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팟캐스트에서 ‘세종대왕의 자녀들’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그러면서 세종(재위 1418~1450)이 갖가지 지병에 걸렸음에도 대단한 자식복을 자랑할만큼 많은 자녀들을 생산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뭐 18남 4녀를 두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때 당뇨, 두통, 이질, 다리부종, 수전증, 풍질, 임질 등 세종이 앓았다는 질병에 열거했는데요.(<세종실록> 1439년 6월29일)
선사시대 유물은 돌화살촉. 석기시대 사람들이 이와같은 인공도구를 사용할 줄 알리 없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와같은 모양의 석기가 출토되면 천둥과 벼락을 관장하는 뇌공이 하늘에서 떨어뜨린 도구로 여겼다. 이와같은 석기를 영험하다면서 갈아먹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임질에 걸렸다”고 고백한 세종
그러나 일부 독자와 청취자의 지적사항이 있었습니다. 열거한 세종의 지병 중 ‘임질’ 부분인데요.
요컨대 “‘아니 세종대왕께서 성병에 걸렸다’는 거냐”는 지적이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국립국어원의 <표준대사전>을 찾아봤더니 ‘임질은 임균이 일으키는 성병이다. 주로 성교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며, 오줌을 눌 때 요도가 몹시 가렵거나 따끔거리고 고름이 심하게 난다.’고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임질은 성병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해괴한 일이 아닌가요.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께서’ 성병에 걸렸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거짓은 아닙니다. 세종대왕 스스로 “내가 임질에 걸렸다”고 고통을 토로했으니까요.
“소갈증(당뇨)와 부종의 뿌리가 근절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을 얻은 지 11일이 되었다. 바쁜 정무를 처리하면 기운이 노곤하다.”(<세종실록> 1438년 4월 28일자)
그런데 이상합니다. <세종실록>은 이 무렵 임질로 고생했던 세종의 투병기를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조금이라도 성질을 내면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1438년 5월 27일) “지난해 여름(1438년)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했다.”(1438년 6월 21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후에도 “임질이 도졌으며”(1439년 7월 2·4일), 3년 뒤에도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면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고 했다는 기록(1442년 11월 11일)이 보입니다.
세종이 스스로 임질에 걸려 괴롭다고 토로한 <세종실록> 1439년 6월29일자.
■성종과 권근까지도
그런데 말입니다. 임질에 걸린 이가 세종 뿐이 아닙니다.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재위 1469~1494) 역시 임질에 걸렸습니다. 즉 <성종실록>은 1485년(성종 16년) 1월 21일 “성종이 ‘임질 때문에 경연에 도저히 나갈 수 없다’고 승정원에 알렸다”는 사실을 적고 있으니까요.
세종-성종과 같은 성군이 임질에 걸렸다는 것이니 이게 될 말이 될 법한 이야기입니니까. 그런데 세종-성종 뿐이 아닙니다.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를 지낸 권근(1352~1409) 역시 임질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한 적이 있답니다.
“임질 때문에 소변이 잦아 그치지 않고 기운이 통하고 막힘이 일정치 않아 아픔을 참기 어렵습니다. 밥 먹는 사이에도 발작이 일어나고 밤새도록 오줌을 누어 평안할 때가 없습니다.”(<태종실록> 1406년 5월1일)
여말선초의 대학자인 인물이 망측스런 임질 때문에 사직을 청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만약 임질이 성병이라는 걸 알았다면 세종이나 성종, 권근 등이 “내가 성병(임질)을 앓고 있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을까요. 그리고 그 부끄러운 기록을 사관이 <실록>에 자신있게 남겼을까요. 사실 ‘임질=성병’이라는 기록은 분명 존재합니다.
요로에서 빠져나온 결석. 큰 결석에서 모래처럼 생긴 작은 결석까지 다양하다. 결석이 요도를 막으면 격심한 통증을 느끼다가 빠져나오면 씻은 듯 통증이 사라지는 증세가 반복된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천하의 패륜아(고려 충혜왕)가 옮긴 임질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원나라 간섭기에 두번이나 왕위에 오른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은 천하의 난봉꾼이었습니다. 충혜왕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패륜 행각을 벌이면서 여인들에게 임질이라는 성병까지 옮겼습니다. 이런 기록이 있으니 세종·성종·권근이 임질에 걸렸다는 기사에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충혜왕의 임질과 세종·성종·권근의 임질은 다른 병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강용혁 분당마음자리 한의원 원장이 제가 해준 말인데요. “한의학에서 임질은 몸이 허약하거나 피로누적 등과 함께 방광에 열이 차서 생긴다는, 일반 비교기과 질환의 개념이지 꼭 성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동의보감>과 <향약구급방>, <향약집성방> 등이 설명하는 임질의 증세를 보면 힌트가 나옵니다.
“임질은 소변이 잘 통하지 않는 병이다. 신이 허하고 방광에 열이 있을 때 생기는 병이다. 소변이 줄고 잦아지며 잘 나오지 않고….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기며 통증이 배꼽에 이른다.”
조선최초의 여성 개업의사인 허영숙(1897~1975)은 동아일보 1920년 5월20일자에서 ‘성병환자’들의 결혼을 금지시키자고 주장했다. 임질을 앓고 있는 부모가 낳은 아이가 선천성 매독에 걸려 실명했다는 것이다.
증세를 보면 꼭 요로결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로결석이 걸리면 그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모래나 돌 같은 것이 요도 중에 들어있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고 급통이 와서 사람이 기절까지 하거든요.
그러다가 요로를 막던 돌이 잠깐 빠지거나 흘러 내려가면 통증은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지고, 그러다 다시 막히면 다시 칼로 찌르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옆구리와 하복부에 생겨 떼굴떼굴 구를 정도로 통증을 호소하고…. 뭐 이런 발작이 반복되는 것은 전형적인 요로결석의 증세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 충혜왕 같은 망나니가 걸렸다는 전형적인 성병인 임질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고림(膏淋)일 수도 있는데요. 고림은 오줌이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아프고, 나와도 고름과 같이 나오는 증세를 보인다는군요.
■“임질은 요로결석”
17년전 고고학자인 이선복 서울대 교수(고고학과)가 세종의 임질 증세를 주제로 흥미로운 논문을 썼는데요.(‘뇌부와 세종의 임질에 대하여’, <역사학보> 178호, 역사학회, 2003년)
이 교수는 1441년(세종 23년) 5월 18일의 <세종실록>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1973년 12월6일 경향신문 광고. 임질과 요도염을 치료할 신약이 나왔다는 내용이다.
“의관이 아뢰었다. <대전본초>에 이르기를 ‘벽력침(뇌부)은 독이 없고…하림(下淋·이질과 임질을 아울러 일컫는 말)을 다스리는데 갈아서 먹거나 또는 달여서 복용한다’고 합니다.”
벽력침, 혹은 뇌부(雷斧)는 지금으로 치면 우연히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석기를 일컫는 말인데요. 돌칼이나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죠. 예전에는 산이나 들에서 수습되는 인공의 도구를 석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겠죠.
뇌부나 혹은 벽력침 등의 표현도 천둥과 벼락을 관장한다는 뇌공(雷公)이 떨어뜨린 도구라 여겼겠죠. 그래서 세종 시대의 의관은 <대전본초>를 인용하면서 “임질 치료제로 돌칼과 돌도끼, 혹은 돌화살촉 등을 갈아서 먹는다”면서 “이를 널리 구하라는 명을 내려달라”고 아뢴 거죠.
1983년 2월5일 동아일보 기사. 걸리면 약도 없는 신종 임질이 창궐하고 있다는 기사다.
그때가 세종이 임질 발작 때문에 무척 고생했던 바로 그 시기이거든요.
실제 <세종실록>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돌칼과 돌화살촉을 바친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선복 교수는 바로 세종이 걸렸다는 임질이 요로결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뇌부 즉 선사시대 석기와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물론 조선시대엔 세균 감염의 개념이 없었고요. 따라서 당시 의료진들은 세종의 임질이 성 접촉에 의한 세균 감염으로 생긴 성병인지, 아니면 단순 요로결석인지 알 수 없었을 거라합니다. 그러나 아무렴 세종대왕께서 그 망측스러운 성병에 걸렸겠습니까. 산고의 통증을 방불케한다는 요로결석을 치료하려고 선사시대 석기까지 구하려고 했겠죠.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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