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서울의 역사를 두고 정도 600년이라는 말을 들으셨죠. 조선 개국과 함께 서울을 도읍지로 삼은지 600여 년이 지났다는 얘기죠. 그러나 실은 ‘정도(定都) 2000년’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기환의 팟캐스트 ‘흔적의 역사 322회’에서는 왜 서울을 두고 ‘정도 600년’이 아니라 ‘정도 2000년’이라 해도 되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풍납토성 때문에 방향을 틀어 설계된 올림픽대교.|YTN '人터view'캡처
문=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정도 600년 정도 600년 소리를 들어왔지 않습니까?
답=그렇죠. 조선이 개국한 게 1392년이고, 한양을 도읍지로 삼은게 1394~5년이니까 ‘정도 620여년’이 되겠네요. 그러나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도읍지라고 한다면 이젠 ‘정도 2000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죠. 풍납토성이 기원전 18년부터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475년까지 493년 동안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으로 각광 받고 있으니까요.
문=풍납토성이 백제의 도읍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얼마 안됐죠?
답=1996년 12월부터 이곳에서 한성백제 시대의 유물과 유구가 잇달아 발견된 순간부터니까요. 제가 이번 주 주제로 ‘풍납토성’을 정한 이유가 있는데요. 얼마 전에 올해의 발굴성과가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풍납토성을 쌓을 때 속에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속에 나무기둥을 무수히 박았고, 토성도 한번에 쌓은게 아니라 몇 번 증축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이 올해 발굴성과였어요.
올림픽대교는 방향을 틀었지만 풍납토성 내부에는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고 말았다.
문=대중들에게는 좀 어려운 뉴스네요?
답=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뉴스를 계기로 해서 자칫 잃어버릴 뻔한 한성백제 493년의 도읍지 흔적이 극적으로 발견되었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996년 12월 말에 발견됐으니까 24년 전 꼭 이맘때네요.
왜 88올림픽을 기념해서 건설된 다리 있죠. 1985년부터 89년까지 건설한 올림픽대교죠. 그런데 그 다리를 보면 남쪽에서 볼 때 왼쪽으로 방향이 틀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가 모르시죠?
풍납토성 모형도. 둘레가 3.5km이고 성벽높이는 11~15m, 폭은 40m가 넘는다.
문=글쎄요?
답=원래는 당연히 남북 직선으로 건설하려 했는데 그 경우 한강 남쪽에 존재하고 있던 풍납토성을 100m와 50m 가량 관통해서 올림픽대로와 강동대로로 연결하게 설계되어 있었어요. 풍납토성 서벽에 올림픽대로 진출입램프가 설치되면 서벽은 100m 가량 유실되고, 동벽은 50m 폭을 절단해서 올림픽공원 북단을 지나 강동대로와 연결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방향이 틀어지게 만든거죠.
문=토성이 잘리는 것을 막았으니까 천만다행이네요?
답=하지만 알고보면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겁니다. 풍납토성은 1963년 사적 11호로 지정됐는데요. 당시 사적지정할 때 잔존하고 있는 토성 벽만 대상으로 삼았고, 그 외는 지정대상에서 제외되었거든요. 웃기는 일 아닙니까. 성벽 그 자체만 지정하고 성 안에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을 백제 사람들의 건축물이나 생활의 흔적은 제외시켰으니까요.
1920년대 풍납토성 모습. 해자의 흔적이 보인다.
문=그러게요 완전히 껍데기만 지정한 꼴이네요.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답=한심한 일이죠. 이렇게 된 데는 학계의 책임도 커요. 왜냐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런 견해가 있었다 해도 말도 안된다고 무시해버린거죠.
사실 이 풍납토성이 중요한 성이라는 것이 알려진 건 1925년 여름 일어난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였어요. 엄청난 홍수 때문에 한강이 범람했고, 강변에 접해있는 풍납토성의 서북쪽 장벽이 쓸려나가면서 토성 내부의 일부가 노출되기 시작한거죠.
문=그럼 유물도 휩쓸려 나왔겠네요?
답=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이 무렵 토성 남단 모래 중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2점의 청동제 초두(鐎斗·술을 데워 잔에 따는 일종의 제사용기)를 비롯하여 금제귀고리 등을 구입해 소장했습니다. 당시 일본학자인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 토성 안에 살던 어느 노파에게 유리옥 십 수 개를 샀다고 하는데요. 아유카이는 이러한 백제시기 유물을 증거로 풍납토성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풍납토성 유구현장. 한성백제인의 삶이 녹아있었다.
문=하남위례성이요?
답=예. 백제 시조 온조왕(재위 기원전 18~기원후 28)이 “기원전 4년(온조왕 15년) 한강 이남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건설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는 바로 그 도성을 일컫는 거죠. 그 도성을 하남위례성이라 합니다. 여담이지만 공주박물관인가 어딘가 가보니까 전시관 벽에 백제의 정신이라면서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크게 써놓았는데 관람객 중 어떤 분이 동료들한테 “저 말은 유홍준 선생이 한 말씀”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절대 아닙니다. 온조왕 때 하남위례성, 즉 풍납토성을 건설할 때의 그 왕궁을 ‘검이불루 화이불치’였다는 뜻이지 절대 유홍준 교수의 말이 아니라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어요.
문=그럼, 일제강점기에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도읍으로 보기 시작한거네요?
답=그렇지않아도 1964년 한국 고고학계의 태두라는 김원룡 교수(1922~1993)가 서울대 고고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풍납토성을 찾아 야외실습용 시굴조사를 벌여서 한성기 백제시대 토기 조각들을 여러편 찾아냈습니다. 그런 뒤에 “이 풍납토성이 기원후 1세기부터 한성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세기 동안 사용한 중요한 성”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김교수는 그때도 ‘풍납토성=하남위례성’이라고 딱 부러진 결론을 내지 않았는데요.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그럼에도 ‘한성백제 시기의 중요한 성’이라는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의 주장까지도 철저히 배격했어요.
풍납토성 성벽 발굴현장. 성 축조에 연인원 450만명이 동원됐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문=아니 왜요? 고고학적으로 출토된 유물 갖고 판단한 건데?
답=왜냐. 역사학계에서는요. 백제 온조왕이 기원 전 후에 한강변에 둘레 3.5km가 되는 풍납토성을 쌓을 힘이 없다고 여긴거죠. 그러니까 그런 기록을 담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백제가 명실공히 강력한 왕국으로 변모해 고구려·신라와 맞설 수 있었던 시기는 3세기 후반대인 고이왕 때가 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라 믿은겁니다.
이것이 당시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서울대 교수(1896~1989) 등의 주장인데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이 됐어요. 이병도 교수는 풍납토성은 3세기 말 백제의 진짜 도성을 수비하기 위해 쌓은 방어성 정도로 낮춰본 겁니다.
문=아니 김원룡 교수나 이병도 교수나 다 내로라는 학자들인데요?
답=당시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고고학계가 일제강점기 이후 완전히 뿌리를 내린 역사학계에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고학자인 김원룡 교수는 “풍납토성은 이병도 교수의 주장대로 한성백제 도읍을 지키는 방어성인 동시에 평시에는 많은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반민반군적인 읍성(半民半軍的 邑城)’”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공사지연 등에 불만을 품은 재개발 조합측에서 유구를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렸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문=고고학이 역사학한테 참패한 거네요? 그러면 한성백제의 도성은 풍납토성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라는 겁니까?
답=몽촌토성 아시죠? 올림픽 공원에 있는…. 1980년대 중반부터 풍납토성 인근의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하남위례성)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 체육시설 및 공원 조성지로 결정되어 1983년부터 서울대 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이 이뤄졌는데요. 이곳에서 3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건물터, 주거터, 저장시설, 방어시설인 목책 흔적 뿐 아니라 백제시대 유물을 다량 수습했어요. 그래서 아! 몽촌토성이 기원후 3세기 중반에서 한성백제가 패망한 475년(개로왕 221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존속한 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된거죠.
문=역사학계에서 ‘야 그것 봐라’ 했겠네요?
답=그렇죠. 몽촌토성의 발굴성과에서 백제가 한강변에서 3세기 후반(고이왕대)에 들어서야 국가의 기반을 잡았다는 기존 역사학계의 학설과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었으니까요.
1963년 풍납토성을 사적으로 지정할 때 성벽 그 자체만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성벽 안팎은 난개발됐다.
문=그래서 풍납토성은 다시 음지로 들어간 건가요?
답=꼭 두더지 게임처럼 고개를 들면 방망이로 쳐서 들어가곤 한거죠.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겨우 성벽은 사적으로 지정됐지만 성 안팎은 주택재개발이 이뤄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그랬죠. 아파트 공사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가 있었는데요. 어느 대학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이곳에는 아무런 유구가 없다고 큰소리치면서 허용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문=참 기막힌 일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한성백제 흔적을 찾아낸 건가요?
답=아까 올림픽대교가 방향이 틀어져서 건설됐다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결정하게 만든 이가 있는데요. 바로 당시 이형구 선문대 교수였어요. 이 분은 1970~80년대부터 한강 이남 백제 유적을 지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분인데요.
문=풍납토성 하면 떠오르는 분이죠?
답=그렇습니다. 혹시 석촌동 고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석촌이라는 동네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동네에는 일제강점기까지 293기나 되는 돌로 만든 고분이 있었거든요. 특히 석촌동 3호분은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규모가 큰 고분인데요. 1981년 이 3호분과 4호분 사이를 관통하는 폭 35m의 도로 공사가 강행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83년 봄부터 도로 확장 공사가 시행되어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는 3호분과 4호분 일부가 포크레인 삽날에 완전히 날라가서 한성백제 시대 옹관하고 인골들이 흩어졌답니다. 그 현장을 이형구 교수사 목격하게 된거죠.
풍납토성 우물터. 백제인의 생활상이 그대로 보인다.
문=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그걸 본 이 교수가 KBS를 비롯한 각 언론에 제보하고 각계에 “그럴 수 없다”고 탄원서를 내어 강력하게 촉구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노력이 통해서 석촌동 3호분과 4호분을 관통하도록 설계됐던 도로 계획이 바뀝니다. 지하도로로 설계가 변경된 거죠. 그로써 석촌동 고분을 지켜냈거든요. 이때 강남지역 백제 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까 언급한 올림픽대교 또한 방향을 틀게 만든겁니다. 심의기구인 당시 문화재위원회 역시 큰 일을 한 거죠.
문=대단한 일을 했네요.
답=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죠. 이형구 교수는 가뜩이나 푸대접을 받고 있던 풍납토성 일대가 무분별한 개발붐에 나날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가 사고를 저지릅니다. 1996년 12월 이맘 때인데요. 높은 방호벽을 치고 아파트 터파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풍납토성 내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하게 됩니다.
문=공사장 방호벽은 높이가 엄청 높은데 잠입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그랬을까요? 뭔가 확신이 있었나보죠?
1983년 5월 석촌동 고분 사이를 뚫는 도로확장공사 때 포클레인 삽날로 잘린 단면에서 백제시대 인골이 드러났다.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원교수가 그 참혹한 광경을 발견했다.|이형구 교수 제공
답=그럼요. 땅을 팠다면 뭔가 유물의 흔적이 보일 거라고 확신했죠. 몰래 들어가서 깊숙이 파놓은 땅의 지하 벽면을 살펴보니 백제토기 편들이 금맥처럼 무수히 박혀 있었다는 겁니다.
문=난리가 났겠네요?
답=그럼요. 1997년 새해 벽두에 언론에 터지고 큰 소동이 벌어졌죠. 한성백제가 2000년만에 현현했다 뭐 이런 식으로...
언론의 엄청난 관심 속에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대박물관·한신대 박물관 등이 참여하는 공동 긴급구제발굴이 이뤄졌습니다.
문=발굴성과가 어땠나요?
답=조사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하 2.5~4m에 걸쳐 유물포함층이 광범위하게 보였구요. 기원 전후에 조성된 방어시설 하고,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 폐기된 유구, 토기 가마 흔적 등이 무수하게 발견되었습니다. 왕궁터로 추정된 경당연립주택 지구에서는 1,000여 평의 조사면적에서 집자리와 제사 관련 대형 건물터를 비롯하여 전돌·와당·초대형 항아리·중국제 도자기·중국동전인 오수전·‘대부(大夫)’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 파편 등 500상자 분량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17년 <조선고적조사보고>에 실린 석촌리 1분(석촌동 3호분)의 사진. 초가집 뒤로 3호분이 보인다. 5~7단으로 쌓아올린 적석총으로 보이며 높이는 6m 정도로 추정된다. 이 3호분의 주인공은 근초고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문=1000평이라면 그리 크지 않은 면적인데 거기서 500상자 분량의 유물이 나왔다면 대단하네요?
답=그렇습니다. 특히 출토된 유물 중에 말머리 뼈가 보이는데, 이것은 국가 주도의 제사행위가 있었음을 암시해주며 중국제 토기류는 활발한 대외교섭의 증거라 합니다. 또한 발굴결과 토성벽의 규모도 엄청났다는 증거들이 보였는데요.
문=풍납토성은 판축기법으로 쌓았다고 유명하잖아요?
답=판축기법은 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서 단단하게 다져 성벽 등을 쌓는 기법입니다. 이렇게 흙을 다져 쌓으면 돌처럼 굳어집니다, 무엇보다 성벽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나무를 박고 흙속에 나뭇잎과 같은 식물유기체를 섞어 다짐으로써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답니다.
문=지금 남아있는 성벽하고, 막상 발굴해서 추정하는 성벽 높이 하고는 규모가 다를텐데요?
답=예. 처음엔 성벽 높이가 한 6~7m 폭은 한 10m 정도 될까 예상했다가 막상 발굴해보니 폭 43m 이상에 현존 높이 11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어요. 추정 최대높이는 15m 정도로 추정됐습니다.
문=한번에 그런 대규모 성을 쌓진 않았겠죠.
답=여러번에 걸쳐 쌓았겠죠. <삼국사기>는 “기원후 23년(온조왕 41년) 한강 동북쪽의 여러 고을의 15세 이상 남성들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했다”고 기록합니다. 지금까지의 발굴결과는 성을 처음 쌓은 때는 확언할 수 없지만 기원후 3세기 중반 정도까지 몇차례에 걸쳐 증축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문=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었겠네요?
답=그렇지 않아도 어떤 연구자(심정보 명예교수)가 얼마나 성 축조에 동원됐을까하고 계산해봤는데요. 연인원 약 400만명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더군요.
문=어떻게 계산한 거죠?
답=길이 3.5㎞, 기저부 폭 43m, 높이 11m에 대한 흙의 양은 222만 톤이라는 겁니다. 이를 1.5톤 트럭으로 운반한다면 14만대 분량이라는 겁니다. 당시엔 트럭이 아니라 지게로 저 날랐을 거 아닙니까. 이상은 전문적인 계산이어서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전체 축성에 동원된 연인원은 445만이 넘는다는 계산입니다.
2년 여의 노력 끝에 석촌동 고분군이 복원되어 보존이 성사됐다. 3~4분 사이를 관통했던 도로(백제고분로)는 지하차도로 바뀌었다. 석촌동을 비롯한 한성백제 유적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이형구 교수 제공
문=아니 당시 백제 인구가 얼만데 그런 엄청난 인원이 투입되죠?
답=<삼국지> ‘동이전 한조’를 보면 “큰 나라는 1만 여 가구”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큰 나라의 전체인구가 5만명 정도라면 그 5만 명 전체가 공역에 참여한다 해도 90일이 걸리는 대역사였겠죠. 풍납토성 축조는 그야말로 한성백제가 국운을 건 대역사였고, 달리 말하면 왕권과 같은 강력한 절대 권력이 없이는 둘레 3.5㎞에 이르는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문=그렇다면 3세기 중후반이나 되어야 백제는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다는 기존 학설은 수정되어야 하나요?
답=글쎄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왜 믿을 수 없다는 건지 전 과문한 탓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풍납토성이 본격 발굴됨으로써 이제 이 풍납토성이 한성 백제의 도읍지라는 것은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백제 678년 역사 중 한성백제의 역사가 493년으로 가장 길어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백제라 하면 고작 63년간 도읍지였던 웅진백제(475~538)와 122년의 사비백제(538~660)를 주로 이야기해왔죠. 그러나 백제의 최전성기는 사실 한성기 백제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문=듣고보니 아파트 공사장에 잠입해서 백제 문화층을 발견한 학자가 없었다면 한성기 백제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덕분에 풍납토성 내부 지역에 대한 보존결정이 내려져서 난개발이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물론 있죠. 그때는 이미 일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사전 발굴한 조사단이 제대로 조사했다면 더 많은 백제 유구와 유물들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안타깝죠.
어떤 학자들은 이형구 교수의 노력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폄훼하고 무시하다가 백제 유구 유물이 계속 쏟아지니까 뒤늦게 한성백제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떠들고 다녔죠.
온조는 한강 이남의 드넓은 평원을 천혜의 도읍으로 정했다. ①풍납토성과 ②몽촌토성에 정궁과 별궁을 조성했고, 방위성인 ③삼성동토성(사성)과 ④아차산성(아단성 혹은 아차성)을 쌓았으며 ⑤석촌동과 ⑥방이동, ⑦가락동에 왕과 왕족, 귀족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주변엔 ⑧미사리 유적과 ⑨이성산성이 보이고, 도성을 품에 안은 형국인 ⑩남한산이 버티고 있다.|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제공
문=주민들 고충도 컸겠네요?
답=그렇죠. 사실 백제 문화층을 발견한 이교수는 곤욕도 많이 치렀습니다. 주민들하고 업자들한테 멱살도 잡히고 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게 상대적으로 풍납토성 내부의 현실이 낙후되어 있어서 빨리 개발해야 하는데 보존결정이 내리지니까 답답해진거죠. 한번은 발굴하고 있는 현장을 포크레인으로 일부 밀어버린 사건이 터지기도 했어요. 당시 ‘백제가 테러 당했다’는 제목의 보도가 이어지고 난리가 났죠.
문=있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진거네요?
답=물론 그랬지만 당시에는 토지보상에 대한 원칙도 없는데다 사업을 시행하는 주민들이 내야하는 발굴비는 물론이고, 기존의 사업비까지 눈덩이처럼 늘어나게 되니까 재건축 사업을 담당한 조합장의 지시로 ‘노출시켜둔 백제 유구’를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엄청난 사건이 역설적으로 풍납토성 내부의 보존이 가닥을 잡는 계기를 마련했어요.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재임 1998~2003)이 “풍납토성이 역사적인 백제의 유적이라면 후손들에게 후회 없도록 처리하라”고 당부하면서 풍납토성 내부의 보존이 결정된거죠.
문=제대로 보존히려면 주민들로부터 토지를 사들여야 할 것 아닙니까?
답=송파구청 측에 알아보니까 지금까지 주민들의 토지를 구입하는 비용으로 1조300억원이 투입되었데요. 사야할 토지면적의 70%를 사들였답니다. 앞으로 5000억원 가량 투입하면 토지매입이 끝나는거죠. 돌이켜놓고 보면 1960년대 김원룡 교수가 심상치않은 유적이다 라고 했을 때 보존했으면 보상비용도 들지 않고 좋았겠지만 뭐 지나간 이야기 할 필요는 없죠.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토대로 그린 백제 최전성기의 추정 강역도.
문=조사하고 보존하는 건 제대로 이뤄지고 있나요?
답=올해 발굴한 것처럼 성벽 발굴을 계속 할 거구요. 왕궁터로 알려진 경당지구는 보상이 끝나는대로 본격발굴할 예정이라네요. 그리고 서쪽 성벽 부근에 유구보호각을 설치해서 발굴장면을 주민들이나 관람객들이 볼 수 있게 만든다고 하고 현장에 박물관도 조성한다고 합니다.
문=한 사람의 열정이 일으킨 나비효과가 엄청나군요?
답=그렇습니다. 풍납토성 보존은 물론이고, 석촌동 고분군을 지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형구 교수라는 분이야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으로만 학자입네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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