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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그 때

'어떻게 살아갈까'…비참한 해방공간의 삶

 “못살겠다 못살겠다 하면서도 죽지못해 사는 것이 살림이요.~내일 일이 어찌될지 모르면서 살아가지요.”
 경향신문은 1947년 11월 27일자부터 ‘어떻게 살아갈까?’를 주제로 원고지 4~5장 분량의 시리즈를 시작했다. 주제에서 알 수 있듯 해방은 됐지만,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미군정 시절의 암울한 분위기가 묻어나온다. 각 직업별로 한 사람씩 등장시켜 해방공간의 비참한 삶을 생중계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1947년 11월 27일자부터 '어떻게 살어갈까'랄 주제로 미군정체제 하의 비참한 생활상을 시리즈로 전했다.

 ■‘어떻게 살아갈까’
 11월27일 첫번째로 나선 사람은 ‘차부편(車夫篇)’의 길삼룡씨(37)였다. 차부는 소나 말이 끄는 수레를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다. 당시엔 ‘구르마꾼’이라도 했다.
 이날 길씨를 인터뷰한 기자는 “극도로 심각해지는 도탄인생(塗炭人生)은 좀처럼 해결될 가망성조차 보이지 않는다”면서 “대형 미군트럭의 질주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추위에 떠는 길씨를 만났다”고 설명한다. 길씨는 “여섯식구 살림의 1년간 돈벌이는 그 절반을 김장철 장작철에 벌어야 한다”고 “살길이 막막하다”고 토로한다.
 28일은 ‘전재민(戰災民)’ 편이었다. 전재민은 태평양전쟁 등의 와중에서 집을 잃고 떠돌거나, 또는 끌려갔다가 해방 이후 돌아온 전쟁이재민을 뜻한다.
 기자는 동소문동 산모퉁이 방공호의 움 속에서 살고 있는 전재민을 만났다. 해방 후 만주에서 네 식구가 왔다는 전재민은 “누가 기다리기나 한듯 찾아온 동포에게 방 한칸 내주지 않은 동포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면서도 쓰디쓴 농담을 던졌다.
 “온돌이 없으니 나무걱정이 없고, 번지가 없는 집이니 세금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입니다.”
 ‘학교편’(11월 30일)을 쓴 기자는 첫 추위가 몰아치는 날 아침 등교를 하는 국민학교 아동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7~8살 되는 국민학생들이 회현동의 어떤 큰 양옥집 앞에서 무엇인가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기자가 ‘무얼 보고있냐’고 묻자 소년 하나가 말했다. ‘저 집의 유리창에는 김이 서려 있잖아요.’ 상급생인 듯한 여학생은 ‘저 김은 방안이 덥고 밖이 추워서 서린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기자는 무심한 소년소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자는 연료난으로 3000여 학생들이 2부제 수업을 하고 있는 남산국민학교를 직접 찾아가 김종현 교장선생을 인터뷰했다. 그러면서 “고생살이는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철모르는 어린이들의 고난에 찌들어가는 모습이 무엇보다 뼈가 저리다”고 안타까워한다.

1947년 당시 남조선 경제가 세계에서도 최악임을 알리는 경향신문 1947년 12월10일자. 그 기사 바로 밑에는 무역수지가 95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바로 석탄기근으로 공장가동이 어려워 탄식하고 있다는 내용도 보도되고 있다. 온통 암울한 소식들이다.

 ■외나무다리로 절벽을 건넌 것처럼…
 ‘노점상인편’에 나오는 이명숙씨(30)는 ‘초코렛 나부랭이 섞인 양담배 목판을 단하나의 밥줄로 알고 손님을 부르는’ 상인이다.
 그는 기자가 “어떻게 살아갈거냐”고 묻자 금방 되물었다.
 “글쎄요.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신세한탄을 한다.
 “일본땅에 살다가 독립된다는 꿈같은 소리에 고향땅을 밟은 것이 어제 일 같은데~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요.~조선물건도 아닌 물건으로 밥을 먹자니 괴롭고 남부끄럽지만 어찌합니까.”
 거리에는 고학생들이 넘쳐났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배움을 향한 열망은 뜨거웠다.
 12월 3일의 ‘고학생(苦學生)’ 편은 38도선 때문에 고향(평북 정주)에 가지못하고 서울에서 신문팔이를 하는 여자 고학생 최원희양(18)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8도선이 생겨 고향에도 못가고 학교도 오지 않고…. 작년(1946년)까지는 인편으로 학비도 받고 소식도 전했는데, 이제는 단념했어요.”
 기자는 “38선의 원한과 독립이 못된 시름이 나이 어린 여학생 최양에게 더욱 뼈아프게 매질한다.”고 안타까워한다.
 ‘관리편’(12월4일)을 쓴 기자는 “해방 이후 조선 땅에는 기다리는 독립은 간데없이 뜨악한 새 술어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고 전한다.
 그 중에도 ‘탐관오리’라는 말이 떠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미관말직의 청념한 관리를 소개하면서 그의 항변을 전한다.
 “탐관오리, 모리배라고 비난하지만 한번 우리 집에 와서 자세히 보시요. 석구둘은 준비없이 겨울을 만나 맨주먹으로 오돌오돌 떨며 좁은 방구석에 모여 앉아~한달에 3000원 밖에 안되는 월급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외나무 다리로 절벽을 건넌 것처럼 아슬아슬하오.”

헬믹 미군정청장 대리는 "절전으로 암흑을 방지하자"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당시 북조선이 남조선에 보내는 송전량이 갈수록 줄고 있을 뿐 아니라 남조선인들이 보낸 전기량의 5할 이상을 초과사용했다는 것이다. 헬믹은 "이렇게 제한량을 초과한다면 전기장차와 송전선이 손상되어 전기없은 세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머니는 마르고 궁끼가 끼어’
 12월6일의 ‘예술가편’은 예술가의 냄새가 나는 내용이다.
 “숙명적으로 불운한 족속…. 그 누구보다 온갖 학대와 고난을 겪었던 예술가라는 것이 해방 직후 예술의 황금시대라도 찾어온 듯 기뻐 날뛰었으나…. 그 때의 기쁨이 도리어 화가 되어 이제는 가난과 번뇌로 이어져 더 할 수 없는 침체의 나락에 빠져있다.”
 기자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 거리의 ‘사롱’인 다방밖에 없지만 차값이 보통 50원이니 친구라도 만나 떠들기라도 하면 400~500원은 앉은 자리에서 날라간다”고 전한다.
 ‘회사원편’(12월 7일)은 ‘일제가 분수도 없는 큰 욕심을 부려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이후 된서리를 맞은’ 회사원의 초라한 신세를 전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월부 세간에 월부 양복 월부 구두 등으로 제법 서방님 행세를 하던 것인데 이 때(태평양 전쟁)부터 차차 주머니는 마르고 궁끼가 끼기 시작하여 오늘에는 요모양 요꼬락서니로 여지없이 전락했다.”

 

 ■세계 최악의 남조선 경제 
 사실 경향신문이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시리즈를 진행할 무렵의 해방정국은 암울하고 끔찍했다.
 예컨대 12월10일자는 “남조선 경제가 세계에서 최악의 상황‘이라는 소식을 구체적인 수치로 전하고 있다.
 “세계주요 국가의 도매물가 지수로 보건대 1937년을 100으로 할 때 1946년의 지수는 미국은 171, 영국은 178, 일본은 141, 프랑스는 881, 이탈리아는 5310, 중국은 1,911,000이다. 남조선은 68,641이다. 세계 2위라는 반갑지 않은 지위를 점령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임금지수였다. 다음 기사내용을 보라.
 “임금지수는 미국이 210, 영국이 166, 프랑스가 490, 일본은 2600이고, 중국은 3,200,200이다. 적어도 물가지수와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조선의 임금지수는 16,730이다. 남조선의 경우 임금지수가 물가지수의 4분의1 밖에 안되는 기행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신문은 “이로써 남조선의 경제상황은 최악이며 봉급생활자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지를 볼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니 경향신문 시리즈 ‘회사원편’에서 왕년의 월급세간·월급양복·월급구두 등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도 사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날짜(12월10일) 기사에는 그 해(1947년) 9월까지 무역적자(수입초과)가 9500만원에 이른다고 전했다. 신문은 그러면서 “주요수입품이 국내공업품을 진흥시킬 생산원료가 아니라 사치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개탄한다.
 “수출품은 해산물, 한천, 홍삼, 잠사 등 2억5000만원이고, 수입품은 생고무, 지류, 성냥, 설탕, 유리, 호초, 모직물, 세탁비누, 식염 등 3억5000만원이다.”

경향신문 '어떻게 살아갈까' 시리즈의 '예술가편'. 신문은 "예술가들은 어떻게 살아갈까는 문제보다 어떻게 사상(思想)하며, 어떻게 창조(創造)하느냐가 더 현실적인 문제"라면서 "예술인은 가난과 번뇌를 극복하고 조선문화계 전체를 뒤덮고 있는 타성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시내는 암흑천지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전력난이었다.
 해방 이후 석탄과 전기 등 에너지원이 많았던 ‘북한’은 협의를 통해 ‘남한’에 일정량의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1948년 5월14일)
 하지만 갈수록 공급이 줄어들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남한은 전력부족 현상에 시달렸다.
 11월26일 민정정관 안재홍씨는 기자간담회에서 전력확보의 현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남조선의 전력사용량은 약 10만㎾가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북조선으로부터 송전량이 줄고 또 석탄부족으로 화력전기도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이튿날인 27일 미군청정 장관 대리인 찰스 헬믹 대장은 남조선의 절전을 요망하는 담화문까지 발표한다.
 11월 28일자 신문은 ‘절전으로 암흑방지-동포애를 살려 전기를 아껴쓰자’는 제목으로 헬믹의 담화문을 보도한다.
 “금년(1947년) 6월8일 체결된 협정을 보면 북조선이 남조선으로 보내는 전기량이 명기되어 있는데, 이 전기량의 5할 이상을 초과사용했다. 이렇게 제한량을 초과한다면 전기장차와 송전선이 손상해서 장차 전기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헬믹의 담화는 “애국자인 조선인은 필요한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는 범죄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예컨대 부산의 공장가는 정전과 연료부족 등으로 거의 휴면상태에 놓였다. 12월10일자 신문을 보면 ‘탄식하는 공장가의 연통’이라는 제목으로 전력난·연료난으로 공장이 멈추었음을 알리고 있다.
 “국가산업의 발전을 상징하고 무럭무럭 검은 연기를 내뿜는 입립(林立)한 연통도 수일 전부터 공연이 하늘로 높이 솟아 탄식을 하고 있는 듯하다. 부산의 영도 조선중공업을 비롯하여‘조선방직 등 크고작은 20여개 고무공장은 하루 조업능률이 70~90%나 저하되어 있고 문을 닫는 공장이 속출하고 있다.”
 12월4일자 신문을 보면 미군정청은 서울 시내의 암흑상태를 타개하고자 각 부대 사령관을 소집, 전력의 절약을 촉구하기도 했다.

 

 ■공창폐지령과 유흥업금지법 발효
 그런 가운데서도 해방이 되자 해외에서 무작정 귀국하는 이른바 전재민들이 마땅히 거처할 곳을 찾지못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다.
 12월10일 신문은 “춘천의 기온이 영하 10도를 밑돌았는데 춘천시내 부대에만 3만2000여 전재동포가 수용돼있다”고 전한다.
 눈에 띄는 소식은 공창폐지령과 함께 ‘통일정부가 설 때까지’ 요정 카페 등의 영업을 중지시키는 유흥업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것이다.(1947년 11월 27일자)
 이 법의 발효와 함께 가장 타격을 심하게 입은 곳은 부산지역이었다. 12월10일자를 보면 “대외무역 개시와 함께 모리배의 활동무대가 되던 항도 부산 유흥가에 큰 파문이 일었다”고 한다.
 “호화로운 몸치장과 황금을 꿈꾸는 업자와 기생, 여급, 작부 등 수많은 종사원들은 앞날이 캄캄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실업의 운명에 놓인 종업원수는 창기 63명, 기생 327명, 여급댄서 332명 등 총 1290명에 이른다.”

 

   ■그래도 희망의 끈 놓지않은 백성들

 이렇게 해방이후의 민생은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지만, 백성들은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경향신문의 ‘어떻게 살아갈까’ 시리즈에 등장하는 시민들의 마지막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나라가 서면 우리같은 놈도 좀 안심하고~ 살게 해주었으면 하는게 막연한 희망이라 할까요. 이것을 믿기 때문에 속상한 것도 눌러가며 지내고 있습니다.”(차부 길삼룡씨)
 “오직 바라는 것은 한시바삐 독립이 오기를~ 그 때를 기다리고 이를 깨물며 기다릴 뿐입니다.”(동소문 방공호 속의 어느 전재민)
 “이것이 우리 민족의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엄연한 현실일 진대 우리는 견디어 나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학교편을 취재한 기자)
 “언제든지 이럴 법은 없겠지요. 우리도 버젓이 독립하면 이따위 장사를 하지 않더라도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양담배 노점상인 이명숙씨)
 “나라에 질서가 설 때까지 끝까지 가난과 싸울 작정이오. 그런다고 설마 굶어죽는 일은 없을 터이니….”(어느 청빈한 말단관리)
 “예술가에겐 어떻게 살아갈까는 문제보다 어떻게 사상(思想)하며, 어떻게 창조(創造)하느냐가 더 현실적인 문제다. 예술인은 가난과 번뇌를 극복하고 조선문화계 전체를 뒤덮고 있는 타성을 과감히 깨뜨려야….”(예술가편을 쓴 기자)
 “어서 빨리 38선이 깨져야겠어요. 38선이 깨지는 날이면 독립도 되는 날이겠지요.”(고학생 최원희 양)
 물론 그 분들의 바람은 반만 이뤄진 셈이지만…. 그래도 그 분들이 절망하여 쓰러지지 않고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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