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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고구려 최전방사령부와 남침루트

-6.25 전쟁 때 북한군도 사용한 천혜의 도하지점

낚시터 바위 위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지포 여울에서 밤고기 잡는 어선의 등불(芝灘漁火),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고야위(규암)에 비친 저녁놀(掛岩晩霞), 장좌리 넓은 모래 벌에 열 지어 내려앉는 기러기 떼(平沙落雁), 저물녘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石浦歸帆), 장단 석벽 좌우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의 절경(赤壁丹楓), 신라 경순왕릉 위에 비치는 저녁햇빛(羅陵落照).”

경기 연천 고랑포를 중심으로 한 임진강 절경을 흔히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했다.

6.25 이전에는 가장 번성한 포구였다. 서해안에서 조류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새우·소금 배들이 장단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던 콩·땔감·곡물 등과 교역했다.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여건으로 경기 북부 농·특산물의 집하장 역할을 했으며, 상권형성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콩은 장단백태(長湍白太)라 하여 당시 보통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했다.

고구려 최전방사령부였던 연천 호로고루. 기마부대가 건널 수 있는 첫번째 요충지였다.

1,500년 전 국경, 지금은 분단의 상징이 되어=하지만 이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제 싹 지워버리자. 1,500년 전 고구려·백제·신라의 국경지역이었고, 50여 년 전에는 남북이 으르렁대며 싸웠던 6.25 전쟁의 격전지였음을 상기하자.

19506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된다. 북한군 주력 전차부대는 개성을 통과, 문산 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우회한다. 목표는 호로고루였다. 탱크가 수심 깊은 임진강 하류 쪽을 건널 수 없었다. 반면 호로고루는 임진강 하류 쪽에서는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었다. 현무암 수직단애 위에 삼각형 모양으로 서있는 강안 평지성. 경기 연천 장남면 원당 3.

이 호로고루는 장마철을 제외하면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이니 탱크부대가 건널 수 있는 곳이었다. 북한군 1사단은 탱크를 앞세우고 호로고루를 도하, 문산-파주-고양-구파발 쪽으로 남침한 것이었다.

다시 시계를 1,5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주지하다시피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 대 백제, 백제 대 신라, 신라 대 고구려의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4~7세기까지 고구려와 신라는 16차례, 고구려와 백제는 31차례(백제를 주체로 한 기록에는 33차례), 백제와 신라는 29차례에 걸쳐 피 말리는 전투를 벌였다. 76(혹은 78)차례의 접전을 벌인 셈이다.

삼국사기 지리조에 따르면 연천의 임진강 유역은 처음에는 고구려에 속해 공목달(功木達)로 칭해지다가 훗날 신라가 취한 것으로 돼있다.

하지만 원래 이 땅은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 있는 백제초기 형식의 대형 적석총 1기와 군남면 선곡리, 백학면 학곡리 등에 분포하는 백제계 적석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제는 애초 근초고왕(재위 346~374)이 평양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3국 가운데 절정의 군사력을 발휘하며 우위를 지킨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장수왕(재위 413~491)대부터 이 땅은 고구려 영역으로 바뀐다.

남진정책을 펼친 고구려는 396년을 전후한 시기에 영팔성(寧八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구모로성(臼模盧城) 58성을 빼앗았다. 이때부터 연천을 공목달이라고 칭한 것이 아닐까.

호로고루에서 바라본 도강로. 멀리 보이는 곳이 고랑포구이다. 그곳까지는 배가 드나들만큼 물이 깊다.

고구려는 남하루트에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비롯해 당포성, 은대리성 등 크고 작은 성과 보루를 축조하기 시작한다. 연천군 관내의 고성산 보루, 무등리 1·2보루, 두루봉 보루, 아미성 등도 이에 포함된다.

북한군 탱크가 호로고루를 통해 건너왔듯 그 옛날 삼국시대와 그 이후에도 이 지역의 중요성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들을 검토해보자.

삼국전쟁, 나당전쟁의 격전지=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던 662(문무왕 2)의 상황을 삼국사기 기록(문무왕 11·671)을 통해 보자.

“~ 용삭 2(662)정월, 유총관(함자도 총관 유덕민을 뜻함)은 신라의 양하도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운송했다. 궂은비가 한 달 이상 계속되고 눈보라가 치고 날씨가 몹시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다는 전달할 수 없었다. 평양의 대군이 돌아가려했고 신라군사도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역시 군사를 돌렸다. ~주림과 추위에 떨어 죽은 병사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호로고루)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적(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백제·고구려를 제압한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맞선다.

다시 삼국사기 문무왕조.

호로고루 내부에서 확인된 고구려군이 먹었던 다양한 군량이 저장돼있었다.

“13(673)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했다. 당의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했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 군사가 이겨 2,000여명을 목 베었고, 당의 군사 가운데 호로(瓠瀘·호로고루)와 왕봉(王逢·고양 행주산성 부근) 등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조선 효종 7(1656)에 나온 동국여지지에는 호로고루는 부의 동쪽 32리 호로탄 위에 있다. 동쪽으로 적성현과 경계이며 두 개의 누()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석벽으로 인해 견고하다. 전하기를 삼국시대의 둔수처(屯戍處·병력 주둔처)라 한다고 돼있다.

경기읍지장단현 고적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호로고루는 옛 남면 표로탄에 있다. 두 개의 루()가 서 있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석벽으로 인해 견고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당나라 유인궤(劉仁軌)가 병사들을 이끌고 노하(蘆河)를 끊고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한 것이 바로 이 성이다.”

임진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국경하천 역할을 했으며, 통일전쟁을 벌이는 신라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당나라가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현무암 지대를 따라 형성된 높이 10가 넘는 임진강·한탄강 단애는 천혜의 요새로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 같은 깎아지른 단애가 없고 수심마저 얕아 쉽게 건널 수 있는 호로고루 같은 여울목 지역은 공격의 루트이자 반드시 사수해야 할 요처였다.

발굴당시의 호로고루 항공사진.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6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서이다. 도면과 함께 사진이 실린 이 보고서는 호로고루를 삼국시대 성으로 기술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발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호로고루는 국유림 미성지(眉城址)라고 하며 석축주위는 약 300, 삼국시대 축성이라고 칭함이라고 기록했다.

그런 호로고루는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냉전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호시탐탐 쳐다보고 칼끝을 겨누는,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결국 6.25전쟁이 터졌고 북한군은 철옹성 요새(임진강변 깎아지른 듯한 단애)의 빈틈(호로고루)을 뚫고 내려온 것이다.

북한군도 이 호로고루 정상에 포대를 설치한다. 누구보다도 방어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터. 1,500년 유적지가 크게 훼손됐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임진강 북안 넓은 벌판에 솟아있는 호로고루. 마을 주민들은 재미산(財尾山), 재미성(財尾城)이라 부른다.

이곳은 분단의 최전선으로 전쟁 이후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 선 북쪽 군사지역에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주민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기에 학술조사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북 고자가 새겨진 토기. 고구려군이 진군나팔을 올릴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 그림은 이 토기를 토대로 복원한 북 모양.

그러다가 지난 1991년 육군사관학교 군사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실시한 군사보호구역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호로고루의 잔존 상태가 확인되었다.

그 때에는 성벽이 온전한 상태였지만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는 유물은 수집되지 않았다.

정적으로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있었지만 확신할 수 없어 막연히 삼국시대성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포대 만드느라, 뱀 잡느라 훼손되는 성=그런데 이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되면서 1995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성내에 가축을 기르는 축사가 마련되면서 서서히 훼손됐다. 토지주인이 성내에 버섯을 재배하기 위해 포크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해서 성 내부를 1가량 파내고 또 차량의 출입을 위해 성안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넓히면서 성벽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다.

이때 다량의 기와 편들이 쏟아져 흩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벽의 남쪽 끝 부분이 잘려 나감으로써 동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자리가 파괴 멸실 되어 버렸다.

이렇게 훼손되는 현장이 1998년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토지박물관에 의해 확인됐다. 그리고 파괴로 인해 흩어져 있는 기와 편들이 고구려시대 기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토지박물관 학예실장 심광주의 말.

당장 시굴조사를 해야 했어요. 토지소유주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얼마나 반대를 했는지. 그래서 문화재청에 보고해서 정식 시굴조사가 아니라 정밀지표조사를 하는 것으로 전환했어요. 지표조사라는 게 단순히 땅 위에 남아있는 흔적만을 조사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어째요. 그나마 잔존한 성벽이라도 보존이 시급하니까.”

조사는 호로고루 뿐 아니라 인근의 고구려 보루 및 성에 대한 조사도 병행했다.

호로고루 맞은 편에는 신라가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잔미성의 흔적의 남아있다. 이곳은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강 하나를 두고 대치했던 삼국시대 휴전선이었다.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강 하나를 두고 대화를 나눴을 장면이 짐작된다.

훼손은 심각했습니다. 인민군이 6.25 때 정상에 쌓은 포대(砲臺)때문에 훼손됐고 정상부 동사면에는 남북으로 길게 성벽을 따라 폭 1, 깊이 2의 참호도 있었습니다. 장대 동쪽부분은 성벽이 무너진 상태였는데, 이것은 10여 년 전 마을 주민들이 뱀을 잡기 위해 중장비를 동원해서 무너뜨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뱀은 지표조사 내내 조사단을 괴롭혔다. 돌로 쌓은 산성에는 원래 온갖 뱀들이 우글거리기 마련이다. 돌로 쌓은 탓에 돌 틈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곳은 뱀이 알을 낳고 동면하는 등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1.5짜리 구렁이도 있었는데 제가 본 뱀의 종류만 해도 한 50종류는 됐어요. 뱀을 잡아서는 안되는 게 원칙이지만 조사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잡기도 했는데 조사 도중에 한 20여 마리는 잡았을 겁니다.”

돌을 들추어 똬리를 튼 뱀들이 우글거리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흥미로운 게 한 가지 있었다. 성 안에 우물이 있었는데 누군가 난리를 피해 급히 피란하면서 많은 보물들을 우물 속에 쓸어 넣고 갔다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그 우물을 발견하는 사람은 부자가 될 거라는 이야기.

조사단도 흥미롭게 그 우물터를 발견하려 애썼지만 결국 미완의 작업으로 끝나고 말았다. 찾지 못했던 것이다.

호로고루에 대한 대강의 조사를 마치고 인근 보루와 성에 대한 조사를 펼치던 98817.

조사단은 호로고루에서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연천 왕징면에 자리 잡고 있는 무등리 2보루에 오른 조사단은 아주 획기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호로고루에서는 다양한 동물뼈들이 출토됐다. 고구려군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다.

고구려 군량미 창고 발견=경작되던 밭고랑에서 다량의 고구려 토기 편들이 수습된 것은 부수입. 성의 북동쪽 부분은 임진강에 접한 단애가 형성돼있는데 그중 2곳에서 집중호우로 잘려나간 토층의 단면에서 엄청난 양의 탄화곡물을 발견한 것이다.

양을 측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마니로 치면 수백가마니 될 겁니다. 중요한 것은 탄화곡물과 함께 발견된 고구려 토기편이나 소토덩어리 등으로 미루어 이곳은 고구려 보루가 분명했어요. 벽체시설의 일부로 판단되는 소토덩어리로 볼 때 상당수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그랬다. 그것은 고구려의 군량미 창고였던 것이다. 정확한 사료는 없었지만 7세기 대 군량미의 이동을 알 수 있는 자료 하나는 있었다.

앞서 인용했던 삼국사기 문무왕 11년조(671)조와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에 이같은 내용이 나온다. 즉 문무왕 2(662) 김유신이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평양까지 군량미를 갖고 들어가 심각한 식량문제에 시달리던 당나라 소정방 군에게 전달하고는 호로고루(瓢河)를 건너 되돌아왔다는 기사이다.

우선 발굴단은 허문회(서울대 명예교수·식물 육종학 전공)에게 탄화미 분석을 의뢰하는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서울대 AMS 연구실 등 3곳에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당대 고구려인들의 식생활과 그 시대에는 어떤 품종을 심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선 당대 고구려 군사들이 쌀과 조를 섞어 먹었으며 쌀의 품종은 인디카(Indica)가 아니라 자포니카(Japonica)를 먹었음을 입증했다. 인디카는 지금 동남아 등지에서 먹고 있는 차지지 않고 풀풀 날리는 이른바 메진쌀이고 자포니카는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차진쌀이다.

그리고 고구려 군사들은 현미와 잘 도정된 백미를 섞어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미는 벼 껍질만 벗긴 것으로 백미는 잘 다듬은 쌀을 말한다. 현미는 소화에 문제가 있고, 백미는 소화에는 좋으나 영양분이 파괴되고 보관상에 문제가 있다.

벼의 겉껍질(왕겨·미각)만 깐 것을 현미라고 합니다. 또 그렇게 깐 현미에도 종피라고 해서 또 하나의 껍질이 감싸고 있는데 이 종피까지 까서 잘 도정한 것이 백미이지요. 그런데 이 종피라고 하는 것은 배속에 들어가면 소화를 방해합니다. 그러니 현미가 소화가 안된다는 거지요. 하지만 현미는 영양분이 파괴되지 않고 보관이 쉬워서 일본에서는 전국적으로 현미로만 저장합니다. 현미상태인 쌀은 살아있는 벼이고, 백미는 죽은 벼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백미는 소화는 잘되지만 영양분이 파괴되고. 쉽게 썩어 보관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허문회는 일제시대 때 현미를 도정해서 백미로 만들 때 나온 종피(현미의 껍질)와 쌀눈으로 빵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설사가 줄줄 나올 정도로 소화가 안됐다고 말했다.

호로고루에서 학인된 다양한 기와. 엄청난 규모의 고구려군사령부 건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충북 옥천 대천리 신석기 시대 주거지에서 발견된 탄화미도 자포니카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자포니카를 먹었다는 증거이다. 연대측정도 흥미로웠다.

호로고루에서 나온 목탄을 토대로 측정한 결과는 AD 410~670년 사이. 이 결과 호로고루는 대략 5세기 중엽쯤 축조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무등리 출토 탄화미에 대한 연대측정은 AD 440~690(서울대 AMS), AD 530~690(국립문화재연구소). 모두 5세기 초에서 7세기 중후반이라는 결과이다. 오차 폭이 약 120년이지만 측정결과 모두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와 거의 겹치고 있다.

결국 고구려는 이 지역을 경영하면서 잇달아 보루와 성을 쌓고 거대한 군량미 창고를 두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또 하나 추론할 수 있는 점은 고구려가 당시로서는 고급 곡물인 쌀을 최전방 군사들에게까지 먹였을 정도로 부강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반도 북쪽에는 논보다는 밭이 많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조밥을 많이 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조에다 당시로서는 고급 곡물인 쌀을 섞었다는 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군사들에게까지 쌀을 먹이다니요. 쌀을 대량으로 수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허문회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당연히 요동반도를 경영했을 것이고 그 반도를 가로지르는 요하유역에는 대평야가 있었을 겁니다. 그 대평야에서 쌀을 수확하지 않았을까요. 이미 3,000년 전부터 요동반도 북쪽 평야에 벼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렇다면 요동반도가 고구려 강역이던 2,000년 전부터 쌀농사가 성행했다고 봐야 합니다.”

결국 임진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량미 창고는 만주와 요동반도를 석권한 고구려 대제국의 욱일승천한 국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얘기다. 물론 요동반도의 쌀이 바로 무등리와 호로고루 등 최전방까지 조달됐다는 것은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고구려가 막대한 군량미를 군사들에게 제공할 만큼 부강한 나라였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욱일승천의 고구려 제국 상징=토지박물관이 호로고루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대한 조사를 계속 벌인 끝에 중요한 결과들이 이어졌다. 우선 호로고루의 경우 임진강·한강 유역의 40여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현재까지의 조사결과만 볼 때) 가장 많은 고구려 기와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구의동 보루나 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에서는 기와가 없었고 심지어는 몽촌토성 출토기와 보다 많다.

또 하나 독특한 성벽의 축조기법이다. 바닥을 점토로 쌓아올리고 중간부분에는 사질토로 판축을 한 뒤 양쪽의 내벽과 외벽을 대칭하여 석축으로 쌓았다는 점.

또 외벽의 밖은 보축하여 조성했다.

삼국시대에 있어 일반적으로 성을 쌓는 수법은 흙으로만 쌓은 토성(土城), 혹은 돌만으로 쌓은 석성 이거나 내부를 돌로 쌓아올리고, 외부에는 흙을 덮어 쌓은 석심토축성(石心土築城)인데. 이 호로고루는 석성과 토성의 장점을 적절히 결합하여 축성을 쉽게 하면서도 견고하게 쌓았습니다. 그리고 성벽의 판축 된 흙 속에서 확인되는 토기 편들이 대부분 고구려 것이고, 축성 이후에 형성된 두터운 와적층(瓦積層)에는 고구려 기와만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볼 때 고구려성이 분명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부 전문가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곳은 원래 백제영역. 따라서 백제가 먼저 흙으로 성을 쌓은 다음, 고구려가 훗날 돌을 덧쌓은 것이 아니냐는 의문, 즉 백제가 이 성의 초축국이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실제 판축토에서 백제토기편이 소량 검출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자 일부 학자는 원래 백제성이고 백제토기편이 나왔는데도 발굴단이 고구려 보루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백제토기 편들을 숨기지 않았는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다.

심광주는 이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다.

소량의 백제토기편이 나왔지만 유의미한 자료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도위원회 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겁니다. 백제 토기 편들은 층위를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가운데 다짐토 속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도 주변에서 원래 살던 백제 사람들의 주거지에서 휩쓸려 들어왔을 겁니다. 고구려가 성을 쌓을 때 옛날의 백제 주거지에서 휩쓸려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죠.”

어쨌든 이 호로고루는 임진강과 샛강이 만나는 삼각형 형태의 천연적인 단애부(斷崖部)에 동쪽부분만 남북을 가로막는 성벽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두 벽은 암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현재의 땅바닥에서 높이 4~5터에 이르게 판축식의 토성 벽을 마련했다. 석축벽인 동벽의 하단부의 폭은 40에 달했다.

동벽의 경우 장대(將臺)가 있었던 위치의 높이가 지상에서 10로 가장 높고 남쪽의 말단부는 6정도였다.

북쪽 말단부는 임진강의 단애면부에 연결되어 무려 30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임진강을 통해 적이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요새였고 전체 성벽의 둘레는 길이 401에 달했다.

기와 편은 고구려 기와와 함께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 기와들이 출토됐다. 고구려 토기 편으로는 대형항아리, 시루편, 동이편 등이 있었고 통일신라 토기 편으로서는 짧은 다리를 가진 토기잔인 단각고배(短脚高杯), 밥그릇인 완(). 도장문양이 찍힌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편들이 출토됐고, 고려시대 청자 편들과 조선시대 분청사기 편들도 확인됐다. 물론 주먹도끼 등 구석기시대 유물도 나온다.

이와 같은 발굴결과에서 오랜 시기에 걸친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니 이 지역에 매우 장구한 세월동안 사람이 살고 있었던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초축국이 어느 나라였냐는 문제는 남는다. 이 성이 맨 처음에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나에 있다. 말하자면 백제냐 고구려냐에 있다.

유물의 경우 백제토기편도 적은 양이지만 판축토에서 출토되고 있다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문헌기록이나 현지의 조건, 그리고 발굴된 유물을 면밀히 검토해 찾아야 한다.

여전히 한강을 중심한 초기의 한성백제사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볼 때 백제는 근초고왕 때 최전성기를 이뤘음은 틀림없다.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까지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후 1세기동안 고구려의 보복전쟁으로 시련을 겪다가 결국 고구려 장수왕 때(475) 한강유역을 잃고 만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비록 이곳 호로고루를 중심으로 한 임진강 유역은 한성백제시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는 분명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보루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의 중심연대는 5세가 중반이후로 편년되고 있다.

결국 발굴단이 추정한 대로 호로고루를 비롯한 인근의 성과 보루는 그 무렵 축조한 고구려 성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호로고루에서 구석기 주먹도끼가 나왔다고 해서 구석기인들이 쌓은 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백제 유물이 조금 출토된다고 해서 바로 백제산성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호로고루는 백제의 고토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확보된 거점성(據點城)으로서 위치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통일신라시대에는 전략상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재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무리가 없을 터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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