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무대는 분명치 않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은 문장과 극한적인 긴장감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의 영관을 획득하기에 족하다고 보겠다.”
 경향신문 1965년 1월 1일자와 4일자는 그 해 경향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평 및 당선자 소감을 싣고 있다.
 앞에 인용한 심사평은 소설 부문 당선작인 조세희의 <돛대없는 장선(葬船)>(상금 2만원) 심사평이다. 당시 심사를 맡은 황순원·김동리 작가의 심사평을 더 보자.
 “남은 세 편에서 <장군의 개>는 걸하사’와 그의 아내의 궁상에 대한 과장적인 묘사가 작자의 목적의식을 앞세우는 느낌이었고, <물래도장경>은 가장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편이나 문장세련이 부족했고~애정관계에 모순점이 있어 당선의 영예를 <돛대없는 장선>에 돌리게 됐다.”

 

 

 

 

 

 

 

 

 

 

 

 

 

 

 

 

 

 

 

 

■“숱한 파지만을 남기기 일쑤다”-조세희 작가 


 경희대에 재학 중 당선한 조세희 작가의 당선소감도 흥미롭다. 앳된 모습의 사진이 게재된 작가의 소감을 한번 읽어보라.
 “나는 이따끔 어떤 의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안의 것을 어떻게 밖으로 내놓는데 성공했을까 하는 점이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지 않는다. 늦가을의 풍경 앞에서 영성의 고갈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 깊은 세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 아닌가. 나도 그들처럼 나의 안에 깊은 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다. 비록 그것이 추론을 거치지 않은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계속해서 정신상의 문제에 관심하는 이상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세계로 가는 통로를 알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책상 앞에 다가 앉았을 때마다 숱한 파지만을 남기기 일쑤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 지 열(列)의 뒷자리에 선 마음 초조할 뿐이다.”
 조세희 작가는 암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병실 한구석에서 당선작인 <돛대 없는 장선>을 썼단다. 그는 10년의 긴 공백기간을 거친 후 ‘난장이 연작’ 시리즈를 발표하고 1978년 12편을 모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펴낸다.
 ‘난장이’는 1970년대 당시의 억압·소외받는 계층의 신체적 불구성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기호이다. 난장이는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바둥거리면서도 희망의 ‘작은 공’을 쏘아 올린다.
 그러나 난장이 아버지는 일상의 삶에서 늘 지는 전쟁만을 치른다. 꿈도 꺾인 난장이는 결국 굴뚝에서 투신자살함으로써 삶을 마치게 된다.
 조 작가의 난장이 연작시리즈는 1970년대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였던 빈부와 노사의 대립을 극적으로 제시하는 현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일말의 희망을 좇아 작은 공을 쏘아올리지만 결국 좌절하고 마는 ‘난장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5년 1월 1일 경향신문은 바로 조세희 작가의 ‘고고성(呱呱聲)’을 기록한 역사서라 할 수 있다.

 

1965년 1월1일자에 실린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사고. 조세희(소설) 김종해(시) 백승철(평론) 권용철(동화) 등이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김종해 시인
 그 해 시 부문 당선작은 김종해의 <내란(內亂)>(상금 1만원)이었다.
 심사를 맡은 조지훈·박목월 시인은 “<내란>은 작자의 혼란된 의식내면의 내란을 표출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라면서 “간결하고 정확한 수사는 이 시인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김종해의 당선소감은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라는 시작되고 있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 대맥(大麥)의 푸른 바람이 불어와서. 한모금씩 물과 지팡이에 의지하여 광막한 사막을 방황하는 모세의 의지를 보고도 울었으니까. 때론 우매한 동키호테의 검을 보고도 흥분했었어. 그로부터 불빛과 모래와 남루가 흐르는 제기천 변을 헤매는 한 낯선 사내를 나는 자주 만났어. 밑바닥 물이 썩어있는 소택 아래서 그의 눈은 검고 불길하게 나의 전신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나는 그 분을 존경해. 술집에서 혼자서 잔을 기울이지. 그 분은 코린 윌슨처럼 나를 자꾸 불러내지. 정말 간밤엔 잠을 자지 못했어. 대맥의 푸른 바람이 불어와서. 4월이 되면 내게 또 한 개의 불을 가져다 줄 신의 전령사를 만나게 돼. 나의 아름다운 걸작이기를 기구(祈求)해주게.”
 만약 조세희·김종해 작가가 지금 이 순간 당시에 썼던 당선소감을 읽으면 어떨까.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쓴 소감이었을텐데…. 
 그 해 신춘문예에서는 문학평론에서 <현대 문학의 철학적 기초>(백승철), 동화에서 <들국화>(권용철)의 당선작을 냈고, 희곡에서 <성야(聖夜)>(오혜령)·<통나무다리>(고동율) 등의 가작을 냈다. 당대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황순원·김동리(소설)와 조지훈·박목월(시)은 물론, 백철·이어령(문학평론), 마해송(동화), 유치진·여석기(희곡) 등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65년 1월1일자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휘호(근면검소)와 가족사진.  

 ■을사조약 60년의 비화
 이렇듯 한국 문단의 큰 별들이 뜬 50년 전의 1월 1일이었지만 그 해, 험난한 파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지(1905년) 한 갑자가 돌아 다시 을사년이 된 1965년이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바로 그 ‘을사년’에 다시 한일회담의 조약을 눈앞에 둔 것이었다.
 경향신문은 1월1일자에 ‘하필이면 왜 을사년에….’라는 유감을 표하면서 60년 전에 체결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비화, 즉 ‘을사비화’를 전한다.
 “1905년 11월 9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명전권대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와서~한국을 먹기 위한 가지가지 압력을 가해왔다. ~그들의 강요로 기어이 11월17일 경운궁(덕수궁) 내에서 내각회의를 열었다. 이토 등이 번갈아 위협하는 가운데 5시간이나 회의가 계속되었으니 끝을 맺지 못했다. 고종은 ‘대신들이 알아서 하라’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심한 나라가 아닌가. 언필칭 황제라는 분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대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니 말이다. 이후의 상황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침략의 원흉은 마치 죄인을 다루듯 대신들에게 ‘가(可)부(否)’를 따졌다. 애초에 왜놈과 내통하던 이완용 학부대신을 비롯하여 이지용 내부, 이근택 군부 등 대신들이 즉각 가(可)로 적었으나 민영환(탁지부), 이하영(법부) 등은 부(否)자를 썼다.”
 이밖에 농상공부대신인 권중현과 외부대신 박제순도 손을 들고 말았다. 역사는 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 등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마지막 고비는 총리격인 한규설 참정대신이었다. 육군 부장을 지낸 그는 군복차림에 칼을 차고 참석했다. 분을 못이긴 한규설은 칼을 벗어놓는 것을 깜빡 잊고 고종의 침전으로 뛰어들어갔다. 교활한 이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너희 나라 법으로는 신하가 칼을 차고 임금 앞에 가면 역적 아니냐. 파직하라.’ 이토는 고종을 물고 늘어졌다. 결국 한규설이 내몰리고 나라파는 일은 눈깜짝할 사이 끝났다.”
 경향신문은 이 비극적인 ‘을사비화’만 단순 전달하지 않았다.
 ‘비극의 초장은 이 때부터(을사조약) 비롯됐고, 비극의 종장은 60년 만에 한일회담으로 매듭짓는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한국을 좋은 나라로 만들어주겠다’는 이토의 감언이설에 백성들이 환영의 대열에 섰다. 그러나 조약체결 소식에 종로상가의 문을 일제히 닫고 항의했다. 선비들은 통곡하며 거리를 누볐고 지금의 데모에 비교될 민요(民擾)의 바람으로 거리는 들끓었다.”
 경향신문은 1965년 을사년에 체결될 가능성이 짙었던 한일회담을 제대로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1월1일자 신문부터 어려운 서민경제를 우려하는 기사가 실렸다. 새해벽두부터 줄줄이 교통요금 등 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간난신고의 예고편
 “새해에는 흐뭇한 이야깃거리만 이 돋보기에 바춰지도록 사회 구석구석까지 명랑해지기를 여러분과 함께 소망합니다.”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들은 인기가십란인 ‘돋보기’ 란에 1965년 한 해에는 보다 밝은 뉴스만 전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애써 마련한 신년 특집기획의 내용을 보면 독자들에게는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예고편이었다. 1월 1일자 기획기사 ‘새해의 가계부’는 ‘도사리는 물가…움츠린 부엌’이라는 부제로 더욱 팍팍해질 백성들의 삶을 전망했다. 
 “가장 두려운 것이 곡가 사정이다.~절량 농가의 속출과 함께 보릿고개인 5월에 접어들면 쌀값이 가마당 4500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절량농가(양식이 떨어지는 농가)와 보릿고개의 사연이 당대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웅변해주고 있다.
 신문은 1965년 1년 간의 물가상승률은 30%가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6월이 되면 식량파동과 함께 물가소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보리값도 3500원 선을 넘을 것이다. 새해부터 철도요금은 여객운임이 35% 올랐다. 서울~부산 간 456원(특급 3등)이던 게 1월1일부터 604원으로 껑충 뛰었다. 앞으로는 기차여행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게 되엇다고 한숨부터 쉰다.”
 이밖에도 1월 15일부터 버스·합승·택시 요금이 30~100% 씩 오른다고 했다. 시내버스요금이 5원→8원(60%), 시외버스요금이 1㎞ 1원10전→1원50전(36.3%), 시내합승요금 10원→15원(50%), 택시 기본요금 30원→40원(33.3%), 택시추가요금 500m 당 5원→10원(100%) 씩…. 신문은 “6000원짜리 월급쟁이(5인 가족 기준)의 월평균 가계지출을 계산해보니 한달에 4930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쌀 한가마(3250원) 등 음식물비가 6250원, 주거비 500원, 전기요금 300원, 연탄값 480원, 의료비 1000원, 교통비 1400원, 잡비 1000원 등…. 한달에 4930원의 적자를 기록한다. 눈물겨운 결과다. 해방 이후 1964년까지 물가는 약 2788배 뛰었다.”

 

   ■스타부부의 선행
 그렇다고 희망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경향신문은 1945년생 해방동이인 대학 모범생 29명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대담하면서 이른바 ‘3행꿈’을 받아 게재했다.
 기사의 제목은 ‘다음 세대는 이들의 두 어깨에-나의 미래상’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되겠다”(경희대 물리학과생) “농업의 후진성을 탈피하고 농업개발을 위한 엔지니어가 되겠다”(충북대 농대생) 등 거창한 포부에서부터 “소녀의 꿈을 이루겠다”(고려대생) “예쁜 마음 키우겠다”(숙명여대생)는 소박한 꿈까지 젊은이다운 ‘3행꿈’이 터져나왔다.
 1월1일자 기사 가운데 ‘스타부부와 스타가족이 불우이웃을 찾아가는 기획’도 흥미로웠다.
 예컨대 1964년 11월14일, 세기의 결혼식으로 화제를 뿌린 신성일·엄앵란 부부는 사과 궤짝을 들고 중부병원을 방문했다.
 “신(성일)군이 직접 사과궤짝을 들고가서~어린 환자는 일어나 앉을 기력조차 없었다. 엄(앵란)양은 베개를 바로 베개 해주고 이불을 더독거려 덮어준 다음 그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또 신영균과 그의 노모(신순옥)는 정릉의 양로원을, 김진규-김보애 부부는 서울 도원동 마루턱의 혜심고아원을 각각 찾아 불우이웃을 돌봤다는 기사를 실었다. 1월1일 사회면 톱기사는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1월 중에 개통된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새출발의 소망이 틔었다’는 것이었다.
 사회부 기자들이 ‘돋보기’ 란에서 기원했듯이 그나마 밝고 활기찬 뉴스가 사회면을 장식한 것이다.(끝)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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