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로 복원한 모습을 공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의 4대문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 등이다. 이중 철거된지 104년이 지나도록 복원되지 않은 유일한 문이 바로 돈의문이다. 원래는 원상회복 방침이었지만 주변토지 보상과 교통난 해소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 증강 및 가상현실로나마 아쉬운대로 ‘상상속의 돈의문’이라도 감상할 수밖에 없다.
돈의문 철거소식을 의인화해서 알린 매일신보 1915년 3월4일자. ‘나는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으로 철거의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돈의문이 철거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이었다. 그해 3월4일자 매일신보는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돈의문(서대문)의 철거를 의인화해서 ‘영원히 사라질 돈의문(서대문)’을 안타까워했다.
“조국에 변란이 일어나면 무능한 나도 국가의 간성(干城) 노릇을 해서 성밑에 몰려드는 적군의 탄환과 화살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지엄하게 한성의 서편을 지켰는데 다만 경매 몇푼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답지않는 기사처럼 자못 안타까운 심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 하다.
일제의 문화재정책을 짐작할 수 있는 1938년 11월26일자 기사. 새로이 101종의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들’이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매일신보는 이내 체념조로 바뀐다.
“(슬프지만) 도량 넓게 생각하면 내 몸 헐려나가는 것이 기쁘기 한량없다”는 것이다.
“대포 한방이면 무너질 정도로 무기가 발달했고, 이제는 번화한 경성(서울)의 교통에만 방해가 된다니 큰 길을 만들려고 헌다 하니…공사를 위해 몸을 버리니 서대문의 면목으로 즐겁습니다.”
250엔에 경매된 돈의문의 완전철거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는 “6월10일 (마지막 부재까지 철거되는 순간) 인부가 위에서 부재를 떨어뜨릴 때 ‘슬프다!’하고 소리치듯 ‘쿠아앙!’하고 땅이 울렸고…서대문은 영구의 그림자가 사라졌다”고 돈의문 최후의 순간을 전한다. 그러나 신문은 이제 “경희궁 흥화문에서 서대문밖까지 평탄한 큰 길이 조성되어…두어달 지나면 그 근처는 면목이 일신된다”고 덧붙인다.
1934년 8월27일 조선총독부 <관보>. 첫번째 문화재 지정이었는데, 이때 보물 1,2호에 경성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을 낙점했다.
요컨대 500년 풍상을 견딘 돈의문의 철거를 안타까와 하면서도 원활한 교통소통을 위한 대로건설을 위해서는 ‘걸림돌만 되던’ 문을 허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매일신보 기사 중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서대문(돈의문)이 동대문(흥인지문)이나 남대문(숭례문) 같이 잘 생기지도 못하기 때문에 옆으로 길을 돌려 보전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 할 수 없이 철거해야 한다”면서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지독한 자기비하였다. 돈의문은 사실 매일신보 기사처럼 ‘교통에 방해가 되었고, 게다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처럼 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철거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왜냐. 일제는 숭례문과 흥인지문 역시 예외없이 철거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왕조 왕도인 서울의 정문이던 숭례문은 철거 0순위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을 보호국을 삼은 일제는 서울을 마치 제나라 땅처럼 취급한다. 즉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단체인 일본거류민회가 용산과 그 인근지역에 40만~50만명을 수용하는 ‘도시개조’를 계획한 것이다. 서울 도심에 도로를 개설하고 특히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한 왜성대와 욱정(예장동·회현동 일대) 등 남산 북쪽을 공원화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계획에 걸림돌이 된 것이 숭례문이었다. 가뜩이나 일제는 숭례문 같은 조선의 기념물들을 백안시하고 있었다. 이런 기념물에 흔히 ‘왜구 정벌’ ‘왜적 섬멸’의 반일자료가 새겨져 있었기에 일선동화를 위해서는 한시바삐 제거해야 할 건축물로 여겼다.
일제는 고적 1호에 경주 포석정터를 선정했다.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술판을 벌였던 망국의 역사를 영영 들추려 한 것일까. 그러나 요즘엔 포석정이 신라시대 국가 제사를 지낸 사당이며, 927년 겨울 11월 경애왕은 후백제의 침략으로 누란에 빠진 신라 1000년 사직을 지키기 위해 제사를 지낸 뒤 음복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당연히 숭례문은 ‘철거 0순위’가 되었고,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한성부(서울시)의 예산부족을 들어 “숭례문을 포격, 즉 대포 한방으로 철거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 몰지각한 계획에 제동을 건 자는 당시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였다. 대한제국의 문화유산이 에뼈서가 아니었다. 나카이는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이라면서 “조선에서 (임진왜란 승전기념물은) 이 숭레문을 포함해서 2~3곳밖에 없으니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나카이는 대안으로 숭례문의 좌우 성벽을 헐고 도로를 내자는 계획을 제시했다. 지금 숭레문이 도로에 둘러싸인 섬처럼 고립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세가와는 ‘임진왜란 전승기념물’이라는 말에 ‘혹’했다. 철거 위기에 놓인 숭례문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흥인지문 역시 같은 논리로 살아남았다. 가토와 함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였다.
1927년에 간행된 서울여행 가이드북인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 책자는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당시 간행물을 보면 숭례문·흥인지문 뿐 아니라 전주 풍남문은 “(정유재란 때)시마즈 유시히로(島津義弘)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돌파한 곳”으로, 조령 제1관문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거했고, 아군(일본군)이 입성한 성문”으로 각각 설명했다. 또한 현무문·칠성문·보통문·모란대·을밀대·만수대 등 평양의 많은 성문과 누각 역시 청·일전쟁(1894~95년) 당시 일본군의 승전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잘 보존됐다. 예컨대 현무문은 “청·일전쟁 때 일등졸인 하라다 주키치(原田重吉)가 비같은 탄환 아래 돌진해서 문을 연 곳”이고, 보통문 역시 “청·일전쟁 때 노쓰 미치쓰라(野津道貫)의 사단 본대가 진격해서 평양을 점유한 곳”이라는 이유로 대접 받았다. 연광정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이 회담했던 곳”이어서 보존됐다.
숭례문과 흥인지문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숭례문 및 흥인지문을 문화재적, 혹은 미술사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승전문’이었기에 보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전승기록과 아무런 연관이 없던 돈의문 등은 교통에도 걸림돌이고 조선인의 배일감정을 부추길 뿐이라는 이유로 철거됐던 것이다.
1904년 무렵의 숭례문 모습. 우마차가 지나가고 있다. 일제는 용산 주변에 신도시 건설계획을 세우면서 교통소통에 불편을 주는 숭례문을 철거할 방침이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비용절감을 위해 포격으로 단 한방에 숭례문을 철거하자고 주장했다.
그런 조선총독부는 1934년 8월 27일 식민지 조선의 문화유산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1차 지정문화재 목록을 <관보>에 제시한다. <관보>는 이때 지정번호와 문화재의 명칭, 소재지, 소재지역, 토지소유자 순으로 이날 지정된 문화재를 표로 정리해놓았다. 이때 보물 1호에 경성 남대문, 보물 2호에 경성 동대문…, 고적 1호에 경주 포석정터 등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 등 모두 169건이 등재됐다.
가만 보면 국보는 단 한 것도 없다. 무슨 이유일까. ‘내선일체’가 아닌가. 그러니까 일본의 국보가 바로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순수 일본의 것만이 국보이고,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는 보물로 만족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보물로 지정하면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했던 ‘승전의 문(남대문과 동대문)’을 굳이 보물 1·2호로 등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또하나 있다. 고적 1호가 된 경주 포석정이다. 경주 포석정은 알다시피 ‘망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유적이다. 927년(경애왕 4년) 후백제군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술판을 벌이고 있다가 1000년 사직을 나락으로 빠뜨린 부끄러운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요즘 다른 해석이 나온다.
증강현실로 복원된 돈의문. 서울 중구 정동사거리에서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돈의문 AR’을 실행하거나 돈의문박물관 앞 키오스크를 이용해 감상할 수 있다. |서울시 제공
그래, 아무리 정신나간 왕이라지만 한겨울(음력 11월)에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경애왕은 두 달 전인 9월(음력)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하자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구원병 1만 명을 냈는데, 미처 경주에 도달하기도 전에 견훤군이 침략한 것이다. 따라서 요즘엔 경애왕이 그날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낸 뒤 포석정에서 음복하다가 그만 변을 당한 것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포석정 인근에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와 혼인식 같은 귀족들의 길례가 열렸던 포석사가 존재했다는 <화랑세기> 기록이 있다.
여하간에 일제가 임진왜란 때 조선점령의 상징문인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보물 1·2호로, 그리고 망국의 상징장소인 포석정터를 서둘러 정비한 다음 굳이 고적 1호로 선정한 것은 무슨 뜻일까. 조선인들은 ‘나라가 망하는 해도 술판을 벌이는 무지몽매한 백성들이고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되는 사람들’로 낙인 찍은 것이다. 그 방증이 있다. 1938년 11월26일자 동아일보는 “고적보존회(요즘의 문화재위원회)가 4회 총회에서는 101종의 문화재를 새로 지정했다”면서 지정된 문화재의 성격을 분명히 밝힌다.
“금번 지정되는 문화재는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는 과연 무엇인가. 고적의 경우 ‘창령 화왕산성·창녕 목마산성·김해 분산성·함안 성산산성·김해 전 김수로왕릉·김해 전 수로왕비릉·김해 삼산리고분·고령 지산동고분·창녕고분군 등’을 등재했다. 그러면서 이들 문화재의 등록사유를 ‘임나(任那)관계 고적’이라고 기재했다.
예의 그 지긋지긋한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깊은 유적들이라고 해서 지정해놓은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기원후 4세기부터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건설해놓고 6세기 중반까지 다스렸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또 이때 경남 양산 물금의 증산성도 지정됐는데, 이에는 ‘임진왜란 때의 고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증산성은 임진왜란 때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쌓았다고 해서 고적의 반열에 올랐다. 모두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뒷받침할만하다’는 이유로 줄줄이 지정됐다. 우리 역사의 타율성·정체성 등을 강조한 것이다.
돈의문의 해체와 가상 복원 소식을 단순하게 넘길게 아니다. 이번을 계기로 돈의문터나 숭례문, 흥인지문을 지날 때 불과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역사를 한번 쯤 반추하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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