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흥미로운 천문학 논문이 실렸습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치세에 관측한 신성폭발 기록을 제대로 규명한 것입니다. 미국·영국·폴란드 등 6개국 공동연구진은 지난해 칠레에서 전갈자리 꼬리부분에 있는 한 별을 둘러싼 가스구름을 관측했습니다. 공동연구진은 이 가스구름을 연구하면서 1437년(세종 19년) 음력 2월5일 “미수(전갈자리 별자리)에서 객성이 14일간이나 나타났다”는 <세종실록> 기록을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관측한 가스구름은 바로 1437년 폭발한 신성의 흔적이었음을 밝혀냈습니다. 조선 천문학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당대 서양 천문학을 압도할 정도의 빼어난 천문관측 수준을 보여줬습니다.
1073년과 74년 <고려사>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신성’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1592~94년 사이에도 역시 서양인들의 눈에 띄지 못한 객성을 4개나 관측했습니다. 특히 한 개의 객성은 15개월간 두 번의 연속된 기간에 걸쳐 관측됐습니다. 이 객성을 끈질기게 추적한 조선 천문학자들은 이 별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고정별(항성)이라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나라 자체적으로 별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변광성이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1572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관측한 이른바 ‘티코 초신성’도 같은 날에 보았습니다. 또한 1604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했다고 해서 ‘케플러 초신성’이라 명명된 초신성도 관측했습니다. 오히려 케플러보다 4일이나 먼저 관측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왜 고려·조선의 천문학은 그렇게 발전했을까요. 천문학자들은 왜 예보를 잘못하면 중한 처벌까지 받았을까요.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하늘을 관측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는 2회에 걸쳐 고려 조선의 천문학을 공부해봅니다. 151회는 ‘케플러보다 4일 빨랐던 조선의 초신성 관측’입니다. 다음 주 방송인 152회는 ‘조선은 왜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입니다.
‘케플러 초신성’이라는 천문현상이 있었다. 1604년 10월 17일부터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가 체코 프라하에서 관측한 초신성 폭발이다. 우리 은하의 초신성 중 인간이 육안으로 목격한 마지막 초신성이다. 이후로는 더 이상의 초신성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1604년(선조 37년) 음력 9월 21일자 <선조실록>도 이 심상치않은 천문현상을 소개하고 있다. 음력 9월2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13일이니, 케플러가 초신성을 관측하기 4일 전의 기록이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케플러 보다 4일이나 빨리 밤하늘에서 벌어진 신기한 현상을 목격한 것이다.
■“도적별이 나타났다”
“1경(오후 7~9시)에 객성(客星)이 미수(尾宿·전갈자리 별자리) 10도의 위치에 있었다. 북극성과는 110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목성보다 작고 색깔은 황적색이었다.”
객성의 출현 소식은 이듬해인 1605년 음력 3월 15일(양력 5월2일)까지 약 6개월이나 50여차례나 이어진다. 선조 임금은 이 천문 현상 때문에 크게 긴장했다.
“객성이 여러 달 미수 분야(分野)에 나타났다. 미수는 우리나라(조선)에 해당되는 분야다. 객성이 무엇인가. 적성(賊星), 즉 도둑별이다. 매우 염려된다.”
무슨 말인가. 동양에서는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돼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하늘의 별자리와 땅의 지역을 1대1로 연결시켰다. 즉 전국의 땅을 나눠서 각각의 별자리에 속하게 했다. 이것을 분야(分野)라 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라.
동양에서는 만약 특정 별자리에서 이변이 일어나면 그 별자리에 해당되는 지역에서도 심상찮은 변고가 발생한다고 믿었다.
선조는 “객성이 출현한 별자리(미수)에 해당되는 땅이 바로 ‘조선’”이라며 땅이 꺼져라 걱정하고 있다. 선조는 이 때 출현한 객성을 ‘도적별’로 표현했다. 두 달 여 뒤인 7월27일(음력)에는 홍문관에서도 “이런 천재지변에 직면한 임금이라면 몸과 마음을 삼가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다.
“전하께서 난리(임진왜란)를 평정했는데 어찌 좋은 징조는 없고 재앙만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동해의 물이 붉어지고 압록강 물이 자주빛이 되었으며, 끓는 샘물이 솟아나고 객성이 나타났습니다.…하늘의 엄한 꾸지람이…더욱 참혹합니다.”
케플러에게 과학적인 탐구 대상으로 보였던 1604년의 ‘초신성’이 조선의 임금에게는 ‘하늘이 임금에게 내리는 경고 메시지’로 해석된 것이다.
■신성, 초신성, 변광성
왜 초신성을 객성, 즉 손님별이라 일컫는가.
우리나라 천문기록에 등장하는 ‘객성’은 초신성만 특정하지는 않는다. 하늘에 갑자기 밝아진 천체나 혜성이 처음 관측되면 통칭해서 ‘객성’이라 한다. 손님별이 왔다는 듯이다. 그런데 한참 관측한 결과 밝아진 천체에 꼬리가 달리있고, 이것이 이동하게 되면 천체의 이름은 객성에서 혜성으로 바뀐다.
예를들어 1554년(명종 9년) 6월2일(음)의 <명종실록>에는 “처음에는 객성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혜성이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만약 갑자기 나타난 밝은 천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 모두를 객성이라 했다. 지금의 개념으로 보면 객성은 신성이나 초신성, 혹은 변광성 중 하나다.
신성과 초신성은 별이 폭발할 때 방출되는 빛 때문에 엄청나게 밝아지는 현상이다. 초신성은 밝은 정도가 신성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초(超)라는 접두어가 붙었지만 폭발의 양상인 완전히 다르다. 신성은 별의 껍질만 폭발하는 현상이다. 반면 초신성은 별 자체가 완전히 폭발해서 사라져 버리는 천문현상이다. 별의 사멸이다.
때문에 어느 별에서 신성 현상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지만, 별의 최후 때 폭발한 뒤 사라져 버리는 초신성 현상은 딱 한번 나타난다.
어느 별에서 일어나는 변광은 자체적인 수축·팽창과정을 통해 주기적으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별의 밝기가 변하기 때문에 변광성이라 한다.
이런 변광성과 달리 별의 밝기가 급격히 변하는 별의 폭발 현상을 신성·초신성 현상이라 한다.
그 중 1604년 케플러와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동시에 관측한 객성이 바로 ‘초신성’이었던 것이다.
■1572년의 ‘티코 초신성’
그 뿐이 아니다. 1572년(조선 선조 5년)에도 초신성이 관측됐다.
서양에서는 1604년의 초신성을 ‘케플러 초신성’이라 하지만, 1572년에 출현한 초신성도 그에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 초신성을 관측한 사람은 별자리의 아버지라는 티코 브라헤(당시 덴마크·1546~1601)였다. 당시만해도 유럽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신봉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테르라는 완벽한 물질로 구성된 천상계(우주)는 불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랬기에 밤하늘 우주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초신성 같은 천문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브라헤는 1572년 11월 6일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별의 사멸현상인 대폭발, 즉 초신성 현상을 자세히 관측했다.
티코 브라헤는 고대 천문학의 전통을 고집하는 자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오! 아둔한 자들이여. 눈 먼 자들이여!”
이로써 2000년 가까이 유럽인들의 관념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크게 흔들렸다.
■1572년의 객성은 ‘율곡의 초신성’이다.
그런데 조선의 성리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쓴 <석담일기>를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실려있다.
“1572년(선조 5년) 음력 10월 객성이 책성(策星·카시오페아의 일부)의 옆에 나타났다. 그 크기가 금성보다 컸다.”
1572년 음력 10월이라면 티코 브라헤가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찾아낸 그 무렵이었다. 게다가 찾아낸 초신성의 위치도 책성, 즉 카시오페아 자리였다.
하기야 유럽에서 보였던 초신성이 조선의 밤하늘에서는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유럽인들은 이 초신성을 ‘티코의 초신성’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율곡의 초신성’이라 일컬어야 하지 않을까.
<석담일기>는 1565년(명종 20년)~1581년(선조 14년) 사이 17년간 율곡이 명종·선조 임금에게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경연일기이다.
당시의 주요 사건과 인물까지 소상하게 담았기에 ‘초신성’ 관측기록까지 써놓은 것이다.
■‘모과’ 크기의 객성, 그것은 1073~74년 초신성이었다
우리 역사는 비단 서양에서도 관측된 1572년과 1604년의 ‘객성(초신성)’ 기록만 남긴 것이 아니다. <고려사> 등에는 흥미로운 고려시대의 객성 기록이 등장한다.
“1073년(고려 문종 27년) 동벽의 남쪽(물병자리)에서 객성이 나타났는데, 이듬해인 1074년에도 다시 같은 자리에서 객성이 보였는데 크기가 ‘모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5년 한국천문연구원의 양홍진·조세형 박사와 경북대 박명구 교수, 고등과학원의 박창범 교수 등은 이 객성의 정체가 물병자리 ‘아르 아쿠아리’라는 신성의 폭발이었음을 논증했다. 어떻게 밝혀냈을까. 연구진은 객성의 크기를 ‘모과’에 비유했다는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 등의 기록에 주목했다.
즉 우리 조상들은 새로운 별이 나타나면 이것을 사물에 비유했다. 크기에 따라 계란·술잔·모과·바리(밥그릇)·질장구(흙으로 만든 화로 모양의 장구) 등으로 표시했다.
단적인 예로 <고려사>의 유성 관측 기록을 보면 ‘모과’가 무려 93번이나 나온다. 1180년(고려 명종 10년)
“유성이 저성좌(천칭자리)에서 나와 익성좌(컵자리)로 들어갔는데 그 크기가 모과만 하고, 꼬리의 길이가 7척이었다”는 <고려사> 기록이 있다.
유성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1349년(충정왕 원년) <고려사>는 “유성이 규성(奎星) 남쪽에서 나왔는데, 크기가 질장구 만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1067년(문종 21년)에는 “유성이 지나갔는데 앞의 것은 모과 같았고, 뒤의 것은 계란 같았다”고 비유한 기록(<고려사>)도 있다. 연구진은 이렇게 유성의 밝기를 다양한 사물의 크기를 비유한 자료를 현대의 별밝기 등급으로 환산했다.
즉 계란은 3~4등급, 술잔은 2~3등급, 모과는 1~2등급, 바리는 0~1등급, 질장구는 0~-1등급으로 추정했다. 1등급이 차이 나면 밝기는 2.5배 차이 난다. 1등급과 6등급은 5등급의 차이지만 밝기는 무려 100배 차이가 난다. -등급은 아주 밝은 것이다. 금성은 -4등급, 태양은 -26.8등급이다.
1073~1074년 사이에 두 번 나타난 ‘모과’ 크기의 변광성 밝기는 1~2등급에 해당된다. 북두칠성에서 가장 밝은 끝 별(1.8등급)에 해당되는 밝기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별은 지구로부터 890광년 떨어져 있으며, 폭발 당시 10의 37승 줄(태양이 830년 동안 내는 에너지)를 발산한 것으로 추산했다.
그런데 이 1073~74년 사이에 관측된 이 신성폭발 기록은 오로지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 등에만 보인다.
우리나라 고천문 관측자료가 우수했다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당시 국내연구진의 논문은 세계 5대 천문학 저널 중 하나인 ‘유럽 천문학 저널’의 표지논문으로 선정됐다.
■‘저것은 객성이 아니다’ 집중토론에 나선 선조시대 천문학자들
우리나라 천문학자들이 최초로 발견한 객성 기록은 또 있다.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4년(선조 27년)까지 무려 4개의 객성이 관측되었다.(<선조실록>)
이 4개 중 가장 오랫동안 관측된 천체는 15개월동안 두 번의 연속된 기간에 걸쳐 관측된 객성이다. 이 객성의 첫번째 기록은 1592년 10월 20일(음)~1593년 2월 24일(음)사이의 3개월이며, 두번째 기록은 1593년 7월17일(음)~1594년 1월4일(음) 사이의 약 6개월이다. 이 두 번 관측의 중심 사이 간격은 대략 11개월 정도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은 “천창성(고래자리)의 동쪽에 나타났다”고 일관되게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의 천문 관리들은 새로운 별, 즉 손님별(객성)이 5개월의 공백(1593년 2월 20일~7월 17일)을 두고 두 번이나 같은 자리에 연속으로 나타났다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도 이상해서 당대 전국에 흩어져있던 관상감 관리들이 총출동해서 이 객성의 실체를 두고 일종의 집중토론회까지 열었다. 그 결과 관상감은 “임진년(1592년)부터 천창성(고래자리)에서 관측된 이름없는 별을 객성이라 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고 솔직하게 선조에게 아뢴다.(<선조실록> 1594년 8월2일)
“천창성 안에 나타난 새 별을 객성이라 했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별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근래에 흩어져 있던 일관(천문관리)들이 모여 이 객성의 실체를 두고 토론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객성은 원래 항성(恒星)과 다른 것인데, 3년(1592~1594년)이나 변하지 않을리 없다. 이것은 필시 이름없는 항성일 것이다.’ 당초 일관들이 잘못 판단해서 항성을 객성이라 한 것입니다. 다시 유능한 일관을 시켜 자세히 살피게 하소서.”
선조 시대의 관상감 관리들이 “15개월간 관측된 고래자리 안의 객성은 실은 갑자기 나타난 신성이나 초신성 현상이 아니라 원래 존재했던 항성이었다”고 수정한 것이다.
■1592년 전세계 최초로 확인한 변광성의 기록
그런데 400년 후의 천문학자들이 이 별의 실체를 규명했다. 이 별은 별이 폭발하는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별의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변광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신성 혹은 초신성 폭발은 대부분 며칠간 기록될 뿐이다.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초신성이 폭발해고 먼 거리 때문에 한 달 이상 관측하기 어렵다.
흔히 ‘케플러 초신성’으로 알려진 1604년의 초신성은 7개월 정도 관측됐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은하 평면에서 일어난 초신성 폭발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조시대에 객성이 보였다는 천창성(고래자리)은 우리 은하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게 머나먼 거리에서 신성이나 초신성 폭발이 일어나도 15개월간, 그것도 두 번의 주기로 육안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금의 국내 천문학자들은 선조시대에 관측된 ‘천창성의 객성’을 우주에서 찾아본 결과 유력한 후보를 찾아냈다.
바로 천창성(고래자리) 안에 존재하는 ‘MIRA 변광성’이었다. 평균 11.3개월을 주기로 2~11등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별의 밝기를 변화시키는 변광성이다. 이 별은 지름이 태양의 300배나 되는 초거성으로서 별 내부가 불안정하여 불규칙적으로 변한다.
그런데 기막힌 사실이 있다. 서양에서 이 변광성을 발견한 때가 조선보다 4년이나 늦었다는 것이다.
즉 천문학자 데이빗 파브리시우스는 주기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별을 발견한 것이 1596년이었다. 파브리시우스 역시 조선시대 천문관리들처럼 이 별을 신성(nova)라 여겼다. 그러나 변광성의 주기가 11.3개월이라는 것이 관측되면서 이 별이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됐다. 1642년 요하네스 헤벨리우스에 의해 ‘MIRA(Mira· 놀라움)’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천창성(고래자리)의 내에서 객성을 확인한 것이 1592년이다. 또 그것이 신성 혹은 초신성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 1594년이다. 조선의 천문학 수준이 서양을 능가할 정도였다는 것이 기록으로 입증되는 순간이다.
■서양에도 없는 1592~94년의 객성 4개
<선조실록>에는 15개월간 관측한 객성(변광성)의 존재말고도 다른 3개의 객성 관측 기록도 있다.
“객성이 천창성과, 왕량성 동쪽과 서제일성 안쪽에 나타났으며, 여귀성(輿鬼星) 안의 적시성(積尸星)의 기운이 밝고 성하였다.”(<선조실록> 1592년 음 11월5일)
변광성으로 밝혀진 천창성 외에도 3개(왕량성 동쪽과 서쪽, 그리고 적시성)의 객성 관측기록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그 중 딱 두 번만 관측된 한개의 객성(적시성)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선조실록>에서 카시오페아 별자리(왕량성 동쪽과 왕량의 서제일성 주변)에서 110일 이상 나타난 객성 두 개의 정체는 400년이 지난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국내 천문학자들은 이 <선조실록> 기록을 살피면서 ‘카시오페아 A’를 주목하고 있다. 카시오페아 A는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터진 초신성 폭발의 잔해를 일컫는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 이 카시오페아 초신성은 1680년 폭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약 <선조실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카시오페아 초신성 폭발은 지금까지 알려진 1680년보다 88년 앞선 기록이다. 1592~94년 사이는 조선이 한창 전란(임진왜란) 중이었다. 그렇다면 <선조실록> 기록도 100% 믿을 수 있겠냐는 의문도 생길법 하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본은 날짜이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이 매일 작성하는 <승정원일기>의 첫머리도 날짜와 날씨, 등 천문학 기록이다.
게다가 변광성의 기록마저 정확하기 기록한 조선 천문학자들이 다른 객성 기록을 엉터리로 기재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1592년부터 110일 이상 관측한 2개의 객성 기록은 카시오페아에서 벌어진 초신성 폭발 기록일 가능성이 짙다. 만약 그렇다면 이 또한 천문학사상 획기적인 관측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카시오페아 자리의 초신성 폭발기록이 왜 외국의 천문기록에 등장하지 않을까. 물론 이 또한 수수께끼이다. 혹시 1592~94년의 폭발이 1680년 초신성 폭발을 앞두고 벌어진 또다른 폭발이 아니었을까.(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박명구, ‘한국 고천문 초신성 기록 연구’, 2006년 기관고유사업 위탁연구과제 보고서, 한국천문연구원, 2007
양홍진, ‘천문기록을 활용한 변광성 연구, 한국천문연구원, 2014
‘Analysis of Korean historical astronomical records:고천문 자료를 이용한 유성과 유성우 R Aqaurii 연구와 고인돌에 대한 천문학적 연구’, 경북대 박사논문, 2004
전상운, ‘서운관지 해제’, <국역 서운관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최병조, ‘천상예보부실죄? 서운관 술자 황사우 사건’, <서울대학교 법학> 제53권 제3호,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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