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서는 아니다. 뒤늦게 내시의 별서로 밝혀졌지만 그래도 명승의 자격은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24일 문화재위원회 천연기념물분과를 열어 명승 제35호 ‘성락원’을 지정해제하고 명승 명칭을 ‘서울 성북동 별서’로 바꿔 재지정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명승 제35호 ‘성락원’에서 명승 제○○호 ‘서울 성북동 별서’로 바꾼다는 것이다.
성락원 영벽지. 당초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서로 명승이 됐지만 뒤늦게 고종의 호위내관인 황윤명의 별서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제공
이 별서는 1992년 조선조 철종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자 의친왕의 별궁으로 인정되어 명승(제35호)으로 지정됐다. ‘200년 역사 품은 조선의 비밀정원’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1983년과 1992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논란이 빚어졌다.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따라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는 애초부터 없었는데, 문화재관리국이 성락원 소유자의 근거없는 주장을 검증없이 받아들였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영벽지의 바위글씨. 춘파유고 시문과 내용이 똑같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렇지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재조사 과정에서 변수가 생겼다. 성락원 영역이 ‘심상응의 별서’는 아니지만 조선조 고종(재위 1863~1907)의 호종내관인 황윤명(1844~1916)의 별서(농사 등을 지으며 기거하던 별장)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황윤명의 <춘파유고>와 오횡묵의 <총쇄록> 등의 문헌기록을 찾아냄으로써 밝혀졌다. 또한 갑신정변(1884) 당시 명성황후가 황윤명의 별서를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기록(일편단충(一片丹忠)의 김규복 발문·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라 1884년 이전에 조성된 것도 확인됐다.
명성황후가 황윤명 등에게 하사한 ‘일편단충’ 유묵. 그중 한 점을 하사받은 김규복의 발문에는 “중전마마(명성황후)가 글자 3본을 써서 황윤명 등에게 주었다”고 했다.|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내시 황윤명은 고종의 호종내관 중 최고위직이며, 명례궁 대차지(大次知·종1품 조선 후기 각 궁방의 재정관리 총책임자)를 역임한 인물이다. 황윤명은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칭송받는 이른바 ‘문인 내시’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학문과 서예, 그림에 뛰어났으며 육교시사(1870년대 후반 위항문인들의 모임)을 주도한 강위(1820~1884)와 교유하기도 했다. 문화재연구소의 확인결과 성락원 영벽지 서측 바위에 새겨진 시(‘시냇물 끌어다 작은 연못 만들다·引水爲小池’)가 황윤명의 문집(<춘파유고>)에 수록된 시문과 정확히 일치했다.
“온 시냇물 모아 흐르지 못하도록 막고서(百川會不流) 연못 만들어 푸른 난간 들렀어라(爲沼碧欄頭). 나는 이 연못 생긴 이후로(自吾得此水) 강호유람 발길 뜸해졌네(少作江湖遊).”
황윤명의 <춘파유고> 서문. 내시의 신분으로 문집이 편집된 것은 황윤명이 처음이다.
이 시는 중국 고사에 출전이 없는 고유 창작시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이런 창작시가 성락원 영벽지와 황윤명의 문집에 똑같이 등장했다면 성락원 영벽지의 시는 황윤명의 작품이 분명하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또 명성황후가 갑신정변(1884) 때 황윤명의 별서로 피난했다는 자료도 찾아냈다.
즉 명성황후(1851~1895)는 1885년 12월21일 측근인 황윤명·김규복·김규석 등 3명에게 ‘일편단충(一片丹忠)’이라는 유묵을 써서 하나씩 나눠준 바 있다. 그런데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한 ‘일편단충’에 달린 김규복의 발문에 ‘명성황후의 황윤명 별서 피란 사실’이 기록돼있다는 것이다.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재검토한 문화재위원회는 지난달 24일 ‘1992년 지정 당시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롭게 밝혀진 문화재적 가치를 명확히 하려고 명승 명칭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문화재위원회는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서는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 공간은 내관 황윤명이 별서로 조성하기 이전에도 경승지로 널리 이용됐고,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로 사용되는 등의 역사적 가치가 확인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다양한 전통정원요소들이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어 있어 경관적 가치 또한 뛰어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밖에 얼마 남지 않은 조선 시대 민가정원으로서의 학술적 가치 등도 인정된다고 보았다. 최재묵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사무관은 “문화재청은 지난해부터 관계전문가 7명 등의 현지조사와 자문회의, 공개토론회, 법률자문 등을 통해 재검토한 결과 명승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성락원’의 지정해제 및 ‘서울 성북동 별서’의 지정 사항을 30일간 관보에 예고하여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그 결과를 최종적으로 심의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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