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7년 신라 진성여왕이 하야를 선언합니다. 국정 파탄의 책임을 “과인이 부덕한 탓”이라고 돌리고 깨끗히 물러납니다. 여왕에게 아들이 2명 이상 있었지만 오빠의 서자(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진성여왕은 왜 자신사퇴, 즉 하야의 길을 선택했을까요. 진성여왕 시대의 신라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왜 서라벌 번화가에 ‘여왕이여~ 당신 측근들의 국정농단 때문에 곧 망할 것’이라는 벽보가 붙었을까요. 진성여왕은 역사가 김부식의 평가처럼 음란하고, 게다가 측근정치에 휘말려 나라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혼군이었을까요. 표면적인 기록을 보면 마냥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평가를 내려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진성여왕은 모든 책임을 지고 깨끗히 자리에서 물러났으니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07회는 신라 진성여왕 시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넘버 3’ 군주 진성여왕, 그녀의 ’하야의 변’입니다. 덧붙여 역사적으로 ‘넘버 3’ 군주로 공식 폄훼된 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또 누구일까요.
정확히 1128년 전인 888년(진성여왕 2년) 서라벌 번화가에 수수께끼 같은 벽보가 붙었다.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바하(鳧伊娑婆訶)”(<삼국유사> ‘기이편·진성여왕 거타지조’)
서라벌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다라니의 은어, 즉 수수께끼 같은 주문의 내용을 해석하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해석문이 나온다.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관작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우삼아간은 진성여왕의 측근에 있는 3~4명의 총신이고, 부이는 부호를 가리킨다.”(<삼국유사>·사진)
무슨 말인가.
‘나무(南無)’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다. 절대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나무망국’은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표한 것이다.
맨 마지막의 ‘사바하(娑婆訶)’는 앞의 주문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불교용어이다.
그러면 ‘소판’은 누구인가. 진성여왕의 숙부이자 정부(혹은 남편)인 위홍의 관작(신라 17관등 중 세번째)이다. ‘부이’는 진성여왕의 유모를 가리킨다.
정리해보자. 당대 신라는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과 애인 위홍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벽보의 내용은 ‘신라여! 여왕이여! 위홍과 부호 같은 3~4명 때문에 망할 것이다!’라는 저주문이다. 측근의 국정농단이 신라 1000년 사직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여왕의 즉위
그렇다면 진성여왕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진성여왕(재위 887~897)은 경문왕(재위 861~875)의 딸이며 헌강왕(재위 875~886)과 정강왕(886~887)의 누이동생이다.
정강왕은 재위 1년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한채 여동생(만·曼)을 후계자로 지목하는 유언을 남긴 뒤 죽는다.
“내 병이 위독해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구나. 내 후사가 없은 누이동생 만(曼)의 천성이 명민하고 골상이 장부 같으니 선덕·진덕의 예에 따라 옹립할 것이 좋겠다.”
원래 왕위계승 후보로는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삼촌인 상대등 위홍이 유력시 됐다. 그러나 정강왕은 여동생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 이가 바로 진성여왕이다.
사실 진성여왕의 오빠인 헌강왕 시대는 신라 1000년 사직 중에서도 최절정기로 표현된다. 즉 진성여왕 즉위하기 8년 전인 880년 9월9일 <삼국사기> 기록을 보라.
“헌강왕은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지금 민간인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覆屋以瓦不以茅)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게 사실이냐’. 대신들은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모두 전하 덕분’이라 입을 모았다.”
<삼국사기>는 “경주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신라의 망조는 이같은 전성기의 뒤안길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경주의 두 얼굴
진성여왕대의 기록인 ‘열녀 효녀 지은’ 이야기를 보라.
서른이 넘도록 혼인하지 않던 지은은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귀족의 집에 노비로 팔려간다.
그 대가로 얻은 쌀로 어미를 봉양하자 그 사실을 할게 된 어머니가 몹시 서러워 한다.
두 모녀가 껴앉고 운 사연은 진성여왕에게까지 알려졌다. 여왕은 이들에게 살 집을 마련해주고 곡식을 내려보냈으며, 군사를 보내 보호해주었다.
당시 신라 사회에 사치와 빈곤이 공존한, 심각한 빈부격차가 존재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하대로 접어든 신라는 이미 8세기말부터 귀족들은 격렬한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지방세력인 장보고까지 끌어들여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민애왕이 피살되는 따위의 불상사도 겪었다. 822년(헌덕왕 14년)엔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헌강왕 대의 ‘기와집, 숯불밥’ 타령은 어쩌면 신라의 급전 직하를 앞둔 폭풍 전야의 평화였을지도 모른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진성여왕은 즉위하자 마자(887년)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간 면제시켰다.
황룡사에서 백좌강경(百座講經·100명의 법사를 모시고 경을 읽는 법회)을 설치하여 설법을 들었다.
삼촌이자 애인(혹은 남편)인 위홍을 시켜 향가를 수집·정리한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 민심을 다잡고 선정을 베풀겠다는 진성여왕의 야심책이었다.
더욱이 진성여왕은 효녀 지은의 딱한 처지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준 속 깊고 정 많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위홍과의 간통이 발목을 잡았다. 사실 재위 기간(11년) 중 위홍과 정을 통한 기간은 불과 8개월이었다.
하지만 여왕이 사랑했고, 의지했던 위홍의 갑작스런 죽음(888년) 이후 정치에 흥미를 잃은 듯 하다.
여왕은 위홍이 죽은 뒤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888년 위홍의 죽음 이후부터 여왕은 몰래 아름답게 생긴 소년 두 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했다. 또 그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나라의 정책을 위임했다. 이 때문에 아첨하는 무리가 방자하게 뜻을 폈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상과 벌이 공평하지 않아,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삼국사기> ‘진성여왕조’)
888년 불어닥친 대기근이 여왕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이 무렵 서라벌에 측근들의 국정농단을 비판하고, 신라가 이들 때문에 망할 것이라는 벽보가 붙은 것이다.
각 지방은 ‘1년 세금 면제 기간’이 끝났지만 더이상 세금을 보내지 않았다. 여왕이 관리를 보내 “빨리 세금을 내라”고 독촉하자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년 사벌주(상주)에서 원종·애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기훤·양길·견훤·궁예·적고적 등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견훤이 신라의 서남부, 궁예가 강원·경기도를 석권하면서 신라의 실질통치지역은 경주 일대로 쪼그라들었다.
■신라왕조는 너무 늙었나
이 모든 책임을 진성여왕이 져야 할까. 아닐 수도 있다.
중국의 경우 300년을 넘긴 왕조는 없다. 이민족의 왕조인 청나라의 296년이 최고이고, 당나라(289년), 명나라(276년), 서한(西漢ㆍ209년), 요나라(209년) 등 길어봐야 200~300년 사이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백제(678년)·고구려(705년)·신라(992년)·고려(474년)·조선(518년)에 이르기까지 500년은 기본이다. 비교적 짧다는 발해도 228년에 이를 정도다.
그 가운데 신라는 끝판왕이다. 천년 가까이 버텼으니 너무 늙어 있었다.
왕조도 인간의 일생처럼 창업-융성-쇠퇴-중흥-쇠운-망국의 흥망성쇠를 걷지 않은가. 그 안에서 내부 모순과 갈등이 생기고 자연스레 왕조교체의 기운이 생기게 마련이다.
신라는 어떨까. 신라사회는 삼국통일 이후 200년 이상 지속된 장기간의 평화로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갖가지 모순이 병폐로 쌓여간 병들고 늙은 사회가 된 것이다. 진성여왕으로서는 이렇게 곪아버린 신라의 정치를 치유하기란 애시당초 어려웠을 것이다.
■최치원을 기용했으나…
물론 진성여왕도 문제였다.
특히 위홍과의 간통이 국정문란을 불렀다는 888년 벽서의 내용이 충격적이다.
물론 여기서 오해하면 안될 일이 있다. 당대에는 여왕과 삼촌인 위홍의 간통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라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근친혼은 얼마든지 허용되었으니까….
위홍은 진성여왕이 등극한 이후 단 8개월 만에 죽는다.
진성여왕은 자신이 ‘그토록 의지했던’ 위홍이 ‘그토록 빨리 죽자’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측근 정치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
유능한 참모를 구하지 않은채 유모인 부호부인과 총신 3~4명 같은 이른바 ‘비선 정치’로 급전직하 했을 가능성이 짙다.
진성여왕은 국정이 파탄나고, 더이상 국정을 수행할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여왕은 마지막까지 흐트러진 국정을 뒤돌리기 위해 안간힘 쓴다.
894년 최치원이 건의한 시무 10조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최치원을 아찬(6등급)으로 등용한다.
아찬이라면 6두품 신분이던 최치원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등급이었다.
진성여왕으로서는 당시 37살이자 당나라 유학파이면서, 참신한 개혁안을 들고온 최치원을 과감히 기용한 것이다.
최치원의 시무 10조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신분에 관계없이 유능하고 청렴한 인재를 등용하고 재정을 절감하는 정책을 건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몸부림은 끝내 수포로 돌아간다. 아마도 기득권층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최치원은 끝내 외직(태수)으로 밀려났다.
■진성여왕의 하야
국정능력을 상실한 진성여왕은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재위 11년 만인 897년 오빠(헌강왕)의 서자인 요(효공왕)에게 흔쾌히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여왕은 2년 전인 895년 효공왕을 태자로 옹립함으로써 장기집권의 미련을 버렸다. 그 과정이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895년 여왕은 몸과 용모가 뛰어난 요(효공왕)를 안으로 불러들여 그 등을 어루만지며 칭찬했다. ‘내 형제자매는 골격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이 아이의 등 뒤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진실로 오빠(헌강왕)의 아들이다. 즉히 이 아이를 태자로 세워라.’ 요는 그해 10월 태자가 됐다.”
그런데 실은 진성여왕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아찬 양패가 왕의 막내아들(季子)이다”(<삼국유사> ‘거타지조’)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2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왕은 자신의 아들을 후계로 고집하지 않았다. ‘쿨하게’ 오빠의 아들을 옹립하고는 표표히 옥좌에서 물러났다. 진성여왕이 왕위를 물려주며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897년 6월)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내 뜻은 결정됐다.”
왕위를 넘겨준 진성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양위한 이유를 전했다.
“신(진성여왕)의 조카 요는 15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그릇됨이 신라 종실을 일으킬만 합니다. 그로 하여금 나라의 재난을 진정시키고 있사옵니다.”
진성여왕은 역사적으로 ‘음란한 여왕’이자 측근 정치의 전형으로 혹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왕은 신라 역사상 재위 중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최초의 임금임을 아는 이는 적다. 새삼 여왕에 선언한 무조건 하야의 변이 떠오른다.
“모두 내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양위할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하일식, '선덕·진성여왕의 지도력과 시대 조건', <내일을 여는 역사> 제58호, 내일을여는 역사재단, 2015
권영오, '진성여왕대 몽민봉기와 신라의 붕괴', <신라사학보> 11, 신라사학회, 2007
이강식, '신라 세 여왕의 삶과 경영', <경영관리연구> 3, 성신여대 경영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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