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대한민국' 국호엔 제국주의 냄새가 풍긴다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

1948년 6월 7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30명은 무기명 투표 끝에 자못 압도적인 표차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의결했다.

기초위원회를 거친 국호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의 다른 조항과 함께 만장일치로 국회본회의를 통과한다.(7월12일)

하지만 국호 ‘대한민국’이 결정되기까지 실로 엄청난 격론이 벌어졌던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당시 서상일 헌법기초위원장은 국회본회의 보고에서 국호를 정할 때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호 문제가 말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혹은 조선이냐. 혹은 한국이냐. 이런 4가지 안을 두고 많이 논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대한민국 국호를 비밀투표로 의결한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들이 이승만 국회의장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승만은 ‘기미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밀어붙였다. |국가기록원

■사대부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조선 국호 
사실 ‘대한’이라는 국호를 쓴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다.

1897년(고종 34년)이었다. 황제국을 선포하려던 고종은 그해 10월 11일 전·현직 대신들을 소집한 확대어전회의를 열어 국호제정을 논했다.

“지금 국호를 정해 써야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고종)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예전에 봉해진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의정 심순택)

심순택의 언급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기자가 누구인가. 중국 은(상)나라 왕족이다. 은(상)을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조선 땅에 책봉했다는 인물이다. 때문에 기자가 다스리던 조선이라 해서 ‘기자조선’이라 했다.

 

그런데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낙점을 받아 국호를 ‘조선’이라 확정했다. 그런데 이때의 조선이 단군 조선이 아니라 기자 조선이었다.

 

“1392년 윤 12월 9일 명나라 태조가 ‘동이의 국호에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영구히 번성하라’고 했다.”(<태조실록>)

문하 좌시중 조준 등은 명나라 황제의 조칙을 “기자(箕子)의 옛 봉토를 다스리니 황제가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평가했다.

 

개국공신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보라.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단군·기자·위만 등 조선이 셋 있었고, 신라·백제·고구려가 있었다. 또 고려가 궁예의 후고구려를 답습했다. 이들은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몰래 땅을 차지하여…오직 기자만 주나라 무왕의 명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명나라 천자께서 ‘오직 (기자)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다’고 했으니….”

정도전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기자(箕子)의 정통성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조선이라 국호를 정했다”고 천명했다.

 

정도전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주나라 무왕에, 기자를 태조 이성계에 비유하면서 “조선을 유교의 국가로 잘 다스려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전형적인 사대주의의 발로이다.        

심순택은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500여년간 섬겨왔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과 황제국을 선포한 이상 ‘조선’이라는 국호를 고집할 이유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1948년 9월1일 관보에 실린 대한민국 제헌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가 눈에 띈다. |국가기록원

■고종은 왜 ‘대한’이라 했을까
고종은 ‘조선’ 국호를 버리고 ‘대한’을 새 국호로 정했다.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이다.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다른 나라에서도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특진관 조병세 역시 거들었다.

“예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한(韓)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상서로운 조짐이 옛날부터 싹터서 바로 천명이 새로워진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한 ‘한’ 자의 변이 ‘조(朝)’자의 변과 기이하게도 들어맞으니 우연이 아닙니다. 태평시대의 조짐입니다.”

조병세는 조(朝)와 한(韓)의 변이 들어맞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하면서까지 조선을 대한으로 바꾸자는 고종의 명에 힘을 보탠 것이다.

고종은 “원구단(황제가 하늘제사를 지내던 곳)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널리 알리던 조서)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틀 뒤인 1897년 10월13일 고종은 만천하에 “국호를 대한이라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했다.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 이후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三韓)’을 통합했다.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북쪽으로는 말갈,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차지했다.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고종실록>)

고종은 우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삼한(마한·진한·변한) 통합이라고 여겼다. 또 조선 건국 후 북방의 4군6진을 개척하고, 남방의 탐라국을 완전 병합한 것을 ‘4000리 강토의 확보’라 보았다.

 

이것을 ‘한(韓)’의 개념을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대한(大韓)’으로 국호를 정한 이유다.

 

■삼한과 삼국은 같은 개념인가
원래 <위략>이나 <삼국지> ‘동이전’이 언급한 삼한(三韓)의 위치는 어디인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 즉 마한·진한·변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7세기부터 삼한은 원래의 역사적 실체와는 관계없이 삼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그랬다.

예컨대 당나라 고종이 백제왕에게 보낸 국서(651년)에도 해동 삼국을 ‘삼한’이라 했다.

“해동 3국은 창건한 역사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여 지역이 실로 맞대어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근래에 전쟁을 번갈아 일으킴에 따라 무사한 해가 없게 됐다. 이리하여 병기를 장만해서 삼한의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분풀이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

731년(성덕왕 30년)에는 당나라 현종이 신라사신에게 비단 30필을 하사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신라는 해와 달이 복되고, 삼한(三韓)이 잘 도우니 오늘날 인의의 나라라 일컬어진다. 대대로 훈현(勳賢)의 업적이 두드러지도다.”

중국은 아마도 삼한(마한·진한·변한)에 이어 3국(고구려·백제·신라)도 동질적인 국가로 이해했기에 ‘삼한’과 ‘삼국’을 혼용했던 것 같다.

1897년 황제국 ‘대한’을 선포한 뒤 프러시아식 황제복으로 차려입은 고종. 

 

■최치원,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입니다”
사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까지는 3국은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었다.

 

그러니까 신라의 백제·고구려 정벌이 무슨 민족적 차원의 통일의식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상황에 180도 달라졌다.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는 야욕을 노골화했기 때문이다.

이에 신라는 한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백제·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통합정책을 폈다. 

이때 표방한 것이 ‘삼한 일통’의 사상이다.

“선대 임금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하여 삼한을 일통하였으니…”(<삼국사기> ‘신라본기·신문왕 12년’)

“왕이 유신과 함께 신통한 계획으로 힘을 함해 삼한을 일통하고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삼국유사> ‘기이·태종 춘추공’)

또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673년(문무왕 13년) “김유신이 임종할 때 ‘삼한이 한 집안이 되었다(三韓爲一家)’고 말했다”고 전한다.

1982년 충북 청주 운천동에서 발견된 사적비를 보면 “삼한을 통합하여 땅을 넓혔다”(民合三韓而廣地)“는 신문왕 6년(686년)의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삼한과 삼국의 개념도 혼용되고 있다.

예컨대 최치원(857~?)은 “동쪽 바다 끝에 3국이 있으니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언급했다.(<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한’은 고려시대 들어 우리나라 전체를 일컫는 단어로 자주 쓰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그 유명한 ‘훈요십조’에도 ‘삼한’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내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했는데…후대의 왕들에게 요긴한 가르침(훈요)를 적어 전하니… 다섯째 대업을 이룸에 있어 삼한의 산천이 도왔으니 특별히 서경(평양)에는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며….”(<고려사절요>)

 

■삼한을 통일한 것은 신라와 고려
<조선왕조실록>에도 삼한이라는 단어가 폭넓게 쓰인다.

예컨대 <태조실록> ‘총서’에는 1380년(고려 우왕 6년) 최영과 이색 등이 왜구를 무찌른 이성계의 공을 상찬하는 대목이 있다.

“태조(이성계)가 개선하자 판삼사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영접하면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공이여! 공이여! 삼한이 다시 일어난 것은 공의 승전 덕분입니다.’ 또 한산군 이색은 치하시를 읊었다.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 만세덕은 1600년(선조 33년) 선조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올리는데, 이때도 ‘삼한 운운’한다.

“삼한의 새해를 경축드립니다. 화기(和氣)가 봄을 타서 팔도로 전해지고 국운은 백성(百城)처럼 공고하기 바랍니다.”(<선조실록>)

이렇게 삼한-삼국이 오랫동안 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조 고종은 왜 “고려 왕건이 삼한을 통일했다”고 했을까.

조선왕조가 바라보는 ‘삼한 통일’을 잘 설명한 기록이 정조시대에 등장한다. 즉 1796년(정조 20년) 정조는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을 보수하라는 명을 내린다.

“고려 태조는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가 있다. 그런데 능 앞의 제각이 엉망이 되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정조실록>)

삼한을 통일한 이가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라는 것이다.

또 1799년(정조 21년)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조선 왕조의 개국 기원을 저술한 <흥왕조승(興王肇乘)>을 임금에게 올리면서 아뢴 말이 있다.

“우리 동방에 단군이 맨먼저 나오고 그 다음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때 이후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홍양호는 “삼한(삼국)을 먼저 통일한 것은 바로 신라이고, 다시 후삼국으로 흩어졌다가 재통일한 것은 고려”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1948년 5월31일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회의장 자격으로 '새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선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
이것이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종의 ‘대한’은 1910년 한일병합으로 13년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러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독립운동가 현순의 셋집에서 중요한 모임이 있었다.

국내와 일본·만주·미국·시베리아 등에서 활약 중이던 독립운동가 29명이 이곳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가장 먼저 안건에 오른 것이 바로 국호문제였다.

이 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칭하자’는 결의가 있었다. 3일 뒤인 14일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규정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왕조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주의 국가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기록으로만 보면 아주 쉽게 결정된 것 같다. 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국호를 결정하기까지 만만치않은 진통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시의정원에 참석한 몽양 여운형의 전기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국호제정문제는…결국 대한민국으로 낙착되었다. 그렇게 결정될 때까지 상당한 격론이 거듭됐다. 대한민국 외에 조선 또는 고려공화국이 어떠냐는 의견도 나왔다.”

대한민국에 거부감을 표시한 사람들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역시 ‘대한’을 반대한 여운형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대한은 이미 우리가 쓰고 있던 국호로서 그 대한 때에 우리는 망했다. 일본에게 합병되어버린 망한 나라 대한의 국호를 우리가 그대로 부른다는 것은 감정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을 주장한 사람들의 논리도 일리는 있었다. ‘대한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호이니 일본으로부터 되찾아 독립했다는 의의를 살리고, 또 중국이 신해혁명 후 새롭고 혁신적인 뜻으로 민국(民國)을 쓰고 있으니 대한민국이라 하는게 좋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수의 주장대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채택됐다.

여운형의 전기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대한’에 ‘민국’이 붙은 이유이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불붙는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논쟁
그런데 이때의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논란은 해방 이후인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때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제헌국회의 국회의장인 이승만과,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는 ‘대한민국’을 지지했다.

1948년 5월 31일 이승만이 국회의장 자격으로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연설한 내용이 결정적이었다.

“…우리는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정의 계승입니다. 이날이 29년만에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여기서 이승만은 매우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즉 곧 태어날 새 정부가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정의 계승’이라 선언했다. 무슨 얘기인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23일 13도 대표자 24명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 선포식을 열었다. 이것을 ‘한성정부’라 한다. 이때 이승만은 최고지도자인 ‘집정관 총재’가 된다. 이승만은 5개월 뒤인 9월 상하이에서 완전체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으로서는 1948년 곧 태어날 단독정부도 한성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맥을 잇는 ‘대한민국’이기를 바랐다. 이것이 이승만이 ‘대한민국’ 국호를 고집한 이유다.

이승만의 제헌국회 연설은 1948년 태어난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한 것이 아니라 1919년 기미년에 탄생한 한성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맥을 잇는 정부임을 만천하에 알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 

1922년 열린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식. ‘대한민국 3년 1월 1일’이라 쓰여진  연호가 도드라진다.   

 

■만만치 않은 ‘고려공화국’파
‘대한민국’ 국호를 반대하는 측도 만만치 않았다.

원래 우파는 대한, 좌파는 조선, 중도는 고려를 국호로 내세웠다.

 

그런데 우파세력의 중추인 인촌 김성수가 이끄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고려공화국을 밀어붙인 것은 다소 의외이다. ‘고려파’의 논리도 만만치는 않았다.

한민당 소속 제헌의원인 조헌영은 ‘고려민국’이 타당함을 조목조목 밝히는 기고문을 언론에 낸다.

“국호는 고려민국이 좋다. 그 이유는 첫째 고려는 전세계가 통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호이다. 둘째 고려는 우리가 완전히 통일된 때에 쓴 국호다. 셋째 고려는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주독립한 때의 국호다. 넷째 고려라는 국호에는 민족적으로 반감, 대립감이 없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한(韓)은 어떤가. 조헌영은 “한(韓)은 삼한으로 분립됐을 때 쓰던 국호이고, 대한은 일본이 침략의 방편으로 과도적으로 산출된 자주성이 없는 나라의 때묻은 구호”라 했다.

 

조헌영은 “조선이라는 국호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폄훼했다.

“조선은 단군조선을 빼놓고는 중국의 지배를 받던 기자·위만·이씨조선의 국호다. 더욱이 왜정 36년간 나라를 잃은 이 땅의 칭호일 뿐이다.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을 국호로 하자는 이는 없을 것이다.”(경향신문 1948년 6월6일)

사학자 현상윤의 주장(동아일보 1948년 6월23일)도 비슷했다.

“대한은 불과 13년(1897~1910년) 동안 일컬어진 명칭이다. 게다가 삼한은 부락국가다. 한강·임진강 이남의 분산적 지방적 명칭에 불과하다. 하등 통일적·전국적 구호가 이니다. 대한은 일한합병의 치욕을 받아 영구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이 찍힌 국호다.”

 

■대한의 대(大)에서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현상윤 등 ‘고려파’의 주장 중에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대한’이 제국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대한(大韓)의 대(大)자는 대영제국이나 대일본제국처럼 제국주의적 사상을 본떠 지었던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국시로 표방하고 있는 때에 국호로 채용하는 것은 불가하다. 따라서 국호는 고려민국이 낫다.”

지금 우리가 그저 아무 생각없이 쓰는 국호 ‘대한민국’에 제국주의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주장이 이미 70년 전에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상윤은 ‘고려’를 재차 주장하면서 “500년 통일국가인 왕씨 고려와, 한민족으로서 중국과 당당히 패권을 다투던 동양 사상의 영웅적 존재인 고구려를 인용하는 만큼 국민의 영예와 이상에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사학자 손진태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대한은 제국주의적 성격이다. 대한은 우리 민족 사상 가장 큰 오점을 남긴 국호이며, 삼한은 지역이 한강 이남에 한했다. 아무런 위대성과 적극성과 진취성이 없다. 국민교육상과 민족정신사에 막대한 지장과 위축을 초래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가하다. 조선은 어떤가. 단군조선은 전설이요, 준왕 때의 조선은 평안도의 미미한 나라였다. 이씨조선은 문약과 당쟁의 나라였고 국제적으로는 왜인에게 모욕을 받은 이름이다.”

 

■보성전문이 고려대가 된 까닭
한민당의 ‘고려민국’ 혹은 ‘고려공화국’ 주장에는 한민당 최고지도자인 김성수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김성수는 해방직후 보성전문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면서 ‘고려대’라는 새교명을 붙였다. 고려대 2~4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는 김성수가 ‘고려’에 특히 애착을 갖고 잇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대학 이름을 고려라 지은 것은 인촌의 발상이었다. ‘~조선이나 한국은 이민족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어서 싫고, 고려도 여진·몽골의 시달림을 받았지만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하여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촌은 ‘우리나라 외국어 명칭인 코리도 고려의 음을 표기한 것이 아니겠냐’고 누누이 말했다.”(유진오의 자서전 <양호기>)

 

■태한, 새한, 한나라, 동화국…
사실 ’대한’ ‘고려’ ‘조선’ 뿐 아니라 백가쟁명식 ‘국호’ 후보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얼마 후 초대 문교부장관이 된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안호상은 “순 한글식으로 한나라 혹은 고려라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자기 나라 헌법에 한글대신 한문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완전한 노예근성의 표현이요. 국어의 모독이자 외국에 대한 수치”라 주장했다.

 

천안 출신 이병국 국회의원은 “대한(大韓)보다 태한(太韓)이라 해야 한다”면서 “태(太)자를 쓰면 크다는 의미를 더 강조할 수 있으며, 태양의 의미도 담고 있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공화국’보다는 ‘동화국’이 어떠냐는 이색주장도 펼쳤다.

언론인 설의식은 “새나라에는 새 국호를 사용하는게 옳다”면서 “새한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대한은 역사가 짧고 무게가 가볍고 권위가 약하며, 조선은 자국의 국호조차 스스로 짓지못하고 중국의 허락을 얻은 얼간이 조정이었다”는 것이다.

1948년 6월 6일 한민당 소속 조헌영 국회의원이 경향신문에 ‘새 국호는 고려공화국이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제호가 바뀔 뻔한 조선일보
적절한 기회에 국호를 다시 논의하자는 이승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냉전분위기가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16일 국무원 고시로 “정식국호는 대한민국이나 편의상 ‘대한’ 또는 ‘한국’이라는 약칭을 쓸 수 있되 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해 조선은 사용하지 못한다”고 못박아 버렸다.

여담이지만 조선일보의 제호도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전시내각의 공보처장이 된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은 ‘조선일보 제호’에 딴죽을 걸었다.

“조선일보의 ‘조선’은 북이 쓰는 국호이니 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딴은 그랬다. 자칫 조선일보가 ‘종북파’ 신문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 문제를 두고 국무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김활란 공보처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 ‘하명’을 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일제 때부터 사용한 고유명사인데 조선이면 어떻게 한국이면 어떠냐.”

 

■“대한은 독립운동의 상징단어”
사실 ‘대한’이 옳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으로 환국한 조소앙은

 

“우리가 ‘대한’의 용어가 애착을 갖는 이유는 한(韓)이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문자인 까닭”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韓)은 일본이 고의로 말살한 글자다. 그러기에 한(韓)은 자주독립의 상징문자이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집결체다.”(<소앙선생 문집>)

조소앙은 일제가 침략 당시 국호인 ‘대한’을 말살하고 사대주의의 상징인 ‘조선’을 강요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닌게 아니라 일제는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7월 7일 병합실무방법세목을 완성했는데, 제1조가 ‘한국을 개칭해서 조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이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축하하는 각계의 격려가 쇄도했다.

 

■‘대한’을 탄압한 조선총독부
매국노 이완용 등은 병합자체는 수긍했지만 국호(한국)와 왕칭은 유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3대 한국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는 딱잘라 거절했다. 그 이유가 기막힌다.

“한국이라는 국호는 청일전쟁 후 일본이 권해서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병합 후에도 한국이 존속한다면 나라의 안에 나라를 세우는 모양이 된다. 양국이 일가가 된다는 취지에 부응하지 못한다. 한국은 안된다. 대신 국(國)자를 떼고 그냥 ‘한(韓)’이라고 하던가, 옛 이름인 조선으로 돌아가던가 하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한가지 찜찜한 대목은 있다. “한국이라는 국호는 청일전쟁 후 일본이 권해서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라우치의 말이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일제가 권한 국호였다는 말인가.

 

■통일 한국의 국호는 어떨까
지금 이 순간도 이 땅에 태어났다 하면 자동으로 ‘대한민국’ 시민이라는 도장이 찍힌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국호가 탄생하기까지 이러한 우여곡절이 담겨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곰곰히 되씹어본다.

 

대한민국이 최선이었을까, 아니면 고려민국 혹은 고려공화국이 더 좋았을까. 아니면 조선민국이나 조선공화국은 어땠을까.

 

내로라하는 정치인과 사학자들이 벌인 논쟁을 한번 다시 더듬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한 인문학 공부일 것이다.

아 참! 1948년 6~7월 제헌국회 의장인 이승만이 했다는 약속, 즉 “적절한 시기에 국호문제를 다시 논의해보자”는 이야기는 어찌 할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남북한 통일이 된다던가 하면 한번쯤 새로운 국호를 논의할 ‘적절한 시기’가 올 것이다. 통일한국의 국호는 과연 무엇으로 정해야 할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기사는 이선민의 <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나남, 2013과 황태연의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를 주로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참고자료>
이선민, <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나남, 2013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김병남, ‘신라의 삼국통일 의식과 그 실제’, <한국사상과 문화> 제24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4
김기빈, <일제에 빼앗긴 땅이름을 찾아서>, 살림터, 1995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