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친필 한글 글씨(1968년)→하얀색 바탕의 검은색 글씨(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의 한문글씨·2010년)→검은색 바탕의 황금빛 동판글씨(2019년)’로….

14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 회의에서 말도 만혹 탈도 많았던 광화문 현판의 재복원방식이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동판글씨’로 결정됨으로써 9년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광화문 현판의 제작방식 논란은 2010년 광복절 광화문 복원에 맞춰 내건 현판이 불과 몇개월만에 균열이 생겼고, 문화재청이 그해 연말 전격적으로 교체를 결정함으로써 전개됐다. 하지만 광화문 현판 논쟁은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가로쓰기 한글 현판이 걸리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그렇게보면 50년도 더 된 논쟁이었다. 1865~68년 사이에 경복궁과 함께 복원된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훼철되고 소실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쳤다. 

2010년 복원된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 현판(왼쪽)과 <경복궁 영건일기>로 복원해본 ‘검은색 바탕의 황금빛 동판글씨’ 현판. ‘검은 색 바탕’은 음양오행 중 ‘북쪽과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경복궁과 광화문이 불에 타지 말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김민규의 논문에서  

■광화문 복원에 ‘웬 유신(維新)의 그림자’가… 

그러다가 중건 100년만인 1968년 박정희 정부 때 복원됐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왜곡된 복원’이었다. 이른바 ‘1000년을 버틴다’ ‘목조일 경우 3년 걸릴 공기가 9개월로 앞당겨진다’는 등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또한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진 모습이었다. 

1968년 10월17일 광화문을 복원수리한 내력을 기록한 ‘광화문 중건중창 상량문’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 구방유신(舊邦維新)의 대업이 진행되고 민족의 주체의식이 높아져가는 이 시운에….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광화문을 복원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구방유신’은 ‘주나라는 오래됐지만 천명은 참으로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시경>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1968년1968년 3월15일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참석한 광화문 복원 기공식장의 ‘광화문 투시도’를 보면 현판글씨가 한자로 쓰여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마당에 ‘대통령의 영도와 유신, 그리고 민족의 주체의식…’의 표현을 썼다는 것은 아무리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72년 공포한 10월 유신의 조짐이 광화문 복원 상량문에서 보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현판까지 내걸렸다. 원래는 한자로 ‘문화광(門化光)’으로 결정되었지만 복원과정에서 가로쓰기 한글체인 ‘광화문’으로 바뀌었다. 1968년 3월15일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참석한 광화문 복원 기공식장의 ‘광화문 투시도’를 보면 현판글씨가 한자로 쓰여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논문을 쓴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은 “1968년이 박정희 대통령의 역점사업이었던 한글전용화 5개년 계획의 원년이어서 한글로 바꾸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판식에 참석한 서예가 출신 윤제술 국회의원(1904~1986)이 박정희 대통령의 현판글씨를 보고 “어떤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어”하고 큰소리로 욕했다가 곁에서 ‘대통령’이라고 쿡쿡 찌르자 순간 기지를 발휘해서 “그래도 뼈대는 살아있구만!”하고 위기를 넘겼다는 일화가 떠돈다. 당시 박대통령도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듬해 현판글씨를 다시 써서 걸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복원됐지만… 

2006년부터 ‘광화문 제모습 찾기’ 사업이 시작되고 4년 뒤인 2010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광화문은 원래의 위치의 제모습으로 복원됐다. 이때 1865~68년 광화문 중건 때 광화문 현판의 주인공인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한 한문 ‘光化門’ 현판을 걸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현판이 금세 균열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재복원이 결정됐다. 그 과정에서 흰색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한 현판이 좀 이상하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도쿄대(1902년)과 국립중앙박물관(1916년) 소장 흑백사진을 보면 흰색바탕에 검은색 글씨가 맞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968년 광화문 중수 후 내걸린 박정희대통령의 친필 한글휘호 현판. 한글현판이 걸린 것은 당시 박대통령이 역점을 둔 한글전용화정책의 산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2015년 궁중화사 출신의 안중식(1861~1919)의 1915년 작품인 ‘백악춘효(白岳春曉)’(2점)에서 검은색 바탕의 광화문 현판이 보인다는 논문(강임산의 ‘1968년 광화문 복원의 성격’)이 발표되었는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지난해(2018년)가 돼서야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광화문 사진(1893년) 등을 토대로 과학적 분석을 해보니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가 맞는 것 같다”고 인정했다. 이후 또다른 변수가 떠올랐다. 지난해 말 경복궁 현판이 ‘검은 색 바탕’이었던 사실 외에도 ‘금색동판’으로 특별 제작되었으며, 그 이유는 ‘화재 방지용’이었다는 역사기록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 와세다대(早稻田大)가 소장한 <경복궁 영건일기>를 찾아 분석한 김민규씨(동국대 미술사학과 강사)의 논문(‘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 덕분이었다. <경복궁 영건일기>는 경복궁을 중건하기 시작한 1865년 4월부터 완공된 1868년 7월까지의 공사 기록이다. 

관악산. 풍수상 ‘불의 산’으로 일컬어질만큼 화염 모양을 하고 있다. 관악산의 화기를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경복궁 중건의 최대과제였다.

즉 1867년(고종 4년) 4월21일 <경복궁 영건일기>를 보면 “교태전·강녕전 현판의 묵질금자(墨質金字·검은 바탕에 금색글자)로 했다”는 기록과 함께 각주에 “경복궁의 각 전당은 모두 ‘검은 바탕’이었고, 이는 불을 제압하는 이치를 취한 것(皆爲墨質 取制火之理)”이라고 부연설명돼 있었다. ‘검은 색’은 사신도의 ‘북 현무(北 玄武)’에서 보듯 음양오행 가운데 ‘북쪽과 물(水)’을 상징한다. <영건일기>에 등장하는 각 전각의 현판 바탕을 보면 교태전과 강녕전 뿐 아니라 광화문·근정전·경회루·강녕전·근정문·건춘문·신무문 등이 모두 검은색으로 되어 있다. 모든 경복궁 전각의 ‘검은색 바탕’ 현판에는 목조건물인 전각들이 화마(火魔)에서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던 셈이다. 그런 것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해놓았던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공사중 발견된 ‘물 水자로 도배한 은제 육각판’. 경복궁 근정전 공사중 발견됐다. 화재막이용 부적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특히 <영건열기> 1865년(고종 2년) 10월11일자는 광화문 현판이 금동판으로 제작됐음을 확인해주었다. 즉 “광화문 현판은 (근정전 현판과 함께) 동으로 만들고(以片銅爲畵), 10품금 4량을 거듭 칠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렇게 새롭게 등장한 여러 증거들을 참고해서 그간의 오류를 바로잡은 뒤 이번에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심의를 통해 ‘검은색 바탕에 금박 동판을 씌운 한문 글씨’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200년 뒤에…” 무학대사의 불길한 예언핟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1820~1898)이 얼마나 화재예방에 노심초사했는 지 알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다. 사실 조선초부터 경복궁의 ‘화기(火氣)’를 잠재우는 것이 풍수학상 관건이었다.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은 재미있는 야사를 전한다. 

경회루 연못에서 확인된 청동용. <경복궁영건일기> 1865년 8월30일자는 “용 배에 ‘을측년(1865년) 임오월(壬午月) 임술일(壬戌日)’에 시작해서 9월10일 임신(壬申)에 몸을 합쳐 한쌍을 주조했다”고 기록했다. 

“한양의 진산을 인왕산으로 잡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대사(1327~1405)와 “제왕은 남면(南面·남쪽을 향해 앉아 다스려야 한다는 뜻)해야 한다”는 정도전(1342~1398)의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때 정도전의 주장이 먹히자 무학대사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라 불길한 에언을 했다. 무학대사가 걱정한 것은 경복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악산의 존재였다. 관악산은 얼핏 보아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상 관악산은 불의 산이다. 그 불의 산으로부터 뻗어나는 화기(火氣)를 다스려야 했다. 하지만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경복궁은 여러차례 화마에 휩싸인다.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은 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게다가 무학대사가 예언한대로 꼭 200년 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왜적의 방화로 경복궁은 전소된다. 그 뒤 270년이 지나도록 경복궁은 중건되지 못했다가 1865년(고종 3년) 중건됐다. 이때 눈물겨운 화재예방 방책이 동원된다. 

龍자를 1000자나 새겨넣은 물 水 부적. 역시 근정전 공사중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흥선대원군

1999년 경회루 연못 준설 과정에서 출토된 ‘혀를 쑥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해학적인 형상의 청동용(龍)’이 대표적이다. <경복궁 영건일기> 1865년 8월30일자는 “청동용의 배에 ‘대청 동치 4년 을측년(1865년) 임오월(壬午月) 임술일(壬戌日)’에 시작해서 9월10일 임신(壬申)에 몸을 합쳐 한쌍을 주조했다”고 기록했다. 용은 ‘물의 신’으로 알려져있다. 간지 ‘임(壬)’의 상징은 북쪽이고 물을 상징하는 괘(卦)와 동일한 의미이다. 청동용을 연못에 넣은 뒤 “물의 기운을 뿌려서 만세토록 궁궐을 보호하소서”라는 고사제문을 낭독(<경복궁 영건일기> ‘청동용 고사제문’)한 데서 궁궐을 화마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조선 왕조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안중식의 1915년 작품인 ‘백악춘효’에서 보이는 광화문 현판. 바탕이 어두운 색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강임산의 논문에서

또한 <경복궁 영건일기> 1865년 1월6일자는 “관악산 정상에 우물을 파고 청동용을 만들어넣었으며 광화문 좌우에 물짐승 한 쌍을 조각해서 관악산의 화기를 씻어내고자 했다”고 기록했다. 역시 관악산 화기를 제압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흥선대원군(1820~1898)은 경복궁 근정전의 종도리에 상량문(중수가 끝났음을 알린 문서)과 함께 물(水)과 용(龍)으로 도배한 부적 3점과 육각형판 5점을 모셔두었다. 특히 깨알같은 글씨로 ‘물의 신’인 ‘龍’ 자를 1000자나 메워 쓴 ‘수(水)’ 자 부적을 두 장이나 두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서리에 물 수(水)를 새긴 육각형 은판 5점 역시 흥미를 자아냈다. 왜 육각형인가. 물은 음양오행상 음(陰)이며, 음의 대표적인 숫자는 ‘6’이기 때문이다. 또 은판을 싼 종이에도 묘(묘)자를 써놓았다. ‘묘’ 자는 ‘물이 아득하다’, 혹은 ‘수면(水面)이 아득하게 넓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물귀신을 의미하는 해태상을 세워놓았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상 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역사가 숨쉬고 있는데 하얀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복원한 광화문 현판이 그대로 걸려있었다면 어쩔뻔 했단 말인가. <경복궁 영건일기>를 발굴한 김민규 동국대 강사는 “광화문 현판 논란은 모쪼록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반면교사가 된 셈”이라면서 “문화유산의 복원에 다시는 이런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연구와 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민규, ‘경복궁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 <고궁문화> 11호, 국립고궁박물관, 2018

강임산, ‘1968년 광화문 복원의 성격’, 명지대석사논문, 2015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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