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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베르됭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던 1914년 8월4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트라팔가 광장을 메운 시민들이 충격과 공포 대신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비단 영국 뿐이 아니었다. 전 유럽이 전쟁을 무슨 월드컵 축구처럼 즐겼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세계제1차대전은 지루한 ‘참호전’의 양상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독일군 총참모총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돌파구를 마련했다.

전 전선에 흩어져있는 프랑스군의 전력을 한곳에 몬 뒤 그곳만 집중적으로 때려 궤멸시키자는 작전을 폈다. 이 작전은 ‘고기분쇄기’로 일컬어졌다. 프랑스군을 모아서 한꺼번에 갈아벌인다는 뜻이었다.

공격유인목표는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고, 두우몽과 보 요새가 철옹성을 보호하고 있던 베르됭 지역이었다.
1916년 2월21일 새벽 4시부터 1000여문의 독일군 대포가 9시간동안 무려 30만발을 쏘아댔다.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일컬어지는 베르됭 전투(사진)가 시작된 것이다. 양국 지휘부는 총과 대포는 물론 화염방사기와 독가스탄으로 무감각한 살상의 경쟁을 이어갔다. 병력을 마치 물레방아처럼 계속 교대해서 투입했다.

전투에 투입될 차례가 된 병사들은 지옥행 티켓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프랑스군 장교는 “지옥도 이렇게 지독할 수 없다. 모두 미쳤다”고 몸서리쳤다.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어느 쪽도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까지의 희생이 아까웠던 탓이었다.

예컨대 플뤼리 마을의 경우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혈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그대로 공동묘지가 됐다. 그렇게 10개월간 사방 10㎞의 전쟁터에서 희생된 양군의 사상자는 70만명에 달했다. 6000만발의 포탄이 떨어진 베르됭 의 일부는 지금도 출입통제 지역으로 남아있다.

그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가 베르됭 전투 100주년 기념식에서 평화를 다짐했다. 베르됭 전투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메르켈 총리의 말처럼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베르됭 전투를 능가할 역사가 있다. 한국전쟁의 전 기간(1127일) 중 무려 764일을 지루한 고지쟁탈전으로 치렀던 쓰라린 기억이다. 단적인 예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단 10일간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며 양측 합해 2만명 이상 희생당했다.

양측이 치열한 고지전을 벌인 이유는 확실한 승리도 아니었다. 그저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 전쟁의 당사자들은 60년이 넘도록 반목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베르됭 전투 100주년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이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남도현의 ‘1916년 베르됭 전투 1,2,3’, 네이버캐스트
피터 하트의 <더 그레이트 워>, 정재면 옮김, 도서출판 관악, 2014
매슈 휴스, 윌리엄 J 필토트의 <제1차 세계대전>, 나종남·정상협 옮김, 생각의 나무, 2008
이기환의 <분단의 섬 민통선>, 책문, 200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