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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다시 미궁에 빠진 백제 무왕의 부인묘

선화공주인가, 사택적덕의 딸인가, 의자왕의 모친인가. 전북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중 백제 무왕의 무덤임이 사실상 밝혀진 대왕릉과 달리 소왕릉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익산 쌍릉 중 소왕릉을 발굴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19일 “지난해 대왕릉의 주인공이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라는 증거를 사실상 확보했지만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소왕릉에서는 피장자와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소왕릉의 주인공을 가늠할 명문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익산 쌍릉 중 소왕릉의 무덤길 안쪽에 서있는 묘표석. 높이가 120㎝에 달하는 거대한 돌이 무덤의 주인공을 지키고 있다. 발굴단은 이 묘표석이 무덤주인공의 사후 생활이 편안하도록 귀신을 지키는 벽사의 의미로 조성된 것이라 추정했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고려 때부터 도굴된 ‘황금 무덤’

그러나 쌍릉과 관련해서는 이미 고려시대인 1327년(충숙왕 16년) “무덤에 황금유물이 많다는 소문 때문에 도굴당했다”(<고려사)한 기록이 남아 있고, 1917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가 약식으로 발굴하면서 무덤을 훼손하고, 정확한 정보도 남기지 않았다. 이번 소왕릉 발굴에서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 길이 68㎝, 높이 45㎝ 정도의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무덤의 주인공을 밝힌 명문 유물이 도굴로 인해 사라진 것인지, 원래 조성하지 않은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왕릉의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의 무덤인지, 혹은 미륵사지 서탑 해체과정에서 발굴된 금판에서 미륵사 석탑의 창건주체로 특정된 ‘사택적덕의 딸’ 무덤인지, 혹은 의자왕 모친의 무덤인지 여전히 미궁에 빠졌다. 그동안 무왕의 부인은 <삼국유사> ‘무왕조’에 등장하는 신라 진흥왕의 딸인 선화공주로 인식됐다. 서동요를 지어 선화공주와의 결혼을 성사시킨 서동(무왕)이 익산에 선화공주를 위한 절(미륵사)을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2009년 해체복원 중이던 미륵사지 서탑(석탑)의 해체과정에서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나왔다. 수습된 유물 중 석탑 조성과정을 적은 금판에 미륵사 석탑을 조성한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639년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분 속에서 발굴된 돌기둥형 묘표석. 이 역시 110㎝ 가량이 되는 큰 묘표석이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잇단 발굴에 특정되지 않는 백제왕비 

이 때문에 <삼국유사>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가공된 설화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내 이 금판의 내용만으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륵사는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구조, 즉 탑 하나에 금당 한 채 씩 모두 3세트의 탑+금당으로 조성돼 있다. 바로 이 점을 착안해서 서탑을 조성한 이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면 중앙탑과 동탑은 선화공주와 의자왕의 모친이 만든 탑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무왕의 부인이 한 명 뿐이었겠는가. 무왕도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 의자왕의 모친 등 3명을 왕후로 들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소왕릉 발굴에서도 무왕의 부인을 특정할만한 물증은 나오지 않았다.

익산 쌍릉 중 소왕릉 전경. 이번 발굴에서 소왕릉의 주인공을 밝힐 적극적인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다만 발굴단을 이끈 최완규 소장은 “대왕릉이 무왕의 무덤이 확실해진만큼 소왕릉은 왕비릉일 가능성이 짙다”면서 “그 중에서도 선화공주의 능일 공산은 여전히 크다”고 밝혔다.

최소장은 “지난해 발굴에서 대왕릉의 경우 무왕 생전에 조성된 이른바 수릉(壽陵·살아생전 미리 조성한 임금의 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면서 “그러나 이번 발굴결과 소왕릉은 수릉이 아니라 죽은 뒤 조성된 무덤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또다른 무왕의 왕비인 사택적덕의 딸이 미륵사지 서탑을 조성한 때가 639년이고, 무왕이 승하한 때가 641년이다, 미륵사 서탑 조성과 무왕의 승하 사이에는 2년의 공백이 있다. 최소장은 “만약 사택적덕의 딸이 2년 안에 승하했을 가능성보다는 무왕의 사후에 승하했을 가능성이 더 짙다”면서 “따라서 소왕릉은 여전히 무왕 생전에 승하한 것으로 보이는 선화공주의 능일 공산이 더 크다”고 밝혔다. 

2009년 미륵사 서석탑에서 나온 명문사리기.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왕후가 절을 지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대왕릉은 무왕 무덤이 확실한데…

지난 2017년부터 진행된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발굴조사는 고분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조사의 의미를 갖고있다. 지난해 대왕릉에서는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냈다. 

주인공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짙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즉 대왕묘에서 확인된 인골 조각 102개를 분석한 결과 ‘주인공의 키가 161~170.1㎝, 나이가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 연대가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됐기 때문이다. 특히 넙다리뼈에서 산출한 키(161~170㎝)의 경우 19세기 조선 성인남성의 평균키가 161㎝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건장한 축에 속한다.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의 기록에도 부합된다. 무엇보다 가속질량분석기를 이용한 정강이뼈의 방사성탄소연대 결과(620~659년)가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무왕의 탄생연대는 미상이지만 서기 600년에 백제 제 30대 임금으로 등극했고, 641년 서거한 기록이 분명하다. 인골연대측정결과는 무왕의 ‘몰연대’에 부합된다. 

미륵사의 구조는 <삼국유사>에 나온 그대로다. 3개의 금당과 3개의 탑이 모여있는 형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가운데 금당과 탑은 선화공주가, 서탑과 서금당은 사택왕후, 동탑과 동금당은 의자왕의 모친이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미터 넘는 돌기둥을 묻은 이유

이번 소왕릉 발굴에서는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무덤을 덮은 봉토 속과 무덤길 입구에서 1m가 넘는 ‘기둥 모양의 돌(석주형)’과 ‘비석 모양의 돌기둥(석비형)이 각각 한 점씩 확인하는 성과를 얻었다. 

석실 입구에서 안쪽으로 약 1m 떨어진 곳에서 비스듬한 채로 확인된 석비형 묘표석은 길이 125㎝, 너비 77㎝, 두께 13㎝였으며 전면은 매우 정교하게,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봉토 안에서 확인된 묘표석은 역시 1m가 넘는 길이 110㎝, 너비 56㎝의 기둥모양으로 상부는 둥글게 가공됐고, 몸체는 둥근 사각형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봉토에서 발견돼 원위치인지는 확실치 않다. 두 묘표석에는 명문이 없었다. 발굴단은 명문이 없어서 비석도 묘지석도 아닌 이 두 유물의 명칭을 ’묘표석‘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왜 명문 없는 거대한 석재를 두 점에나 무덤에 조성했는 지 역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최완규 소장은 “명문 없는 두 점의 묘표석은 무덤 주인공의 영원한 사후 휴식을 귀신을 쫓는 의미로 세운 진묘(鎭墓)의 의미로 조성한게 아닌가 추정한다”고 밝혔다. 이런 형식의 무덤은 중국 만주 지안(集安) 지역의 태왕릉(장군총)과 오회분 사이에 있는 고구려봉토석실분인 우산하 1080호 고분에서 찾을 수 있다. 최소장은 “무령왕릉 안에서 발굴된 진묘수의 의미와 같은 것”이라면서 “이번 발굴이 백제왕실의 장묘제 연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소장은 또 “소왕릉이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적극적인 물증은 찾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렇다고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면서 “대왕릉과의 관계를 통해 주인공의 실체를 밝혀내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