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년 전인가. 석굴암에서 20여 곳의 균열이 보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안전진단이 펼쳐졌고, 유네스코 전문가까지 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보고 돌아갔습니다. 결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동을 보면서 옛 기록을 찾아보니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석굴암은 창건당시부터 부실공사였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분명히 나오는 기록입니다. 천장 덮개돌을 올릴 때 그 엄청난 무게의 돌을 9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려 삼등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삼등분 난 돌을 그대로 덮개돌로 마무리하고는 공사를 끝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일일까요. 전문가들은 석굴암 공사의 총책임자인 김대성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여러 각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부실공사의 결과물인 석굴암이 1300년이 지나도록 붕괴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체 어떤 연유일까요. 석굴암의 문제는 김대성의 부실공사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석굴암은 1907년 이른바 ‘재발견’될 때부터 수난을 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08회는 ‘석굴암 부실공사의 원흉은 김대성이었나’입니다.
“석굴암은 영원한 걸작이다. 동양문화가 최고조였을 때 그 영기(靈氣)를 살린 신라 사람들이 만들었다.”(야나기 무네요시)
조선 미술에 남다른 애정을 보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의 ‘석굴암 예찬론’이다. 그는 심지어 “석굴암을 회상하는 것 자체가 영원한 행복”이라고 했다.
하기야 국내 최초의 미술사학자였던 고유섭은 “인도를 버릴 지언정 세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한다던 영국처럼,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했다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완전무결한’ 석굴암에서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석굴암 내부, 본존불 머리 위 천장을 한번 쳐다보라.
천장 한가운데를 마무리한 연꽃 문양이 조각된 천개석(龕蓋·천장 덮개돌)이 보인다. 이 천개석은 돌을 돔의 형태로 원형으로 쌓은 다음 맨 마지막에 올려놓는 덮개돌이다.
그런데 지름 2.5m 가량의 천개석을 바라보면 ‘석굴암 답지 않은’ 균열선이 세 부분으로 갈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옥의 티’라고 하기엔 무시할 수 없는 흠결이다.
■김대성의 비겁한 변명?
석굴암 천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석굴암 창건 설화를 들춰보자.
숭례문 부실복구 논란이 거세고, 석굴암도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작금이라면…. 슬며시 웃음이 터질 지도 모른다.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金大城·?~774)이야말로 석굴암 부실공사의 원흉으로 지목돼 여론의 십자포화를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삼국유사> ‘효선·대성효이세부모’조에 나오는 창건설화를 한번 보자.
“석불 조각을 위해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龕蓋·천개석)을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石忽三分) 김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김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항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무슨 말인가. 요약하자면 석굴암 창건이 시작된 751년 이후의 어느 무렵, 공사가 한창일 때 큰 일이 터졌다.
본존불을 보호하기 위해 원형 돔을 쌓고, 맨 꼭대기에 얹을 덮개돌을 다듬다가 그만 돌이 세 조각 난 것이다. 분하게 여긴 김대성이 졸다가 천신(天神)의 도움으로 공사를 끝낸 다음, 천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것은 시쳇말로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김대성은 덮개돌이 삼등분이 났는 데도 모른채 하고 공사를 마무리했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삼등분’ 난 부실공사의 흔적이 13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역력하니….
김대성이야말로 부실공사의 원조이자 원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삼국유사>의 설화가 맞다면 김대성은 형사처벌감이 아닌가.
■왜 떨어졌을까
이 설화를 두고 숱한 연구자들이 설왕설래했다.
우선 덮개돌로 얹다가 9m 높이에서 떨어져 세 조각 났을 것이라는 설은? 9m에서 떨어진 돌이 달랑 세조각만 났을까. 납득하기 어려운 설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돌이 깨지자 분통을 삭이던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그냥 세 조각난 덮개돌을 그대로 얹었을 것이다? 이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공사책임자인 김대성은 진골귀족이었다. 아버지 김문량이 성덕왕 대에 국상까지 지낸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런데 석공들이 무슨 경을 치려고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세 조각 난 돌을 그냥 덮었다는 얘긴가.
다른 해석도 있다. 덮개돌이 안쪽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 천장 위 밖에서 들어 올리다가 떨어지면서 세 조각났다는 주장이다.
무슨 말이냐면 덮개돌이 천장에서 본존불 밑으로 추락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천장 위에서 들어 올리다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산산조각이 아니라 세 조각 난 이유로는 나름 일리 있어 보이는 주장이긴 하다.
그러나 그 또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앞의 어떤 경우에서도 다른 의문점이 생긴다. 김대성은 왜 세 조각 난 덮개돌을 새 것으로 바꾸지 않은 채 공사를 서둘러 마무리한 것일까.
■한국인 적당주의의 원조?
역시 추측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대목에서 ‘경덕왕과 표훈 선사’의 기록을 들춰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표훈대덕’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들이 없어 왕비까지 갈아치운) 경덕왕은 표훈 대덕에게 "'천제에게 아들 낳는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해달라"고 명한다.
그러나 천제를 만나고 돌아온 표훈의 응답은 절망적이었다. 딸은 낳을 수 있겠지만 아들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경덕왕은 다시 표훈에게 "제발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재차 부탁한다.
표훈이 천제를 만나 경덕왕의 청을 아뢰자 천제는 "아들로 바꿀 수 있지만, 그러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한다. 그 말을 들은 경덕왕은 "대를 잇는다면 나라가 위태로워도 좋다"고 한다.
마침내 경덕왕은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혜공왕이다. 그런데 혜공왕 때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결국 경덕왕의 소원대로 딸이 아들로 바뀌는 덕택에 후사를 잇기는 했지만, 나라는 어지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과 석굴암은 무슨 관련이 있다는 얘긴가.
경덕왕이 정처를 버리고, 후처인 만월부인과 재혼한 해는 743년이고, 김대성이 석굴암을 창건하기 시작한 해는 751년이다. 혜공왕이 태어난 해는 758년이다.
만약 석굴암이 혜공왕 출생 이전에 완공됐다면….
경덕왕은 석굴암을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도처로 삼았을 수도 있다.
혹 아들을 바라는 경덕왕이 석굴암의 창건을 재촉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공기를 맞추기 위해 삼등분된 덮개돌로 그냥 마무리 지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않아도 <삼국유사> ‘효선·대성효이세부모’에는 “김대성이 석굴암을 지은 후 표훈과 신림 등 두 성사(聖師)를 머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어쨌거나 조각난 천개석으로 그냥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곧잘 지적되는 ‘적당주의’를 탓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한국인의 고질병인 ‘적당주의’의 원조는 신라인이라는 소린가.
■진정한 삼국통합을 위해?
이런 억측도 나온다.
천개석(덮개돌)은 운반 중 단순사고로 균열이 갔다는 것. 그런데 ‘천신’이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점을 김대성에게 알려주면서 그대로 얹게 했다는 것. 무엇이 하늘의 뜻이냐.
즉 ‘진정한 삼국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하늘이 알려주려고 했다’는 것. 그래서 세 조각난 천개석을 그대로 설치하도록 했다는 것.
그러나 당시는 삼국통일을 이룬 지(668년) 80년이 지난 때였다.
더구나 ‘진정한 삼국통일을 위해’ 천개석을 세조각 냈다? 아무리 봐도 억지춘향 같은 감이 든다.
또 다른 추정도 꼽을 수 있다. 천개석이 완성 직후, 혹은 그리 멀지않은 시기에 모종의 이유로 균열됐을 가능성이다.
가정해보자. 지름 2.5m, 무게 20t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암석을 채취하고, 운반하고, 다듬는 과정에서 큰 충격이 가해졌다면?
이런 일련의 작업과정에서 매우 약해진 천개석을 천장에 올린 직후 균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사를 막 끝낸 직후, 본존불이 이미 자리잡고 있을 때 금방 올린 천개석에 균열이 생겼다?
만약 균열된 천개석을 다시 빼내 새 부재로 교체하는 작업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천개석을 들어내다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지진 가능성은?
또 다른 가정은 석굴암 완공 이후 지진이나 대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한 균열 가능성이다.
<삼국사기> ‘혜공왕조’에는 “779년 경주에 큰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100여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대성이 죽은 뒤(774년) 5년이 지난 때였다. 또 “797년(원성왕 13년) 동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졌다”는 기사도 있다.(<삼국사기> ‘원성왕조’)
사실 석굴암의 벽체는 많은 석재를 쌓아 조성했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구조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돔형 구조인 천장의 정상부에 얹은 천개석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물이다.
따라서 천개석은 지진의 진동에 의해 발생하는 내부의 응력에 가장 취약한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또 산이 무너질만큼의 대홍수가 일어났다면 암석과 토사가 일시에 밀어닥쳐 취약한 천개석을 짓눌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공사 도중에 균열이 생겼다는 <삼국유사>의 창건설화를 어찌 설명할 것인가.
김기흥 교수(건국대)는 창건설화가 공사 후 균열된 천개석을 보게 된 사람들의 ‘인식의 소산’이었을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다.
사실 완공 직후, 사람들의 발길이 아직 뜸했던 때의 지진(779년)이나 대홍수(797년) 등 자연재해로 천개석이 균열됐다고 가정해보자.
신라인들은 천장에 놓인 균열된 천개석을 보고 신비롭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본존불의 위용에 압도된 신라인들은 ‘깨진 채 설치된’ 천개석의 신비에 빠져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 이야깃거리들은 결국 ‘천신의 도움’이 가미된 설화의 형태로 굳어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 또한 그럴듯한 추론일 뿐이지만….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희한한 대목이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큰 탈이 날 부실공사였음이 분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13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붕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은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김기흥, <깨어진 석굴암의 천개석>, ‘역사와 현실’ 통권 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년
강희정,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일제 강점기 석굴암론>, 서강학술총서, 서강대출판사, 2013년
성균관대박물관,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석굴암·불국사·남산>,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전Ⅱ’, 2007년
김영, <석굴암 조성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배판적 고찰>, 부산대 석사논문,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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