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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광화문 현판, "아니 어떤 X의 작품이야"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서예솜씨를 자랑한 이는 누구일까.
일단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뛰어난 서예실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년기부터 한학을 배우고 서예를 연마했으니 그럴만 하다.
기교가 뛰어나고 기운이 웅혼하다는 평을 받는다. 윤보선 대통령의 글씨에서는 소박한 필의가 느껴진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대구사범 시절부터 김용하(1896~1950)로부터 서예를 배웠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소전 손재형(1903~1981)을 사사했다. 손재형 앞에서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을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전문교육을 받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군인출신답게 굳세고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도무문(大道無門)’으로 유명한 김영삼 대통령은 독창적인 글씨체를 자랑했으며, 대자서(大字書)를 즐겼다. 역대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개인서예전을 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투옥시절을 독서와 서예로 보냈는데, 특히 미국의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에게 써준 ‘경천애인(敬天愛人)’ 글씨가 유명하다. 몸에 익숙해진 달필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물론 역대 대통령들의 서예 솜씨를 3살 어릴 적부터 혹독한 왕재 교육을 받았던 조선의 국왕들과는 견줄 수 없다.
그래도 역대 대통령들은 글씨를 통해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보이고, 지도자로서의 정책과 이념을 나타내고자 했다.
심지어 199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종전에 걸려있던 ‘대웅전(大雄殿)’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이 쓴 ‘극락보전(極樂寶殿)’ 현판으로 교체했을 정도다. 4대강 사업을 강행한 이명박 대통령의 ‘합강정(合江亭)’ 현판도 세종지구의 금강과 미호천이 만나는 지점에 걸었다. 그래도 문화재가 아니니까 그렇다 치자.

 

■문화재 현판에 걸린 대통령 글씨
문화재 건물에 걸린 역대 대통령들의 글씨만 예로 들어보자.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은 청간정(淸澗亭·강원 고성·도유형문화재 32호)과 이산묘(전북 진안·도기념물 120호) 등이다. 충북 괴산의 ‘정인지묘’(도기념물 33호)의 비문은 윤보선 대통령의 글씨다. 강원 원주의 ‘선화당(宣化堂·도유형문화재 3호)’ 현판과 충북 보은의 ‘고봉정사’(도기념물 51호) 현판은 최규하 대통령의 작품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작품도 문화재에 걸려있다. 충북 청원의 체화당사 및 사적비 안에 있는 ‘체화당사(체華堂祀·도기념물 73호)’ 현판이 그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글씨도 김유신묘(사적 21호)의 ‘숭무전(崇武殿) 현판으로 걸려있다.

 

■박정희 글씨를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떤 지도자도 박정희 대통령을 능가할 수 없다.
2005년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문화재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37곳(43건)이었는데, 그중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28곳(34건)에 달했다.
지금은 교체되었지만 한글 현판인 ‘광화문’(사적 117호)을 비롯해 영릉·녕릉(사적 195호), 행주산성(사적 56호),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사적 229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3호) 등 내로라하는 사적의 현판이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이중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유허지인 화석정(파주시유형문화재 61호)와 오죽헌(보물 165호)까지 포함돼 있다. 18년이나 집권을 한 탓도 있겠지만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도 서예를 통치에 활용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가 철거된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다.  
도대체 광화문 현판이 무엇인데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가.

 

■유신의 조짐을 나타낸 광화문 상량문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자들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을 불러들인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설파한 경복궁 정문(혹은 오문)의 의미다. 1426년(세종 8년)에는 ‘빛이 사방에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方)’는 뜻에서 ‘광화문(光化門)’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름은 거룩했지만 그 팔자는 기구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270년 이상 방치됐다. 1865년(고종 2년) 시작된 경복궁 중건과 함께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마구 훼철된다.
총독부 건물에 제자리를 내주고 강제 이건됐고, 심지어는 식민지 실상을 왜곡 날조하는 조선박람회장의

안중식의 1915년 작품인 ‘백악춘효’(2점) 에서 보이는 광화문 현판. 바탕이 어두운 색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강임산씨 제공

선전문으로 전락했으며, 총독부 청사 뒤편에 잘 꾸며진 공원의 매표소 출입문이 되기도 했다. 급기야 한국전쟁 때인 1951년 1월에는 문루가 완전 소실되는 운명을 맞는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복원되었다고 했지만 그 역사성은 상당부분 잃었다.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채, 그것도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진채, 그나마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에 ‘철근 콘트리트 공법’으로 복원된 탓에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됐다.
무엇보다 1968년 10월17일 광화문을 복원수리한 내력을 기록한 ‘광화문 중건중창 상량문’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 구방유신(舊邦維新)의 대업이 진행되고 민족의 주체의식이 높아져가는 이 시운에….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바로 ‘구방유신’이다. 무슨 뜻인가. ‘주나라는 오래됐지만 천명은 참으로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시경>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대통령의 영도와 유신, 그리고 민족의 주체의식…. 모골이 송연해지는 구절이다. 그로부터 꼭 4년 후인 1972년 공포한 10월 유신의 조짐이 바로 이 광화문 복원 상량문에서 엿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심형구가 1940년 그림엽서 유통용으로 그린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이 검은색임을 알 수 있다.|강임산씨 제공 

 

■‘아니 어떤 놈이 저걸 글씨라고…’
광화문 본체는 그나마 남아있는 각종 사진자료와 실측도면 등을 토대로 2010년 재복원했으니 천만다행이라 할까.
하지만 광화문 현판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현판은 1865년(고종 2년)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지만 한국전쟁 때 문루가 불타면서 소실됐다. 1968년 복원당시 처음 계획은 한문체인 ‘光化門’이었다.

1968년 3월15일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참석한 광화문 복원기공식에 걸린 ‘광화문 투시도’를 보면 ‘光化門’을 거꾸로 쓴 ‘문화광(門化光)’으로 되어있다.

투시도는 완공예정인 건물의 설계내용과 향후 계획을 반영한 그림이다. 투시도에 ‘光化門’이라 했다면 원래의 계획이 ‘光化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원 공사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가로쓰기 한글체인 ‘광화문’으로 둔갑했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추진한 한글전용화 정책 때문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분석이 있다.

1968년 3월15일의 광화문 복원기공식에 등장한 투시도. 이때는 한자인 '光化門'을 거꾸로 한 '門化光'이었다가 어느 순간 한글 '광화문'으로 바뀌었다.

1968년은 한글전용화 5개년 계획의 원년이었던 것이다.
현판식에 참석한 서예가이자 정치인인 윤제술 국회의원은 박정희의 현판글씨를 보고는 “아니 어떤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어!”라고 큰소리로 욕했다가 곁에서 ‘대통령’이라고 쿡쿡 찌르자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있구먼!”하고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떠돈다.

당시 박대통령도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듬해 현판글씨를 다시 써서 걸었다고 한다.
결국 2010년 복원 때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한 ‘光化門’ 현판을 걸었지만 또다른 논란에 휩싸였다.
현판이 균열되는가 하면 흰색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한 것이 어쩐지 이상하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도쿄대(1902년)과 국립중앙박물관(1916년) 소장 흑백사진을 보면 흰색바탕에 검은색 글씨가 맞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제는 제대로 고치는가
그러던 문화재청이 이제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광화문 사진(1893년) 등을 토대로 과학적 분석을 해보니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가 맞는 것 같아서 다시 고치겠다고 했다. 사실 굳이 스미소미언 박물관까지 갈 것도 없었다.
궁중화사 출신의 안중식(1861~1919)의 1915년 작품인 ‘백악춘효(白岳春曉)’(2점)를 보면 광화문 현판의 바탕이 검은 색으로 보인다. ‘백악춘효’는 광화문을 여름과 가을의 모습으로 각각 나누어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이 육안으로 보기에도 선명한 검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 1940년 서양화가 심형구(1908~1962)가 그림엽서에 그려 유통시킨 광화문 그림에도 어두운 바탕에 밝은 색의 글씨가 보인다.
그러니 부실복원이었다는 비판을 받을만 하다. 뒤늦게나마 잘못을 인정했으니 다행이다. 모쪼록 이번에야말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고 복원작업에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강임산, ‘1968년 광화문 복원의 성격’, 명지대 석사논문, 2015
송동현, ‘조선시대 궁궐건축의 현판구성과 상징성에 관한 연구’, 한양대 석사논문, 2005
손철주, <그림, 아는만큼 보인다>, 생각의 나무, 2010
구본진, <필적은 말한다-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중앙북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