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劍)이란 무엇인가. ‘밑동에서부터 끝까지 고르고 순수하게 단련된 양날의 칼’이다.
신석기 유적인 함북 웅기군 굴포리의 서포항 패총 등에서 출토된 골제단검은 짐승의 다리뼈를 쪼개 끝부분을 갈아서 예리한 칼날을 세워 만들었다.
청동기 시대 들어서는 마제석검이 등장했다. 문자그대로 점판암을 아주 정교하게 갈아서 만든 짧은 석검이다. 이 마제석검은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 전통의 무기 또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사냥용이라기보다는 개인간의 싸움이나 호신의 무기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기와 철기시대 들어 다양한 동검, 혹은 철검이 등장한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기는 청동단검이다. 이른바 비파형 동검의 형식이 발전된 세형동검이 한반도에서는 유행했다. 비파형 동검은 검신, 즉 칼의 형태가 비파처럼 아래가 둥글게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형동검은 비파형 동검보다 좁고 날카롭게 만든 칼이다. 철제 검은 전반적인 모양이 청동 검과 비슷하다.
■백일도, 천일창, 만일검
그런데 양날의 칼인 ‘검’보다 실제 전투에 주로 사용된 것은 외날의 칼인 ‘도(刀)’였다.
중국 한나라를 끈질기게 괴롭힌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아무래도 ‘도’가 유리했다. 말을 타고 재빨리 움직이는 흉노의 기병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곡선의 형태를 갖추며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刀)가 마상에서 휘두르기 편하고, 게다가 갑옷을 입은 적을 베는데 위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도(刀)는 단기간에 배우기 쉬웠다.
반면 양측에 날을 세운 검은 사면팔방으로 찌르고 벨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도(刀)에 비해서는 수련기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예부터 ‘백일도(百日刀) 천일창(千日槍) 만일검(萬日劍)’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무슨 말인가. 도를 수련하는 데는 100일, 창을 배우려면 1000일이 각각 걸리지만 검을 능수능란하게 쓰려면 1만일, 즉 30년은 족히 소요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실전에서는 배우기 쉬운 도(刀)가 널리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나 만들수 없던 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검(劍)이었으니 오히려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다룰줄 알아야 지닐 수 있는 게 검이었으므로, 검을 지닌 이는 곧 뛰어난 기예의 소유자임을 과시한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인용한 <구삼국사>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용광지검(龍光之劍)을 허리에 찬채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해모수의 용광지검은 하늘의 신탁을 받은 특별한 존재의 힘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 때문에 검은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신분과 권위의 상징이며, 사귀를 쫓는 벽사(피邪), 귀신을 베어버리는 참마(斬魔), 재앙을 굴복시키는 항요(降妖)의 목적에서 만들었다. 물론 장신구와 호신용으로도 제작했다. 아무렇게나 만들 수도 없었다. <장자> ‘설검편’은 “검은 신분에 따라 천자검과, 제후검, 서인검(庶人劍·백성용검)이 있다”고 했다.
■사인검은 연산군이 처음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인검(四寅劍), 삼인검(三寅劍)이라 칭하는 검이 제작됐다. 이 검은 사악하고 요사스러운 것을 없애기 위해 만든 것이다.
사인검과 관련된 기록은 연산군 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1499년(연산군 12년) 병인년에 연산군은 “사인검 200자루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내린다.(<연산군일기>)
그런데 이 사인검은 조선초기부터 제작되었다는 기록은 1542년(중종 37년)의 일을 기록한 <중종실록>에 보인다.
“사인검은 해마다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호랑이해(인년·寅年)에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조종 때의 옛 일이었다”고 했다.
폐단이 일기도 했다. 중종은 1529년(중종 24년) 12월 경인년을 앞두고 사인검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헌부는 “흉년에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중단해야 하는데 급하지도 않은 사인검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같은 폐단이 꾸준히 지적되자 중종은 1542년(중종 37년) 4월 승정원에 ‘사인검 제작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사인검을 제작하는데 내관 사약(조선 시대 왕명의 전달 및 임금이 쓰는 붓과 벼루의 보관, 궁중의 자물쇠 관리, 대궐 뜰의 설비 등을 맡은 관청의 6품 관리) 등이 사익을 위해 폐단을 만들고 있다”고 사인검 제작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사대부와 인검
그래도 사인검의 제작은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1566~1628)은 장남(신익성)에게서 사인도(四寅刀)를 선물받고 자신감 넘치는 시를 남겼다.
“나에게 사인(四寅)이라는 칼이 있어… 땅신도 두려워하고 하늘신과는 통해…내 몸을 방어하니 두려울 게 무엇인고. 사귀 저절로 쫓겨가서 나를 범하지 못하리.”
“어떤 귀신도 날 범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다.
송문흠(1710~1752)의 ‘삼인칠성검’은 더욱 신묘한 기운을 뿜어낸다.
삼인이란 삼인(三寅)의 시기에 만들어진 인검을 의미하고, 칠성검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칼 속에 모으려고 칠성문을 금상감으로 칼날에 새긴 것이다.
즉 송문흠은 “일월이 양강(陽剛·강함)을 도우니 북두칠성 무늬 밝게 비친다(日月贊剛 星文昭光)”면서 “잡으면 반드시 베니 부드러운 도리로 끊어버린다(操以必割 柔道是絶)”고 했다.(<문정당집>)
영조시대의 문신 유언호(1730~1796)는 믿기힘든 일화를 자신의 시문집(<연석>)에 기록한다.
즉 유언호의 집에는 무뎌진 1척 남짓의 삼인검이 있었다. 그러나 유언호는 이 삼인검을 방치해두었다.
숫돌질을 하지 않아서 칼날은 무뎌진채로 벽 사이 먼지구덩이 속에 몇년간 놔두었다. 어느날 밤 귀신이 은근슬쩍 찾아와 유언호의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유언호는 무딘 삼인검을 찾아 던졌다. 그런데 삼인검은 귀신의 이마 정확하게 꽂혔다. 귀신은 땅에 엎어져 울부짖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악몽에서 깨어난 유언호가 새삼스레 칼을 갈자 물에 햇빛이 반사되듯 검광이 빛났다.
삼인검의 신묘함에 놀란 유언호는 대장장이에게 수리를 맡겼다. 그러자 삼인검은 연못에서 개구리밥이 헤쳐지면서 물에 햇빛이 반사되듯 검광이 번쩍 빛났다.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만든 이유
신흠의 사인도(검)과 유언호의 삼인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2간지 중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맞춰 제작한 칼은 삼인도(三寅刀) 혹은 삼인검이고, 여기에 ‘인시(寅時·새벽 3~5시)’에까지 맞춰 만든 칼이 사인검 혹은 사인도이다.
왜 하필 인(寅)자만 3~4번인가. 양(陽)의 기운이 가장 왕성해지려는 이 순간에 만들어야 음(陰)한 사귀(邪鬼)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유(1587~1638)의 ‘삼인검부’에는 ‘인검(寅劍)’의 신묘함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寅)이라는 것은 세 개의 양이 모여 사계절 중 첫번째이고, 성질이 굳세고 밝아서 으뜸으로 대우받고 만물이 비롯되는 인(仁)을 덕(德)으로 한다. 12간지 중 호랑이에 해당되는 인(寅)은 위엄과 용맹이 넘치는 백수의 왕이다. 여우나 들개 따위의 악수를 한 입에 박살낸다. 인월·인일·인시의 기운이 모두 이 인(寅)이라는 때에 모여들면 인검은 그 정기를 듬뿍 받아 신통력을 온전히 갖추게 된다.”
장유는 “이 칼을 한 번 쓰면 사악한 마귀가 쫓겨가고 요망한 기운이 삽시간에 없어지며 장난치는 도깨비가 감히 접근을 못한다”면서 “요망한 자의 허리와 머리를 삼대 자르듯 베어낸다”고 했다.(<계곡선생집> ‘삼인검부’)
12년 만에 한번꼴인 사인검(혹은 삼인검)의 제작과정은 자못 성스러웠다. 천년고철을 재료로 36번 불에 달궈야 했고, 글자를 새길 때는 주문을 읊었으며, 개와 닭은 물론 잡인의 출입마저 막았다. 검을 만든 후에는 술과 과일, 흰닭, 향촉을 준비해서 ‘검을 위한) 제사’까지 지냈다.
■삿된 악을 베어낸다
검의 한편엔 주역의 이치인 ‘건강정(乾降精) 곤원령(坤援靈) 일월상(日月象) 강전형(岡전形) 휘뢰전(휘雷電)’과, 도교의 뜻인 ‘운현좌(運玄座) 추산악(推山惡) 현참정(玄斬貞)’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건강정’은 하늘이 생명을 내린다는 뜻이고, ‘곤원령’은 만물의 영을 돕는다는 뜻이다. ‘일월상’은 해와 달, ‘강전형’은 산과 강이 각각 모양을 갖추고 ‘휘(위)뢰전’은 벼락과 천둥을 몰아친다(혹은 보좌하거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운현좌’는 원신천존(도교가 숭배하는 최고의 신)의 힘을 움직인다는 뜻이고, ‘추(퇴)산악’은 원시천존의 힘으로 악을 물리친다는 의미이며, ‘현참정’은 현묘한 도력으로 악을 물리치고 비로소 바름을 굳게 지킨다는 것이다.
종합해보면 ‘천지자연의 힘이 검에 깃들어(건강정~휘뢰전) 삿된 악을 베어 쫓아내기를(운현좌~현참정)’는 바란 것이다. 이 글자들을 부적처럼 신비롭게 보이려고 전서체로 새긴 것도 이채롭다.
다른 한편에는 북두칠성을 포함해서 태양이 지나는 황도의 28수 별자리를 상감했다. 세상사를 관장하는 별의 신령한 힘이 사인검에 깃들어 사악한 기운을 막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양날의 검을 쥔 장군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일 준장 진급자 56명에게 수여한 ‘삼정검(三精劍)’의 뒷면에 새겨진 글귀가 바로 사인검의 ‘건강정~현참정’이다.
꿈에 그리던 별을 단 장군을 상징하는 칼이니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그러나 ‘사인검’의 뜻을 곡해해서 그저 자신의 일신만을 지키는 칼로 여기지 않을까 적이 걱정된다. 장군 스스로를 현혹시키는 악을 단칼에 베어내는 ‘사인검’의 참된 정신을 잊지 않아야 할 텐데….
게다가 육해공 3군이 호국·통일·번영이라는 세가지 정신을 이루라는 뜻에서 삼정검이라 이름붙였고,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 명언까지 새겨놓았다지 않은가. 이것도 모자라 2007년엔 외날(삼정도)이던 칼을 양날(삼정검)로 바꿨다. 장군의 자리가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속뜻을 품고 있다. 장군이 된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새겨야 할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성곤, ‘조선시대 사인검 연구’, 국립민속박물관, 2007
조혁상, ‘조선조 인검의 상징성 연구’, <군사> 제62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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