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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소동파는 왜 고려를 증오한 '혐한파'가 되었을까

소동파를 아십니까. 북송시대의 대문호입니다. 당대 고려에서는 소동파 열풍에 휩싸였습니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는 '소동파의 문장은 금은보화가 가득 찬 부잣집 같다'고 했고, 이제현은 '소동파 가문의 3명, 즉 소순 소동파 소철 등을 가리켜 천리마와 봉황 같다'고 극찬했습니다. 아니 오죽했으면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은 두 아들의 이름을 소식(소동파)과 소철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부식과 부철로 지었겠습니까. 요즘 중국에서 한류가 유행이라지만 고려시대 때는 소동파를 대표로 하는 '송류'가 풍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고려와 고려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소동파가 고려와 고려인들을 무지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혐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동파는 왜 그렇게 고려를 싫어했을까요. 왜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오랑캐라 했을까요.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입니다. <소동파는 왜 고려를 증오한 '혐한파'가 되었을까>입니다.     

 

 

 “(소)동파의 문장은 금은보화가 창고에 가득찬 부잣집 같다. 도둑이 훔쳐가도 줄지 않으니 표절한들 어찌 해롭겠는가.”
고려의 대문인 이규보(1168~1241)는 송나라 대문호 소동파(소식·1036~1101)을 향한 ‘무한사랑’을 구구절절 표현했다. 어디 이규보 뿐인가. 
“‘입시(과거)’에 매달리던 사람들이 과거 합격 후 비로소 시를 배운다. 그 때 소동파의 시를 즐겨 읽는다. 그러므로 과거합격자 방이 나붙으면 사람들이 ‘올해도 소동파가 33명 나왔다’고 이구동성 하는 것이다.”(<동국이상국집>)
과거에만 전념하느라 다른 공부를 하지못한 입시생들이 합격하기만 하면 모조리 소동파의 시를 읽는다는 것이다. 당대 고려에 불어닥친 ‘소동파 열풍’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스촨성 메이산현에 있던 소동파의 석조좌상. 고려문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소동파는 실은 극도로 고려를 미워한 ‘혐한파’였다. |경향신문 자료

■소동파 ‘사생팬’들
그랬다. 고려인들은 ‘소동파의 사생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컨대 당대 한림학사 권적(1094~1147)이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에게 준 시를 보자.
“소동파 문장은 해외에 알려졌지만 송 황제는 그의 글을 불태웠네. 문장은 불에 태워 재로 만들 수 있지만 천고의 꽃다운 명망은 불태울 수 없네.”
조선의 서거정은 이 권적의 시를 소개하면서 “고려의 문사들이 소동파의 문장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고 토를 달았다.
고려 대학자 이색도 만만찮은 ‘소동파 광팬’이었다.
“큰 소나무 그늘 속에서 동파의 시를 읽었더니 머문 물 같은 고담은 마치 황하를 터뜨린 듯 하였다.(長松影裏讀東坡 定水高談似決河)”(<목은시고> ‘삼각산을 지나며’)
“(소)동파 노인은 뜻이 커서 만장이나 되는 불꽃처럼 세차네.(落落東坡翁 光焰萬丈强)”(<목은시고>)
이색은 소동파의 시와 뜻이 ‘황하를 터뜨린 듯’하고 ‘만장의 불꽃처럼 세차다’고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은 송나라의 ‘삼소(三蘇)’, 즉 소식(蘇軾·소동파)·소철(蘇轍) 형제와 아버지 소순(蘇洵)을 극찬하는 시를 짓는다.
“훌륭한 ‘삼소’가 시운을 타서 태어났으니 한 집안 빼어난 기상 활짝 열렸네. 어른은 천리마처럼 독보적이고, 두 아들은 봉황처럼 쌍으로 날았네. 200년 내려오도록 높은 이름 해와 달과 빛을 다투네.”
아버지 소순은 천리마 같고, 두 아들(소동파와 소철)은 쌍으로 나는 봉황 같다고 추앙한 것이다.

 

■“소동파의 남는 향기까지 흠모”
이 뿐이랴. 임춘은 소동파를 두고 “제자백가를 통합, 저작의 근원까지 파고 든 진정한 명유(名儒)”(<서하선생집>)라 했다.

이인로는 “고사를 많이 사용했지만 흠을 찾아볼 수 없는 청출어람”(<파한집>)이라 했다. 최자는 이규보를 평하면서 “그 호매한 기세와 넉넉한 체모가 소동파와 비슷하다”(<보한집>)고 했다. 이규보에게 주는 최상의 칭송이었던 것이다. 고려인들이 얼마나 소동파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입(제3차)으로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인 와중에서 소동파의 문집(‘동파문집’)이 발간된 것이다.
이 동파문집을 발간한 이는 전주목 완산태수 최군지였고, 이규보가 문집의 발문을 썼다. 이규보의 발문을 보자.
“바야흐로 오랑캐의 말(馬)이 불의에 왕래하여 사세가 위급한 때였다. 그러나 완산태수 최군지는 ‘옛 사람도 전쟁에 임하여 노래를 부르고 창을 던지고 문학을 강론한 일이 있었다. 문(文)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 시시한 오랑캐 때문에 (문집 발간을) 미룬다면 (어찌되겠는가.)’라고 했다. 임금도 역시 문학을 좋아해서 흔쾌히 윤허했다.”
그러니까 몽골의 선봉부대가 전주목에 도착하는 화급한 때인 데도 ‘문(文)을 폐할 수 없다’며 동파문집 간행을 강행한 것이다. 이규보의 발문을 곱씹어보면 당시 소동파의 인기가 어땠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고금을 통해 소동파처럼 인기있는 이도 없었다. 문장이 부섬(富贍·지식의 밑천이 넉넉함)하고, 용사(用事·사실이나 전고를 인용하는 한시의 작법)가 해박해서 그 영양분이 사람들에게 두루 미쳤기 때문이리라. 사대부부터 신진 후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동파의 시를 손에서 떼지 않고 그 남은 향기를 되씹어 보았다.”
고려인들은 ‘전쟁 중에도 소동파의 남는 향기까지 맡을 정도’로 열광했던 것이다.

 

■이름까지 바꾼 김부식 형제
아마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金覲)은 ‘소동파 사생팬’의 종결자일 것이다.
얼마나 소동파를 존경했던지, 셋째와 넷째 아들의 이름까지 ‘소동파 형제’의 이름으로 개명했으니 말이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자.
“일찍이 그 형제(김부식 형제)의 이름 지은 뜻을 몰래 물어보았다.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고 했다.”(<고려도경> ‘인물·김부식조’)
대체 누구를 사모해서 형제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인가. 청나라 시인 왕사정(1634~1711)의 <향조필기>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왕사정은 <고려사>를 읽다가 김부식의 문장을 좋아하게 됐다. 그 때 형제 한 사람의 이름이 ‘부식(富軾)’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이 ‘부철(富轍)’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소식(蘇軾·소동파)·소철(蘇轍) 형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왕사정)는 김부식(1075~1151)과 소동파(1036~1101)의 시대와 멀지 않은데, 어떻게 이름을 넌지시 취했는지 궁금했다. <환유기문(宦遊紀聞)>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서긍이 고려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 기록돼 있었다. 서긍이 김부식에게 묻자 ‘소식·소철 형제’를 사모해서 형제 이름을 ‘부식·부철’로 지었다고 했단다.”
아마도 소동파를 흠모한 김근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1080년(문종 34년) 직전에 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김부식은 1075년생, 김부철은 1079년생이다. 

 

소식(소동파), 소철 형제와 아버지 소순을 모신 사당인 삼소사. 고려의 김근도 아들인 김부식, 김부철 형제의 이름을 소식, 소철 형제의 이름을 본따 개명했다.

■“고려는 상종 못할 오랑캐”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고려인들은 소동파를 그토록 추종했는데, 소동파는 그런 고려인들을 그토록 싫어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동파는 ‘혐한파’ 였으며, 고려는 그런 소동파를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다. 소동파가 지독한 ‘혐한파’였다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그토록 고려를 싫어했을까.
아닌게 아니라 소동파는 무려 7차례에 걸쳐 “‘고려 오랑캐’와는 절대 상종하지 말라”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린다. 집요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1089년 11월 3일부터 12월 3일까지 연속 3번 올린 소동파의 상소문을 보자.
“고려가 16~17년 간 (송나라에)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런데 고려 사신들을 접대하고 답례품을 하사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성을 쌓고 배를 만들고 관사를 짓느라 각 지방의 백성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1089년 11월 3일의 ‘고려의 진상에 대해 논하는 상소문’)
소동파는 특히 “고려 사신들이 중국의 산천을 그리고, 서적을 구매하는데 이 모든 정보와 하사품들이 대부분 거란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려 사신의 접대 때문에 백성들이 피곤하다”고 혐오감을 드러낸 소동파는 고려사신을 ‘거란의 앞잡이’로까지 폄훼한 것이다.
“하물며 해외의 오랑캐요, 거란의 심복이겠습니까. 고려는 명분상 의리를 흠모하여 입공한다고 표방하지만 사실은 이익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만약 보답하지 않으면 오랑캐는 천성이 탐욕스러워 혹시 원망이 생길 지 모릅니다.”(11월3일)
그는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10만 관도 넘는다”면서 ‘고려와 절대 상종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밝혔다. 이것이 소동파의 ‘오해론(五害論)’이다.
“첫째 고려가 바치는 공물은 모두 노리개처럼 허접한 물건인데 반해 송나라가 지출하는 경비는 모두 백성들의 고혈(膏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려 사신들이 닿은 곳마다 백성들과 말, 기물 등을 징발하고 영빈관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고려가 송나라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분명 거란에 넘겨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식량을 대주는 것입니다.”(1093년의 ‘고려의 서적수매에 따른 이익과 손해에 대한 상소문’)
소동파는 이어 “고려사신이 수집한 송나라의 모든 정보가 거란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 뻔하며”(네번째), “훗날 거란이 송나라와 고려의 교섭을 트집 잡는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다섯째)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고려의 국모(國母)가 송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선물(금탑 2개)마저 “절대 받지 말라”고 사생결단하고 가로막았다. 그는 3번이나 상소문을 내서 “선물을 가져온 고려 사신들을 빨리 추방시키라”고 앙앙불락한다. 한 번도 아닌 3번이나 상소를 올려 고려 사신들을 내쫓으려 한 것이다. 얼마나 원한이 깊었기에 그렇게 안달복달 했을까.

 

■“오랑캐에만 이익을 준다”
사실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소동파는 일련의 상소문에서 ‘고려사신을 맞이하느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고려 사신 대접에 쓰이는 돈(10만관)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한다면 최소한 몇 만 명은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1089년 12월 3일의 상소문)
그는 “(고려사신의 방문은) 송나라 조정에는 추호의 이익도 없고, 오랑캐(고려)에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익을 남긴다”고 주장했다.
소동파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소동파는 1089~1092년 사이 항저우·잉저우·양저우 지주(知主·도지사)로 근무하면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목도했다.
흉년이 들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쇠비름과 겨를 넣어 먹는 사람들, 산더미 같은 빚에 허덕여 결국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본 것이다.
소동파는 특히 1085년 덩저우(登州) 지주로 부임하던 중 하이저우(海州)에 우뚝 선 고려 사신의 숙소(고려정)을 보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처마와 기둥이 춤을 추며 담장 밖으로 날아오르고, 뽕나무는 도끼를 맞아 쓸쓸하게 서있네. 오랑캐에게 다 주어 노비가 되게 했으니 이들에게 보상해줄 길이 있을 지 모르겠네.(첨楹飛舞垣牆外 桑자蕭條斤斧餘盡賜昆邪作奴婢 不知償得此人無)”(<소식시집>)
소동파는 이 시를 지은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1084년 고려사신 숙소인 고려정을 지으라는 황명을 내리자 하이저우 등 두 고을에는 심한 동요가 일었다. 백성들 가운데는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듬해(1085년) 내가 그곳을 지나다 고려정의 장려함에 탄복해서 시 1수를 남긴다.”(<소식시집>)  
소동파는 고려 사신들을 위한 ‘호화 영빈관’을 짓기 위해 고통받고 있던 송나라 백성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소동파가 즐겨먹었다는 동파육. 소동파가 즐겨먹었다 해서 동파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외교는 국익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하더라도 고려를 향한 소동파의 적개심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특히 고려를 ‘거란의 앞잡이’로 보고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국제정세의 오판’이라 할 수 있다.
993년 10월 거란(요나라)이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응하지 않았다.
이 때 고려의 서희가 나서 “고려가 거란에 조견하고, 거란의 연호를 쓴다”는 조건으로 화약을 맺었다. 고려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후 고려는 끊임없이 거란과 샅바싸움을 벌이면서 송나라와의 동맹을 타진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고려의 요청을 거부했다.
사실 외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소동파도 ‘고려가 송나라에 조공하는 것은 결국 고려의 이익을 위한 것’(1089년 11월3일 상소문)이라 언급하지 않았던가. 외교의 요체는 결국 국익이 아닌가.
만약 송나라가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합해서 거란과 맞섰다면 거란의 국력은 크게 약화됐을 가능성이 있다. 푸단대 왕수이자오(王水照) 교수의 견해가 흥미롭다.
“고려는 진정으로 송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거란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따라서 소동파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소동파가 고려를 싫어한 이유
또 하나 지적할 사항은 소동파의 고질적인 중화사상이다.
소동파는 고려를 두고 ‘해외의 오랑캐’로 폄훼하고, “만약 따뜻하게 대해주면 다시 탐욕스런 마음을 발공하여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여기서 소동파와 동시대인인 범조우(范祖禹·1041~1098)의 언급과 비교해보자.
“저들이 비록 이적(夷敵)이지만 역시 중국의 백성과 같다. 오랑캐는 이익을 좇고 손해를 피하며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니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다.”(범조우의 <당감·唐鑑> 권3)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금수와 같아서 너무 잘 다스려지기 바라면 커다란 혼란에 빠지고 만다.”(소동파 전집>)
얼마나 대조적인 가치관인가. “오랑캐도 중국 사람과 같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범조우와, “금수와 같으니 금수처럼 다스려야 한다”는 소동파….
소동파는 왜 고런 보수적인 이적관과 철저한 중화사상에 젖어야만 했을까. 류종목 교수(서울대)는 ‘소동파의 열등의식’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송나라는 다른 이전의 중국 왕조에 견주면 문약(文弱)하기 짝이 없었다. 늘 요나라(거란)과 서하(西夏)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소동파는 송나라의 ‘대외적 열등감’을 해소하고 싶은 복합심리에서 지나칠 정도의 문화적 우월감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다. 그런 소동파를 ‘진정한 명유(名儒)’, ‘청출어람’, ‘시의 영웅’, ‘신선의 풍모’라고 떠받들며 맹목적인 ‘사생팬’이 된 고려 문인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류종목, <소식과 고려>, 서울대, 2001년
류종목, <소식평전-팔방미인 소동파>, 신서원, 2005년
조규백, <고려시대 문인의 소동파 시문 수용 및 그 의의>, 제주관광대.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