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의 왕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된 지 233년만인 1739년 복위되면서 ‘단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종묘에 신주가 안장되는 과정을 그린 반차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516년 3월28일 <고려사>(‘세가·명종’)를 읽던 상(중종)이 깊은 한숨을 쉬며…‘멍’하니 있었다.”(<중종실록>)
조선조 중종이 <고려사>를 읽다가 시쳇말로 ‘멍 때렸다’는 기사입니다. 문제의 <고려사> 구절은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인 최충수(?~1197)가 태자(희종·1204~1211)의 조강지처(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던 대목’입니다.
최충수 때문에 쫓겨난 태자비가 흐느껴 울자 궁궐이 눈물바다를 이뤘다는 겁니다. 중종은 서슬퍼런 신하의 겁박에 조강지처를 내쳐야 했던 고려 희종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 겁니다.
<중종실록>의 사관도 중종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상(중종)이 신씨(愼氏)의 폐출을 반드시 깊이 후회한 것이다. 그러나 강한 신하에게 제압되어 벌써 폐출했으니, 이제야 어찌할 것인가.”
■‘멍 때린 중종’
13년 뒤인 1529년(중종 24) 9월13일 충청도 부여 출신인 김식이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신씨의 죄목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얼룩소의 새끼라도 빛깔이 붉고 뿔이 똑바로 났으면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씨의 덕이 얼룩소만도 못하단 말씀입니까.”(<중종실록>)
‘얼룩소의 비유’는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인데요.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붉고 뿔이 곧은 소가 환영받았습니다. ‘얼룩소’는 못난소의 대명사였죠. 그러나 공자는 출신이 천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반드시 쓰임새가 있다고 가르친겁니다. 신씨를 얼룩소에 비유한 겁니다. 두 기사에서 동일인물이 등장하죠. 바로 ‘신(愼)’씨입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1488~1544, 재위 1506~1544)의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1487~1557)를 가리킵니다. ‘7일의 왕비’로 알려진 분이죠.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시리즈물로 기획한 학술총서 중 7번째 책을 펴냈는데요.
그것이 <외규장각의궤 연구:추상·복위부묘봉릉>입니다. 이름부터 어렵죠. 그러나 여느 책도 아니고 <외규장각 도서(의궤)> 아닙니까.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했다가 2011년 대여 형식으로 귀환한 책(297권)이죠.
그래서 이번에 펴낸 책의 목차를 차분히 읽어봤는데요. 등장 인물은 당대에는 홀대 받았거나 혹은 폐위되었다가, 훗날 추상(존호를 올림) 혹은 복위(신분 회복)된 분들이죠. 이번 출간된 책은 이 분들의 추상·복위 논의와 의례의 전과정을 수록했습니다. 이 참에 파란만장했던 분들의 삶을 돌아보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명예가 회복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겠죠.
■남편의 자결을 맞은 부인
이번에는 ‘7일의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삶을 살펴보려 합니다.
신씨는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 신수근(1450~1506)의 딸입니다.
신씨는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아들이자 연산군(1494~1506)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훗날 중종)과 혼인했습니다.
그런데 얽히고설킨 관계가 운명을 가릅니다. 연산군의 부인이 바로 신수근의 동생(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연산군의 부인(거창군 부인)과 진성대군(중종)의 부인(단경왕후)은 고모와 조카사이였던 겁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2일의 일화가 눈에 띕니다. 반정군이 진성대군의 집을 에워쌌습니다.
이때 진성대군은 반정군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신씨가 남편의 소매자락을 붙들고 말렸답니다. “집을 에워싼 군사의 말머리가 이궁(진성대군의 자택)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는 죽어야 합니다. 만일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다면 반드시 공자(진성대군)를 호위하려는 뜻일 겁니다.”
과연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었습니다. 만일 신씨의 만류가 없었던들 진성대군은 지레 자결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반정 끝에 즉위한 남편(중종)과 달리 신씨의 운명은 급전직하합니다.
연산군의 매부이기도 한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죄’로 죽임을 당했던 겁니다.
“반정세력의 권유에 신수근은 ‘매부(연산군)를 폐하고 사위(진성대군·중종)를 세우는 일은 할 수 없다…영명한 세자(연산군의 아들)을 믿을 뿐’이라 했다.”(<연려실기술>)
신수근은 아무리 매부가 폭군이라 하지만 신하가 군주를 폐하는 것은 의리에도 맞지 않다고 봤고요. 대신 똘똘한 것으로 알려진 세자(이황·1497~1506)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강지처를 내쫓다’
그러나 아버지의 선택은 딸(신씨)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반정이 일어난지 7일만인 1506년 9월9일이었습니다. 이때 반정세력이 총출동해서 중종을 다그칩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 딸이 궁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왕비)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니…은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그러자 중종은 “조강지처를 어떻게 내치겠냐”고 난감해 합니다.
그러나 반정세력의 시퍼런 서슬에 중종은 나약한 군주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종사가 지극히 중하다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
허약한 군주이자 못난 남편은 내쫓는 것도 모자라 대못을 박는 명을 내립니다.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가게 하리라.”
■죽은 사람 취급당한 신씨
참 기막힌 일입니다. 그런데 ‘신씨를 쫓아낸 이날의 기록’이 훗날까지 논란을 일으킵니다.
반정세력이 ‘신씨를 왕비로 삼을 경우~’라는 가정법을 쓴 대목입니다.
그래서 신씨가 애초부터 왕비로 책봉된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 훗날까지 제기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씨는 왕비에서 폐위된 것이 아니라 중종의 진성대군 시절 부인의 신분으로 쫓겨났다는 거죠.
반정세력들은 ‘신수근의 딸인 신씨=왕비’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반정 성공 후 19일이 지난 9월21일 명나라에 중종의 책봉을 받기위한 사신단을 보내는데요.
이때 중종의 왕위계승이 정변이 아니라 선위를 통해 이뤄졌음을 알리는 9가지 조목을 마련하는데요.
다 새빨간 거짓으로 채웠습니다. 즉 세자가 두창으로 요절했고, 세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연산군이 지병인 풍현증(스트레스성 현기증) 때문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다고 했고요. 신씨와 관련되어 기막힌 ‘가짜뉴스’도 넣습니다.
“만약 명 황제가 ‘왕비를 책봉했느냐’고 물으면 ‘전하(중종)의 대군 시절 부인이 병으로 죽었고, 아직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고 대답한다.”(<중종실록>)고 했어요. 시퍼렇게 살아있는 부인을 죽은 사람으로 둔갑시킨 겁니다.
■남편이 왕이면 부인은 자동 왕비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죠.
<국조보감>과 <선원보략> 등 왕실기록은 “신씨는 9월2일 중종 반정 후 중전이 되었고, 9일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또 1557년(명종12) 12월7일 승하한 신씨를 위해 쓴 졸기는 “중종이 즉위하자 비(신씨)도 정위(중전 자리)에서 하례를 받았다가 쫓겨났다”(<명종실록>)고 했습니다. ‘신씨=만 7일간의 중전(왕비)’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건데요.
233년 뒤 영조가 신씨를 왕비(단경왕후)로 올리며 반대여론을 잠재운 한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날 봐라. 내가 임금이 되었을 때 내 부인은 이미 중전이 됐다. 중종이 왕위에 이은 날 신비(단경왕후) 역시 자동으로 중전이 된 것이다.”(<영조실록> 1739년 3월11일)
영조는 “남편이 임금이 되면 부인은 당연히 그 순간부터 중전이 되는데 누가 이의를 다냐”고 매조지한 겁니다.
■중종의 임종 때 부른 여인
그러나 어찌됐든 남편에게 쫓겨난 모양새가 되지 않았습니까. 신씨는 사저로 쫓겨나 불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사이 전 남편은 반정세력의 핵심인 박원종(1467~1510)의 조카(장경왕후 윤씨)와 재혼합니다.
하지만 중종의 속은 편치 않았나 봅니다. <국조기사>는 “중종은…명나라 사신을 맞을 때마다 쫓아낸 신씨의 사저에 ‘임금이 타고 온 말’을 보냈다. 신씨는 늘 흰죽을 쑤어 손수 말을 먹여 보냈다.”고 했습니다.
또 “폐비 신씨의 집(어의동)에 도둑이 들었으니 경비 군사를 4명에서 6명으로 늘리라”(<중종실록> 1528년 1월29일)는 명을 내립니다. 어의동 자택은 중종이 대군시절 부인(신씨)과 알콩달콩 살던 집이었습니다.
1544년(중종 39) 11월 15일 죽음을 앞둔 중종이 사경을 헤맬 때인데요. 그 급박한 순간의 실록기사가 심상치않습니다.
“통화문(창경궁 북쪽 문)을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놓았기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들리는 말에 ‘상(중종)이 임종 때 폐비 신씨를 보고 싶어했기에 불러들였다’고 했다.”
물론 실록의 사관은 “이 말은 헛소문”이라고 부연 설명했는데요. 진위 여부를 떠나 중종이 신씨에게 진 마음의 빚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죠.
■비등한 동정여론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1544~1545)도 “이제부터 폐비 신씨를 자수궁(후궁들의 거처)의 예로 대우하라”(<인종실록> 1544년 4월6일)는 명을 내렸고요. 1557년(명종 12) 폐비 신씨가 71세의 춘추로 승하했을때 명종은 ‘왕후(왕비)의 어머니’의 예로 장례를 치르도록 했습니다. <명종실록>은 “(반정공신들의 계속된 위협에) 중종도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러나 폐비가 무죄한 것을 생각하고 항시 불쌍하게 여기며 잊지 못했다”고 썼습니다. 이때 졸기를 쓴 사관은 “(반정공신들의) 죄악은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신씨에게 아무런 죄가 없었다”고 논평했습니다. 또 “신씨의 장례가 후하게 갖춰지지 않아 당대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고 세간의 동정여론을 전했습니다.
■‘보류’된 상소문
동정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종의 두번째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인종)를 낳고 승하하는데요.(1515)
이때 놀라운 상소문이 올라옵니다. 담양부사 박상(1474~1530)과 순창군수 김정(1486~1521)이 “신씨를 복위시켜 원통함을 풀어줘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전하께서 신씨를 폐위하신 명분은 무엇입니까…반정공신들이…임금을 다리 사이와 손바닥 위에 놓고 희롱하듯 겁박하고, 국모를 병아리새끼 팽개치듯 쫓아냈으니…”
두 사람은 이어 ‘반정공신=난신적자’로 지목하면서 “난신적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이 ‘춘추’의 의리”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러면서 “장경왕후가 돌아가셨으니 지금이야말로 신씨를 복위시킬 호기”라고 중종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이에 중종은 어정쩡한 반응을 보입니다. 중종은 “이런 큰일을 박상과 김정 같은 하급관리들의 말을 듣고 처리할 수 있겠느냐”면서 “상소문은 승정원에 보관해두라”는 명을 내립니다. 한마디로 ‘보류’한 겁니다.
중종이 두 사람의 주장에 솔깃한 것 같아요. 조정공론이 어떤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본 거죠.
■기묘사화의 씨앗
하지만 대사헌 권민수(1406~1517)와 대사간 이행(1478~1534)이 가만있지 않습니다.(8월11일) 박상·김정을 탄핵합니다.
“만약 신씨를 복위시키면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인종)는 어찌됩니까. 또 신씨가 복위되면 그 지위가 장경왕후 보다 앞선 자리에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 피의 보복을 감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중종실록>)
중중도 섣불리 신씨의 복위를 단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반정공신들을 난신적자로 규정하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정통성은 어찌됩니까. 결국 상소문을 올린 박상과 김정은 유배형의 처분을 받았는데요.
그러나 이 ‘신씨 복위’ 논쟁은 또 한 번의 비극을 잉태합니다.
사간원 정언 조광조(1482~1520)가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촉구한 대간들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기본적으로 박상과 김정은 “나를 꾸짖어달라”는 중종의 ‘구언’ 전교에 따라 상소문을 올렸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을 처벌한다? 그것도 언로를 밝혀야 할 사헌부와 사간원 수장이 앞장 서서 이 두사람의 처벌을 촉구했다? 조광조는 이렇게 언로를 막은 대간들이야말로 파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합니다.(조광조의 <정암집>)
이 폐비 신씨 복위 논쟁은 기묘사화(1519)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중종실록>은 “박상·김정의 상소문은 올바른 것이었는데, 이를 두고 워낙 논쟁이 격화되어서 결국 사림이 반목해서 참혹한 화(기묘사화)를 불렀다”(1515년 8월8일)고 평했습니다.
■‘안타까워, 어쩌나’
‘폐비 신씨의 복위’는 중종이 세번째 부인(문정왕후 윤씨·1501~1565)을 맞이함으로써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갑니다.(1517)그러나 폐비 신씨의 처지가 딱하다는 것은 여러 대가 지나도록 불변의 여론이었나봅니다.
현종 연간에 ‘신씨 복위’건이 거론되었는데요. 이때도 묘소의 관리를 국가가 담당하는 선에서 끝납니다.
그러다 숙종 연간에 ‘폐비 신씨의 복위’ 운동은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1698년(숙종 24) 9월30일 전 현감 신규(1659~1708)가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겁니다.
이때 숙종의 명에 따라 대신·종친·문무백관들이 궁정에 총출동했고요. 또 지방 대신 및 유신들의 의견까지 자그만치 491명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찬반 여론이 워낙 팽팽하자 숙종은 “참으로 난처한 측면이 있다”고 토로했는데요.
또한번 복위는 이뤄지지 못했고요. 다만 별도의 사당을 세우고, 신주에는 ‘폐비 신씨’라 해서 ‘왕비에서 폐위된 사실’을 적시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숙종이 “신씨를 위해 사당을 세우라”는 명을 내리면서 신씨를 쉽게 복위시켜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어제시로 읊었습니다. “옛날 왕비로서 지존의 짝이더니/밤에 건춘문으로 나감에 백성들이 원통해 했네/슬픔과 한스러움에 어찌 추복의 의논이 없으랴만/어쩌나. 이제 와서 임금 마음 알 수 없음을….”
■538명 중 537명이 ‘복위’ 찬성
숙종의 마음을 알아준 이는 아들 영조였습니다. 1739년(영조 15) 3월11일 유생 김태남이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어찌 백성들만 억울하게 여기겠냐. 내 마음도 아프다”고 공감하면서 밀어붙입니다.
마침 대비(숙종의 계비 인원왕후·1687~1757)가 “숙종이 본래 신씨를 복위시키려 했지만 대신들의 의논이 엇갈려 시행하지 못했기에 늘 유감으로 여겼다”고 영조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영조는 내외의 의견을 폭넓게 모으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3월15일 종친 및 문무백관 등이 총출동해서 신씨의 복위를 두고 찬반토론을 벌였고요. 지방 관리 및 유생들의 의견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토론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이가 무려 538명이고요.
이중 1명을 제외한 537명이 ‘신씨 복위’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영조실록> 1739년 3월15일) <승정원일기> 1739년 3월15일자는 538명의 의견을 전부 기록했는데요. 제가 눈에 불을 켜고 숫자를 세어봤는데, 511명 쯤에서 헷갈려서 포기했습니다.
지독한 의견수렴이기도 하고요. 또 그 500명이 넘는 의견서를 기록으로 남긴 것도 대단합니다. 아무튼 신씨의 복위가 결정되자 영조는 자못 감회어린 소감을 밝힙니다.
“아! 황량한 신비의 무덤에 난 풀은 지금 몇 년이 지났는가…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다.”
신씨의 복위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요. 영조는 ‘오버 아니냐’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면복(국왕이 제례 때 입는 관복)을 입고 직접 신비의 사당에 행차했습니다. 시호는 ‘단경’, 능호는 ‘온릉’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단경왕후의 신주는 태묘의 중종실에 모셨습니다. 신주의 위치는 중종의 ‘원후’, 즉 첫번째 부인 자리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그저 ‘7일의 왕비’와, ‘비운의 러브스토리’ 쯤으로만 알던 분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분에게서 이렇게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담겨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기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윤희 학예연구관과 김진실 학예연구사, 국립진주박물관의 허문행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나영훈, ‘영조대 단경왕후 온릉의 봉릉 과정과 도감 운영’, <외규장각의궤연구-추장·복위부묘봉릉>(학술총서7), 국립중앙박물관, 2023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정비와 세실론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6
김우진, ‘영조의 단경왕후 신씨 복와와 의의-복위·부묘 의례를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 90권90호, 동양고전학회, 2023
한희숙, ‘중종비 신씨의 처지와 그 복위논의’, <한국인물사연구> 7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7
황정연, ‘단경왕후 온릉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봉릉의 역사적인 의미’, <민족문화논총>5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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