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제가 국보 청동거울인 정문경을 지정번호(국보 141호)로 찾으려다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문화재 검색란에서 ‘지정번호’로 찾을 수 있는 항목이 자취를 감춰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냥 ‘정문경’을 입력했더니 그제서야 ‘국보 141호 였던’ 숭실대박물관 소장 ‘정문경’이 검색되었습니다.
■59년 만인가, 87년 만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지정문화재 검색란을 살펴보니 ‘국보 1호=숭례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보물 1호=흥인지문’ ‘사적 1호=포석정’도 없었습니다. 그저 ‘국보 숭례문’, ‘보물 흥인지문’. ‘사적 포석정’으로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지난 2월에 쓴 기사를 떠올렸습니다.
문화재청이 올해 업무계획을 발표하면서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를 대폭 개선한다는 내용이었는데요. 문화재 지정번호는 행정편의상 내부 관리용으로 두고요. 보도자료 같은 공문서나 홈페이지, 교과서와 도로표지판, 안내판 등에서 사용을 제한하거나 중지한다는 것이 개선안의 골자였습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지정번호’의 시행령 개정안을 6월29일자 관보에 공시했는데요. 이로써 1962년 문화재보호법 시행으로 시작된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는 59년 만에 사실상 사라지는 셈이라는데요.
하지만 저는 이 제도가 87년 만에 폐지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실제로 지정문화재가 처음 도입된 것이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이었으니까요. 궁금증이 샘솟습니다. 일제는 지정문화재 제도를 도입하면서 문화재의 중요도에 따라 번호를 매긴걸까요. 또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지정문화재(유형)를 ‘국보’ 없이 ‘보물’과 ‘고적’(사적) 등으로만 분류했습니다. ‘국보’는 왜 한 점(건)도 지정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굳이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을 보물 1·2호로,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지정했을까요.
■편의상 붙인 번호일까
그 내막을 들춰볼까요. 1933년 12월5일이었는데요, 일제가 아주 특별한 조치를 취합니다.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는 법인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한 건데요.
이 법에 따라 문화재 보전과 지정 등을 심의하는 지금의 문화재위원회와 비슷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듭니다. 보존회는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 쇼조(牛島省三)를 비롯해서 25명으로 구성했는데요.
한국인은 5명이 들어갔습니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가 포함됐고, 학계에서는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습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
총독부는 이듬해인 1934년 8월 25일자 <관보>(제2290호)의 고시를 통해 1차 지정문화재를 발표합니다.
그 관보를 봅시다. ‘보물 1·2호는 남대문과 동대문, 4·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 6·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 9·10·11호는 개성 첨성대·개성 남대문·개성 연복사 등’으로 붙였네요.
이것만 보면 총독부가 문화재의 중요도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던가, 또는 다른 의도를 갖고 번호를 붙였는지 알 수 없죠. 그저 지정 순서에 따라, 혹은 비슷한 장소에 있는 문화재들을 묶어 ‘편의상’ 관리번호를 붙였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저도 그런 줄 알고 있었죠.
■풍전등화에서 살아남은 숭례문·흥인지문
그런데 19년 전인 2002년 저는 오다 히데하루(太田秀春)라는 연구자가 서울대에 제출한 석사논문(‘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고적조사와 성곽정책’)을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이 논문에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이 왜 보물 1·2호가 됐는지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있었습니다.
그 논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의 결과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됩니다. 그러자 서울 거주 일본인들의 모임인 일본거류민회는 40만~50만명을 수용하는 용산 신도시 건설을 포함한 대대적인 도시계획을 세웁니다. 계획에 따르면 남·동·서대문 등 서울의 관문은 모두 철거대상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조선인의 배일감정을 부추길 기념물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차에 도시계획이 발표되자 4대문은 교통의 장애물로 치부됐습니다. 심지어 당시 일본의 조선주차군사령관이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는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예산이 없어 이전은 불가능하니 포격으로 파괴해버리자”는 극단론까지 제기됐습니다. 숭례문 등은 풍전등화에 놓였죠.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당시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 등이 반대한 겁니다.
“남대문(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입성한 문이니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동대문(흥인지문)은 어떨까요.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가 입성했다”는 사연 때문에 보전됐습니다.
실제로 1927년 간행된 조선여행안내서(<趣味の朝鮮の旅>)’를 보면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고 소개합니다.
■‘나는 서대문이올시다.’
반면 일본의 전승기념물이 아닌 서대문(돈의문) 등은 1915년 속절없이 철거됩니다.
1915년 3월4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돈의문(서대문)의 철거를 의인화한 ‘나는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도로개설 때문에 서울의 성문 8곳, 즉 8형제 중 둘째되는 돈의문이 영원히 철거된다”고 보도합니다. 비단 서울뿐이 아닙니다. 현무문·칠성문·보통문·모란대·을밀대·만수대 등 평양성의 각 성문과 누각 역시 청·일전쟁(1894~95년) 당시 일본군의 승전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잘 보존됐습니다.
예컨대 현무문은 “청·일 전쟁 때 일등졸인 하라다 주키치(原田重吉)가 비 같은 탄환 아래 돌진해서 문을 연 곳”이고, 보통문 역시 “청·일전쟁 때 노쓰 미치쓰라(野津道貫)의 사단 본대가 진격해서 평양을 점유한 곳”이라는 이유로 대접 받았습니다. 연광정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이 회담했던 곳”이어서 보존됩니다.
결국 일제는 숭례문 및 흥인지문을 문화재적, 혹은 미술사적인 가치를 인정해서 보물 1·2호로 지정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승전문’이라는 점 덕분에 지정문화재의 투톱이 된 겁니다.
■포석정은 왜 고적 1호가 됐을까
그럼 경주 포석정은 왜 ‘고적 1호’가 됐을까요. 이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삼국사기>는 “927년 음력 11월 신라 경애왕(재위 924~927)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했죠. 일제는 가장 지우고 싶은 신라의 흑역사를 굳이 ‘고적 1호’로 삼은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경애왕이 정말 그랬을까요.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 1000년 사직을 나락으로 빠뜨렸을까요. 일단 927년의 상황을 짚어보죠.
경애왕은 두 달 전인 927년 9월(음력)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하자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고려 왕건이 구원병 1만 명을 내줬습니다.
그러나 구원병이 미처 경주에 도달하기도 전에 후백제의 견훤왕(재위 892~935)이 침략합니다. 게다가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때가 음력 11월이었습니다. 여기서 합리적인 의심이 들죠. 아니 아무리 정신나간 왕이라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한겨울에 노천에서 놀자판 먹자판을 벌였을까요.
<화랑세기>는 ‘포석정’을 정자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포석사(祠)’라고 표현합니다. 포석정 주변에서는 포석이라는 기와편도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 포석사에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은 문노(文努·8대 풍월주·재임 579~582)의 화상을 모셨다고 하구요. 또 포석사에서는 귀족들의 길례(吉禮)도 열렸는데요.
문노의 혼례식이 열릴 때 진평왕(재위·579~632)이 친히 포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구요. 또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인 김춘추와 김유신(595~673)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바로 포석사였답니다.
그렇다면 경애왕은 어떨까요. 아무렴 술판을 벌이려고 한겨울에 포석정으로 갔을까요. 아닐겁니다. 아마도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갔겠죠.
그곳에서 1000년 사직의 보존을 빈 다음 음복을 하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겠죠.
그런 포석정에 일제는 물이 드나드는 출수구도 없이 괴상망측하게 복원해놓고는 ‘고적 1호’라 한 게 아닐까요. ‘신라의 망국=대한제국의 망국’으로 여기려는 일제의 숨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하겠죠.
‘너희는 적이 쳐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 퍼마시고 놀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를 은연 중 심어주려 했을 겁니다. 아, 덤으로 후백제 견훤왕의 잔인무도까지 부각시킨거죠. 이런 해석이야말로 견강부회가 아니냐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른바 임나일본부 유적을 대거 고적으로…
1933년 8월11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볼까요. 조선총독부가 지정문화재 제도의 도입을 골자로 한 ‘보물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하면서 국가(일제)가 관리해야 할 문화재의 범위를 규정했는데요.
“중국의 문화를 수입하여 이것을 일본에 전한 조선사의 변천, 고대 일중(日中)관계를 천명하는 유적 등을 국가(일제)관리 하에 영구히 보존한다”고 했습니다.
이 무슨 뜻인가요. 조선의 독창적인 역사를 보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문화를 수입해서 일본에 전한, 이른바 ‘일본과 중국 관계의 역사’ 위주의 문화재를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1938년 11월26일 기사를 보면 좀더 명확해집니다.
“(지정문화재) 101종을 새로 지정했다.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 해서 주목을 끈다”고 했습니다. 그래놓고 ‘창령 화왕산성·창녕 목마산성·김해 분산성·함안 성산산성·김해 전 김수로왕릉·김해 전 수로왕비릉·김해 삼산리고분·고령 지산동고분·창녕고분군 등’을 등재했는데요.
어떻습니까. 등록사유가 ‘내선일체를 뒷받침하는 임나(任那)관계 고적’이라고 분명히 기재했죠. 그 지긋지긋한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깊은 유적들이라고 해서 지정해놓은 겁니다.
■“식민지에는 국보가 필요없다”
마지막 궁금증이 있죠. 일제는 왜 조선의 문화재에 단 한 점의 ‘국보’도 없이 보물과 고적. 천연기념물만 지정했을까요. 뭐 안봐도 비디오죠. 일제가 줄기차게 주장한게 ‘일본과 조선이 한몸’이라는 ‘내선일체’잖습니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거죠.
문제는 이렇게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가 해방 후에도 아무런 비판없이 답습됐다는 겁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지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지정한 거죠. 이때 보물 1·2호였던 남대문과 동대문은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고적 1호였던 포석정은 사적 1호가 된겁니다.
어떻습니까. 문화재 지정 번호 제도가 올해 안으로 사실상 폐지된다고 하죠. 그렇다면 앞으로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금방 사라져버리겠네요.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안됩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수십년, 수백년, 아니 수천년이 지나도 80년간 가까이 숭례문, 흥인지문, 포석정을 자랑스레 수식하던 ‘1호’는 일제가 붙인 타이틀이었다는 사실을….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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