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경북 안동 임청각이라는 유서깊은 가옥이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보물 182호로 지정된 집인데요. 7년간 280억원을 들이는 사업이랍니다. 일제강점기에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이 가옥의 앞마당을 관통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는데요. 임청각은 80여 년 만에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셈이라고 하네요, 어떤 사연이 있는 지 알아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일가족이 서간도로 망명하여 평생 독립운동을 펼친 분이다.
문=임청각이 가옥이라고 했는데요, 보물로 지정될만큼 유서깊은 집인가보죠?
답=임청각은 경북 안동 낙동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는데요. 1515년(중종 10년) 지어진 가장 오래된 민가입니다. 고성 이씨 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수요. 어느 방에서나 아침 저녁으로 햇빛이 들도록 채광효과를 높인 배산임수의 99칸 저택입니다.
제일의 형승이라는 극찬과 함께 지금은 보물 제182호로 지정돼있죠. 그러나 이 집의 가치는 건축사적인 의미에만 있지 않습니다.
문=그러면 또 어떤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답=대대로 주인인 고성 이씨 가문의 올곶은 마음이 담겨있는 가옥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일제의 침탈에 맞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문=석주 이상룡 선생 하면 그렇게 많이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답=그러나 반드시 아셔야 하는 독립운동가죠. 석주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분이구요. 무엇보다 이 고성 이씨 가문에서 모두 11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고, 처가와 친인척을 포함하면 4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했답니다. 석주 선생을 포함한 3대(본인^아들^손자)와 부인(석주 선생의 부인과 동생의 부인) 2명, 동생 2명, 조카 3명, 당숙 1명 등 해서 11분입니다.
문=대단한 집안인데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네요?
답=그렇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을미사변 후인 1896년 가야산에서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의병항전을 시도했고요. 이후에는 아 일제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대항할 수 없겠구나. 국내에서 의병활동은 어렵겠구나 라고 생각해서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틀어서 협동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09년 안동경찰서에 구속되었는데 “이상룡을 풀어주라”는 시위대의 압력으로 석방되기도 했답니다.
문=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나봐요? 풀어주라는 시위까지 있었다니까?
답=그렇습니다. 선생이 독립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40대 후반이었더군요. 당시 안동이라는 전통사회에서 명가의 후손으로 이미 뚜렷한 입지와 명망을 얻고 있던 선생이 지천명이 다되는 나이에 분연히 일어나 독립을 외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겠죠. 이상룡 선생이 이렇게 혁신적인 유림의 행보를 걷게 되자 안동지방 특유의 친족적 연대감이 발동해서 이 지역 집단개화의 선두에 자리잡게 된겁니다.
문=그런 분인데 국권이 침탈되는 모습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1910년 한일합병이 일어나자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다’면서 중대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항일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처남과 함께 망명계획을 세웁니다. 석주 선생은 1911년 1월1일 신정에 오락기구를 마련해서 여러 일족을 불러 하루종일 통쾌하게 놀았답니다. 마지막 전치를 벌인거죠.
문=당시 연세가 쉰이 넘으셨다는데 그냥 편하게 사실 수도 있었는데 고난의 길을 택하셨네요?
답=그렇습니다. 그분이 한 말씀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는 잠시 시렁(물건을 넣어두는 도구)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는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한마디로 국권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씀이셨네요?
답=그렇습니다. 신정에 한바탕 신명나게 놀고는 1911년 1월5일 조상신을 모신 사당에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떠났는데요.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는군요.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였겠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석주 선생 혼자만 가신게 아니라 일가족 전체가 떠났다는 겁니다.
문=집은 어떻게 하구요?
답=논과 밭 일부를 제사 비용과 친족의 생활 비용으로 남겨둔 뒤 나머지는 모두 처분했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비들에게 일정한 보상금을 주었고, 노비문서마저 모두 불태워서 양민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가족 50여 명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몽땅 데리고 서간도 망명을 단행합니다.
철도가 반토막낸 임청각의 모습이다. 1941년 일제가 직선으로 뚫지않고 이렇게 10km를 돌게 철로를 뚫었다고 한다.|문화재청 제공
문=이걸 노블리스 오블레쥬를 실천한 가문이라고 해도 되죠? 그런 가문이 또 있잖습니까?
답=있죠. 바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처남인 백하 김대락 선생(1845~1914)이 만삭의 임산부인 손녀 손부를 포함해서 가신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도 우리가 잘 아는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6형제 또한 지금으로 치면 600억원 가량의 전 재산을 갖고 만주로 넘어갔죠. 뭐 끊임없이 일제강점기에 크고 작은 친일하지 않은 사람과 가문이 어디있냐,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한 것 아니냐고 부르짖는 자들이 있잖습니까. 그러나 그런 자들은 석주나 백하, 우당 가문 독립투사들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여야 합니다.
문=이런 분들, 이런 가문들을 보면 부끄러워집니다. 일가족이 움직였다면 그만큼 위험했을텐데요?
답=그렇습니다. 도중에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전설계획에 일제에 의해 탐지되어 관련자들이 체포됐다는 암울한 소식이 들였는데요. 주변에서 “이거 만주 망명 계획,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석주 선생은 “이미 떠난 길인데 다소 위험하다가 중지할 수는 없다”고 갈 길을 재촉했다고 합니다.
문=망명 떠난 때가 겨울철인데 고초가 심했겠습니다?
답=그랬답니다. 서울에서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에 도착해서 늦게 도착한 집 식구들하고 합류해서 1월27일 압록강을 건넜는데요. 살을 에는 듯한 바람 속에서 고개를 돌려 돌아올 기약없는 고국땅을 향해 ‘거국음(去國吟)’ 시 한 수를 읊어서 망명의 변을 밝혔다고 합니다.
문=거국음이요? 어떤 내용의 시인가요?
답=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미 내 밭과 집을 빼앗겼는데, (일제가) 다시 내 처자를 노리고 있구나. 차라리 이 머리를 잘라도, 이 무릎은 결코 꿇지 않으리라.”
문=머리를 잘라도 무릎은 결코 꿇지 않겠다는 시네요. 눈물겨운 시네요.
답=그렇습니다. 마차 두 대에 나눠 탄 식구들이 담요와 솜이불을 뒤집어썼다 해도 만주의 칼바람이 얼마나 매서웠을까요. 일본경찰이 거의 100보 마다 초소를 설치하고 검문하고 있었고, “외지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이 퍼져서 지나던 마을이 통제되는 등의 우여곡절로 망명길이 한없이 지체됐대요. 석주 선생은 이때의 심경을 “내가 쉰이 넘도록 너른 집 깊은 처마의 훌륭한 거처에 살다가 하루아침에 집을 나서는 문 듯 집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고 보니 사람의 한 생애가 허깨비임을 참으로 깨달았다”고 당시의 일기(<서사록>)에 적었답니다.
임청각 복원의 마스터플랜. 280억원을 들여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단다.
문=보통 사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길을 선택하신 거죠?
답=생각해보면 임청각은 99칸의 고성 이씨 대종택이었고, 석주 선생은 고성 이씨의 종손이었으니까요.
여하간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인 서간도 유하현에 정착한 선생 일가는 역시 일가족이 망명한 김대락, 이회영 가문과 이동녕 선생(1840~1962)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했습니다.
문=경학사가 어떤 단체였어요?
답=아까 잠깐 말씀드렸지만 국내의 비밀 항일운동단체인 신민회 간부들이 1909년 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세웠거든요. 그 기지가 바로 만주 봉천성 유하현이었습니다. 거기서 일가족이 단체 망명한 이상룡 김대락 이회영 가문 등이 정착해서 만든 독립운동단체입니다. 경학사는 민단적 자치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요.
문=그러니까 만주에 한국인들의 자치마을을 만들어서 농사도 짓고 군대도 양성해서 독립투쟁을 벌였다는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마을을 조성해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해서 구국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하기로 한 거죠. 그러나 두 해에 걸친 흉작으로 재정난이 겹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경학사의 사무는 폐지하고 신흥학교만을 남겨 교육사업에 전념하게 되죠. 신흥학교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며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습니다.
문=물설고 낯선 곳에서 엄청 고생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이상룡 선생이 사장이 되고, 이회영 선생이 내무부장이 되어 한인사회를 이끌었는데요. 불철주야 산비탈에 조성된 콩밭에 김을 매던 이상룡 선생을 보고 사람들이 “사장 선생이 손수 호미로 밭에 나가 김을 매는데 우리가 어찌 놀 수 있겠냐”고 힘을 냈다고 하고요. 철로 옆에 살던 이상룡 선생의 집은 여름철이면 비가 새어 앉을 자리도 없었는데 어르신이 편히 주무시라고 선생의 아들과 손자가 우산을 받쳐들고 밤을 밝히기도 했답니다.
문=이상룡 선생이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다고 했죠?
답=그렇습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상룡 선생은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구요. 1925년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습니다. 물론 임시정부내에서 사상적인 대립과 파쟁이 일어나서 정치적 경륜을발휘할 수 없게 되자 사임했구요. 이후에도 선생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932년 서거했습니다.
문=나라가 독립되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했네요?
답=임시정부 내 여러 세력들의 갈등 이념투쟁이 이상룡 선생을 피곤하게 했나봅니다.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선생의 호소 또한 메아리없는 외침이 됐고요. 더욱이 만주에서 동고동락하던 대한독립군단 동지들이 마적들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에 곡기를 끊고 한탄하다가 기력을 잃고 세상을 떠났답니다.
선생의 유언은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는 절대 내 해골을 운반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문=선생 뿐 아니라 그 분의 자손까지도 독립운동가였다면서요?
답=그렇습니다. 선생을 포함해서 11명이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이죠. 그럴만도 합니다. 선생은 외아들(준형·1875~1942)이 일제 관헌한테 붙잡혔다가 풀려나온 뒤 의기소침했을 때 “콜럼버스가 작은 배를 타고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건너지 않았다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다”고 격려했답니다.
또 나중에 독립투쟁 하던 청년들이 선생의 손자(병화·1906~1952)를 대표로 선출하려 했을 때 손자가 “난 타국에서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고 있으니 맡을 수 없다”고 고사했다는 소식에 “무슨 소리야. 나라를 되찾겠다는 사람이 부모 생각하는 거냐. 내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는 구국에 헌신하라”고 혼냈답니다.
문=뭐 그런 가문이니 독립투사가 배출될 수밖에 없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선생의 외아들인 준형은 일제강점기에 변절을 요구받자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더 보탤 뿐”이라고 한 뒤 1942년 9월에 자결 순국했답니다.
문=들을수록 가슴이 숙연해지는 가문이네요?
답=지난 2019년 4월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독일 경매에 출품된 ‘척암선생 문집’이라는 책을 찍어낸 목판(책판)을 구매 환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척암이라는 분인 항일 의병장 김도화 선생(1825~1912)인데요,
이 분이 유명한 것이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라고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린 분입니다. 이 분은 “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고,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닌데 그런데 임금인 당신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서로 매매하듯 하느냐”고 질타했습니다.
문=나라와 백성을 빼앗긴 황제는 더 이상 임금도 아니고,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한거네요.
답=당시 김도화 선생의 춘추가 86살이었답니다. 자택의 문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대반대지가·합방을 절대 반대하는 집)’이라고 써붙였답니다. 그런데 이 척암 김도화 선생은 바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왕고모부였다고 합니다.
문=왕고모부면 촌수가 어떻게 되나요?
답=석주 이상룡 선생 할아버지의 누나의 남편입니다.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죠. 생각할수록 대단한 가문, 집안인 것 같아요.
문=그렇다면 왜 이상룡 선생 집에 중앙선 철도가 관통하게 된거죠?
답=일제로서는 일가족이 망명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 얼마나 눈엣가시였겠습니까. 1941년 중앙선 철로를 개통하면서 99칸 되는 임청각의 앞마당을 관통시켜 버렸답니다.
원래는 지금 35번 국도가 지나는 안동과 영주 구간처럼 직선으로 중앙선 뚫으면 되는건데 일제가 설계를 바꿔서 안동에서 임청각 마당을 통해서 옹천역까지 돌아서 우회시켰다는데요. 그 과정에서 세 개의 터널을 뚫었다네요. 이 때문에 기차가 10km를 돌아서 가게됐다네요?
문=믿어지지 않네요. 아무리 석주 선생 일가가 밉다해도 일제가 그런 출혈을 가뭇하면서까지 철로를 돌렸을까요?
답=아니 99칸이던 임청각의 반이 뚝 잘려나갔는데요. 그리고 당시 석주 선생의 아드님이신 이준형 선생이 자결 순국하기 전에 철도 공사소식을 듣고는 “압록강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애끊는 편지를 보냈답니다.
문=그렇게 철로로 반토막난 임청각이 제대로 복원되는 건가요?
답=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철길 앞을 가로막은 방음벽을 부수는 퍼포먼스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2025년까지 280억원을 들여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정비한데요.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문으로선 1945년이 아니라 그보다 75년이 지난 지금이 되어서야 일제로부터 해방된 셈이죠.
문=그러네요. 제대로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답=뒤늦었지만 복원하기로 한 것은 다행이구요.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제가 어제 방송 때문에 석주 이상룡 선생의 후손 되는 분과 통화를 해서 그 후손들의 삶을 여쭤봤는데요.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문=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대부분 불우하게 산다고 했죠?
답=그렇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속적으로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문 이야기를 했는데요.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한다는 거죠. 제가 들으니 이상룡 선생의 손자(병화)는 6남 1녀를 두셨는데, 귀국 후에 너무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고, 5째 증손자와 여섯째 증손녀는 해방 후에 대구의 고아원에서 생활했답니다. 뭐 다른 증손자들도 제대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네요.
문=재산을 처분해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했으니 뭐?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답=그렇습니다. 학창시절 학비를 제때 내지 못했던 석주 선생의 증손자가 그 당시 돈이 없어 못 낸 중학교 학비를 몇 년 전에서야 갚아주었다고 하네요. 늘 마음 속에 ‘갚아아지 갚아야지’ 하고 벼르다가 이제와서 갚았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갚은 게 없는게 이분들은 학비 한번 못냈다고 수 십 년이 지난 뒤에 냈다는 겁니다.
문=이런 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요?
답=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1973년 이상룡 선생의 증손인 이범증씨가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임청각 서적 395종(1309책)을 기증했는데요. 김상협 고려대 총장이 4000만원을 보상하려고 했는데요. 이범증씨는 단칸방에 사는 어려운 경제형편 속에서도 “받을 수 없다”면서 한마디 했답니다.
“조상의 정신적인 유산을 팔아먹을 수 없습니다.”라고요.
지금이라도 대통령 말처럼 국가에 헌신하면 3대까지 대접받는다는 인식을 심어놓았으면 합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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