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1> “미국의 침략자들이 한국의 국보 유물을 송두리째 약탈했다”. 한국전쟁 도중 동베를린 영화관에서 구 소련 측이 방영한 뉴스였다. 경복궁 내 국립박물관 진열실의 텅빈 모습을 보여주고 ‘미군의 약탈’ 운운하며 맹렬히 비난한 것이다.
<일화 2> “저게 대체 어찌 된 것인가”. 1957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월남(베트남)의 응오 딘 지엠 대통령(재임 1956~1963)과 경복궁 산책에 나선 이승만 대통령(재임 1948~1960)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한국전쟁 중 공습을 받아 1만2000 조각으로 파괴·방치된 탑 1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름아닌 외국정상과 거닐다가 보았으니 얼마나 큰 망신인가. 이 탑이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이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황이 급박했던 1950년 7월25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소장 유물 중 금관 등 금관총 출토유물 15점 등 139점이 대구로 이송되어 그곳의 한국은행 금괴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로 소개됐다. 국방부 제3국장인 김일환 대령이 최순봉 국립박물관 분관장으로부터 유물을 인계받아 대구로 이송했으며, 당시 최순주 재무부장관이 인수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다들 한국전쟁으로 피아간 엄청난 인명손실이 났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수백 수천년 이어온 문화유산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또 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길에 오른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2만점에 가까운 문화유산이 ‘전격 비밀 소개(疏開) 작전’을 펼쳐 부산 피란길에 올랐고, 그 중 일부가 전쟁 초기에 일찌감치 바다건너 미국으로 이송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50년 7월27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작성한 2차 미국 소개 유물 124점 목록. 금동미륵반가상 등과 ‘두 귀 달린 청자 긴목항아리’ 등 다양한 유물들이 포함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 문화재를 지켜라!’
바야흐로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25일이었다. 북한군의 공세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 손님이 찾아왔다.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이었다.
“경주 분관에 소장된 주요 국보를 소개(疏開·분산 이동)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 지령으로 왔습니다.”
최순봉 당시 경주분관장으로서는 일순 당황했다. 현역군인이 갑자기 나타나 유물을 내놓으라는 것이니…. 그러나 자초지종을 듣고나니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국립박물관 서울본관은 물론 개성·부여·공주분관은 이미 북한군 치하에 놓여있었고, 온전한 곳은 경주 분관 뿐이었다. 만약 경주까지 잃게되면 국립박물관의 모든 소장유물은 북한의 소유로 넘어가는 꼴이었다.
경주분관 직원들은 부랴부랴 중요 소장유물들을 챙겼다. 맨먼저 금관 등 금관총 출토 유물을 골랐다. 왜 하필 금관총 유물인가. 금관총 금관(국보 제87호) 등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조선총독부는 당초 금관총 출토 유물들을 서울로 옮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경주 여론이 들끓었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상징은 역시 1921년 출토된 금관 등 금관총 유물이다. 조선총독부는 경주 지방의 들끓는 여론에 밀려 금관총 출토유물을 서울로 가져오지 못했다. 경주에서는 지역민들의 십시일반 성금이 모여 박물관을 지었는데, 그것이 국립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이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신라 건국의 토대가 된 박(朴)·석(昔)·김(金)씨와 이(李)·최(崔)·손(孫)·정(鄭)·설(薛)·배(裵)씨 가문대표가 모여 금관총 유물의 경주 소장 및 전시를 촉구했다. 대대적인 시민대회가 열렸고, 시민대표 10여명이 총독부를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1923년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금관총 유물을 소장·전시할 박물관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경주박물관 분관이다. 이후 금령총(1924년)·서봉총(1926년)에서도 금관 등 황금제 유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금령총·서봉총 유물은 모두 서울로 옮겨졌고, 금관총 유물은 경주분관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
미국으로 소개되는 경주 유물 중에는 1942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해체수리 공사때 나온 사리함에서 발견된 순금제여래 좌상과 입상이 포함됐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금관총 금관의 미국피란기
따라서 미국 피란길에 나설 문화재는 당연히 금관총 유물 등이 첫손가락으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주분관이 작성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소개물 목록’을 보면 25일 선정된 ‘제1급품’은 15점에 달했다. ‘금관총 금관’(국보 제87호)과 ‘순금제 허리띠’(국보 제88호), ‘순금제 귀고리’, ‘순금제 가락지’, ‘굽은 옥’과 ‘옥피리’, ‘은제 주발’ 등이 포함됐다. 1942년 경주 황복사터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 등도 선택됐다.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당시 경주분관이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 순금제 위주로 피란유물을 우선 선택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틀 뒤인 27일 김일환 대령이 다시 찾아왔다. 경주분관 직원들은 2순위, 즉 ‘제2급품’ 124점을 골랐다. 제2급품은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금동석가여래 좌상, 금동입상, 사천왕상 등 불상 및 불교조각, 두 귀 달린 청자 긴목항아리, 청자 국화형 그릇(청자국화형합), 청자 상감 구름 학 무늬 사발 등 청자 등이 포함됐다.
김일환 대령은 1차에 이어 2차로 선택된 유물들까지 대구 한국운행으로 이송했다. 139점의 유물은 역시 대구 피란 중이던 한국은행 금괴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공수됐다.
이 소개작전으로 미국에 가있던 139점 중 금관총 유물과 황복사터 불상 등은 1957년 12월부터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린 최초의 해외전시(<한국국보전>)에 출품된 뒤 다른 전시품들과 함께 7년 여 만에 귀환했다.
임금의 편전이던 사정전과 부속건물인 만춘전, 대비의 침전이던 자경전 등은 국립박물관 진열 및 수장공간으로도 쓰였다. 그 건물들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24일 서울 수복작전 도중 최소한 6발의 포·폭격을 맞아 붕괴되거나 대파됐다. 건물 안에 진열되어 있던 유물들도 파괴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유물을 포장하라!”
그렇다면 서울의 국립박물관 본관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때의 국립박물관장은 김재원(1909~1990)이었다. 김재원 관장은 독일 뮌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미술사학자였고, 1948년 4~12월 사이 미국내 여러 박물관을 방문하고 돌아온 국제통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원 대부분은 한강을 건너 피란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국립박물관 직원 누구도 ‘피란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전원 잔류했다. 박물관에 인공기가 걸렸고, 김용태라는 사람이 북한 내각 직속의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 위원장이라며 나타났다.
조선시대 대비의 침전이었고, 국립박물관 진열 및 수장공간으로 쓰인 자경전도 폭격으로 파괴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재원 관장의 직책은 박탈됐다. 박물관을 접수한 북한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는 7월 중순 제1순위에 속하는 진열품을 시외로 모두 소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박물관 직원들은 “그 경우 유물의 안전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극력 반대했다. 그 반대가 통했다.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 중 1급에 해당되는 금속과 토·도기, 옥석·목칠·서화 등 총 1228점의 유물(상자 69개 분량)을 덕수궁 미술관 지하창고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져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서울로 접근해오자 박물관도 분주해졌다. 위원장인 김용태가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유물, 그리고 간송 전형필(1906~1962)의 개인소장품 등을 모두 포장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철수 때 북한으로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은 강원 원주 폐사지에 있다가 1911년 일본으로 반출된 뒤 10여차례 이전을 거듭하고, 한국전쟁 때는 직격탄을 맞아 산산조각 나는 비운을 겪었다. 경복궁내 진열본관도 대파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숨막히는 지연작전
이때부터 박물관 요원들의 암묵적인 지연 작전이 시작됐다. 덕수궁 미술관 지하창고에 보관된 유물 중 최상품을 따로 포장해서 소개하라는 지시에 “시내 최고의 안전지대로 인정되는 종묘 안에 방공 지하실을 구축해서 그 안에 보관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시간을 끌었다. 실제로 지하실 구축 공사에 착수하면서 시일을 지연시켰다. 또 포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물 5개를 포장하는데 사흘이 걸릴 정도로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포장이 다 끝나면 ‘아차! 유물목록을 써야하는데 그만 빠뜨렸네!’ 하면서 풀렀다가 포장하기를 반복했다.”(김재원의 <박물관과 한평생>·1992)
경복궁 경내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치열한 서울 수복 작전의 와중에서 최소한 6발의 포탄과 폭탄을 맞았다.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16’, <박물관 신문> 2019년 4월호에서
고려자기 싸는 데는 종이가 많이 필요하다느니, 회화는 습기가 들지 않아야 한다느니, 뷸상은 머리부분이 떨어질 수 있다느니 하는 등의 갖가지 이유를 댔다. 그렇게 포장된 유물을 궤짝에 넣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궤짝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판자를 사서 상자로 꾸며야 한다”며 하루를 더 소비했다. 여기에 “목수가 없다” “못이 없다”고 또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시간을 끈 이는 훗날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와 이화여대 박물관 고문역을 지낸 장규서였다.(김재원의 <경복궁야화>·1990)
1950년 10월5일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 경무대 경찰서장에게 보낸 ‘박물관 소장 진열품 수호 보관에 관한 문건’. 북한 치하에서 박물관 요원들이 “박물관 유물을 모두 포장하라” “중요유물은 외곽으로 소개하라”는 북한 물질문화보존연구위원회의 지시를 갖가지 이유로 지연시킨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9월24일 새벽부터 유엔군과 한국군이 도심 진출을 시도하자 다급해진 북한의 김용태 물질문화연구보존회 위원장이 동료들과 함께 도주했다. 당시 국립박물관 박물감(학예연구관)이었던 황수영 전 동국대총장(2018~2011)은 “김용태 등이 도주하면서 박물관 수장고 열쇠를 나에게 주고 떠났다”고 회고했다. 김용태의 입장에서는 지연작전을 펼친 박물관원들을 괘씸하게 여겨 골탕먹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쿨’하게 떠난 셈이다. 북한군이 후퇴하자 유물을 지켜낸 박물관 요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50년 11월30일 백낙준 문교부장관이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에게 보내는 영문편지. 소장품의 소개(피란)을 허거하는 편지이다. 공문이 아니라 편지, 그것도 국문이 아닌 영문으로 작성했다. 정식 결재 계통을 밟을 경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염려가 작용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공습에 파괴된 경복궁과 박물관 유물
그러나 적 치하에서 벗어났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9월 24일 새벽부터 미 해병과 한국군이 서울 서측방의 연희고지 능선(안산과 연희동 104고지 사이)을 차지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을 벌였다. 서울 탈환의 최대고비이자 격전지였던 이 전투에 맹렬한 포격과 공습이 수반됐다. 1963년 국립박물관이 작성한 문건(‘첩보조사보고지시’)은 “국립박물관 등을 장악하고 있던 괴뢰기관(북한의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이 도주한 1950년 9월 24일 경복궁 경내에 6발 이상의 폭탄이 공중에서 투하됐다”고 기록했다. 기사의 첫머리에 인용한 지광국사 현묘탑도 이때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훗날 박물관이 작성한 ‘첩보조사보고지시’(1963년)와 ‘유물정리사무지연의 요인’(1957년 이후), ‘국립박물관 소장품 정리상황통계표’(1959년 10월5일) 등에 따르면 박물관 건물로 쓰이던 진열본관, 사정전(임금이 정사를 펼치던 편전)과 그 부속건물인 만춘전, 자경전(대비의 침전), 신창고 등이 피격됐다.
1950년 12월 벌어진 유물의 전격 비밀 소개 작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당시 미국공보원 한국지부장이었던 유진 크네즈(왼쪽)와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었다. 크네즈는 “유물 이송을 도와달라”는 김재원 관장의 부탁을 듣고 트럭과 열차 수송을 도맡아했다. 미국 정부의 허락도 얻지 않았지만 징계를 무릅쓰고 도왔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도자와 목공, 회화, 의상 등의 유물을 보관한 만춘전은 직격탄을 맞아 괴멸됐고, 활자와 무기, 무구(武具) 등을 보관하던 만춘전 회랑도 지근탄(가까운 곳에서 쏜 탄환)을 맞아 대파했다. 또 임금의 편전이자 박물관 건물로 쓰일 때는 도자기와 목공을 보관하던 사정전과, 각 시대의 토기와 도기, 와당 등 발굴품을 보관하던 사정전의 회랑 및 창고도 역시 크게 파괴됐다. 발굴품과 토기·도기 그리고 회화와 탁본을 보관중이던 신창고 역시 포탄이 명중했다. 중앙아시아 유물과 서화, 도자 및 귀중품이 보관되어 있던 본관 창고도 크게 부서졌다.
■1급 유물이 공습에서 비껴난 이유
이 피격으로 인한 문화재의 피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진열관 뒤에 북한군이 죽어 있었다. 만춘전에 소장된 의상이 전멸됐고, 대형 티벳금동라마불상이 완전 파괴됐다. 또 중앙아시아 유물 중 미라 1구가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이 미라는 전쟁직전 전시되어 수천명의 관람객이 구경했던 것인데….”(김재원의 <경복궁야화>·1990)
1950년 12월2일 김재원 관장이 연합군최고사령부 민간교육정보국의 미술 및 기념물 부서의 과장 조지 케이트에게 보낸 편지. 만약 한국전쟁이 확전되거나 제3차대전으로 비화할 경우 한국문화재의 국외반출을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송수단이 없으므로 도와달라고 했다. |김리나의 논문(‘한국전쟁 시기 문화재 피난사’)에서
9·28 수복 후 경복궁을 찾은 김재원 관장은 참상을 목격하고는 망연자실했다.
“관원 전원이 동원되어 무너지거나 대파된 창고들을 파헤치고 유물의 파편들을 모았다. 그러나 사실상 원형을 식별하기 힘든 것이 다수였다. 그 태반이 파편으로 남았거나 혹은 멸실됐다.”(‘첩보조사지시보고’)
유물정리작업은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도 무려 10년간 이어졌다. 박물관원들은 폭격 맞은 뒷자리 흙을 채로 쳐서 조그만 유물 파편 한조각에 이르기까지 수습했다. 비단 경복궁 내 박물관 뿐이 아니었다. 남산 기슭에 있던 국립과학관은 소장품 전체와 함께 소실되었고, 덕수궁 석조전 또한 폭탄을 맞아 내부가 전소했다. ‘첩보조사지시보고’에 따르면 최종 집계된 ‘전쟁으로 사라진 소장품 총수량’은 7109점에 달한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일이 있다. 북한군 치하에서 국립박물관의 국보급 핵심소장품들을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로 옮긴 것이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가 됐다는 것이다. 덕수궁 석조전 역시 피격했지만 미술관 지하창고는 멀쩡했던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보급 핵심유물을 시외곽으로 분산하라는 북한 기관의 명령도 그랬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를 고집한 박물관원들의 판단도 그랬다. 가령 서봉총·금령총 금관과 두 구의 반가사유상 등을 옮기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할 따름이다.
전쟁이 확전될 경우 한국문화재를 미국에 옮기게 해달라는 한국측 요청에 미국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1년 2월9일자 미 국무부가 보낸 전문(왼쪽)에는 “운송과 보험비용이 많이 들고 현재의 포장상태로는 미국까지 가기가 적합치 않다”고 했고, 2월21일 딘 에치슨 미국무장관이 주미대사관에 보낸 전보(오른쪽)는 “한국 문화재를 해외로 옮길 경우 안전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리나의 논문
■한국문화재의 부산피란을 진두지휘한 미국인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문화유산은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고비를 맞는다. 11월 말 전황이 심각해졌을 때 김재원 관장에게 “박물관 소장 유물을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귀띔해준 이가 있었다. 바로 부산에 있던 미국공보원 한국지부장인 유진 크네즈(1916~2010)였다.
김재원 관장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을 세 번이나 찾아가 “박물관 유물을 옮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마침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문교부장관은 11월30일 정식 공문 대신 영문 편지 형식으로 ‘유물의 피란’을 허가했다. 관공서의 정식공문이라면 서기-계장-과장-차관 등 모든 계통의 관리가 열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부가 박물관 유물을 소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들이 동요할 수 있기 때문에 영문 편지 형식을 빌려 비밀수송작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부산으로 갈 수송수단이 없었다.
미국정부의 소극적인 반응에 비해 하와이 호놀루루 예술원이 한국문화재의 이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1년 3월5일 호놀루루 예술원은 한국문화재를 호놀루루 박물관으로 옮기고 김재원 관장이 이를 관리할 것을 제의했다.| 김리나의 논문에서
김재원 관장이 연합군 총사령부에 “수송수단 좀 제공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김 관장은 “유물을 옮기라”고 귀띔해준 크네즈 미국공보원 한국지부장에게 매달렸다. 크네즈는 “(주한 미국대사인) 존 무초(1900~1991)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김관장의 두번째 방문을 받고 결심을 굳힌다.
“철수의 책임을 내(크네즈)가 개인적으로 지기로 했다. 한국유물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거나 더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크네즈의 <한 이방인의 한국사랑>·1997)
크네즈는 미국 대사관의 허락없이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소장 유물의 ‘비밀소개작전’에 가담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발각된다면 직위가 박탈될 수 있었다. 기왕 한국측을 돕기로 마음 먹은 이상 분주히 움직였다.
우선 미군 군용열차가 전쟁물자를 하역한 뒤 빈차로 부산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에 착안했다. 크네즈는 해방후 미군정 시절 교화국장을 지낸 예비역 대위였다. 그 신분을 이용해 열차를 징발했고, 대사관 트럭을 임시로 빌려 유물들을 열차로 옮겨 실어날랐다(12월 7일). 피란대열에는 국립박물관(소장품 83상자) 및 덕수궁미술관(155상자) 소장품 외에도 서울대 도서관 소장 <승정원일기> 3045책 등 규장각 도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기할만한 일이 있다. 이 유물들을 따로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또하나의 아이러니다. 왜냐면 유물들이 적 치하에서 북한의 명령을 받고 포장해놓은 채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물을 실은 열차는 나흘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다른 열차에게 수시로 길을 내줬고, 공산군의 공격이 의심될 때는 두어시간씩 멈춰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기서도 크네즈의 역할이 빛났다. 모든 검문소마다 전화를 걸어 열차의 안전이동을 확인했고, 그 자신 군용기를 타고 부산까지 와서 유물의 무사도착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1951년 7월9일 이승만 대통령이 문교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 “호놀루루 예술원이 자비로 한국문화재를 반출 보관하겠다는 제의도 했고, 전시도 하겠다니 호놀루루로 문화재를 옮기라”는 지시가 담겨있다.|국가기록원 제공
■오타니 컬렉션까지 구했다
이렇게 중요유물을 무사히 옮긴 김재원 관장에게 한 가지의 숙제가 더 남아있었다.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약탈·수집해온 360여건 1500여점의 ‘중앙아시아 유물’(오타니 컬렉션)을 서울에 두고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중 60여점의 벽화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1차 수송 때는 가져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백년~1000년 이상 토벽 위에 그린 그림이라 트럭 및 열차 수송 중 충격을 받는다면 파손될 위험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독일유학파인 김관장은 독일의 뼈아픈 예를 떠올렸다.
즉 알베르트 폰 르 코크(1860~1930)과 알베르트 그륀베델(1856~1935)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져온 벽화를 벽에 붙여둔 베를린 민속박물관이 제2차대전 중 공습을 받아 30%가 파손된 바 있다. 이때의 충격으로 박물관 벽화 책임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도 김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전전반측하던 김관장은 1951년 3월 말 국립박물관 소속 최순우와 덕수궁 미술관장인 이규필 등을 서울로 보내 ‘오타니 컬렉션의 부산 이송작전’을 벌였다.
최순우씨는 1·4 후퇴 후에도 홀로 박물관에 남아있던 수위 문억석씨와 함께 4주에 걸쳐 벽화를 뜯어 포장했다. 4월25일 덕수궁 미술관과 남산 분관(옛 국립민족학박물관)의 일부 소장품 등을 합해 미군트럭 3대분이 열차편으로 수송됐다. 이로써 국립박물관와 덕수궁미술관의 중요 소장품 430상자분 1만8883점이 무사히 부산으로 피란했다. 이후 김재원 관장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한국에서 근무하다 귀국한 미국 외교관의 편지였다.
“내가 베를린의 영화관에서 방영된 소련측의 뉴스를 보았습니다. 서울의 텅 빈 국립박물관 진열실을 보여주면서 ‘미국 침략자들이 한국의 국보를 송두리째 약탈해갔다’고 극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뉴스를 보고 나는 ‘아! 한국박물관 직원들이 문화재를 무사히 옮겼구나’하고 안도했습니다.”
재미교포 이대수씨가 기증한 조선의 국새 ‘대군주보’. 미국인인 듯한 W B. Tom의 서명이 선명하다. 고종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을 즈음 청나라와의 사대주의를 청산 하고 자주외교를 펼치겠다는 의지로 제작한 국새다. 그러나 한국전쟁 즈음 미국인인 W B. Tom 이 국새를 수중에 넣어 자기 이름을 새겨넣은 것으로 보인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한국 문화재 몽땅 하와이 갈뻔한 사연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유물의 ‘제2차 미국 소개 계획’도 추진중이었다는 사실이다. 김재원 관장은 중국군의 공세가 치열할 때인 1950년 12월2일 연합군 총사령부의 민간교육정보국에 “비상상황에…귀중한 문화재들을 국외로 반출하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무부는 비용문제 등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미국정부로서는 ‘피란을 핑계로 문화재를 약탈한다’는 구 소련 등 공산권의 비난을 감수하기 어려웠다.
미국 정부는 그 대안으로 일본을 지목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서로는 한국문화재의 일본 피란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미국 하와이 호놀루루 예술원이 “우리가 받아주겠다”고 나섰다. 호놀루루 예술원은 “유물의 운송비용을 책임질 뿐 아니라 전시회도 추진할 것”이라고 적극 나섰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1951년 7월10일부터 정전회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더는 박물관 유물이 다칠 위험은 희박해졌다.
최근 환수된 강원 속초 신흥사 ‘영산회상도’. 38선 이북에 속한 속초는 한국전쟁 때 수복지역이어서 1951년 8~54년 11월까지 미군정이 실시된 곳이다. 이 와중에 신흥사 불화가 6개의 조각으로 나눠져 미군에 의해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계종 제공
■7000여점 잃고 중요유물 1만8880여점 지켰다
“남한과 북한이 같은 민족인데 왜 유물이 북한으로 가는 것에 그렇게 부정적이냐.”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1회 국제청방패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시기 문화재 피란사’를 발표한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에게 한 미국인이 던진 질문이다. 김교수는 뜻밖 질문에 한참 생각하다가 “당시 북한은 공산국가로 적국의 위치에 있었다”고 답했단다. 하기야 외국인으로서는 ‘같은 민족이라면서 문화재가 남에 있으면 어떻고, 북에 있으면 어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또 ‘굳이 자기네 나라 문화재를 다른 나라(미국)로 피신시킬 필요가 있었냐’고 의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찌 외국인들이 1950년에 벌어진 동존상잔의 비극과 그 이후 70년간 이어진 갈등과 반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1950년 9월 문화유산들이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까지 70년간 그 문화유산을 향유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야 할 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영산회상도’는 1954년 6월까지는 신흥사에 봉안돼 있다가 어느 시기에 사라졌다. 미국 통신장교 폴 뷰포드 팬처가 1953~1954년 5월 사이 쵤영한 사진(왼쪽)에는 불화가법당에 봉안되어 있는데, 해병대 장교 리처드 브루스 락웰이 1954년 10월 무렵 찍은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 제공·속초시립박물관 소장
또 달리 생각해보면 전쟁이 일어나 포격과 폭격이 난무하는데 문화유산 담당자들이 나몰라라 제 몸만 피할 수 있는가. 어떤 경우든 문화유산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전쟁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문화유산을 그대로 두었던 결과는 어떠했는가. 적군이 아닌 아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문화재들이 부서졌거나 사라졌다. 경복궁 내 전각과 박물관 유물은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다.
남묘(서울 동작구 관왕묘), 벽제관, 수원 화성, 촉석루, 봉선사, 송광사, 내장사, 월정사, 건봉사 등이 주로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불에 탔거나 파괴됐다. 특히 전국의 사찰 31곳이 전소됐다. 종묘에 안치되어 있던 조선의 국새와 어보가 미군에게 무단 반출되고, 전국의 사찰에 소장되어 있던 경판과 불화들이 땔감으로 불에 태워졌거나 전리품으로 뜯겨져 나갔다.
‘W B. Tom’의 서명이 선명한 조선 고종의 국새와, 6조각으로 무자비하게 잘려 반출된 ‘신흥사 영산회상도’가 상징적이다. 물론 이 유물들은 천신만고 끝에 귀환했지만 지금 이 순간 한국전쟁의 와중에 무단 반출된 유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2만점에 가까운 문화유산을 지켜낸 박물관 직원들의 분투는 청사에 길이 빛난다.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의 언급이 심금을 울린다.
“내 일생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일이 있다면 우리 직원들과 함께 동산문화재 거의 전부를 전쟁의 와중에서 무사히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쓰는데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깊이있는 조언과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미국반출목록(1950년)을 정리해서 보내준 국립경주박물관 김보경 김재열 주무관의 도움도 컸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장상훈, ‘6·25전쟁시 국립박물관의 문화유산 수호’, <6·25전쟁과 문화유산 보존-6·25전쟁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국립고궁박물관, 2020
‘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15~19회), <박물관 신문>, 국립중앙박물관, 2019~2020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0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김리나, ‘한국전쟁 시기 문화재 피난사’, <미술자료> 86집, 국립중앙박물관, 2014
한국박물관 100년사 편찬위, <한국박물관 100년사>, 국립중앙박물관·한국박물관협회, 2009
유진 크네즈, <한 이방인의 한국사랑>, 국립중앙박물관, 1997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6·25전쟁사> 권6, 2009
이학수, ‘전시 군의 문화재보호사례’, <6·25전쟁과 문화유산 보존-6·25전쟁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국립고궁박물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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