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제 청동투구’, ‘동유럽제 황금보검’, ‘중국제(낙랑) 황금 띠고리’…. 거론한 문화재들은 외국산이 분명하죠. 그런데 셋 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국보(띠고리)와 보물(청동투구·황금보검)입니다.
좀 이상하다는 분도 있을 겁니다. 아니 한국의 국보·보물이라면 국내산이거나 한국인이 제작한 문화재라야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이 규정한 ‘국보·유물’의 개념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화재보호법 23조는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지정할 수 있다’면서 ‘보물 중에서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한국산’이라는 단서가 없죠. 한마디로 당대의 해외명품이거나, 혹은 그 유물의 특별한 상징성이 인정되면 외제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와 보물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경주에서 출토된 동유럽제 황금보검의 정체
대표적인 서양제 유물인 황금보검(보물)을 볼까요. 1973년 경주 계림로 도로공사 도중에 신라시대 고분 55기가 줄줄이 엮여나왔습니다. 그 중 14호분은 4~6세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었지만 같은 형식의 왕릉급 고분(금관총·금령총·황남대총·천마총·서봉총)처럼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소규모였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그 무덤에서 뜻밖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화살통과 금과 은으로 용무늬를 새겨넣은 말안장, 유리로 장식한 말꾸미개 등 295점이 확인됐는데요.
그러나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발굴 막바지에 군계일학의 유물이 노출됐는데요.
이것이 바로 황금보검입니다. 크기는 36㎝에 불과했구요. 칼의 몸집은 대부분 부식됐지만 칼집과 손잡이가 황금이었습니다. S자형·네모형·사다리꼴·나뭇잎·바람개비 등 윤곽을 만들고 그 속에 맑고 검붉은 석류석과 유리질을 녹여 넣어 장식했구요. 장식의 중간과 외곽에는 금 알갱이를 붙여넣었습니다.
■해외명품인 이유
이상하죠. 경주에서 출토된 황금보검을 왜 외국산으로 분류해놓았냐구요.
분명한 이유가 있죠. 이 황금보검은 신라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첫번째 근거를 대볼까요. 황금보검의 금속성분을 분석하니 구리의 비율이 3.0~3.3%에 달했는데요. 비슷한 시기 신라의 다른 무덤에 출토된 황금 제품의 구리 성분과 달랐습니다. 천마총·금관총·교동 출토 금제품 7점 중 6점의 구리 비율은 1% 미만이거든요.
반면 최근 보고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헝가리 출토 금제품의 구리 성분은 대개 2.8~4.8% 사이입니다.
계림로 14호묘의 황금보검 제작지가 적어도 신라산이 아니고, 오히려 동유럽제일 수 있다는 얘기죠.
아닌게 아니라 이 황금보검과 매우 유사한 칼의 일부가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의 쿠차(庫車) 키질(克孜이) 석굴벽화 입구 천장에 묘사된 인물의 허리춤 칼도 거의 흡사합니다. 이밖에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알타이, 투바, 신장 위그르 자치구, 이란 등의 석인상과 유물 등에서도 비슷한 칼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제작지가 과연 어디일까요.
사실 황금보검과 제작 기법이 비슷한 각종 유물이 유럽 전역에서 고르게 확인됩니다.
황금과 붉은색 석류석을 사용한 것은 동로마제국에서 기원한 건데요. 이 기법은 훈족의 발흥과 유럽 침략에 따른 민족 대이동 시대에 유럽전역으로 퍼졌답니다. 황금보검의 제작 기법은 동로마제국 또는 동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여러 이민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남자가 왜 나란히 누워있을까
동유럽산일 가능성이 큰 황금보검이 어떻게 신라의 경주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중국이나 고구려를 통한 수입품이거나, 혹은 중앙 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소그드·박트리아·에프탈 상인들과 거래한 해외명품이었겠죠.
그렇다면 황금보검과 같은 해외명품을 지니고 묻힌 계림로 14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이 고분은 남성 두 명이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둘다 키는 150~160㎝, 나이는 20~39살로 추정되었습니다. 왼쪽 피장자는 황금보검을, 오른쪽 피장자는 대도를 각각 차고 있었습니다.
이상하죠. 남자 두 명이 왜 함께, 그것도 나란히 누웠을까요. 연구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참 특색있는 조합으로 나란히 누운 두 남성의 정체를 연구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일단 두 피장자의 신분은 왕족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무덤의 규모가 소규모(3.5mx1.2m)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황금보검은 분명 당대의 해외명품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무덤 안에서는 무늬가 있는 비단도 확인됐구요. 화려한 문양의 비단벌레 날개를 장식한 최고급 화살통과 발걸이, 안장, 치레거리 등 말장식 및 말갖춤새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특히 용 문양을 한 말안장이 눈에 띄는데요.
용은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그럼 용문양을 새긴 말안장 등은 임금이 하사한 물품은 아니었을까요.
물론 나란히 누운 두 남자의 신분은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오른쪽 피장자(대도)보다 황금보검을 지닌 왼쪽 피장자의 신분이 더 높았겠죠.
다시 정리해볼까요. 두 남자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작은 규모의 무덤을 썼겠죠. 그러나 훗날 공훈을 세워 임금의 하사품을 받고, 황금보검 같은 해외 명품을 갖게 되는 영예를 누렸을 겁니다.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형제나 혹은 전우의 합장무덤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숱한 사연을 안고 출토된 황금보검이니 아무리 외국산이라도 보물 대접을 받을만 하겠죠.
■그리스제 청동투구가 대한민국 보물?
‘황금보검’은 그래도 신라 경주에서 출토된 외국산이니까 할 말 없겠네요.
대한민국 ‘보물’ 가운데 19세기말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에서 실제로 발굴한 그리스제 청동투구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저도 한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유물은 지금 이 순간 국립중앙박물관 2층 기증유물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니까요. 한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띄엄띄엄’ 볼 만한 유물이 아닙니다. 그리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이 어딥니까.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것도 1875년 독일 고고학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1814~1896)가 이끄는 고고학팀이 이 신전을 조사하다가 다른 수많은 전쟁유물과 함께 발굴했는데요. 엄연한 고대 그리스 유물이죠.
국립중앙박물관도 ‘서구 유물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보물)’라고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 청동투구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코린트에서 제작했으며, 고대 그리스 올림픽 제전 때 승리를 기원하면서 신에게 바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라 설명해놓았습니다. 그래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죠.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리스땅에서 발굴된 유물이 왜 이역만리인 대한민국의 보물이 됐을까요.
■“손기정에게 청동투구 선물하겠다”
1936년 8월 9일로 되돌아가 볼까요. 당시 24살의 손기정 선수는 27개국 56명이 경쟁을 벌인 마라톤 경기에서 당당히 1위로 골인합니다. 또 한 사람의 한국인인 남승룡도 3위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각 신문은 보름 이상 민족 자긍심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기사로 도배질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동아일보(8월16·18일)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립니다.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행되는 브라디니 신문의 사장이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에게 주고 싶다”면서 고대 그리스의 청동투구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통해 전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투구는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금품을 주고받는 행위가 올림픽정신(아마추어리즘)에 어긋난다는 IOC 규정 때문이었죠. 당시 동아일보는 “청동투구는 결국 우승자 ‘손기정’의 이름을 새겨 IOC와 독일올림픽위원회를 거쳐 베를린박물관에 기증됐다”고 전했습니다.
■50년을 돌고돌아 결국 손기정의 품에
해방 이후 손기정 선수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투구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마침내 재독교포의 수소문으로 제2차대전 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샤를로텐부르크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청동투구를 확인했습니다. 결국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맞은 1986년 독일(서독) 올림픽위원회가 손기정씨에게 “올림픽 정신에 따라 청동투구를 돌려주기로 했다”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환이 이뤄집니다.
그해(1986년) 9월 22일 청동투구는 꼭 50년 만에 주인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는데요. 손기정씨는 “금메달을 두 번 받은 격”이라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청동투구는 실제 고고학 조사에서 발굴된 생생한 그리스제 유물인데다 손기정 선수라는 역사성, 상징성이 덧붙여져 1987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됩니다.
이렇게 청동투구는 반환됐지만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IOC 금메달리스트 역사에 남아있는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이름과 국적이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공식 기록에는 아직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동메달리스트를 ‘일본 국적(JPN)의 기테이 손(손기정)과 쇼류 난(남승룡)’이라고 표기해놓고 있어요.
다만 10여 년 전부터 ‘기테이 손’의 프로필 세부내용에는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일제 치하에서 일본 이름으로 대회출전을 강요당했다는 내용의 설명문이 달려 있는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그 오욕의 역사를 완전히 지울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죠.
■중국제 국보의 비밀
서양제인 이 두 보물도 있지만 중국제라 할 수 있는 유물 중에 국보가 있는데요.
바로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발굴된 ‘금제 띠고리’입니다. 1916년부터 펼쳐진 일제의 평양지역 낙랑고분 조사사업의 경우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합니다.
‘기원전 108년부터 한나라 식민지가 된 한사군(漢四郡) 지역을 주로 조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일제는 ‘너희는 식민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타율성을 부각시키려고 낙랑고분 발굴에 혈안이 됐던거죠.
바로 첫해(1916년) 석암리 9호분에서 발굴된 유물 중 한국의 국보가 된 ‘순금 허리띠’가 있었던거죠.
이밖에도 전남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국보)도 기록은 없지만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중국에서 가져온 당나라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인천 강화 전등사 철종(보물)에는 북송 시대(1097년)의 작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중국종이라 할 수 있죠. 마침 올림픽 열기가 뜨거운 이때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홀로 전시되고 있는 청동투구를 모티브 삼아 다뤄본 ‘외국산’ 국보·보물 이야기였습니다.(이 기사는 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신용비 학예연구사, 이한상 대전대 교수 등의 도움말과 자료제공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왕은 절대 출입금지 지역”···‘화장실 고고학’의 은밀한 세계 (0) | 2021.08.17 |
---|---|
아무도 눈치못챈 세종의 ‘숨겨진 업적’…‘신의 한수’ 될 줄이야 (0) | 2021.08.09 |
바둑 간첩에 녹아난 ‘비운의 끝판왕’…개로왕의 가짜묘가 무령왕릉 위에? (0) | 2021.07.26 |
1763년 조선 외교관 오사카 피살사건…고구마 종자에 묻혔다 (0) | 2021.07.19 |
87년만에 싹 지워진 국보 ‘1호’ 숭례문 타이틀…일제 잔재 ‘말끔’ (0) | 2021.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