩍 다셨다.
“연경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는 복날에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했는데 연경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이상하게 여겨 팔지 않았다. 심상규는 개의치 않고 그릇을 빌려다 개고기를 삶았다. 연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삶은 그릇을 모두 내다 버렸다.”
한번 상상해보라. 연경 사람들은 조선사신 심상규를 ‘짐승’ 보듯 했을 것이다.
빌려준 그릇마저 팽개쳤으니 말이다. 외교관이 남의 나라 땅에 특사로 가서 혐오식품을 스스로 해먹었으니 국제망신이 아닐 수 없다.
청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지 았았던 이유가 있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태조(누루하치·재위 1616~1626)를 둘러싼 전설 때문이었다. 즉 누루하치가 전쟁에서 불아 타 죽을 지경이었는데 개가 나타나 온몸에 물을 적셔 살려냈다는 것이다. 이후 청나라에서는 개를 신성하게 여겨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교관이라는 사람이 상대국의 문화도 아랑곳 하지않고, 개고기에 정신이 팔려 천인공노할 국제망신을 저질렀다니 참….
■개고기, 사족을 못쓴 이유
이렇게 사람들이 개고기라면 사족은 못쓴 이유는 무엇일까.
“개고기는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고, 오장을 편하게 한다.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한다.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양도(陽道)를 일으켜 기력을 증진시킨다.”(<동의보감>)
한마디로 정력에 좋다는 뜻이다. ‘정력’이라면 사족을 못쓰니 개고기, 아니 좋은 말로 보신탕 문화는 수 천 년을 면면히 이어온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말릴 것인가.
그렇지만 이제 대세가 흔들리고 있다. 보신탕 말고도 활력제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개에 무슨 식용견이 따로 있고, 반려견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애견인구가 늘면서 보신탕 문화 역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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