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昭和) 8년 3월 개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당인 종묘(사적 제125호)의 외곽담장에는 국권침탈의 뼈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조선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국가사당에 일본 왕(히로히토·裕仁)의 연호인 ‘소화(昭和·1926~89)’ 글자를 새긴 것이 9개나 된다. 그런데 이 일본 왕의 연호인 ‘소화’ 명문이 일제가 1932년 종묘~창덕궁·창경궁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종묘담장을 개축하고 새긴 모욕의 상징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종묘 외곽담장에 새겨진 일왕 히로히토(재위 1926~1989년)연호. 소화(쇼와·昭和) 8년은 1933년에 해당된다.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지나는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담장을 수리한  증거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궁능사업본부 종묘관리소 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28일 펴낸 <종묘 외곽담장 기초현황 자료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소화’라는 일왕 연호가 새겨진 담장은 9곳에 이른다. 이중 서쪽에 있는 8개는 ‘소화 팔년 삼월 개축’(昭和 八年 三月 改築)이라고 표기했다. 소화 8년은 1933년이다. 동쪽에 남은 명문 1개는 ‘소화 7년(1932년) 3월 개축’이라고 새겨져 있다. 명문 앞에 붙은 ‘우(右)’자는 우측 담장에 지대석 명문을 새겼다는 의미로 새긴 글자로 추정된다. 

‘1932년(昭和 7년) 3월 개축’ 사실을 알린 명문.  앞에 붙은 ‘우(右)’자는 우측 담장에 지대석 명문을 새겼다는 의미로 새긴 글자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궁능사업본부 종묘사업소 제공

보고서에 따르면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쪽 담장에는 일왕연호 9개를 빼고도 60간지 명문이 73개 새겨져 있었다. 동쪽 담장에서는 신사(辛巳) 6개, 임자(壬子) 4개, 을묘(乙卯) 4개, 정사(丁巳) 3개, 신해(辛亥) 3개 등 60간지 명문 각자석만 33개가 확인됐다. 서쪽담장에는 총 16가지 명문이 새겨진 각자석 37개와 확인하기 어려운 명문 3개 등 60간지 각자석이 총 40개 확인됐다.    

1932년 7월16일 <종묘일기> 기록. ‘관덕교 도로의  방어축대를 수리한 일’을 기록했다. 관덕교는 1932년 창덕궁-종묘 관통도로가 개설된 후 종묘와 창격궁을 잇는 구름다리였다. 1932년 7월 관덕교 도로 방축공사와 맞물려 종묘 외곽담장수리가 이뤄졌음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종묘관리소 제공 

민경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종묘관리소 주무관은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이 ‘60간지와 일왕 연호’ 명문은 종묘의 담장을 수리한 뒤 그 수리연도를 새긴 것”이라고 밝혔다. 즉 <승정원일기>에는 “종묘 대문의 서쪽 담장과 동영(東營) 사이에 있는 담장이 이미 완전히 축조됐으니 정식에 따라 연조(年條)를 새긴 후…”(1868년 8월4일)라는 내용이 있다. 담장을 수리한 뒤 “수리연도를 새겨 후세에 길이 알리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종묘는 1395년(태조 4년) 처음 준공됐지만 외곽담장은 1414년(태종 14년)이 되어서야 쌓았다. 이후 담장은 지속적으로 무너지고 개수했는데, 1608년(광해군 원년) 종묘를 재건한 이후에는 담장공사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933년(소화 8년) 4월27일 <종묘일기> 기록. ‘동측 외궁의 담장 10칸을 수리한 일’을 기록했다. 이번에 서측 담장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된  ‘소화 8년 3월 개축’ 각자석과 연관성이 높은 기록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궁능사업본부 종묘관리소 제공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경성시구개선(시가 정리) 사업의 하나로 돈화문(창덕궁 정문)에서 시작되어 창덕궁과 종묘를 가로질러 총독부 병원(서울대병원) 남부까지 이어지는 노선 건설이 계획되고, 급기야 1932년 종묘를 관통하는 도로가 뚫린다. 이어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육교를 설치되면서 종묘는 두동강 나고 창덕궁과 창경궁도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는다.

바로 종묘와 창덕궁의 경계를 관통하는 ‘종묘관통선’ 공사 때 일부 종묘의 외곽 담장들도 철거됐다. 

외곽담장에 남아있는 ‘소화 7년’ 명문은 바로 종묘 관통선이 뚫리고 창경궁과 종묘를 이은 다리(관덕교)를 만든 뒤 그 관덕교 도로의 방어축대를 수리한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관덕교 도로 방축공사와 맞물린 종묘외곽담장의 수리가 이뤄졌다’고 알린 <종묘일기> 1932년 7월16일자가 웅변해준다.

또 ‘동쪽 외측 담장 10칸을 수리한 일’(1933년 4월27일자)과 ‘외궁 담장을 철수한 후 남은 덮개 기와를 영선계 김기영이 받아간 일(5월9일자)’ 따위를 기록한 <종묘일기>는 바로 담장에서 확인된 ‘소화 8년’ 명문을 증거해준다. 결국 종묘 외국담장에 새겨진 ‘소화 7년’ ‘소화 8년’ 명문은 조선의 국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국가사당인 종묘가 일제가 개설한 관통도로로 인해 두동강 난 사연을 간직한 치욕의 흔적이라 추정할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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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19.08.28 1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순한 근대화 유산을 굴욕 치욕 모욕 통한이라고 거창한 취업 후 비분강개하는 정신연령을 이제 우리는 졸업해야 할 때다.타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굴욕이었다면 조선왕조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고마워서 사용한 것이다.

    • Favicon of https://noblogyet.tistory.com Goddess of Rainbow 2019.10.01 0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가 단순한 근대화 유산이란 건지? 누가 당신 조상묘 훼손하고 비석에 낙서 새겨 놓아도 유산이라 할텐가? 유산과 훼손도 구분 못하는 당신이야 말로 정신연령과 지능이 상당히 낮은 것 같은데요? 타국의 연호를 사용했다라. 한국 종묘와 고유 문화제 어디에 중국 연호를 사용 했답디까?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는 몰라도. 그리고 사용했다 한들 자발적으로 한 것과 침략 당해 문화재가 훼손되고 낙서가 새겨진게 같다고 봅니까?

    • kimduhan 2019.10.01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초층탑신에 새겨진 비문을 줄여서 당평제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백제를 정벌했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의 공을 기록했다 하여 소정방비라고도 부른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8자를 2행으로 전서(篆書), 그 아래에 ‘현경(顯慶) … 계미건(癸未建)’이라고 2행이 새겨져 있다. 능주장사 판병부에 있던 하수량이 글을 짓고 하남사람 권회소가 글씨를 썼다. 비문의 제목은 전서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의자왕, 태자 융, 효, 인 및 대신과 장군 88인,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고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6%80%EC%97%AC_%EC%A0%95%EB%A6%BC%EC%82%AC%EC%A7%80_%EC%98%A4%EC%B8%B5%EC%84%9D%ED%83%91

      역시 중국에 대해서는 사근성으로 문화재에 정복하는 비문이 새겨져도 국보로 지정하고 있는데, 일본이 재건한 우리 문화재에 작게 새긴 글씨는 문제 삼는가?그리고 조선국왕은 기꺼이 오랑캐이라고 폄훼하던 여진족 청나라 연호를 사용했을 줄은 몰랐다.재미있는 민족성이네요.

  2. kimduhan 2019.10.11 2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이 석탑의 기단부를 살펴보면 글씨가 새겨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비문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이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쓴 것이었다. 남쪽면을 제1면으로 하며, 4면에 걸쳐 내용이 실려 있다. 당나라 황제의 은혜를 찬양하고 의자왕과 왕자를 비롯해 관료 700여명을 사로잡았다는 내용과, ‘무릇 5도독(都督) 37주 250현을 두고 호 24만, 구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했다’는 기록에는 백제의 마지막 행정 상황이 나타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세우게 한 삼전도비(三田渡碑, 일명 대청황제공덕비)처럼 새로 비석을 만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당평백제국비명’과 같이 비석이 아닌 석탑의 탑신을 활용해 비문을 새겨 넣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https://m.news.naver.com/read.nhn?oid=022&aid=0003404844&sid1=110&mode=LS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