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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관청 노비에서 세종의 후궁으로 깜짝 출세한 여인…왕후보다 더 행복했다

역사는 히스토리, 히스토리는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보는 코너, 이기환의 ‘하이-스토리’ 시간입니다.

세종을 흔히 만고의 성군이라고 합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업적과 함께 세종의 일거수일투족도 인구에 회자되었죠. 그렇다면 세종을 둘러싼 여인들은 어떨까요. 한번 알아볼까요?

세종은 2살 연상의 소헌왕후 심씨(1395~1446)를 비롯해서 모두 여섯분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정부인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는 8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영빈 강씨(1남)·신빈 김씨(6남)·혜빈 양씨(3남)·숙원 이씨(1녀)와 궁녀인 상침 송씨(1녀) 등 다섯분의 부인들이 더 있었고, 그 분들과의 사이에 10남2녀를 더 두셨습니다. 슬하에 총 18남4녀를 두신 거죠.

경기 화성 남양동에 있는 신빈 김씨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종에서 정1품 빈(신빈)으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보죠.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국모(중전)의 자리에 오른 대가로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진 소헌왕후 심씨 보다는 후궁들의 신세가 오히려 행복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세종의 여인은 신빈 김씨(?~1464)가 아닐까요. 

신빈 김씨는 세종의 자식을 8명이나 낳은 분입니다. 그중 두 명의 딸은 일찍 죽었지만 남은 6명은 모두 왕자였습니다. 계양군(1427~1464), 의창군(1428~1460), 밀성군(1430~1470), 익현군(1431~1463), 영해군(1435~1477), 담양군(1439~1450) 등입니다. 자식들의 출생연도를 봐서 짐작하겠지만 신빈 김씨는 1427년부터 1439년까지 12년만에 아들만 여섯분 두었으니 세종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뭐 요즘 말로 치면 신빈 김씨는 그야말로 신데렐라라 할 수 있어요.

왜냐면 신빈 김씨의 신분이 원래 내자시의 여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자시는 대궐에서 쓰는 물품을 관장하는 관청이죠. 천민에서 일약 내명부 정1품인 후궁(빈)으로 출세했으니까 신데렐라 소리를 들어도 돼죠. 

신빈 김씨는 바로 그 관청의 종이었는데, 13세의 나이로 세종의 어머니(원경왕후 민씨·1365~1420)에 의해 중궁전으로 발탁됩니다. 

세종대왕과 그 부인들. 정부인인 소헌왕후와 8남2녀를 낳았고, 5명의 후궁들과 10남 2녀를 두었다. 그중 내자시 여종 출신인 신빈 김씨와 6남을 두었다.|출처:두피디아 

신빈 김씨의 출세기는 <세종실록> 1439년 1월27일자에 자세하게 나와있는데요. 세종의 육성입니다. 세종은 “소의(정2품) 김씨를 귀인(종1품)으로 올리고 싶다”고 도승지 김돈(1385~1440)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김씨의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중궁(소헌왕후)이 막내아들(영응대군)을 기르게 했다.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했겠느냐.”

소헌왕후가 막내아들(영응대군)의 교육을 맡길만큼 신빈 김씨의 심성이 고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소헌왕후가 천민 출신인 신빈 김씨한테 아들 교육을 시켰으니까요. 그리고 세종은 김씨를 칭찬하면서 “예부터 궁녀의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의 계보)엔 본래 귀천이 없었다”면서 “노래하던 아이를 궁중에 들인 자도 있고, 일찍이 남을 섬기다가 궁중에 들어온 자도 있었다”고 길게 부연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김씨의 계보는 비록 천하지만 겨우 13세에 궁중에 들어왔으니 이후에 쌓은 부덕(婦德)은 바른 것”이라면서 “과인이 김씨를 빈(嬪)이나 귀인으로 승격시키고자 한다”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남편 세종과 함께 묻힌 소헌왕후(경기 여주 영릉). 원래 왕후가 될 수 없었지만 지아비인 충녕대군이 임금이 되면서 중전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상왕 태종에 의해 친정 아버지(심온)가 죽임을 당하는 등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졌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때 도승지 김돈은 “셋째 부인 이하는 계보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면서 “김씨를 귀인으로 삼아도 하등 문제될 게 없다”고 동의합니다. 훗날 김씨는 내명부 정1품인 신빈으로 승격합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신빈 김씨는 ‘선왕의 후궁들은 머리를 깎는다’는 풍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어요.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되는 일이죠. 선왕의 부인들이 대궐에 남아있으면 헷갈린다는 거에요. 

지금 임금이 선왕, 즉 아버지의 부인에게 마음을 두게되면 그것은 패륜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머리를 깎게 했답니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 특별히 “신빈 김씨만은 머리를 길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신빈 김씨는 “환속해도 좋다”는 조정의 결정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절제하고 조신하는 성격이었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훗날 왕위에 오른 세조는 1458년(세조 4년) 신빈 김씨가 목욕을 하러 강원도를 방문하자 “강원도 관찰사는 군자미 5석을 신빈에게 주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그리고 신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1464년·세조 10년) 쌀과 콩 70석을 부의(賻儀)로 하사합니다. 

신빈 김씨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1365~1420)는 태종의 재위(1400~1418) 중에 13살이던 내자시 여종을 중궁전으로 불렀다는 거니까 1400년대 초반에 태어났겠죠. 신빈 김씨가 1464년 세상을 떠났으니까 당대로서는 장수한 편인 60대 초반까지 사셨던 겁니다. 

보물 2049호 ‘청송 찬경루’. 청송 군수 하담이 1428년 객사와 함께 이에 부속된 관영 누각으로 처음 건립했다. 청송이 당시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그의 가문 청송심씨의 관향임을 들어 관찰사 홍여방이 그 은덕을 찬미하며 찬경루라 이름 지었다.|문화재청 제공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진 본부인

물론 여섯분의 부인 중 최고는 소헌왕후겠죠. 남편(세종)과 낳은 문종·세조·안평대군 등 아들 8명은 물론이고, 그 어렵다는 역법과 산학에 능했으며, 일설에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도움을 줬다는 정의공주까지 낳은 분이죠. 

세종의 유전자 또한 뛰어났지만 당연히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DNA 또한 우월했으니까 똘똘한 자식들을 낳았겠죠. 그러나 소현왕후의 삶이 행복했을까요. 전 ‘아니다’에 한 표 던질게요. 

돌이켜보면 소헌왕후는 참 기구한 신세였습니다. 심씨는 원래 임금 자리와는 상관없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했잔하요. 그러나 창졸간에 남편이 세자위를 받는 바람에 심씨 역시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즉위(1418년)와 함께 왕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었어요. 

외척의 발호를 지나치게 염려한 태종(재위 1400~1418)이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1375~1418)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심온은 자결을 강요받았습니다.(1418년)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이었지만 상왕에 올라 군권을 휘두르던 부왕(태종)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가가 멸문지경에 몰렸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역적의 딸’이라면서 당장 중전의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상소가 밧발쳤습니다. 간신히 국모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헌왕후는 천갈래만갈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삭이고 국모의 체통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헌왕후는 내명부(궁궐 여성의 조직체계)의 귀감이 되었어요. 성격이 워낙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기강이 엄정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후덕한 소헌왕후의 내조 덕분에 남편인 세종이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편 세종이 훗날 군주의 본보기가 된 것처럼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이 된겁니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6년(세종 28년) 승하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실록> 1448년 8월4일자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임금이 만년에 지병이 겹쳐 고생한데다 두 아들(광평대군·평원대군)이 잇달아 죽고 여기에 소헌왕후(부인)마저 승하하여 임금의 마음이 기댈 곳이 없었다. 이에…궁궐 옆에 불당을 두었다.”(<세종실록>)

세종이 죽은 부인(소헌왕후)를 위해 지은 <월인천강지곡>(국보 제320호).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으면서 “(부인은)~눈에 보이는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는 부인을 위한 비밀 사랑코드를 넣었다는 해석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대궐 옆에 불당을 세운다는 것은 엄청난 반발을 초래하는 거죠. 역시 신료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평생 부인의 가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나봐요. 황희 정승까지 나서서 “절대 안된다”고 반대했는데, “내가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양위 소동까지 벌이면서 끝까지 관철시킵니다. 

세종은 둘째아들(수양대군·세조)을 시켜 석가모니의 일대기(<석보상절>)를 편찬하게 하고는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불교신자인 소헌왕후를 추모하자는 겁니다. 그렇게 편찬한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은 583곡에 이르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월인천강지곡>입니다. 

돌아가신 소헌왕후로서는 하늘에서 남편의 가없는 사랑에 위안을 삼았을 겁니다. 소헌왕후는 비록 현실의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똘똘한 자식들을 낳았으니 후손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겠죠. 

지금 소헌왕후의 삶을 반추해보면서 한편으로는 여종의 신분으로 ‘해동의 성군’인 세종의 사랑을 받아 정 1품 후궁이 된 여인(신빈 김씨)의 존재를  알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