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 쓴다 하면서 미뤄뒀다가 해를 넘긴 아이템이 있습니다.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이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 되는 해가 2023년이었는데요. 그러나 그냥 넘길 수 없죠. 음력으로 치면 아직 해가 바뀌지도 않았고요.
고려를 방문하고 귀국한 서긍이 <고려도경>을 써서 송 휘종(1100~1125)에게 바친 것이 1124년(인종2)이었습니다. 따라서 2024년은 <고려도경> 편찬 900주년이 되는 해가 됩니다. 그러니 ‘~주년 기념’ 기사는 유효하겠지요.
■비색청자와 세밀가귀
<고려도경> 하면 ‘비색청자’가 첫손가락으로 꼽히죠.
“도기의 푸른 빛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 하는데, 근래에 더욱 정교해져서 빛깔이 좋아졌다.”(<고려도경> ‘기명3·도준’)
고 했습니다. 나전칠기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일컫는 ‘세밀가귀(細密可貴)’도 빼놓을 수 없죠.
“고려의 나전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而螺細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 ‘잡속2·토산’)고 했습니다.
나전칠기에 사용된 나전이 2만~3만개에 이르고, 나전의 두께가 0.3~0.8mm 정도에 불과하니, 그런 찬사가 나온겁니다.
■음주문화…1차에 15잔은 기본
이외에도 당대 고려의 풍속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흥미로운 장면이 포착되는데요. 특히 음주 문화도 눈길을 끕니다.
사신단은 방문 첫날부터 귀국 때까지 고려 국왕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는데요.
첫번째 연회부터 “왕(인종)이 사신단에게 술 9번 돌린 뒤 쉬었다가 다시 술자리에 앉으라”(<고려도경> ‘궁전2·연영각전’)고 했고요.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요. ‘밤 늦게까지 15차례씩 마셨다 쉬었다 마셨다’를 반복한 술자리가 사신단이 돌아가는 순간까지 3차례(<고려도경> ‘연례·헌주·관회·서교송행’)나 이어집니다. 1차에 15잔씩 2차, 3차까지 가는 술자리….
아마 송나라 사신들이 고려의 술공세에 넉다운 되었을 겁니다. 2차, 3차로 차수를 이어가는 음주문화는 최근까지 이어지죠.
■고려인은 ‘깔끔쟁이’
서긍의 눈에 비친 고려인은 어땠을까요. ‘깔끔쟁이’였습니다.
우선 “옛 사서(<위서> ‘열전·고구려)는 ‘고려인들은 모두 깨끗하다’고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깨끗하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더러운 중국인’을 ‘디스’하는 말을 옮깁니다.
“고려인들은 늘 중국인이 ‘때가 많다’고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한다.”
.
그런데 서긍도 고려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다고 콕콕 쑤십니다.
“고려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 혼인도 쉽게 하고 이혼도 쉽게 한다…예법을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이상합니다. 서긍의 ‘디스’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싶은데요. 그런데 요즘 풍속에 비추어보면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고려 여인의 몽수패션
‘여성 패션’ 기사가 눈길을 끄는데요. “부인이 몸을 꾸밀 때는 화장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분을 바를 때 붉은 색은 사용하지 않는데 버들같이 그린 눈썹이 이마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몽수’라는 특유의 패션을 전합니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는 3폭으로 만든다. 한 폭의 길이는 8척이다. 정수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얼굴만 드러내게 한다. 나머지 부분은 완전히 땅에까지 내려온다.”
그런데 일하는 여인들은 거추장스럽지 않게 “몽수를 늘어뜨리지 않고 정수리에서 겹쳐지게 한 후 옷을 추스르며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천한 집에서는 몽수 패션을 할 수 없었답니다. 신분 때문이 아니고요.
“몽수 가격이 은 1근에 해당되니 가난한 집에서는 마련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고려패션 중에 ‘돌려입는 치마’가 눈에 띕니다, 치마가 8폭인데요. 겨드랑이까지 끌어올려 높이 묶는답니다.
“몸을 휘감을수록 고상한 여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부귀한 집안의 부녀자는 치마를 만들 때 7~8필까지 사용한다.”
■송나라는 사면초가
그런데 지금까지 <고려도경>과 관련해서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왜 이 <고려도경>을 만들어 황제(휘종)에게 바쳤을까요.
사실 송나라가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에 보낸 것은 그때(1123)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45년 전이었습니다.
1078년 송나라 신종(1067~1085)이 고려로 떠나는 대규모 사신단을 막 건조한 거함(‘신주·神舟)’ 2척에 태웠습니다.
<고려도경>은 “예전(1078)에 신종 황제가 고려에 보낼 사신단을 위해 거함 두 척을 만들도록 했다. 그 규모가 매우 웅장(規模甚雄)했다”고 전했습니다. 1078년(문종 32)이면 언제입니까.
고려 현종(1009~1031)이 거란과의 전쟁에서 최종승리(1018~1019)를 거둔 후 전성기를 누리던 때죠.
송나라는 왜 ‘웅장한 규모의 거함’까지 건조하면서까지 대규모 사신단을 보냈을까요.
여기에는 심각한 속사정이 있었죠. 당시 송나라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습니다.
북쪽의 강국 요(거란)과 서북방의 서하 등에게 막대한 세폐(해마다 건네주는 물자)를 대가로 평화를 구걸하는 처지였죠.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1075~76) 남방의 교지국(베트남)과도 국경분쟁을 벌였습니다.
■고려에 까인 송나라
그나마 거란과 송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고려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송나라로서는 그런 고려를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뜨거운 구애작전을 펼친겁니다.
그러나 송나라 신종의 외교전은 실패하고 맙니다. 고려 입장에서 북쪽에 요(거란)이 버티고 있는데 그렇게 가볍게 놀 수 없었죠. <고려사>를 읽어보면 송나라 사신단을 맞이한 고려 문종(1046~1083)이 이런 말을 합니다.
“황제가…후히 하사하니 영광스럽고 감사하나, 삼가 두려운 것도 많다.”(<고려사> 1078년 6월25일)
‘삼가 두려운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송나라의 접근이 부담스럽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송나라가 고려에게 ‘까인’ 겁니다. 그럼에도 신종은 고려를 향한 애정공세를 멈추지 않는데요.
송나라를 방문하는 고려 사신들의 연도에 고려관(혹은 고려정)을 세워 편의를 제공했고요. 고려와의 공적·사적 무역을 전면 허용하는 고려교역법을 반포하기도 했습니다.(1079년 1월)
■소동파는 ‘혐한파’
그런데 친고려정책을 썼던 신종이 죽고 새 황제(철종·1085~1100)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지죠.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비판론이 등장한 겁니다. 특히 고려 지식인 사회에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던 소식(소동파·1036~1101)이 실은 ‘지독한 혐한파’였는데요. 웃기죠. 당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1075~1151)·김부철(1079~1136) 형제가 소식·소철(1039~1112) 형제를 신봉한 나머지 이름까지 바꿨다는데 말이죠.
그런 소식이 1089~1093년 사이에 끈질기게 고려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그가 주장한 고려의 오해론(五害論·5가지 폐해)은 “고려 오랑캐와는 절대 상종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거란(요)의 앞잡이’인 고려에게 너무도 많은 선심을 베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송나라가 쓰지 않아도 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여론 때문에 송나라의 고려 구애작전은 흐지부지 되는 듯 했는데요.
■길이 100m의 초대형 선박 건조
그러나 국제정세가 다시 급변하게 되죠. 1100년 송나라 황제가 휘종(1100~1125)으로 바뀐 것이 첫번째 변화였는데요.
무엇보다 북방에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1115년 건국한 금나라(여진족)가 무서운 기세로 강성해졌구요.
결국 송나라는 북방의 패자로 급부상한 금나라에게 막대한 세폐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연경과 계주 등 6주의 지배권을 획득하기는 했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1122년 12월)
송나라는 다시 고려로 눈길을 돌렸는데요. 그것이 바로 서긍이 파견되는 1123년의 사절단입니다.
송 휘종은 1178년을 능가하는 사절단을 꾸밉니다. 우선 1178년에 건조한 배(신주·神舟)를 능가하는 새로운 신주 2척을 건조합니다. 여기에 민간 무역선인 객주 6척을 더 동원합니다. <고려도경>은 ‘신주’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는데요. 다만 민간 무역선인 ‘객주’의 규모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놓고는 ‘신주의 길이·너비·높이·크기·집기·용기·인원수 등은 모두 객주의 3배’라고 특기해놓았습니다.
■1000명에 육박한 사신단 수
그럼 객주의 규모를 볼까요. “객주의 길이는 10여길(장), 높이는 3길, 너비는 2길5자이고…선원은 배마다 60명에 이른다”(<고려도경> ‘객주’)고 했어요. 신주의 규모는 정확하게 객주의 3배라 했죠.
그렇다면 신주는 길이 30여 장(90m), 높이 9장(27m), 폭은 7장 5척(24m)이라는 얘기입니다.(#주:실제 신주의 규모는 길이 43m, 높이 13m, 너비 11m 정도라는 견해도 있다.)
또 객주 6척에 선원(1대당 60명)만 360명(6×60명)이 탔다고 했죠. 그럼 객주의 3배라는 신주에도 선원만 360명(2×60×3)이 탄겁니다. 그렇다면 8척(신주 2척+객주 6척)에 승선한 선원만 총 720명에 이릅니다. 또 <고려도경>에 기록된 공식사절단수가 156명인데요. 이것만 해도 876명인데요. 그밖의 수행원까지 합하면 1000명에 달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자그만치 900년 전인데요. 송나라가 1000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사신단을 고려국에 보냈다는 겁니다.
■<고려도경>은 기행문이 아니다
아무리봐도 보통 사절단 같지 않죠. <고려도경>은 단순한 기행문이나 풍물지가 아닙니다.(김대식 성균관대박물관장 설명)
일단 <고려도경> ‘서문’을 들여다 봅시다.
“구중궁궐 깊은 곳…천자(황제)는 만리 밖 사방을 손바닥 위에서 가리키듯 훤히 살펴야 한다.”
“고려는 요동에 자리잡고 있어서…가까운 제후국이 아니다. 도적(圖籍·지도와 호적) 작성이 곤란하다.”
“눈 귀가 닿는대로 널리 일을 탐문하는 것이 사신의 직분이다.”
“고려의 실정을 수집하여 사신의 임무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한다.”
어떻습니까. ‘쌔~’한 느낌이죠. 좋은 말로 ‘정보수집’, 쉬운 말로 ‘스파이’ 같죠.
그렇습니다. <고려도경>에는 58명에 이르는 ‘그 다음 보충된 하절(차충대하절)’들의 임무가 적혀있는데요.
“충대하절은 군인 신분이 많았다. 이번 사절단에는 군인 뿐 아니라 사인(士人·선비)이나 예술인 및 장인들도 뽑았다. 이번 사절의 행차에 고려인을 위로하고 살피라는 황제의 뜻을 모두 유념했으므로 누구나 고려의 풍속을 살피려고 했다.”
■송나라 스파이 58명의 암약
이 무슨 뜻입니까. 공식사절단(156명) 가운데 58명의 스파이가 존재했다는 겁니다. 무술을 익힌 군인들도 있었지만 더러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인, 더러는 측정과 측량을 담당하는 기술인들로 구성되었다는 뜻이죠.
서긍은 어떤 역할이었을까요. 서긍은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도할관 다음인 ‘제할관’이었는데요. ‘넘버4’였죠.
1000명에 육박하는 사신단원과 신주·객주, 그리고 고려와 주고받은 예물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긍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뽑힌 이유가 있었죠. 글씨는 물론이고요. 산수화와 인물화 모두 ‘신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풍물과 인물을 그리고, 기록하는데 적격이었다는 뜻입니다.
서긍은 본인은 물론 58명의 ‘스파이’가 수집해오는 정보를 취사 선택하고 정리해서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총지휘했을 겁니다. 송나라의 다른 의도도 있었을 겁니다. 요즘의 항공모함 같은, 길이 100m에 육박하는 초대형 최신 선박에 1000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함으로써 송나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싶었을 겁니다.
■감시의 눈 번뜩인 고려
고려 조정은 과연 송나라의 의도를 몰랐을까요. 알았던 것 같습니다.
1123년 6월12일 당대 세계최대의 선박인 신주 2척을 앞세운 송나라 사절단의 배 8척이 위풍당당 예성항 어귀에 들어섰습니다. 송나라 사신단은 내심 고려인들이 거대한 신주의 규모에 압도 당할 고려인들을 상상했겠죠.
그러나 더 놀란 것은 송나라 사신단이었습니다. 서긍은 “중무장한 기병들과 의장대를 비롯한 고려 정예부대 1만명이 도열해 있었고, 구경꾼이 담장처럼 둘러서 있었다.”(<고려도경> ‘예성항’ ‘초신기대’)고 보고했습니다.
사신단이 도착부터 송나라와 고려가 엄청난 기싸움을 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첩보활동은 자유로웠을까요. 아닙니다. 서긍의 발언을 들어보죠.
“고려에 머문게 겨우 한달 남짓이었고, 고려가 객관을 제공한 다음에는 군사가 지켰으므로 객관을 나선게 겨우 5~6번에 불과했다. 수레가 달리는 동안이나 연회 도중에 주워듣고 보았던 부분에 대해서….”
고려 조정의 감시로 첩보활동에 너무도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서긍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서긍은 그런 상황에서도 58명의 스파이요원이 눈도장, 귀동냥한 것을 토대로 나름 그럴싸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도경>이라는 책이름처럼 글과 그림을 곁들인 보고서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1127~28)에 일어난 ‘정강의 변’(휘종과 그 아들 흠종이 금나라에 잡혀간 사건)-북송의 멸망-남송의 건국 등 난리통에 그림 부분은 사라졌습니다.
■실패로 끝난 사신단의 임무
그렇다면 송나라가 고려에 보낸 대규모 사신단은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었을까요. 그렇지 못했답니다.
사신단장인 정사 노윤적이 “이제 요나라의 운명도 다했으니 송나라의 책봉을 받으라”고 막 즉위한 고려 인종(1122~1146)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인종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아직 선왕(예종)의 상(喪)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책봉을 요청하는 것은 예의상 미안한 일이오. 실로 황공하고 부끄러울 뿐이오.”(<고려사> 1123년 6월22일)
구구절절한 외교적 수사죠. ‘상중(喪中)’이라는 점을 내세워 완곡하게 거절한 겁니다.
한마디로 최첨단 거함 신주를 앞세워 고려를 제 편으로 만들려 했던 송나라의 외교전은 실패로 끝났던 겁니다.
하지만 단 한달여의 짧은 기간에 온갖 감시를 받아가면서 남긴 일종의 첩보보고서가 900년전 고려와 고려인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는 지침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이 기사를 위해 김대식 성균관대박물관장과 문경호 공주대 교수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했습니다. 강봉룡 목포대 교수의 논문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려도경>과 관련한 단행본으로 문경호 교수의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푸른역사, 2023)과 김대식 관장의 <그림으로 읽는 고려도경>(그림 강민경, 역사인, 2013)을 추천합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강봉룡, ‘1123년 송의 봉사고려사신단 파견의 실상과 의의-대고려 거대 외교프로젝트의 관점에서’, <2023 해양실크로드 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3
김대식, ‘이방인에 비친 고려, 고려도경’, <900년전 이방인의 고려방문기-고려도경>(경기도박물관 특별전 도록), 경기도박물관, 2018
김대식, <그림으로 읽는 고려도경>, 그림 강민경, 역사인, 2013
문경호, ‘도쿄대 소장 당선지도를 통해 본 신주의 선형과 구조’, <2023 해양실크로드 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3
문경호,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서긍, 조동원·김대식·이경록·이상국·홍기표 옮김, <고려도경>, 황소자리, 2005
국립문화재연구소, <고려도경 숨은그림 찾기>, 2019
경기도박물관, <900년전 이방인의 코리아방문기>(특별전 도록),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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