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학년부터 한국사가 수능과목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고 봐야죠. 하지만 여전히 역사는 암기과목으로 기억됩니다. 그 지긋지긋한 '태정태제문단세~'로 이어지는 암기의 행렬이 뇌를 떠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란 과연 암기과목이고 어려운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훨씬 지난 시기에 역사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기>를 쓴 사마천이라는 분이죠. 알다시피 남성의 중요부위를 잘리는 형벌, 즉 궁형의 처벌을 받고도 '발분의 저작'이자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남긴 분입니다.
사마천은 왜 거세형을 당했으며, 왜 그런 치욕을 받고도 살아남으로 했을까요. 그가 남긴 <사기>는 천하의 역사서라 할까요. 이번 주 팟캐스트의 주제입니다./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도대체 하늘의 도리라는 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天道是耶非耶)”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다. <사기> ‘백이·숙제 열전’을 쓰면서 울분을 참지못한 것이다.
그는 백이와 숙제 같은 어진 이들이 결국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반면, 희대의 도적인 도척(盜척)은 천수를 다한 것을 괴로워 했다. 도척은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먹은 악명높은 춘추시대 도적이었다. 사마천의 장탄식이 계속된다.
“하늘은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진 백이와 숙제는 굶어죽고, 도척은 천수를 다했다. 도척이 대체 무슨 덕행을 쌓았는가. 반면 공평하고 바른 일만 하는 사람이 재앙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백이·숙제전’)
사마천이 유명한 ‘천도시야비야’를 외친 까닭이 있다. 졸지에 궁형을 당한 스스로의 처지를 백이·숙제와 견준 것이다. ‘궁형’의 역사는 뿌리깊다. 은(상) 말기(기원전 1300~1046)의 갑골문에 나온다.
은(상)의 국왕이 점을 치면서 하늘신에게 묻고 있는 내용이다.
“짐(왕)이 강족 노예의 성기를 자르는 형벌을 내리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죽지 않겠습니까.(朕탁羌人, 不死)”
상형문을 보듯이 노예로 잡힌 강족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의 기록이다. 더 참혹한 갑골문도 등장한다.
“목을 자르는 벌형(伐刑)을 시행하려는데 괜찮겠습니까.(貞伐若)”
‘벌(伐)’이라는 상형문자는 사람의 목을 도끼로 치는 형국을 하고 있다. 이것은 참형이다. 하지만 선비에게 치욕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궁형만큼 참담한 형벌은 없다.
사기를 쓴 사마천을 그린 그림.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욕(辱)자를 19번이나 쓰면서 치욕스러워했다.
■사마천 거세당하다.
사마천은 천문과 지리, 역사를 담당해온 집안에서 태어난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그의 앞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기원전 99년 그의 운명을 급전직하로 떨어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이 ‘이릉(李陵)의 화(禍)’이다. 이릉 장군이 불과 5000명을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투항한 사건이다.
한나라 조정은 오랑캐에 항복한 이릉을 대역죄인으로 성토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것”이라면서 변호한다. 그것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산다. 흉노족의 침략에 혼쭐이 나기 일쑤였던 한무제는 오랑캐에 투항한 역적을 변호하는 사마천에게 ‘궁형’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린다.
사마천은 울부짖는다. 마침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요참형(腰斬刑·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받은 임안에게 쓴 편지 등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토로한다. 얼마나 궁형을 부끄러워했는지 ‘욕(辱)’이라는 낱말이 무려 19번이나 나온다.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저 또한 거세되어~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창자가 9번 끊어지는 듯하고 집안에 있으면 갑자기 망연자실합니다. ~아아! 몸이 망가져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한서> ‘사마천전·보임안서(報任安書)’ <사기> ‘태사공자서’ 등)
사마천에게는 몸을 보전할 마지막 기회는 있었다. 50만전의 벌금을 내면 죄를 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저는 가난하여 속죄할만큼의 재물도 없었습니다.~(급기야)거세되어 잠실(蠶室·궁형 당한 이들의 회복실)에 던져졌습니다. 슬픕니다! 슬픕니다!”(‘보임안서’)
자결할 마음도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참았다. 사마천은 피를 토하면서 참아야 했던 까닭을 밝힌다.
“문채(文彩)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요. 주 문왕은 유폐 당했을 때 <주역(周易)>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陳)과 채나라에서 고난을 당했을 때 <춘추(春秋)>를, 초나라 굴원(屈原)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離騷)>를,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한 이후에 <국어(國語)>를 지었습니다. 손자는 발이 잘린 뒤 <손자병법>을,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된 뒤 <여씨춘추(呂氏春秋)>를 간행했습니다. 시(詩) 300편도 현성(賢聖)들이 스스로의 비분을 촉발하여 지은 것입니다.(發憤之作)”
■<사기>를 쓴 까닭
사마천이 언급한 저작들은 한결같이 저자들이 불우한 시기에 완결시킨 이른바 ‘발분(發憤)의 저작’들이다.
사마천은 이를 두고 “저자들이 마음 속의 울분을 시원하게 풀 방법을 찾은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궁형의 치욕 속에서도 자결하지 않고, <사기(史記)>에 매달린 이유를 털어놓는다.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 것입니다.(故述往事 思來者)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이런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사기> ‘태사공자서’, <한서> ‘사마천전·보임안서’)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마천이 불후의 역사서를 쓴 까닭이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결국 미래에 대비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것…. 이는 역사라는 것이 과거사일 뿐인데, 과거에 집착할 까닭이 있느냐는 야유에 대한 대답이다. <사기>를 읽으면서 늘 감탄하는 대목이 있다.
중국 정사(正史)의 모범인 기전체의 효시가 된 역사서인 점도 그렇다. 하지만 그보다는 사마천의 ‘발분의 저작’인 <사기>가 ‘백성의 역사’라는 것이 돋보인다. 이것이 같은 동시대의 정사인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생식기를 칼로 자르는 모양의 상형문자. 3300년전 갑골문에 새겨진 기록이다.(양동숙의 <갑골문 해독>, 서예문인화, 2007년)
■‘개그맨’도 역사의 주인공
<사기>에 나온 주인공들을 일별해보자.
진나라를 무너뜨린 진섭(陳涉)은 머슴살이를 한 농사꾼에서 일어선 난세의 영웅이었다.
세치 혀로 6국의 재상을 지낸 소진(蘇秦)과 진나라 통일을 이끈 명재상 이사(李斯)는 여염에서 일어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섰다. 개백정인 주해(朱亥)와 번쾌(樊쾌), 노름꾼 모공(毛公), 백수건달 한신(韓信), 비단장수 관영(灌영), 마부 하후영(夏侯영) 등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특히 지금으로 치면 개그맨·코미디언인 순우곤(淳于곤)·우맹(優孟)·우전(優전)의 풍자를 열전(‘골계열전’)에 포함시켰다. 사마천이 골계열전(滑稽列傳)을 쓴 이유이다.
“골계가들은 세속에 흐르지 않는다. 권세와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위아래가 막힌 곳이 없고, 사람들도 그것을 해롭게 여기지 않아 그 도가 받아들여졌다.”
당대 골계가들이 마음껏 세상을 풍자했으며, 제아무리 포악한 군주라도 그들의 풍자를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터럭’의 풍자에도 ‘버럭’하면서 입을 막으려는 작금보다 2000년 전의 상황이 더 민주적이라는 얘기다.
사마천은 또 지금의 역술가와 점술가들의 열전인 ‘일자열전’과 ‘귀책열전’을 지었다.
심지어는 군주의 총애를 받은 ‘최측근’들의 이야기인 ‘영행열전’까지 다뤘다. 군주의 총애를 받으려 애쓰는 아첨꾼들은 당대의 권력을 잡았지만, 결국엔 군주의 미움을 받아 추락했다. 사마천이 한탄했다.
“(군주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때에 따라 심하게 변한다.”
<사기>는 이어 지금으로 치면 ‘기업인의 성공스토리’인 ‘화식열전(貨殖列傳)’까지 썼다. 그러나 돈만 벌었다고 다 칭송한 것은 아니었다.
“벼슬이 없는 필부 신분으로 정치를 해치지 않고 백성에게 방해되지도 않으면서 때에 맞춰 팔고 사서 재산을 늘린 사람이 있다. 지혜로운 자도 이들에게서 취한 점이 있다. 그래서 화식열전을 지었다.”(<사기> ‘태사공자서’)
그야말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재산을 불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재산가라는 것이다.
■‘실패한 혁명가’, ‘패배자’, ‘여성’도 역사의 전면에
이밖에도 <사기>를 씹어보면 사마천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천자들의 이야기인 ‘본기(本紀)’에 여성인 ‘여태후’와 패배자인 ‘항우’를 올린 것….
우선 여태후. 한나라 시조인 고조의 뒤를 이은 것은 어린 아들 효혜제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천하를 다스린 여태후(呂太后)였다. 사마천은 여태후를 ‘실질적인 천자’로 보아 ‘본기’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여태후의 비정한 정치와 정권욕을 비난하면서도 이와같이 마무리 지었다.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백성들이 농삿일에 힘쓰니 의식이 나날이 풍족해졌다.”
항우는 물론 패배자였다. 하지만 밭두둑에서 일어나 단 3년 만에 다섯제후를 거느렸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진(秦)나라의 폭정 속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끝내 실패한 진섭(陳涉)을 ‘진섭세가’에 올려놓은 것은 또 무엇인가.
‘세가(世家)’는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진섭을 제후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진섭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진섭이 봉하고 파견한 왕후장상들이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사기> ‘진섭세가’)
머슴출신 진섭이 진시황의 제국을 단번에 무너뜨린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공자를 제후의 반열에 올려놓아 ‘세가’로 기록한 뜻은 무엇일까? 사마천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주 왕실이 쇠퇴하자 제후들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공자는 예악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도(正道)로 돌려놓고자 했다. 그는 천하를 위해 법도와 규범을 수립하고 육예의 기강을 후세에 남겼다.”(<사기> ‘공자세가’)
은(상)시대 갑인일에 점을 치면서 “궁형을 내려도 좋을끼요”라고 묻는 내용을 담은 갑골문이다.(양동숙의 <갑골문해독>, 서예문인화, 2007)에서
■생생한 구어체의 향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사기>를 읽다가 절로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다. 당대의 마치 지금 이 순간 생생한 대화를 나누는 듯한 표현들이다.
“陛下欲廢太子 臣期期知其不可”(<사기> ‘장승상열전’)
한나라 고조(유방) 때 주창(周昌)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당시 천자인 고조는 정부인인 여후(여태후)가 낳은 태자를 폐할 심산이었다. 총애하는 척부인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주창을 비롯한 신하들이 반대했다. 주창이 말한 앞의 인용문을 풀어보자.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시려는 데 신은 결~결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기(期)기(期)’를 연발함으로써 말을 더듬는 주창을 묘사한 것이다. 이로써 ‘말더듬이 주창’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 얼마나 생생한 인물묘사인가. 숨막힐 듯한 편전은 말더듬는 주창 때문에 살짝 웃음이 일었을 것이다. 상상하면 또 얼마나 재미있는가. 또 있다.
“애희애(에라!) 애 녀석하고는 뭔 일을 도모하지 못하겠구나!)”
‘항우본기’에 나오는 말이다. 항우의 멘토인 범증의 한탄이다. 항우가 홍문(鴻門)에서 유방을 죽일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자 벌컥 화를 내며 한 말이다. ‘애녀석(竪子)’은 다름 아닌 항우를 일컫는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또 있다. 진섭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그때 머슴살이를 함께 했던 옛 친구가 찾아와 으리으리한 왕궁을 보고 감탄했다.
“굉장하구나! 섭이 왕이 되더니 궁전이 으리으리하구나!(과 涉之爲王 沈沈者)”(<사기> ‘진섭세가’)
■“혀가 살아있다니 됐소”
전국시대 대표적 연횡가인 장의의 한마디를 보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유세가인 그의 유일한 무기는 세치 혀였다. 어느 날 초나라 재상을 만나던 장의는 구슬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쓴다. 장의는 변명할 틈도 없이 수백대의 매질을 당한다. 겨우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본 아내가 혀를 찼다.
그러자 장의가 한마디 했다.
“내 혓바닥이 아직 있는지 보구려.(視吾舌尙在不)”
장의의 처는 기가 막힌 듯 웃으며 말했다.
“혀는 있구려!(舌在也)”
장의가 대꾸했다.
“그럼 됐소!(足矣)”
<사기> ‘장의열전’에 있는 대화이다. 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고 재미있는 묘사인가. 장의가 얼마나 빼어난 유세가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것을 하나의 사례를 들어 내러티브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 무려 2000년 전에 쓴 역사서이다.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역사서…. 사마천이야말로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범접하기 어려운 천재 스토리텔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이 있으니…. 아직도 우리는 역사라 하면 그저 암기과목으로 인식하고, 그처럼 따분한 과목이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사마천과 <사기>를 책상머리에 놓고 보고 또 보며 반성하는 이유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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