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과연 임진강·한강유역을 어떻게 지배했을까. 고구려는 과연 천자국을 지향했을까. 그렇다면 백제·신라는 고구려 제국의 제후국이었을까.
호로고루를 비롯한 임진강·한강유역의 고구려 유적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이상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려 유적들이 한결같이 면(面)의 개념이 아니라 선(線)의 개념으로 분포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 혹은 신라를 칠 때 점령지역을 정치적·행정적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오로지 군사루트만을 개척하고 보루 위주의 성을 쌓았다는 걸 말해준다. 이를테면 행정관을 두고, 점령지역을 다스리고, 조세를 수취하는 형식이 아니라 전진·후퇴의 루트만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최종택(고려대 교수)은 “미군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영역확보는 하지 않고, 보급선만 확보하고 진격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하고 있다. 심광주(토지주택박물관장)가 추정하는 고구려 남하루트를 이렇다.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개성을 거쳐 호로고루를 건넌다. 개성-장단-파주-고양루트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호로고루 쪽이야말로 고구려 주력인 기마병 부대가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뒤의 남하루트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감악산 남서쪽의 323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거나 혹은 37번 국도를 따라 적암리 쪽으로 우회한 뒤 368번 국도를 따라 남하한다. 고구려군은 의정부-상계동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렀고 한강을 건너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한 끝에 개로왕을 죽인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한강유역에서 발견되는 40여개 고구려 유적들은 대부분 둘레 400m 안팎의 소규모 보루들뿐이라는 점이다. 한강유역 아차산 일대에 분포한 보루는 군사루트를 따라 500~1,000m 거리에 하나씩 모두 20여개가 배치돼 있다.
당포성이나 은대리성도 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보루로 치부될 만큼 규모가 작다. 반면 지안이나 평양, 황해도, 즉 예성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들은 짧게는 수㎞ 길게는 10㎞가 넘을 만큼 그 규모가 엄청나다.
왜일까. 왜 점령지역에는 그렇게 작은 규모의 보루만을 지었을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한강유역에 이성산성과 아차산성, 대모산성 등 큰 성을 쌓고 주변지역을 행정적·정치적으로 지배한 것과도 크게 구별된다.
이는 점령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통치방법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그 단서에 근거를 달아주는 기록의 편린을 보자.
광개토대왕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396년) 왕이~백잔(百殘·백제)의 성을 포위하니 이에 백잔왕이 곤핍해져서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바치고 왕 앞에 꿇어앉아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제부터 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하였다. ~잘못을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정성을 받아들였다. 이때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굴복시키고 백제왕을 ‘노객’으로 삼은 뒤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5세기 말의 것으로 보이는 중원고구려비문에도 “고려태왕의 조왕의 영으로 신라 매금과 (더불어)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如兄如弟)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쪽으로 왔다”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노객’ 혹은 ‘형제국’으로 삼았다는 것과, 백제·신라를 친 뒤 그 지역을 점령하지 않고 노획물만 지니고 다시 귀국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심광주는 “만주일대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이룬 고구려가 혹 황제의 나라를 칭하여 백제·신라를 조공국가, 즉 제후국으로 삼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추정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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