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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경순왕, 지뢰와 비무장지대의 호위를 받다.

 경순왕릉 가는 길은 언제나 서늘한 느낌을 준다.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인데도 그렇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닿아있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릉과 왕릉 가는 길을 잘 닦아놓고는 ‘민간인 통제선’에서 제외시켜 놓았으니…. 입구에서 왕릉까지의 길 양옆에는 ‘지뢰’ 표지를 단 울타리가 길게 펼쳐져 있다. 갈 때마다 섬뜩하다. 그 길을 100m가량 가면 시야가 확 트인다. 제법 새뜻한 모습의 왕릉이다. 왕릉을 빙 둘러싼 울타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 저 울타리를 넘어가면 큰일 난다. 울타리 너머 손에 닿을 듯한 거리, 야트막한 성거산 능선이 바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이라고 새겨진 명문비석을 보라. 총탄 자국들이 선명하다. 이 심상찮은 상흔들이 경순왕릉(사적 244호)의 ‘흑역사’를 상징해주고 있다.

경기 연천 비무장지대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 경순왕릉. 그러나 민통선 지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가갈 수 있다 연천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경순왕릉의 ‘흑역사’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무덤을 오래전에 잃었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습니다.”(<영조실록>)
 1746년(영조 22년), 동지(同知·직함이 없는 노인) 김응호가 “임진왜란 이후 실전된 경순왕릉을 찾았으니 나라 차원에서 관리해줘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영조 역시 “1000년 가까이 된 왕릉을 찾았으니 얼마나 기이한 일이냐”고 반색하면서 5명의 관리인을 두었다. 이 무덤은 이후 고려 왕릉의 예우를 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또다시 실전되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이 지역이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었는가. 경순왕릉은 남북 분단에 이은 한국전쟁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 한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던 1973년 1월, 육군 25사단 예하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가 수색 중 총탄에 맞고 쓰러진 비석을 발견한다.
 바로 ‘신라 경순왕의 능(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명문비석이었다. 경순왕릉은 두 번이나 실전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국전쟁의 와중에 총탄 세례를 받은 채로 현현한 것이다. 지뢰밭과 남방한계선 철책의 무장호위를 받는 것도 모자라 비석마저 총상을 입은 채 누워계신 임금….
 그것도 고향인 경주가 아니라 머나먼 이곳 고랑포에 묻혀 있다니…. 과연 천년 사직을 고이 바친 ‘무능한 망국의 임금’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하기야 얼마나 고분고분 나라를 바쳤으면 ‘경순왕(敬順王)’의 시호를 받았을까. 우리는 흔히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 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ㆍ찰나)던가”하고 한탄했던 정비석의 <산정무한(山情無限)>을 기억한다. 그러니 마의초식(麻衣草食)했던 태자와 견줘, 속절없이 나라를 들어 바친 아비의 무력함을 탓할 수밖에.

 

 ■무능한 임금이냐, 승리한 패배자냐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경순왕을 두고 ‘백성을 전쟁에서 구해낸 임금’이자, ‘승리한 패배자’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으니까….
 먼저 김부식이 <삼국사기> ‘경순왕조’를 쓴 뒤 달아놓은 사족을 보자.
 “경순왕이 만약 저항했다면 필시 그 종족이 뒤집혀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들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이제 935년(경순왕 9년) 10월, 서라벌에서 벌어졌던 신라의 마지막 군신회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나라를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고려로 귀부(歸附)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경순왕은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고려 귀부는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군신들은 끝까지 갑론을박했다.
 경순왕의 첫째 아들인 태자(일·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절규한다.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겠나이까.”
 그러나 경순왕의 뜻은 확고했다.
 “이미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는 지경에 왔다. 무고한 백성들을 전쟁의 참화로 빠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경순왕은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천년사직에 접어들던 신라는 이른바 하대(下代)로 접어들면서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3년(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반란에도 어쩔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효공왕(재위 897∼912년) 9년(905년)에는 궁예가 신라를 침범했으나 방어할 힘이 없어 성만 지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그야말로 명맥만 남은 나라가 됐던 것이다.  

제법 새뜻하게 정비된 경순왕릉(사적 244호). 왕릉의 뒤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울타리 넘어 조금 더 가면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다.

 ■후백제군의 침략
 마침내 927년(경애왕 4년) 음력 11월, 세력을 키운 후백제 견훤이 왕경(경주)을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경애왕조’를 보면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여 즐겁게 노느라 적병이 들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전멸당한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왕비를 강간했으며 휘하들을 풀어 비첩들을 능욕하게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없는 왕이라도 그렇지, 그 추운 겨울에,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술판’을 벌였겠느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당시 신라에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성스러운 장소인 포석사가 있었고, 포석정은 제사 이후에 음복을 했던 장소일 가능성이 짙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게 맞다면 경애왕은 당시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때 왕경을 마음껏 유린한 견훤은 후사로 경순왕을 옹립한다.(927년)
 견훤은 경순왕을 세우면서 “나는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이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련다.”고 머리를 낮췄다. 하지만 견훤의 목적은 경순왕을 어르고 뺨치면서 마음껏 요리하기 위해 왕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사실 경순왕의 직위 무렵(927년 11월)에는 후백제의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경순왕은 절대 견훤에게 경도되지 않는다.
 꺼져가는 등불을 되살려야 하는 경순왕으로서는 끈질긴 형세판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던 930년(경순왕 4년),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고려가 견훤의 후백제군을 대파하면서 후백제 30여개 군이 잇달아 항복한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경순왕조’)
 승부의 저울추가 고려 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고려 왕건은 경순왕에게 사신을 보낸다. 사태를 저울질하던 경순왕은 반색한다.
 이듬해인 931년 2월, 고려 왕건이 50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경주 부근에 당도하자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 달려나간다. 왕건을 ‘모시고’ 벌인 임해전(臨海殿) 잔치에서 경순왕은 눈물을 줄줄 흘린다.  
 “내가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해 차츰 환란을 불러일으키고, 견훤은 의롭지 못한 일을 제멋대로 하여 나의 국가를 없애려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왕이 울자 신하들도 오열했다. 왕건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단다. 왕건과 휘하의 병사들이 93일간이나 머물다 귀국하자 신라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단다.
 “견훤은 승냥이나 범 같았는데, 왕공(王公ㆍ왕건)은 마치 부모 같구나.”
 이마도 왕건의 서라벌 방문 때 고려귀부와 관련된 끈질긴 협상이 이뤄졌을 것이다. 바로 이 협상에서 경순왕 스스로를 비롯, 신라귀족세력의 안녕과 백성의 안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경순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옆으로 지뢰지대임을 뜻하는 표지가 붙어 있다.

 ■왕건보다 35년 더 살았던 임금
 경순왕은 드디어(935년) “우리 백성들을 죽일 수 없다”면서 나라를 들어 항복한 것이다.
 부왕의 귀부결정에 반발한 태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인사를 전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삼베옷과 나물음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그에게 ‘마의태자’란 이름을 붙였다. 경순왕의 막내아들 역시 화엄종의 승려가 됐다. 그는 범공(梵空) 스님이란 법명으로 법수사와 해인사에서 지냈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 개경으로 향할 때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 행렬을 따랐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나 이어졌다. 연도에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려 태조는 개경 교외까지 나서 경순왕 일행을 맞았다.
 고려의 경순왕 대접은 극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고한 백성의 희생 없이 통합의 위업을 이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태조는 그의 딸(낙랑공주)을 경순왕에게 주어 장인·사위 관계를 맺었다. 또 경순왕을 정승공(政承公)으로 봉했으며, 그 지위 또한 고려 태자보다 위에 있게 했다. 녹봉 1000석을 내렸고, 신라를 경주라 칭한 뒤 경순왕을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했다. 그 땅은 모두 정승공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경순왕은 망국 후에도 무려 43년이나 더 살았고, 왕건보다도 35년 더 장수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수를 다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고려 태조는 경순왕에게 “나라를 준 그 은혜가 크다”면서 “앞으로 영원히 장인-사위 관계를 맺자”고 제안했다. 이 말에 따라 경순왕은 자신의 큰아버지(김억렴) 딸(신성왕후)을 태조 왕건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니까 왕건의 부인이 된 신성왕후는 경순왕의 사촌누이가 되는 셈이다.
 왕건과 이 신성왕후 사이에서 난 아들이 왕욱(후에 안종으로 추존)이다. 왕욱이 누구인가. 바로 고려 8대 왕인 현종(재위 1009~1031)의 아버지이다. 그랬으니 김부식은 “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이은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이 모든 것이 (경순왕의) 음덕(陰德)”이라고 평했다. 결국 경순왕의 외손들이 고려의 왕통을 이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고려는 신라의 나라, 경순왕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니 경순왕을 두고 감히 ‘승리한 패배자’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경순왕릉의 입구에 있는 고랑포구. 지금은 유실지뢰의 우려 때문에 철문으로 닫아놓았지만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기막 포구였고, 서울~개성 도로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바다와 육지의 무산의 집결지였다고 한다.   

 ■고랑포에 묻힌 까닭은
 한 가지 의문점이 더 남는다. 경순왕은 왜 죽어서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고랑포구가 눈앞에 보이는 야산(성거산)에 기대어 묻혔을까.
 속전인 <계림문헌록>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살필 수 있다.
 “978년(경종 3년) 4월4일 경순왕이 훙거했다. 그의 능지는 경주로 예정됐다. 신라 유민들이 경순왕의 운구를 따라가느라 장사진을 이뤘다. 그들은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나섰다. 송도가 텅텅 빌 정도였다.”
 고려 조정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신라 유민들이 대거 경순왕의 운구를 따라가면서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짙지 않은가. 설사 운구가 무사히 경주에 도착한다 해도 장례식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조정은 긴급 군신회의를 열어 숙의를 거듭한 끝에 절묘한 대책을 마련한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경순왕에게 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궁벽한 이곳, 고랑포구인가.
 지금 고랑포구로 내려가는 길은 철문으로 닫혀 있다. 유실된 도시락 지뢰가 쌓일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고랑포구는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다. 서울~개성을 잇는 길목이기도 했고,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이기도 했다.
 아마 고려 태조 왕건이 경순왕의 귀순 대열을 맞이한 ‘개경 외곽’이 바로 이 고랑포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경순왕의 운구 행렬이 마지막 순간에 멈춰야 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으리라. 첨언하자면 경순왕이 망국의 슬픔을 간직한 채 옛 신라(新羅)의 도읍(都)을 그리워했다는 도라산(都羅山)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뿐이 아니다. 왕릉 가는 길목에 예전엔 없었던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아버지의 귀순 결정에 맞서 은둔의 길을 떠난 마의태자의 넋을 기리는 영단(靈壇)이 설치된 것이다. 마의태자의 후손들이 세웠단다. 돌아서는 길에 갖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그래 아버지가 백성을 위해 나라를 바친 ‘현실론자’였다면, 아들은 대의명분을 위해 절개를 바친 ‘이상론자’라 할 수 있겠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