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가장 살벌했던 해가 바로 1968년일 것이다.
1월21일 북한 124군 소속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고, 이틀 뒤인 23일엔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1월30일 북베트남 게릴라의 ‘구정공세’가 펼쳐졌고, 10월30일부터는 울진·삼척 지역에 북한의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다.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가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한 해였다.
특히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새해 벽두부터 청와대 코앞까지 달려와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고 외친 이른바 1·21사태는 박정희 정권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그해 4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주도 아래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가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창설됐다. 워낙 극비리에 진행되었기에 아무도 몰랐다.
공작원 수(31명)도 청와대를 습격한 북한 특수부대원과 같았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복수부대였다. 원래 사형수 등에서 찾으려 했지만 법적인 문제 때문에 민간인으로 모집대상이 바뀌었다.
모집과정에서 ‘훈련후 장교 임관’, ‘임무수행 복귀 뒤 원하는 곳 배속’, ‘미군부대 취직’ 등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했다. “북한 특수부대원을 능가해야 한다”면서 공작원들을 인간살상병기로 만들었다.
인근 섬의 여교사를 겁탈한 동료를 총으로 쏴죽이고 시신을 화장한 다음 뼛가루를 나눠 갖기도 했다.
가혹한 훈련 끝에 7명의 부대원이 살해됐다. 하지만 실미도 부대의 북한 주석궁 습격계획은 때마침 불기 시작한 남북화해모드로 ‘없었던 일’이 된다.
비인간적인 처우에다 목표감까지 잃은 공작원들은 결국 폭발했다.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한 뒤 서울 진입을 시도한다.
교육대장의 머리를 장도리로 찍고, 기관총 난사로 기간병 18명을 벌집으로 만든데서 공작원들의 쌓인 적개심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 대방동까지 진입한 공작원 20명은 군·경과 교전 끝에 자폭했다.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총살됐다. 정부는 교전 중 죽은 공작원들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하지 않은채 가매장했다.
더욱이 총살당한 4명의 시신은 어디 묻혔는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한때는 오류동 지역이 매장지로 추정됐지만 찾지 못했다.
사건 발생 46년이 지난 이제(23일) 와서야 국방부가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을 거행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아직은 ‘영면’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여전히 4명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석궁이 아니라 중앙청으로 달려가려 했던 공작원 김종철의 46년 전 요구가 귓전을 때린다.
“억눌려 속아 살아왔다. 중앙청에서 높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잔혹한 일을 벌인 사람의 요구조건 치고는 너무도 소박하다.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진작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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