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동료 기자가 ‘무명초’ 기사를 썼다가 독자에게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도대체 이름 없는 식물이 어디있냐’는 것이다. 하기야 ‘이름 모를 풀’이라면 모를까 ‘이름 없는 풀’이라는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식물도감을 들여다보면 기기묘묘한 이름들로 가득차 있다.
“개불알꽃을 보았다. 우리 집 바둑이의 불알과 너무도 닮았다. 바둑이는 좋겠다. 불알에도 꽃이 피니까.” 정호승 시인의 ‘개불알꽃’(위 사진)이다.
일제 강점기에 열매가 ‘개의 음낭’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누노후구리(犬の陰囊)’라 망측한 이름을 붙인 것을 우리 말로 그대로 옮겼다.
‘며느리밑씻개’(아래사진) 역시 일본 이름인 ‘마마코노시리누구이(의붓자식밑씻개·繼子の尻拭い)’에서 유래됐다. 어떻게 일본의 의붓자식이 어떻게 이 땅에 와서 ‘며느리’로 살짝 둔갑했는지는 수수께끼다.
다만 줄기에 돋은 까칠한 가시가 단서가 될까. 화장지가 없었던 시절,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골탕먹이려고 이 가시가 돋은 들풀을 변소에 잔뜩 쌓아두었다는 이야기가 그럴듯 하다.
불교 하고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중대가리풀’이라는 들풀도 있다. 동그란 열매가 마치 머리카
락을 밀어버린 스님의 두상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붙인 들꽃 이름들을 답습해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엔 개불알꽃 대신 복주머니난(봄까치꽃), 며느리밑씻개 대신 사광이아재비 등으로 일컬어진다.
근자에 복원사업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꽃이름 두가지가 있다. 광릉요강꽃과 미스김라일락이다.
광릉요강꽃은 입술 모양의 부리가 요강을 닮았고, 뿌리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해서 약간은 남사스런 이름이 붙었다. 최근 복원작업이 성공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미스김라일락도 만만찮은 사연을 안고 있다. 1947년 미군정청 소속 식물학자인 엘윈 미더는 삼각산 부근에서 토종 라일락인 ‘정향(丁香)나무’를 발견하고는 종자 12개를 미국으로 가져간다.
새 품종의 라일락을 개발한 미더는 한국에서 자신을 도와준 타이피스트의 성을 붙여 미스김라일락이라 했다. 무단 유출된 정향나무의 개량종(미스김라일락)이 세계적인 꽃으로 자리잡는 사이, 원종(정향나무)은 멸종 위기에 놓이는 신세가 됐다.
최근 기자출신 귀농인(김판수씨·53)이 원종인 정향나무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참에 정향나무의 명성을 되찾기 바란다. 꽃 모양이 ‘丁’자이고, 향기(香)가 있어서 정향나무라 했다. 미스김보다는 한결 나은 이름이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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